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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석의 조선 후기史 팩트추적(6)] 19세기 중반 서울 5대 구경거리 노래한 '한양가' 

쇄국 정책에도 수입산 옷감 가게 성업 

궁궐·시장·놀이터·능행차·과거시험 풍경 한글로 묘사
“국산 부끄럽지 않다” 조선 수도 서민들 자부심 드러나


▎1890년대의 운종가 전경. 운종가는 동대문에서 돈의문을 지나는 서울의 중심축으로 상업의 중심지였다.
서울이라는 말은 참 재미있는 단어다. “중국의 서울은 북경”이라고 말할 때의 서울은 한 나라의 수도를 가리키는 일반명사인데, “현재 서울의 기온은 18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라고 아나운서가 말할 때의 서울은 한반도의 중심에 있는 도시를 말하는 고유명사다. ‘서울’이라는 말이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에 대해서는 전문 학자들의 연구가 있지만, 그 정확한 유래를 밝혀내기는 쉽지 않은 것 같다.

행정안전부의 주민등록 인구통계에 따르면 한때 1000만 명이 넘던 인구가 올해 4월에는 약 960만 명이 됐다고 한다. 좁은 면적에 이처럼 많은 인구가 모여 있으므로 여러 가지 문제가 있어서, 역대 정권에서는 서울의 인구를 분산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정책을 써왔다. 그러나 서울은 이미 600년 이상 한 나라의 수도로서 한반도에서 중심적 역할을 해왔으므로, 온갖 인물과 재화가 서울로 집중되는 이 현상을 바꾸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제 서울은 대한민국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일 뿐만 아니라, 세계의 정치·경제·문화에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중요한 도시가 됐다. 19세기 중반까지는 몇몇 중국의 사신 이외에는 아무도 들어올 수 없었던 쇄국의 도시 서울이 이제 세계로 열린 국제적인 도시가 됐다. 그 쇄국의 시기에 조선의 수도 서울에는 어떤 구경거리가 있었는지, 잠깐 한 세기 반 전으로 돌아가 보기로 하자.

먼저 서울과 관련된 몇 가지 명칭을 살펴보기로 한다. 서울은 순우리말이므로, 훈민정음을 만들기 이전에는 이 단어를 표기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후에 처음으로 이 새로운 글자를 이용해서 만든 책이 용비어천가]인데, 여기에는 ‘京’이라는 한자를 한글로 쓸 때는 모두 ‘서울’이라고 했다.

이처럼 조선 초기 세종 때 한자 ‘京’에 대응하는 순우리말로 ‘서울’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이 단어가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고유명사 ‘서울’로 정착된 것이 언제인지는 알기 어렵다. 아무튼 서울이라는 일반명사는 아주 오래된 순우리 말 단어다.

한양·경성·수선·장안…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 서울


▎압구정(狎鷗亭)은 조선시대 한명회가 지은 정자의 이름이다. 오른쪽 사진은 1961년 압구정 터 근처에서 한강변을 바라본 사진이다. 합성한 왼쪽 사진은 같은 자리에서 바라본 최근 모습이다.
갑오개혁으로 공문서에서 한글을 공식적으로 쓸 수 있게 되기 전까지 조선의 공식문자는 한자였으므로, 순우리말로 된 ‘서울’이라는 단어는 한문으로 쓴 문장에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런 까닭에 한문으로 된 문서에서는 수도라는 의미의 한자어 ‘도성(都城)’ ‘경사(京師)’ ‘경성(京城)’ ‘경조(京兆)’ ‘수선(首善)’ 등등을 사용했다. 그리고 조선시대 서울의 공식 명칭인 ‘한성(漢城)’도 쓰고, 또 고려 때부터 부르던 ‘한양(漢陽)’도 많이 썼으며, 중국의 지명으로 수도의 일반명사로 쓰이는 ‘장안(長安)’이나 ‘낙양(洛陽)’도 종종 사용했다. 이러한 한자로 된 명칭의 의미나 유래는 다음과 같다.

장안은 현재 중국의 시안(西安)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당나라의 수도였고, 낙양은 현재의 뤄양(洛陽)으로 고대 주나라부터 한나라와 육조시대 북위 등 여러 나라의 수도였다. 이 둘을 조선시대에 수도를 뜻하는 의미로도 썼는데, 특히 장안은 서울이라는 뜻으로 많이 쓰였다. 서울을 강조하는 의미로 서울 장안이라고 한다든가, 서울사람을 장안사람이라고 하는 말이 있고, 지금도 가게나 회사 이름에 장안을 붙인 데가 많이 있다.

도성·경사·경성·경조·수선 등도 수도라는 의미를 지닌 한자어인데, 경사·경성·경조에는 모두 한자 ‘경(京)’ 자가 들어 있어서 서울을 뜻하는 말이 된다. 그리고 도성은 도읍지가 있는 성이라는 의미이므로 자연히 수도를 가리킨다. ‘수선(首善)’이라는 단어는 흔히 쓰이는 말은 아니지만, 사마천의 [사기]에 “서울에서부터 모범을 보여(建首善自京師始)”라는 말에서 온 것으로 수도를 가리킨다. 조선의 서울이나 청나라 북경의 지도 제목을 ‘수선전도(首善全圖)’라고 한 것은 여기에서 따온 말이다. 식민지 시기 일본인이 세운 대학 ‘경성제국대학’도 서울에 있는 대학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조선시대 서울의 공식 명칭은 ‘한성부(漢城府)’여서 일반적으로 한성이라고 했는데, 고려시대의 이름인 ‘한양’이 오히려 더 많이 쓰였다. 특히 한글로 된 문서에서는 한성보다 한양을 더 자주 볼 수 있다. 얼핏 떠오르는 속담만 보더라도, “사람은 태어나면 한양으로 보내고 말은 태어나면 제주도로 보내라” “모로 가도 한양으로만 가면 된다” “한양에서 매 맞고 송도에서 주먹질한다” 등등에 한양이라고 했지 한성이라고 하지는 않았다.

중국에서는 오랫동안 서울의 한자표기를 ‘한성(漢城)’이라고 했는데, 2005년부터 서우얼(首尔/首爾)로 바꾸기로 해 현재 서울의 한자표기는 이것으로 쓰고 있다. 이제는 ‘한성’이라는 명칭이 오히려 귀해져서 1909년에 개교한 ‘한성화교소학교’나 서울에 사는 화교들의 모임인 ‘한성화교협회’ 등에서나 볼 수 있게 됐다.

조선시대에 서울의 모습을 총체적으로 조감할 수 있는 자료는 국가에서 통치의 편의를 위해서 작성한 것이 많다. 대표적인 것으로 [동국여지승람]이나 [만기요람] 같은 책의 서울 관련 항목이라든가 서울에 대해 집중적으로 기술한 [동국여지비고] 같은 책이다. 그런데 이런 책은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자의 시각으로 작성한 문서이므로, 서울의 모습을 생동감 있게 그려내지는 못했다. 양반 사대부들이 서울의 세시풍속을 한문으로 기록한 유득공의 [경도잡지]나 김매순의 [열양세시기]는 간략하게 사실을 나열한 책이다.

19세기 중반에 나온 [한양가]는 조선의 수도 한양의 모습을 노래로 적어놓은 50페이지 정도의 짤막한 책이다. 그러나 이 책은 당대 서민이 조선의 수도 서울의 모습을 한글로 그려낸 것이므로, 정부에서 간행하거나 양반 지식인이 쓴 것과는 다른 시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상당히 귀중한 자료다. 특히 서민들이 구매해서 읽던 책인 ‘방각본(坊刻本)’으로 간행됐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대부분의 방각본과 마찬가지로 이 책도 누가 쓴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서민이 쓰고 서민들이 사서 읽은 방각본 <한양가>


▎‘정조 반차’ 재현 행사의 한 장면. 정조 반차는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가 묻힌 화성(수원)까지 능행을 다녀온 8일간의 행차다.
[한양가]에는 19세기 중반 서울의 볼만한 구경거리 다섯 가지가 꽤 자세히 서술돼 있는데, 첫째는 궁궐과 관청, 둘째는 시장, 셋째는 서울의 놀이터, 넷째는 왕의 수원 행차, 그리고 다섯째는 과거시험의 풍경이다. 이 가운데 어떤 것은 지금도 남아 있어서 사람들이 찾아가거나 관심을 두는 것도 있고, 또 어떤 것은 이제는 없어져서 다시 볼 수 없는 것도 있다. 남아 있는 것과 사라진 것으로 나눠서 [한양가]에 나오는 서울의 구경거리를 보기로 한다.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조선시대 궁궐은 창덕궁·창경궁·경복궁·덕수궁·경희궁 등 다섯 군데이고, 궁궐 이외에 사직단과 종묘가 남아 있다. 이 중에 창덕궁과 종묘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등재된 대한민국의 중요한 문화재다. 원형은 훼손됐다 하더라도 궁궐은 대부분 남아 있는 데 비해, 조선시대 관청 건물은 남아 있는 것이 없다. 그리고 조선시대와 같은 모습은 아니더라도, 동대문시장은 조선시대에도 시장이 있던 터다. 또 조선시대 종로거리 전체는 장사하는 가게였는데, 지금도 마찬가지다.

먼저 궁궐을 보기로 한다. 조선시대 대궐과 종묘는 당시의 서민들은 들어갈 수 없는 너무나 높은 곳이지만, 대궐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을 통해 대궐 안의 모습이나 소식이 서울의 서민들에게도 전해졌다.

조선을 건국하고 맨 처음 지은 궁궐은 경복궁이다. [시경]의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는 영원토록 그대의 크나큰 복을 모시리라(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는 대목에서 ‘크나큰 복’이라는 의미의 ‘경복(景福)’을 가져온 것이다. 태종 때 별궁의 이름을 창덕궁이라고 했고, 성종 때 창경궁을 지었다. 임진왜란 때 난민이 경복궁·창덕궁·창경궁에 불을 질러 세 대궐이 모두 타버린 후 창덕궁과 창경궁은 다시 지었으나 경복궁은 폐허로 내버려 뒀다. 그리고 잘 알려진 대로, 고종이 즉위하면서 대원군이 경복궁을 다시 지었다.

[한양가]에서는 주로 창덕궁을 중심으로 궁궐의 웅장함과 화려함을 그려내었다. 그런데 궁궐의 모습을 설명하면서 예를 드는 인물들은 대부분 하층 인물이고, 관청을 소개하면서도 장관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장관을 모시는 아랫사람을 묘사한 것이 많다. 그리고 이들이 맡은 일만이 아니라, 입은 옷이라든가 머리 장식 등을 자세히 설명했다. 이렇게 고관대작이 아닌 하층 인물을 묘사한 것은 [한양가]의 작자는 서민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고, 이 작자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었나 하는 점을 잘 보여준다.

[한양가]에는 서울에 사는 사람이 아니면 알기 어려운 한양의 지리나 문물에 대한 정보에서부터 일상생활에 필요한 여러 가지 지식까지 다양한 것이 들어 있다. 그중 하나가 시장이다. 19세기에 지방의 시장은 대체로 5일에 한 번씩 장이 서는 오일장이었고, 매일 가게를 열어놓는 상설시장은 서울에만 있었다. 그러므로 서울의 시장은 커다란 구경거리였다.

시장에서 거래하는 물건 중에 중요한 것은 비단·무명·명주·베·모시 같은 옷감이었는데, 19세기 중반이 되면 중국이나 일본의 옷감뿐만 아니라 서양의 옷감도 수입했다. 그래서 시장에는 외국 물건이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생산하는 물건들도 부끄럽지 않다”고 했다. 시장에서 파는 품목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은 생선·과일·곡식 같은 식료품이나 장식품과 패물 같은 사치품과 함께 여러 가지 그림이 있다는 점이다.

광통교 부근에서는 닭·개·사자·호랑이 그림 팔아


▎성균관대에서 진행된 알성시 (謁聖試) 재현 행사. 알성시는 조선시대에 성균관 유생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비정규 문·무과 시험이다.
아파트가 주거의 대세가 되면서 현재는 거의 잊힌 공간이지만, 한옥의 안방에는 대개 다락이 붙어 있었고, 벽장도 만들어 뒀다. 이 다락의 네 문짝에는 닭·개·사자·호랑이를 그린 그림을 붙여뒀고, 벽장문에는 매화·난초·국화·대나무 그림을 붙였다. 그리고 벽이나 기둥에도 그림을 걸고, 대문에는 화려한 색채의 신장(神將) 그림을 붙였다. 이런 그림들은 주로 광통교 근처에서 팔았는데, 현재 종로2가에서 을지로2가로 가는 길에 청계천을 건너는 다리가 광통교다.

한 가지 더 들어보면, 구리개 약방이 있다. 구리개는 한자로는 동현(銅峴)이라고 하는데, 현재 을지로 2가 지역으로, 이곳에 흙이 구리 색깔처럼 빛나는 언덕이 있었다고 한다. 근처에 혜민서라는 현재의 국립의료원 역할을 하는 관청이 있어서, 약방이 많이 모여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의 약방이 얼마나 유명했는지는 [춘향전]에서 변사또의 수청을 거절하고 곤장을 맞아 기절한 춘향이를 살리려고 “구리개 박주부 약국에 가서 청심환을 사 오라”고 말하는 대목을 봐서도 알 수 있다. 청심환을 사러 남원에서 서울 구리개까지 갔다 오라고 한 것이다.

조선시대 서울사람들은 각자의 신분에 어울리는 여러 가지 놀이를 즐겼다. 선비들은 시짓기 놀이, 장사하는 사람들은 한강에서 뱃놀이, 양반집 하인들은 꽃놀이, 그리고 활쏘기 같은 것도 놀이로 즐겼다. 이런 놀이는 서울의 여러 누각과 경치 좋은 곳에서 열렸다. [한양가]에서 이름을 든 유명한 누대와 정자 중에 현재 원형이 남아 있는 것은 없고, 아름다운 경치로 거론한 곳도 서울의 난개발로 거의 사라졌다.

수많은 정자 중에 그나마 이름만이라도 남아 있는 것은, 압구정과 창랑정 정도인 것 같다. 압구정은 압구정동이라는 강남구의 동명으로 전해지고, 창랑정은 유진오의 소설 [창랑정기]에 그 이름이 남아 있다. 그리고 [한양가]에서 언급한 명소 가운데 현재까지 그 자리에서 그대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곳은 은평구 진관외동에 있는 진관사와 서대문구 홍은동의 옥천암 정도다. 둘 다 불교 사찰인데, 부근의 경치가 좋아서 서울 사람들이 놀러 가면서 절에도 들렀던 곳이다.

예나 지금이나 놀이를 하려면 돈이 드니까, 서울에서 놀이를 즐기는 사람들은 주로 대갓집이나 부잣집 자제들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 더 들 수 있는 부류가 대궐과 관청에 근무하는 별감이다. 별감은 하급직원으로 양반도 아니었지만, 이들은 임금을 호위한다든가 각종 행사를 준비하는 일을 맡았으므로, 그들이 관할하는 분야의 실질적인 권한을 갖고 있었다.

서울의 많은 놀이 중에 가장 볼만한 것을 [한양가]의 작자는 ‘승전놀음’이라고 말했다. 승전놀음은 앞에서 말한 별감들의 놀이로, 비번인 별감 백여 명이 모여서 벌이는 놀이였다. 이들 별감은 서울의 유행을 선도하는 옷차림을 하고, 자기들이 관할하는 부서의 악사와 가수 그리고 기생들을 총동원시켜 놀이판을 벌였다. 이들의 놀이는 당시 서울에서 볼 수 있는 가장 화려한 것이었다.

별감놀이 다음의 볼거리로는 능행을 들었다. 조선의 왕이 선대의 여러 임금 무덤을 참배하는 것을 능행(陵幸)이라고 한다. 한자 ‘幸’에는 다행이나 행복이라는 의미 외에 ‘임금의 나들이’라는 뜻도 있으므로, 능행은 임금님의 행차를 말한다. 조선의 왕릉은 대부분 서울에서 가까운 곳에 있으므로, 대부분 하루에 갔다 올 수 있었다. 그런데 정조는 즉위 후 10여 년이 지난 1789년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양주에서 수원으로 옮기고 이름도 현륭원이라고 고쳤다. 그리고 정조는 1800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12년 동안 13차례 수원의 현륭원에 행차했다.

과거시험 합격자 거리 행진, 구경꾼 눈으로 그려


▎서울의 옛 지도인 ‘수선전도(首善全圖)’. 지도 가운데는 백악산·낙산·남산· 인왕산을 연결해 만든 성곽이 그려져 있고, 성곽 안에는 궁궐·거리 등이 묘사됐다.
일반적으로 임금의 능행은 그 자체가 구경거리였지만, 정조의 수원 행차는 그 이전의 능행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큰 규모였기 때문에 더욱 커다란 볼거리였다. 정조의 능도 현륭원 옆에 조성했으므로, 후대의 임금인 순조나 철종도 수원으로 능행을 했다.

현재 서울 청계천에는 1795년 정조의 수원 행차의 행렬 순서를 벽화로 만들어놓은 것이 있다. 후대의 왕이 능행할 때의 광경도 대체로 이와 같은 모습이니, 서울시민들의 큰 구경거리가 아닐 수 없다. 전체 능행 과정에서 가장 큰 구경거리는 왕의 가마가 한강을 건너는 것인데, 임금은 배를 타고 건너는 것이 아니라, 많은 배를 서로 연결한 다음 그 위에 널빤지를 깐 배다리를 만들어 건넜다. ‘노량주교도섭도(露梁舟橋渡涉圖)’는 정조의 행차가 노량진의 배다리를 건너는 그림인데, 이 그림에는 강 양쪽에 가득한 구경꾼의 모습도 함께 들어 있다.

마지막 구경거리로는 과거시험의 여러 가지 광경을 들었다. 대부분의 과거시험에 대한 기록은 과거에 응시할 자격이 있는 사람들의 시각인데, [한양가]는 구경꾼의 시선으로 과거시험을 그렸다. 여기서 묘사한 과거시험장은 창덕궁 영화당 앞의 넓은 뜰인 춘당대이고, 임금이 직접 참석하는 알성시다.

임금이 참관하는 시험이므로, 임금이 좌정하는 옥좌 뒤에 펼치는 병풍인 오봉산일월병풍을 세워놓고, 용 무늬를 놓아서 짠 돗자리도 깔며, 햇빛을 가리는 양산도 준비해놓는다. 과거 응시생들은 창경궁의 여러 문으로 들어오는데, 좋은 자리를 잡기 위해 해뜨기 전에 등불을 들고 온다. 이 때문에 창경궁의 문은 밤중에 미리 열어놓는다.

화려한 임금의 행차가 도착한 후 임금이 직접 문제지를 건네면, 이를 받아서 높이 걸어 수험생들이 모두 볼 수 있게 한다. 답안을 작성한 수험생이 답안지를 제출하면, 이를 열 장씩 묶어서 쌓아놓는다. 산처럼 쌓인 답안지를 시관(試官)이 빠른 속도로 채점해 임금 앞에서 합격자를 결정하고, 합격자의 이름을 크게 부른다.

채점하는 동안 수험생들은 모여 앉아 발표를 기다리다가 급제자의 이름을 부르면 당사자는 대답하고 임금의 앞으로 나아간다. 합격자들은 임금이 내려준 술을 마시고, 머리에 어사화를 꽂은 다음 대궐 문을 나온다. 과거 합격자들이 서울의 거리를 누비며 다니는 모습은 서울시민의 큰 구경거리였다.

이상 다섯 가지 19세기 중반 서울의 구경거리에는 서울 사람들의 자신감과 자부심이 잘 드러나 있다. 이러한 서민의 자부심과 자신감이 국가의 융성과 연결되기 위해서 정치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19세기 후반 이후의 우리 역사가 잘 말해준다.

※ 이윤석 - 한국 고전문학 연구자다. 연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2016년 연세대 국어국문학과에서 정년 퇴임했다. [홍길동전]과 [춘향전] 같은 고전소설을 연구해서 기존의 잘못을 바로잡았다. 30여 종의 [홍길동전] 이본(異本) 가운데 원본의 흔적을 찾아내 복원했을 뿐만 아니라 작품 해석 방법을 서술했다. 고전소설과 관련된 30여 권의 저서와 80여 편의 논문이 있다. 최근에는 [홍길동전의 작자는 허균이 아니다]와 같은 대중서적도 썼다.

202107호 (2021.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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