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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협이 발굴한 ‘오랑캐의 역사’(21)] 16세기 중국인이 왜구(倭寇)로 나선 사정 

국가가 바닷길 통제하자 ‘해적업자’ 창궐 

정화 함대 원정으로 대외교섭 독점하고 민간 교역은 막아
무력 갖춘 법외 사업 급증, 정부도 국익에 도움되게 활용


▎왜구와의 해전을 그린 18세기 중국 그림. / 사진:위키피디아
근세 동아시아 3국의 대외정책을 ‘쇄국(鎖國)’과 ‘개항(開港)’으로 구분하는 담론이 오랫동안 펼쳐졌다. 이 담론은 19세기 중-후반 서방세력의 개방 압력이 닥쳤을 때 개방을 지지하는 일본인들이 꺼낸 것이다. 개방에 반대하는 입장에 부정적 느낌을 주는 ‘쇄국’이란 이름을 씌운 것인데, 이 말은 19세기 초에 일본에서 나타난 것이다. 일본에서도 중국에서도 그 전의 개방 억제 정책은 ‘해금(海禁)’이란 말로 표현되었다.

‘쇄국’이란 말은 대외관계의 맹목적 봉쇄를 떠올리게 하는데, 실제 해금정책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필요한 대로 대외관계를 유지하기도 하고 발전시키기도 하되 ‘국가의 통제’ 안에서 시행한다는 것이었다. 자유무역 원리에 길든 현대인에게는 ‘국가의 통제’ 자체가 안 좋은 것으로 보이기 쉽지만, 국가라는 것이 원래 통제를 위해 존재하는 것 아닌가? 질서에 대한 위협 요소라면 국내의 것이든 국외의 것이든 억제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국가의 당연한 책무다.

명나라는 중국의 왕조 중 해금정책을 가장 강력하게 시행한 왕조였다. 개국 초에 홍무제가 해금정책을 확고하게 세웠고, 왕조 끝까지 유지되었다. 목종(穆宗, 1566~1572) 때에 이르러 해금이 완화된 것을 ‘융경개관(隆慶開關)’이라 하여 개방정책으로의 선회로 보는 연구자들도 있지만, 국가의 통제력이 약화된 결과일 뿐 능동적인 전환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홍무제, 유교 이념인 농본국가 지키겠다는 의지


▎명나라 가정제 시기 ‘왜구’ 무역활동의 중심지 쌍서(雙嶼)항이 있던 주산(舟山)열도의 육횡도(六橫島). / 사진:바이두
영락제의 정화 함대 출동도 해금정책을 뒤집은 것이 아니었다. 함대 건설 착수와 동시에 민간의 해선(海船) 건조를 금지하며 기존의 해선도 원양항해가 불가능한 형태로 개조할 것을 명령했다. 정화 함대는 대외교섭을 국가가 독점한다는 의미에서 해금정책의 가장 적극적인 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당나라 이후 해로를 통한 중국의 무역은 꾸준히 늘어났다. 당나라는 661년 이후 광주(廣州)를 비롯한 몇 개 항구에 해운을 관장하는 관서를 설치했고 송나라는 1107년에 이 관서들을 시박사(市舶司)라는 이름으로 정비해서 운영했다. 1220년대에 천주(泉州) 시박사 제거(提擧)를 지낸 조여괄(趙汝适)이 남긴 [제번지(諸蕃誌)]에 실려 있는 광범한 지리정보에서 시박사의 폭넓은 활동 범위를 알아볼 수 있다. 두 권으로 된 [제번지]의 상권에는 남중국해와 인도양은 물론 지중해 연안까지 여러 지역의 지리와 풍속이 적혀 있고 하권에는 그 지역의 물산과 자원이 기록되어 있다.

1370~1374년 시박사 철폐는 명나라 출범 후 첫 정책의 하나였고 해금정책의 출발점이었다. 종래의 시박사는 다른 행정기구와 어울리지 않는 하나의 특수기관으로 운영됐다. 철폐에 따라 그 기능을 예부(조공 관계), 호부(재정 관계)와 지방행정관서(질서 유지)로 넘긴 것은 행정조직의 이념적 원리를 분명히 하기 위한 정비였다. 당-송 시대에 많이 늘어나는 해외무역을 처리하기 위해 서둘러 만든 시박사는 [주례(周禮)]에 명기된 유가 원리가 반영되지 않은 것이었고 관련된 이권 때문에 물의가 잦았다. 홍무제는 유가 이념을 표방한 왕조를 세우면서 이념적 근거를 갖지 못한 시박사를 없앤 것이다. 이 조치에는 해외무역의 이득이 아무리 크더라도 농본(農本)국가의 틀을 지키겠다는 의지가 있었다.

해외무역만이 아니라 모든 면에서 명나라는 농본의 원리를 굳게 지켰다. 그러나 경제 발전에 따른 산업의 고도화는 국가정책으로 틀어막을 수 없는 현상이었다. [주례]가 작성된 시대에 비해 제조업과 상업의 비중이 크게 자라나 있어서 농본국가의 틀을 지키기 어렵게 만드는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그중에서 해외무역이 특히 두드러진 문제를 일으킨 것은 국가의 통제 밖에 있는 해외 상황의 변화에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중국인의 해외활동 증가는 해외 화교(華僑) 사회의 생성에 비쳐 나타난다. 중국 밖의 여러 지역 여러 국가에서 일어난 현상이기 때문에 중국 측 기록이 소략하고 각국의 집계를 모으기 어렵지만 근년의 연구로 윤곽이 밝혀지고 있다. [바이두백과]의 ‘华侨’ 항목에는 해외 화교의 인구가 송나라 때 10만 명 선, 19세기 초 청나라 중기까지는 100만 명 선에 이르고 아편전쟁 후 중국인의 해외 이주가 급증해서 20세기 초까지 1000만 명을 넘어선 것으로 추정되어 있다. 거대한 화교 사회는 20세기 초에는 민국혁명(民國革命)의 큰 지원세력이 되었고 그 100년 후에는 중국의 개혁·개방에 발판을 마련해 주기에 이른다.

정화 함대는 제1차 항해(1405~1407)의 귀로에 진조의(陳祖義)가 이끄는 팔렘방의 해적을 토벌했다. 진조의는 명나라가 들어선 후 온 가족이 남양으로 나가 해적질을 했다고 한다. 1만 명 무리를 끌고 100척의 함대로 남중국해와 인도양을 주름잡으며 1만 척의 배를 약탈하고 50여 개 항구를 공략했다고 하는 마환(馬歡) 등의 기록은 과장된 것으로 보이지만, 상당히 큰 세력을 이루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영락제가 50만 량의 현상금을 내건 ‘역사상 최고의 현상수배범’이었다고 하는 주장까지 있다.

흥미로운 것은 진조의 토벌에 협조한 다른 중국인 집단의 존재다. 수마트라 섬의 팔렘방은 일찍부터 스리비자야(Srivijaya, 三佛齊) 왕국의 중심지였는데 11세기 이후 세력이 꺾여 자바 섬의 마자파힛(Majapahit) 왕국의 정복 대상이 되었다. 1397년 스리비자야 왕국 소멸 후 1000여 명 현지중국인들이 양도명(梁道明)을 왕으로 추대했다고 한다. 양도명은 1405년 영락제의 칙서를 받고 입조했다고 하는데, 정화 함대가 (나가는 길에) 칙서를 전한 모양이다. 정화 함대의 귀로에 양도명의 수하였던 시진경(施進卿)이 진조의가 꾸미고 있던 음모를 알려주었기 때문에 토벌할 수 있었다고 하며, 시진경은 그 공으로 선위사(宣慰使)의 직함을 받아 양도명 대신 현지의 왕 노릇을 했다고 한다.

상인 집단 간 주도권 다툼 과정 ‘해적’으로 몬 듯


▎1682년에 그려진 수마트라 섬의 팔렘방 모습. / 사진:위키피디아
진조의·양도명·시진경, 모두 남양 일대의 중국인 집단 지도자였다. 양도명·시진경 집단이 정화 함대의 신임을 얻으며 경쟁관계에 있던 진조의를 해적으로 몰아붙인 것으로 보인다. 진조의를 희대의 ‘해적왕’으로 그린 것은 양도명·시진경이 제공한 정보였을 것이다. 진조의 집단이 가진 선박이 10여 척에 불과했다고 하는 자료도 있다.

남양으로 진출한 중국인 집단에게 해적이 인기 있는 직종이었을까? 동남아시아로 나간 중국인은 대개 상업 아니면 농업에 종사했다. 중국 내에도 아열대 작물 재배 지역이 많아졌기 때문에 새로운 품종과 재배기술을 갖고 나간 사람들이 많았다. 후일 유럽인들의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에 기술이 좋은 중국인 노동자를 선호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포메란츠와 토픽, [The World that Trade Created 교역이 빚어낸 세계] 15쪽)

상업에 종사한 중국인들은 현지인보다 우월한 자본과 조직력, 그리고 중국 시장으로 통로도 가졌기 때문에 유리한 조건에서 활동할 수 있었다. 스리비자야 체제가 무너지는 상황에서 자위를 위해서도 무장은 필요했고 활동 범위를 놓고 집단들 사이의 경쟁이 있었을 것이다. 양도명·시진경 집단과 진조의 집단 사이에도 그런 경쟁이 있었던 것이고, 그런 과정에서 ‘해적’의 이름도 붙게 된 것으로 보인다.

특이한 것은 시진경의 출신이다. 양도명과 진조의는 광동(廣東) 출신이었는데, 시진경은 항주(杭州) 출신의 무슬림이었다. 진조의는 압송·처형되고 양도명은 조공을 바치러 남경으로 갔다가 고향으로 돌아갔고, 팔렘방에 남은 시진경이 선위사로 임명받아 그 아들딸까지 그 지역의 ‘왕’ 노릇을 했다. 중국 출신으로 기술력과 조직력을 가진 위에 종교를 통해 현지인과의 유대관계를 겸비한 것이 그의 역할을 뒷받침한 것으로 보인다.

명나라의 해금정책 아래 해외무역의 대부분은 민간의 불법 사업이 되었고 해적의 창궐을 불러왔다. ‘불법’ 사업이라고는 하지만 원래는 관습적으로 용인되는 ‘법외(法外)’ 사업이었다. 부분적,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해적의 행태가 이목을 너무 많이 끌기 때문에 그 배경의 비교적 점잖은 무역 기능이 제대로 드러나 보이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무역 기능의 지속적 존재는 생활양식의 변화에서도 확인된다. 후추(胡椒)가 하나의 예다. 명나라 이전에는 후추가 대단한 사치품이었는데 명나라 말까지 그 값이 10분의 1 이하로 떨어져 서민의 부엌에서도 쓰이게 되었다. 정화 함대가 다량의 후추를 실어오면서 값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민간 상인들에 의해 후추의 대량 수입이 계속된 결과였다고 한다. (핀들레이와 오루어크 [Power and Plenty 권력과 풍요] 134쪽)

대외무역을 조공무역 형태로 모으려 해금(海禁)정책


▎중국풍과 포르투갈풍이 결합된 말라카의 한 건물. 미술관 이름에 ‘정화(鄭和)’가 들어있다. / 사진:위키피디아
명나라의 해금정책은 모든 대외무역을 조공무역의 형태로 모으는 데 목적이 있었다. 자유무역 원리에 익숙한 현대인에게는 조공무역이 미개한 관행으로 보이기 쉽다. 그러나 조공무역과 같은 통제 무역이 적합한 상황도 있었다. 포메란츠와 토픽은 [교역이 빚어낸 세계] 8~9쪽에서 아스테카 제국의 장거리 교역과 지역 내 교역이 서로 다른 사람들에 의해 서로 다른 장소에서 진행된 사실을 지적한다. 지역 내 교역은 상인과 주민들이 저잣거리에서 행하는 것이었지만 장거리 교역은 귀족과 관리들이 궁정에서 행하는 것으로 조공무역과 비슷한 형태였다. 사치품을 주고받는 장거리 교역은 주민들의 일상적 활동과 별개로 행해진 것이다.

산업 발전과 사회 분화는 교역량 증가를 가져온다. 지역 간 분업의 진행에 따라 지배계층의 사치품만이 아니라 직물과 공산품 등 서민의 생필품까지 먼 거리를 이동할 필요가 늘어나고 교통수단의 발전에 따라 운송비용이 낮아지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당-송 시대에 국내 교역과 해외무역이 모두 많이 늘어났다. 송-원 시대에는 민간의 해외무역에 대한 통제가 엄격하지 않았고, 명나라가 들어설 때는 해외무역이 국가가 통제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 있었다.

정화 함대의 원정은 국가의 무역 통제 범위를 넓히려는 시도였다. 통제할 대상이 얼마나 거대한 것이었는지 함대의 어마어마한 규모가 보여준다. 왕조 초기에는 재정이 넉넉하다. 종래의 기득권이 척결되고 새로운 기득권은 아직 자리 잡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무제와 당 태종의 적극적 대외정책도 초창기의 재정 여유 위에서 펼쳐진 것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여유가 사라진다. 20여 년 함대를 운영해 본 뒤 거대한 함대를 유지하는 적극적 해금정책에서 물러서 항구를 지키는 소극적 해금정책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홍무제가 철폐했던 시박사도 영락제 때 ‘역(驛)’의 이름으로 다시 조직되어 조공단의 응접과 사무역의 통제 등 해금정책 집행기관의 역할을 계속했다.

국가의 기능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확장되었지만, 그 확장이 산술적인 확장이라면 같은 기간 대외교역을 포함한 교역의 확장은 기하급수적인 것이었다. 한나라와 당나라는 대외교역의 대부분을 조공무역의 틀에 담을 수 있었지만 송나라 이후는 어렵게 되었다. 영락제가 왕조 초기의 기세를 타고 조공무역의 틀을 키우려고 시도했으나 20여 년 만에 한계에 부딪혔다. 그 후의 해금정책은 ‘국가 통제’의 원칙을 겉으로 표방하면서 실제로는 현실의 변화를 완만하게 받아들이는 길이었다.

표방하는 원칙과 수용하는 현실 사이의 괴리가 계속해서 문제를 일으켰고, 문제가 겉으로 드러날 때 ‘해적(海賊)’의 형태로 나타났다. 정화 함대는 진조의의 해적을 소탕하고 이에 협조한 시진경을 선위사로 임명해 현지 세력으로 인정했다. 진조의 집단과 시진경 집단 사이에 성격 차이가 컸을 것 같지 않다. 둘 다 유랑해 온 중국인들이 같은 상황 속에서 조직을 만든 것이고 (영락제를 대신한) 정화 입장에서는 그 경쟁 상태를 방치하기보다 어느 한 쪽으로 몰아주는 것이 관리하기에 편리할 것으로 판단했을 것 같다.

유럽 ‘프라이버티어링’은 국가 차원의 해적질


▎1548년부터 1562년까지 가정제의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엄숭(1480-1567). 그는 [명사(明史)] ‘간신(奸臣) 열전’에 명대 6대 간신의 으뜸으로 소개되어 있다. / 사진:바이두
유럽에서 이 무렵부터 19세기까지 성행한 ‘프라이버티어링(privateering)’을 떠올린다. (‘사략선(私掠船)’이라는 일본식 번역은 도저히 내키지 않는다) 대항해시대에서 제국주의 팽창기까지 유럽인의 해상활동에서 화려한 역할을 맡은 사업이었다. 영국만 하더라도 월터 롤리, 프랜시스 드레이크 등 쟁쟁한 인물들이 이 사업으로 명성을 쌓았다. 적국 선박을 나포할 권한을 국가가 민간 사업자에게 부여하는 제도였는데, 실제 운용이 어지러웠다. 해적질(piracy)의 합법화 내지 국가 차원의 해적질로 볼 수 있는 사업이었다.

국가의 통제력은 해상에서 효과를 일으키기 어렵다. 해상에서는 통제할 대상이 쉽게 움직이기 때문이다. 프라이버티어링은 어차피 통제가 힘든 해상세력의 활동을 억지로 통제하려 드는 대신 국가가 오히려 도와주면서 국익에 보탬이 되는 방향으로 활용한 제도였다. 시진경이 받은 명나라의 선위사 직함을 유럽의 프라이버티어들이 받은 나포 인허증(letter of marque)과 같은 성격의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약탈만 하는 단순한 해적은 그 세력 규모에 한계가 있을 것 같다. 모든 육상세력과 적대관계여서 세력이 커질수록 공격이 집중되기 때문이다. 큰 세력을 가진 해적은 육상세력과 복잡한 이해관계를 맺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특정 국가의 지원과 보호를 받은 유럽의 프라이버티어가 단적인 예다.

명나라의 해금정책 아래 조공무역의 틀에 담길 수 없는 해외무역은 민간의 ‘법외’ 사업이 되었다. 이 사업의 종사자들은 약탈이 아닌 무역에서 이득을 찾는 ‘무역업자’였지만 국가의 법망 밖에서 활동하며 무력을 많이 활용한다는 점에서 ‘해적’으로 규정되었다. 이들을 단순한 해적과 구별해서 ‘해적업자’라 부르고 싶다.

해적업자들은 연해 지역의 토착세력과 긴밀한 협력관계 아래 활동했다. 이 업자들이 수입한 물품은 생필품이 아닌 사치품이었기 때문에 그 유통을 위해 육상세력의 역할이 필요했던 것이다. 무역활동의 수익성이 높았기 때문에 국가권력을 자극하는 약탈 행위는 스스로 삼갔고 따라서 중앙정부도 그 퇴치에 큰 힘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 시대 해적의 대명사가 된 ‘왜구(倭寇)’의 성격 변화가 해적업의 발전상을 보여준다. 14세기 중엽에 나타난 초기 왜구는 약탈만 하는 단순 해적에 가까웠다. 당시 일본의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일부 지방세력이 해적으로 나서면서 왜구가 번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초기 왜구의 주된 침공 지역은 일차적으로 한반도, 다음으로 산동성 등 북중국 해안지대였다. 그런데 15세기 들어 잦아들었던 왜구가 16세기에 급증하는데, 그 주 무대는 중국의 동남해안이었다. 이 후기 왜구의 구성에는 중국인이 다수를 점했다고 한다.

해적업자, 연안지역 토착세력과 손잡고 활동


▎1542년 몇 명의 포르투갈인이 규슈 남쪽의 다네가시마(種子島)에 와서 화총 등 신기한 물건들을 전해줬다. 이들을 데려온 것이 중국인 해적 왕직이었다. / 사진:위키피디아
후기 왜구의 활동이 남쪽으로 옮겨가고 중국인의 역할이 커진 것은 그 활동 내용이 무역 관계였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위키피디아] ‘Wokou’ 기사 중 첸 마오헝의 [明代倭寇考略](1957)에서 인용된 중국 측 왜구 관련기사의 빈도표가 흥미롭다. 명나라 7대 경제(景帝)에서 11대 무종(武宗)까지 72년간(1450~1521) 6개 기사가 나타날 뿐인데 12대 세종(世宗) 때는 45년간(1522~1566) 601개 기사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다음 13대 목종(穆宗)과 14대 신종(神宗)의 53년간(1567~1619) 나타나는 기사는 34개다.

한 황제의 재위 기간에 왜구 기사의 대부분이 집중된 까닭이 무엇일까? 바로 떠오르는 추측은 세종, 즉 가정제(嘉靖帝) 재위 기간의 왜구 관련 정책에 특이성이 있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실제로 다음 황제 목종이 즉위 직후 ‘융경개관’을 행하자 왜구 기사가 드물어진다.

레이 황의 [1587: A Year of No Significance 만력 15년,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해]에 신종 만력제(萬曆帝, 1572~1620)가 정무를 사보타주하는 모습이 인상적으로 그려져 있는데, 신종의 할아버지 가정제가 황제 사보타주의 원조였다. 가정제는 후사를 정하지 못한 채 갑자기 죽은 사촌 형 무종의 제위를 15세 때 물려받은 후 백부인 효종(孝宗)에게 입양 절차를 밟을 것을 거부하고 자기 생부의 추존(追尊)을 고집하면서 주류 관료집단을 등지기 시작했다. 몇몇 총신과 환관만을 신임하고, 1539년부터 25년간 조회(朝會)도 열지 않았다고 한다. 엄숭(嚴崇) 같은 희대의 간신의 발호는 물론이고, 1542년에는 학대를 못 이긴 비빈(妃嬪)들이 황제의 교살(絞殺)을 시도한 임인궁변(壬寅宮變)까지 일어났다.

명나라에 시원찮은 황제가 한둘이 아니었지만 가정제는 그중에서도 심한 편이었고 게다가 재위기간이 무척 길었다. 가정제의 정치 실패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왜구’ 문제였다.

가정제(이 황제를 ‘세종’이라고 부르기 싫은 마음을 독자들이 이해해 주기를!)시기 왜구에 관한 기록은 분량이 많지만 갈피를 잡기 어렵다. 정치적 입장에 따라 편향된 내용이 많기 때문일 것 같다. 몇 개 인상적인 장면을 소개함으로써 분위기 파악에 만족하려 한다.

무협지 한 장면 같은 1555년 여름 ‘가정왜란(嘉靖倭亂)’


▎일본 이와미 은광 유적. 1526년 개발되어 1923년까지 생산을 계속했다. 1545년 볼리비아의 포토시 은광이 개발되기 전까지 잠시 동안 세계 최대의 은광이었다. / 사진:위키피디아
1555년 여름에 일어난 ‘가정왜란(嘉靖倭亂)’의 기록은 무협지의 장면처럼 느껴진다. 53인의 왜구가 80여 일 동안 절강(浙江)-안휘(安徽)-강소(江蘇) 3성을 휩쓸고 다니면서 4000여 명의 관병을 살상했다고 한다. 그 섬멸전에 참모로 참여한 정약증(鄭若曾)은 이런 말을 남겼다. “8개 군(郡)에 걸쳐 3000리를 돌아다니며 싸우는데… 사람을 (비무장 민간인) 죽이지 않고 재물을 약탈하지 않고 부녀자를 범하지 않았다. 이렇게 깊이 쳐들어온 뜻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 헤아릴 길이 없다.”

이 53인의 ‘특수부대’는 날아오는 화살을 맨손으로 잡아채는 무예의 고수들이어서 통상적인 병력과 전술로는 도저히 막아낼 길이 없었다고 한다. 이들이 제2의 황도 남경(南京)에 들이닥치자 1000여 명 수비대가 이틀 동안 성문을 걸어 잠그고 쩔쩔맸다고 한다. 결국 수천 명을 동원한 치밀한 작전으로 겨우 섬멸했다고 한다. ([바이두백과] ‘嘉靖倭乱’)

이 왜구의 정체가 무엇인지, 침공의 목적이 무엇인지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일본 사츠마(薩摩)의 낭인(浪人) 출신 해적집단으로 보는 시각이 유력하지만 석연치 않다. 정약증 등 당시 사람들은 대거 침공을 위한 정찰대로 보기도 했지만 그 역시 석연치 않다. 어쩌면 이런 중대한 문제를 석연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수수께끼로 남겨둔 것이 가정제 시기 대 왜구 정책의 특성일지도 모르겠다.


▎브루클린의 차이나타운. 뉴욕은 서양에서 가장 많은 중국인이(90만 명 이상) 거주하는 도시다. / 사진:위키피디아
명말청초의 문학작품에 많이 등장한 해적으로 서해(徐海)와 그 아내 왕취교(王翠翹)가 있다. 일본 규슈(九州)에 근거를 두고 중국 동남해안에 큰 세력을 이룬 서해는 절강-남직예(南直隸, 즉 안휘) 총독 호종헌(胡宗憲, 1512~1565)의 초무(招撫)에 응해 1556년 투항했으나 호종헌은 서해를 용납하는 척하면서 섬멸할 준비를 계속해서 그를 끝내 제거했다.

왕취교는 강남의 명기(名妓)였던 여인으로 서해 일당의 약탈 때 잡혀가 서해의 아내가 되었다. 호종헌이 서해를 초무하기 위해 연락할 때 서해의 수준 높은 서신을 보고 크게 놀랐는데 알고 보니 왕취교가 써준 것이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여인의 존재를 알게 된 호종헌이 왕취교에게 따로 예물을 보내며 서해의 설득에 도움이 되기를 바랐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서해가 죽은 후 그 시신을 예를 갖춰 매장하게 해주고 자신이 여승이 되게 해달라는 요청을 호종헌이 모두 거부하고 부하 장수의 첩으로 주려고 하자 물에 뛰어들어 자살했다고 하는 것이 수많은 희곡과 소설에 나타나는 왕취교의 모습이다.

당대 최강의 해적왕으로 명성을 떨친 왕직(汪直) 역시 호종헌의 초무에 응하다가 1559년에 처형당했다. 왕직은 1553년 관군의 토벌을 피해 일본에 가 있었는데 이듬해 총독에 부임한 호종헌이 그 가족을 옥에서 풀어주고 우대하면서 왕직에게 사람을 보내 초무했다. 왕직은 이를 믿고 무역의 허가를 청하러 절강으로 왔다가 순안사(巡按使) 왕본고(王本固, 1515~1585)에게 체포되고 얼마 후 처형되었다.

호종헌이 왕직을 꼭 죽이기 위해 속여서 불러온 것 같지는 않다. 호종헌은 당대의 세도가 엄숭의 1562년 실각 후 그 일당으로 몰려 자살에 이른 인물이다. 왕직의 무역업을 ‘양성화’시켜 주고 그로부터 이득을 얻고자 한 것 같은데, 고지식하기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왕본고가 나서는 바람에 왕직의 처형을 막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15세기 후반에 잠잠하던 왜구가 16세기 초~중엽 가정제 시기에 폭증한 이유가 무엇일까? 정치가 부실해서 암묵적으로 진행되어 온 해외무역의 틀이 흔들린 데 문제가 있었을 것을 우선 생각할 수 있지만, 배경조건의 큰 변화 또한 생각할 수 있다. 은(銀)이 중국으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19세기 초에 아편이 부각되기 전까지 중국은 대외교역에서 ‘은 먹는 하마’였다. 해외의 중국 상품 수요에 비해 중국의 해외상품 수요가 훨씬 작았기 때문에 막대한 양의 은이 수백 년간 계속해서 중국으로 흘러들었다. 은의 중국 대량 유입이 시작된 것이 16세기였다. 1526년 개발된 이와미(石見) 은광이 일본의 구매력을 크게 늘려줌에 따라 동남아시아 방면에서 주로 펼쳐지고 있던 중국인의 해외 활동이 일본 방면으로 옮겨오게 된 것으로 보인다.

※ 김기협 - 서울대·경북대·연세대에서 동양사를 공부하고 한국과학사학회에서 활동했다. 1980년대에 계명대 사학과에서 강의하고, 1990년대에 중앙일보사 연구위원(객원), 전문위원(객원) 등으로 일하며 글쓰기를 시작했다. 2002년 이후 19년간 공부와 글쓰기를 계속해왔다. 저서로 [밖에서 본 한국사](2008), [뉴라이트 비판](2008),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2010), [아흔 개의 봄](2011), [해방일기](10책, 2011~2015), [냉전 이후](2016) 등이 있다.

202107호 (2021.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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