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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경률의 사랑으로 재해석한 한국사(16)] 조선 중종이 들려주는 궁중 암투 내막 

반정·사화 피바람에 휘말린 왕의 여자들 

개혁 맡겼던 조광조는 후궁과 결탁한 소인배들 이용해 제거
세자 저주 등 잇단 괴변… 군주 변덕이 음모·무고의 괴물 키워


▎SBS 사극 [여인천하]에서 중종과 그의 계비 문정왕후의 혼례식 장면. 문정왕후는 조선의 측천무후라 불렸을 만큼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운명의 그날, 아내가 아니었다면 나 이역(李懌)은 임금이 되기는커녕 자결했을 것이다. 며칠 전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내 이복형 연산군이 수많은 관리와 선비를 죽이고 폭정을 일삼았기에 민심이 흉흉했다. 박원종·성희안·유순정 등이 반정을 꾀하고 있다는 풍문이 저자에 떠돌았다. 설마, 하면서도 저들이 들고일어날까 봐 오금이 저렸다. 폭군의 동생이라고 처단하면 어떡하지? 차라리 내 손으로 목숨을 끊을까?

1506년 9월 2일 반정의 주역들이 심야에 군사를 일으켜 궁궐로 행군했다. 문신과 장수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고 백성들은 길을 가득 메웠다. 나는 아내 신씨 부인과 함께 집에서 떨고 있었다. 별안간 말발굽 소리가 나더니 군사들이 집을 에워쌌다. 우려했던 일이 그예 터진 것이다. 깜짝 놀라 죽으려고 했는데 신씨 부인이 내 소매를 붙잡았다.

“군사의 말 머리가 이 집을 향해 있으면 우리 부부가 죽지 않고 무엇을 기다리겠습니까? 그러나 만일 말 머리가 밖을 향해 있으면 당신을 호위하려는 뜻일 겁니다. 알아보고 자결해도 늦지 않습니다.”(이긍익, [연려실기술] ‘중종조고사본말’)

하인을 내보내 확인해보니 과연 말머리가 밖을 향해 있었다. 현명한 아내 덕분에 목숨을 보전한 것이다. 나는 1499년 12세의 나이로 한 살 연상인 이 사람과 혼인했다. 우리 부부는 남녀의 정에 눈뜨며 사랑을 키워나갔다. 반정이 일어났을 때는 18~19세였는데 금슬이 매우 좋았다. 불안과 두려움도 서로 믿고 의지하며 이겨냈다.

그날부로 내 운명이 바뀌었다. 반정 공신들에게 옹립돼 경복궁에서 즉위한 것이다. 조선 11대 임금, 중종이다. 신씨 부인도 백관의 하례를 받으며 중궁전에 들어갔다. 그 순간 운명은 변덕을 부렸다. 청천벽력과 같은 생이별이 우리 부부를 덮쳤다.

저들은 임금을 협박하고 있었다


▎SBS 사극 [여인천하]에서 정난정 역을 맡은 배우 강수연(왼쪽)과 문정왕후로 분한 배우 전인화.
문제는 아내의 가족이었다. 아버지 좌의정 신수근은 연산군의 처남이자 조정의 실세였다. 폭군과 달리 덕망이 높아 실록에 칭송을 남긴 폐비 신씨가 고모였다. 외척 신씨 일족은 반정이 터지면서 공공의 적으로 몰렸다. 그날 밤 한 무리의 용사들이 내 처가로 찾아가 장인 신수근을 쳐 죽였다. 자식과 친척들도 모조리 체포돼 유배지로 끌려갔다.

궁궐의 공기가 확 달라졌다. 9월 9일에 ‘반정 삼공신’ 박원종·성희안·유순정이 대신들을 앞세워 우르르 몰려왔다. 그들은 새 임금에게 아내를 내치라고 요구했다. 거사를 위해 신수근을 제거했는데 죄인의 딸을 왕비로 삼으면 민심이 불안해질 것이라는 이유였다. 하지만 신씨 부인에게는 아무 잘못도 없었다. 나는 사랑하는 아내를 지키고 싶었다.

“조강지처(糟糠之妻)를 어찌 내치는가?” ([중종실록] 1506년 9월 9일) 가난하고 궁할 때 사귄 벗은 잊어선 안 되고, 함께 고생한 조강지처는 버리지 않는 법이다. 반정 공신들은 그러나 물러서지 않았다. 종사(宗社)를 들먹이며 결단을 촉구했다. 완강한 태도에 기가 질렸다. 저들은 임금을 협박하고 있었다. 신수근의 딸이 왕비가 되면 임금과 세자를 움직여 보복할까 봐 화근을 뿌리 뽑으려고 한 것이다. 치졸한 보신책이었다.

차라리 죽은 신수근이 충신이다. 박원종은 거사 직전에 그를 만났다고 한다. 연산군의 처남에게 누이냐 딸이냐, 택하라고 했다. 넌지시 정변을 암시하고 속내를 떠본 것이다. 신수근은 소매를 떨치고 일어나 소신을 밝혔다. 임금은 포악하지만 세자가 총명하니 희망을 걸어보겠다고 했다. 이때 박원종은 처단을 결심했을 테고, 장인은 죽음을 예감했을 것이다.

결국 나는 그의 딸을 지켜내지 못했다. 상대는 위세 등등한 반정 공신들이었다. 무력한 왕은 무릎을 꿇고 말았다. 초저녁에 신씨 부인이 교자를 타고 건춘문을 나섰다. 경복궁 밖으로 어둑어둑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부부의 백년가약은 눈물에 씻겨 내려갔고 꽃 같은 아내는 233년 후에야 내 곁으로 돌아왔다. 1739년 영조는 신씨를 복위시켜 단경왕후라는 시호를 올리고 온릉을 조성했다.

임금이 상심을 달랠 겨를도 없이 또 다른 여인들이 궁에 들어왔다. 비상한 시국에 국모의 자리를 오래 비워둘 수 없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 아내 장경왕후 윤씨는 일단 후궁이 됐다가 이듬해 17세의 나이로 왕비 자리를 꿰찼다. 정비(正妃), 곧 정실 왕비였다. 박원종의 조카(누이의 딸)이자 내 어머니 정현왕후를 배출한 파평 윤씨 일족이니 공신들과 대비전의 합작품인 셈이다. 궁궐에서는 모든 게 정치고 타협의 결과물이었다.

정비 윤씨는 어진 사람이었다. 생모를 일찍 여의고 이모 월산대군 부인의 손에 길러졌는데 어려서부터 책을 두루 읽으며 자기 자신을 닦았다. 왕비가 돼서는 지성으로 대비를 봉양하고 임금을 보필했다. 후궁들에게도 은혜를 베풀어 서자녀까지 친자식처럼 품었다. 그이는 국모로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외척에 대해서는 엄정했다.

“외척의 관작을 첩이 어찌 구하겠습니까? 어질면 자연히 공론에 따라 쓸 것이요, 어질지 못하면 공론에 어긋나 버릴 테지요. 혹 죄를 입는 자가 있더라도 누굴 탓하겠습니까? 소첩은 외척의 허물을 감싸지 않겠습니다.”([중종실록] 1515년 3월 7일)

정실 왕비 죽음이 몰고 온 정치적 격변


▎SBS 사극 [여인천하]에서 중종 역을 맡은 배우 최종환.
왕비가 현명하게 처신하니 궁이 원만히 다스려졌다. 위아래가 화목하고 사방에서 칭송이 가득했다. 1515년 2월 25일 정비 윤씨가 원자를 출산했다. 큰 경사에 백관이 하례하고 만백성이 기뻐했다. 그러나 왕비는 생사의 기로에 섰다. 산후병이라는 사신(死神)과 대면한 것이다. 의녀 장금이 밤낮으로 돌보고 내의원에서 온갖 약을 올렸지만 허사였다. 윤씨는 젖먹이 원자를 남겨두고 3월 2일 새벽에 운명했다. 시호는 장경왕후, 능호는 희릉이다.

정실 왕비의 죽음은 정치적 격변을 몰고 왔다. 발단은 담양부사 박상과 순창군수 김정의 상소였다. 여름에 우박이 쏟아지고 전라도에서 발 다섯 달린 송아지가 나오자 나는 구언(求言), 곧 직언을 구하는 하교를 내렸다. 임금이 잘못한 게 있으면 기탄없이 말하라는 것이다. 두 사람은 내 전처 신씨를 복위시켜야 한다고 상소했다.

“박원종·성희안·유순정 등이 자신들을 보전하려고 사사로이 옛 왕비를 내쳤으니 명분이 없습니다. 옛적에 ‘여자가 원한을 품자 연(燕)나라에 서리가 내렸다’고 했습니다. 하물며 지존의 배필을 까닭 없이 내쳐 그윽한 원한을 맺었으니 지금 여러 가지 괴변이 일어나도 이상할 게 없습니다. 어찌 바로잡지 않으십니까?”([중종실록] 1515년 8월 8일)

상소는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사헌부와 사간원, 양사(兩司)의 대간들은 사악한 의논이 불거졌다며 박상과 김정을 처벌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양사의 수장인 대사헌 권민수와 대사간 이행이 탄핵에 앞장섰다. 처벌의 근거는 구구절절했다. 신씨가 궁에 돌아와 원한을 갚으려 한다면 조정에 피바람이 불지도 모르고, 조강지처로서 왕자라도 출산하는 날이면 장경왕후 소생의 원자와 선후를 가려야 하니 인심을 어지럽힌다는 것이었다.

반면 좌의정 정광필 등 대신들은 처벌을 만류했다. 박상과 김정이 올린 상소가 임금의 구언에 응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나라에 일어난 이변을 잘못된 정치에 대한 하늘의 경고라고 보고 위정자의 허물을 묻는 게 구언이다. 상소가 과격하더라도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유교 정치는 선비의 언로에서 꽃피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구언 상소를 처벌하면 언로를 강제로 닫는 격이라고 대신들은 우려했다. 홍문관도 여기에 동조했다.

나도 안다. 아버지 성종대왕은 유교 통치 체제를 완성했다. 삼사를 정비하고 사림을 등용해 선비의 언로를 활짝 열었다. 말년에는 “신하의 도는 의를 따르는 것이지, 임금을 따르는 게 아니다”며 관리들이 왕명을 거부하는 바람에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이복형 연산군은 임금을 능멸하는 건방진 유교 정치를 뜯어고치려 했다. 공포 정치로 언로를 틀어막고 강력한 왕이 되고자 했다. 당시 신하들이 차던 신언패(愼言牌)의 글귀는 섬찟했다. “입은 화를 부르는 문! 혀는 자신을 베는 칼!”(이긍익, [연려실기술] ‘연산조고사본말’)

그럼 신씨 복위 상소 사건은 어떻게 처리할까? 나는 이상주의자 아버지와 폭군 형을 절충하기로 했다. 먼저 과격한 상소로 나라를 어지럽힌 박상과 김정을 유배 보냈다. 현실정치는 호락호락하지 않다. 박원종·성희안·유순정은 죽었지만, 공신 세력은 아직 힘이 세다. 그리고 구언 상소를 탄핵해 스스로 언로를 훼손한 사헌부와 사간원 관리들은 모두 교체했다. 조정에 새로 출사한 사간원 정언의 간청을 신호탄으로 삼았다. 조광조였다.

“양사를 파하고 언로를 다시 여소서.”([중종실록] 1515년 11월 22일) 권력자는 욕심이 있는 자가 쓰기 편하다. 필요한 일을 시키고 대가를 치르면 깔끔하다. 반대로 사심이 없는 자는 쓰기가 까다롭다. 대가를 바라지 않기에 고분고분 복종하지도 않는다. 통제가 안 된다. 조광조에게 기대를 걸었다가 내 손으로 제거한 이유다.

그는 주자 성리학을 배우고 실천한 명망 높은 도학자였다.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정여창·김굉필로 이어지는 절의파 학통을 계승했다. 사림이 가장 높이 쳐주는 학벌이다. 의제 설정과 공론 창출도 발군이었다. 대간의 전원 교체를 주장하며 신씨 복위 상소 사건의 본질을 언로 훼손으로 몰고 간 것은 탁월했다. 소장파 관리들은 조광조에게 매료됐다.

임금까지 겨눈 조광조, 변덕스럽지만 제거하는 수 밖에…


▎SBS 사극 [여인천하]에서 중종의 후궁인 경빈 박씨 역을 맡아 열연한 배우 도지원.
도덕적 권위를 갖춘 유능한 언론인의 출현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성리학을 신봉하는 조정의 청요직, 삼사의 언관과 육조의 낭관들이 그를 중심으로 뭉쳤다. 공신들에게 문제의식을 가진 대신들도 동참했다. 훈구파를 견제할 개혁 세력이 나타났다. 그들은 공자와 주자가 꿈꾼 요순시절의 지치(至治, 지극한 정치)를 부르짖었다. 도학자가 지핀 이상 열기였다.

조광조 일파의 뒤에는 내가 있었다. 20대 후반의 의욕 넘칠 나이인데다 ‘반정 삼공신’ 박원종·성희안·유순정이 다 죽었다. 이제 눈치 보지 않고 군부(君父)로서 뭔가 과시하고 싶었다. 이상 열기에 들떴는지 나도 요순 같은 성군이 되고 싶었다. 개혁 세력은 조광조가 이끌었지만, 원동력은 군주의 전폭 지지였다. 의정부·승정원·육조·삼사의 요직을 다 내줬다. 정몽주를 문묘에 배향하고, 현량과도 시행하고, 여악도 폐지하고, 하자는 거 다 해줬다.

3~4년 하고 깨달았다. 성군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니었다. 조광조는 성리학 공부하라고 밤낮으로 국왕을 닦달했다. 소격서를 혁파하지 않는다고 퇴청도 안 하고 밤새도록 상소를 올려댔다. 그는 임금을 가르치려 했다. 위훈(僞勳), 거짓 공훈을 삭제하려는 시도는 훈구파를 흔들었다. 반정에 무임승차한 가짜 공신들은 물론 불만 세력을 고변해 역모 사건을 조작한 소인배까지 겨냥했다. 이들은 나의 충성스러운 신하들이자 정권의 기반이었다. 조광조는 임금을 위태롭게 했다. 변덕스럽지만 제거하는 수밖에….

“궁궐 후원 나뭇잎에 달콤한 열매즙으로 ‘주초위왕(走肖爲王)’ 4자를 쓰고 산 벌레가 갉아먹게 했다. 조(趙)씨가 왕이 된다는 주술적인 예언 같았다. 희빈 홍씨가 이것을 따서 임금께 아뢰니 의혹이 커졌다.”(이긍익, [연려실기술] ‘중종조고사본말’)

세간에는 내가 후궁들의 요망한 참소에 빠져 조광조를 의심하고 죽였다는 설이 나돈다. ‘주초위왕’이라니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뭐 그렇게 생각해준다면 나로서는 나쁠 게 없다. 경빈과 희빈이 조광조를 헐뜯은 것도 사실이다. 인심이 조씨에게 돌아갔다는 둥, 조씨가 나라를 마음대로 한다는 둥, 종알거리기는 했다.

장경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내 후궁들도 야심을 갖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왕비 자리를 탐냈다. 그러나 사림이 반발하고 대비전에서 새 왕비 간택을 서두르며 무산됐다. 다음은 후계자 자리였다. 젖먹이 원자의 운명은 바람 앞의 촛불이었다. 후궁들은 제 자식을 세자에 앉히고자 유력한 공신들과 결탁했다. 궁중 암투가 본격적으로 막을 올린 것이다.

경빈 박씨는 원래 연산군이 모집한 여성 예인 ‘흥청(興淸)’에 속해 있었다. 1504년 폭군은 전국 방방곡곡 채홍사를 보내 미모와 재주가 뛰어난 여인들을 뽑았다. 상주의 몰락한 양반가 출신인 박씨는 ‘천하절색’이었다. 나도 형이 베푼 연회에서 슬쩍슬쩍 훔쳐보곤 했었는데 반정으로 국왕이 되고 나서 종2품 숙의 첩지를 내렸다.

신씨 부인이 궁에서 쫓겨난 뒤에 나는 이 후궁을 총애하며 상실감을 달랬다. 박씨는 1509년 복성군 이미를 낳고 정1품 빈(嬪)으로 승격했다. 복성군은 서출이지만 왕의 맏아들이다. 경빈 박씨를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졌다. 간교한 자들이 경빈의 환심을 사려고 때마다 선물을 보내 아부했다. ‘꾀주머니’ 심정은 이미의 후견인을 자처했다.

희빈 홍씨는금원군 이영과 봉성군 이완의 어미다. 아버지가 병조판서와 좌찬성을 지낸 훈구대신 홍경주라 거리낌 없이 처신했다. 그는 반정에 군대를 동원해 일등공신이 됐다. 희빈의 자식들은 외할아버지의 든든한 후원 덕분에 장래를 도모할 수 있었다. 여기에 당대 제일의 문장가 남곤이 붙었다. 문장 못지않게 모사(謀事)에도 능한 자였다.

경빈과 희빈이 임금의 궁첩(宮妾)이라면 남곤과 심정 같은 자들은 신첩(臣妾)이다. 그들은 해바라기처럼 국왕을 쳐다보며 후궁들을 통해 끊임없이 추파를 던졌다. 남보다 조금 더 높아지려고, 공명(功名)을 좀 더 쌓기 위해서 영혼의 무릎을 주저 없이 꿇었다. 나는 이 조건부 사랑을 이용하기로 했다. 조광조와 기묘 사림을 치는 데 앞장세운 것이다.

임금이 신하 제거하려고 도적 모의


▎영화 [간신]에서 연산군 역을 맡은 배우 김강우.
“임금이 신하를 제거하려고 다른 신하와 꾀하는 것은 도적의 모의에 가깝기는 하나, 간당(奸黨)이 이미 이뤄졌고 임금은 고립돼 제재하기 어려우니, 함께 도모해서 종사를 안정시키려 한다.”([중종실록] 1519년 12월 29일)

나는 이 밀지를 직접 써서 남곤과 심정 등에 전했고, 그들은 은밀히 동조자들을 모아 1519년 11월 14일 친위 정변을 일으켰다. 조광조와 그의 도당은 체포돼 목숨을 잃거나 유배를 떠났다. 영의정 정광필이 조광조를 감싸 즉결처분은 성사시키지 못했지만, 남곤을 이조판서에 임명해 간당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이른바 기묘사화다.

그럼 쓰고 난 궁첩과 신첩은 어떻게 처리할까? ‘작서(灼鼠)의 변’과 ‘물괴(物怪) 사건’에 내 속마음이 담겨 있다. 1527년 2월 25일 장경왕후 소생 세자 이호의 생일잔치가 동궁에서 열렸다. 1515년 을해년(乙亥年)생이므로 돼지띠 세자가 돼지해에 뜻깊은 생일을 맞은 것이다. 그런데 이날 시녀들이 동궁 밖 나뭇가지에 거꾸로 매달려 죽은 쥐를 발견했다. 이튿날 줄을 풀어 쥐를 살펴보니 꼬리와 사지가 잘렸고 눈·코·입은 불에 지져져 있었다. 그 형상이 돼지를 닮았고 매달린 위치도 동궁의 해방(亥方, 북북서)이라 세자에 대한 저주가 의심됐다.

대비전에서 쉬쉬하는 바람에 나는 이 사건을 3월 22일에야 보고받았다. 세자의 외조부 윤여필이 항의해 우의정 심정이 뒤늦게 입을 연 것이다. 세자 저주는 나라를 흔드는 중죄였기에 즉각 조사를 명했다. 그리고 한 달 후, 경빈 박씨를 폐서인한다는 전교를 내렸다. 사건 당시 경빈의 행적이 미심쩍고 이후 딸 혜순옹주의 하인들이 인형을 만들어 수상한 행동을 했다는 게 이유였다. 물증도, 목격자도 없지만 정황이 경빈을 가리켰다.

물론 경빈 박씨가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시녀와 하인들을 몽땅 끌고 와 6차례나 고문했다. 다 죽어가는데 한 명도 자백하지 않았다. 주인을 따르고 죄를 원통해 하는 마음이 갸륵했다. 또 세자만 없으면 복성군에게 대운이 오니 경빈에게 동기가 있다고들 하지만 그럼 궁인들이 오가는 곳에 저주물을 둘 까닭이 없지 않은가. 오히려 박씨에게 누명을 씌우려는 의도로 보였다. 허나 어찌하랴. 누군가 책임져야 하고 경빈이 유력한 것을….

그해 여름 경복궁에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갑사 한 명이 꿈에 가위눌려 기절했는데 동료들이 일어나 보살피고 있을 때 괴이한 짐승이 방에서 나와 달아났다. 생김새가 삽살개 같고 크기는 망아지 만한 것이었다([중종실록] 1527년 6월 17일). 궁인들은 ‘물괴(物怪)’라고 부르며 두려움에 떨었다. 나는 대비와 세자를 염려해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나뭇가지에 매달려 죽은 쥐, 세자 저주 의심


▎성종의 아들이자 조선 제11대 왕인 중종의 무덤(정릉). 정릉은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다. / 사진:문화재청
물괴는 궁궐에 팽배한 불안감의 현신일지도 모른다. 언젠가부터 음모를 꾸미고 거짓으로 고변하는 자들이 임금의 총애를 얻으며 득세했다. 남곤과 심정만 해도 1507년 의관 김공저와 서얼 박경을 무고해 공훈을 쌓았다. 이 사건에 연루돼 추궁당한 조광조는 훗날 소인배를 몰아내려 했지만 임금의 변덕에 최후를 맞았다. 음모와 무고가 판치는 정치, 이랬다저랬다 변덕스러운 왕이 사람들을 불안에 빠뜨리는 물괴다.

나는 잘못된 정치를 반성하면서 변덕에 편승해 권세를 부린 궁첩과 신첩을 정리하기로 했다. 남곤은 1527년 작서의 변이 불거지기 전에 죽었다. 심정은 작서의 변 당시 경빈에게 뇌물을 받은 죄로 1530년 파직하고 이듬해 사사(賜死)했다. 희빈 홍씨는 1521년 홍경주가 세상을 떠난 뒤로 조용히 살았다. 상주에서 유배 중이던 경빈 박씨는 1533년 동궁 근처에서 저주의 목패가 나왔을 때 사위 홍여의 소행으로 몰아 함께 죽였다.

다행히 세자 이호는 인품이 어질고 학문에 밝은 성군의 재목이었다. 내 아들이 공명정대한 정치로 아비의 실책을 만회하고 태평성대를 이룩하길 바랐다. 하지만 나는 중궁전에 웅크린 야망의 화신을 알아보지 못했다. 계비 윤씨는 1517년 17세의 나이로 궁에 들어와 얌전히 세자를 돌봤다. 딸 넷을 낳은 끝에 1534년 경원대군을 본 계비는 단숨에 궁중 암투의 주도권을 잡았다. 바야흐로 문정왕후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었다.

※ 권경률 - 역사 칼럼니스트, 작가. 서강대에서 역사를 공부했다. 사람을 읽고 생각하고 쓰면서 역사의 행간을 채워나간다. 팟캐스트·유튜브·페이스북에 ‘역사채널권경률’을 열어 독자들과 역사하는 재미를 나누고 있다. [시작은 모두 사랑이었다](2019) [조선을 새롭게 하라](2017) [조선을 만든 위험한 말들](2015) 등을 썼다.

202107호 (2021.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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