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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정신의 미학(64)] 퇴계와 남명 학문 아우른 한강(寒岡) 정구 

갈라진 유학 회통(會通), 실학 태동 길을 열다 

김굉필 도학 이어받아 낙동강 좌우 연결하고 기호학파 포용
정인홍과 갈등으로 은둔하며 후학 양성, 문인 300여 명 배출


▎후손들이 한강 정구를 모신 회연서원 강당 앞에서 선생을 회고하고 있다. 왼쪽부터 정재엽·정청용·정우락·정구용 씨. / 사진:송의호
"이황은 온화하고 인정이 두터우며 실천이 독실합니다. 공부는 매우 숙련되어 그 단계가 분명하므로 배우는 자가 그 길을 쉽게 찾아 들어갈 수 있습니다. 반면 조식은 엄정하고 재기가 호탕합니다. 학문은 스스로 도를 깨달아 우뚝 서서 혼자 나아가므로 배우는 자가 그 요체를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1579년 선조는 한 선비에게 창녕 현감 벼슬을 내린다. 그리고 그가 스승으로 모셨던 대학자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의 기상과 학문이 어떠냐고 묻는다. 순간 선비는 임금 앞에 두 스승의 특성을 조심스레 비교한다.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 선생이다. 두 스승이 세상을 떠난 뒤다.

한강을 말할 때 퇴계와 남명과의 만남은 빼놓을 수 없는 대목이다. 한강이 도산서당으로 퇴계를 처음 찾은 것은 1563년, 그의 나이 21세 때다. 63세 퇴계는 이미 조야에 명성이 자자했다. 청년과 원로의 만남이다. 한강은 그 자리에서 자신이 미처 깨닫지 못한 학문의 방법과 목적 등을 터득한다. 문집인 [한강집]은 그날을 이렇게 정리했다. “계해년 봄 선생이 퇴계 선생을 뵙고 의심나는 곳을 질문했는데, 이 선생께서 성인의 문하에서 학문하는 순서와 방법을 말씀하셨다. 이에 비로소 지난날 향하는 바가 정해지지 않았음을 깨닫고 마음속으로 채찍질함에 규모가 확대되고 사업이 날로 커졌다.”

1566년 한강은 이번에는 남명을 찾아간다. 이때 남명은 “사군자(士君子)의 큰 절개는 오직 출처(出處)를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는데, 너는 출처를 약간 알고 있으니 나는 마음속으로 너를 인정한다”고 했다. 한강을 제자로 받아들인 것이다. 한강은 이렇게 당대 조선을 대표하는 대학자를 한꺼번에 스승으로 모셨다. 그러나 두 스승은 삶의 방식이나 학문적 지향이 확연히 달랐다. 5월 19일 한강 선생의 자취를 찾아 고향인 경북 성주를 찾았다. 먼저 들른 곳은 선생이 태어난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 유촌이다. 생가 자리에 들어선 유동서당(柳東書堂)에서 후손인 정재엽과 정청용 그리고 경북대 정우락 교수를 만났다.

한강 정구는 10세에 [대학]과 [논어]를 읽고 대체적인 뜻을 알았다고 한다. 또 12세엔 공자의 초상화를 모사한 뒤 벽에 걸어두고 매일 절하는 등 일찍이 학문에 큰 뜻을 두었다. 13세엔 덕계 오건에게 나아가 가르침을 받았다. 한강의 첫 스승이다. 그 무렵 성주목사는 퇴계가 아끼던 제자 황준량이었다. 그는 성주목사에 부임한 뒤 고을 자제를 뽑아 그 교육을 오건에게 맡겼다. 오건은 남명의 제자였다. 오건은 황준량을 만나면서 다시 퇴계를 찾아가 제자가 된다. 오건과 황준량의 이러한 관계가 정구에게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김굉필의 진외증손, 어릴 때부터 도학 공부


퇴계를 찾은 이듬해 정구는 과거를 보러 상경했다가 느낀 바 있어 과장(科場)에 들지 않고 귀향했다. 그길로 과거를 포기하고 오직 구도(求道) 일념으로 학문에 정진한다. 유동 서당 앞에는 ‘한강 정선생 태지(胎地)’라 새겨진 오래된 바윗돌이 있었다. 정재엽 전 경북청년유도회장은 “이곳에 생가 복원을 추진 중”이라고 설명했다. 정구는 퇴계·남명 이전에 한훤당 김굉필과 혈연으로 이어진다. 정구의 조부 정응상은 김굉필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그의 사위가 됐다. 정응상의 아들 정사중은 어머니를 모시고 서울에서 한훤당의 고향 현풍으로 내려왔고, 성주 이씨와 혼인하면서 성주 유촌에 자리잡게 된 것이다. 관계를 따지면 정구는 김굉필의 외증손이 아닌 진외증손이다. 이러한 인연으로 정구는 일찌감치 김굉필의 도학을 물려받는다.

유촌을 떠나 남서쪽으로 10㎞쯤 떨어진 성주군 수륜면 수성리 한강종택으로 이동했다. 종택으로 이어지는 도로명은 ‘한강길’이다. 창평산 자락에 들어선 종택은 1800년대에 지었다는 작은 사랑채와 안채로 단출했다. 종손은 외국에 나가 있고, 어머니가 종가를 지키고 있었다. 사랑채 오른쪽으로 높은 위치에 사당이 있었다. 지난해는 선생 서거 400주년이었다. 코로나로 행사는 축소됐다. 대유행 직전 다행히 종택 사당에서 제사를 올렸는데 타 문중 등 제관 70여 명이 모여 선생을 기렸다고 한다.

일대는 지명이 갖말이다. 선생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창평산에 선영(先塋)을 마련한 뒤 1573년(선조 6) 서쪽 기슭에 한강정사(寒岡精舍)를 세워 독서하고 글을 가르친 곳이다. 정사에 붙인 이름 ‘한강’은 이후 선생의 호가 된다. 정 교수가 그 뜻을 설명했다. ‘한(寒)’에는 절의를 뜻하는 ‘세한(歲寒)’의 ‘한’과 주자(朱子)가 지은 ‘한천정사(寒泉精舍)’의 ‘한’을 동시에 취했다는 것이다. 또 ‘강(岡)’은 절벽을 가리킨다. 정사의 정신과 모습이 담긴 이름이다. 갖말 앞으로 멀리 가야산이 보였다.

“퇴계 이후 영남의 최대 학파”


▎회연서원 숭모각의 내부. 한강 정구의 초상화와 교지 등이 보인다. / 사진:송의호
한강종택을 나와 남쪽으로 1㎞쯤 떨어진 회연서원(檜淵書院)에 닿았다. 선생의 위패가 주향으로 모셔진 서원이다. 문루인 현도루(見道樓)를 지나 경내로 들어서자 서원은 신록에 쌓여 고즈넉했다. 누군가는 일대를 ‘천개승지(天開勝地, 하늘이 연 경관)’로 표현하고, 겸재 정선은 회연서원도를 남겼다. 서원은 한강이 41세에 지은 회연초당이 있던 자리다. ‘회연서원’ 편액이 걸린 강당은 이름이 경회당(景晦堂)이다. ‘회연’의 ‘회(檜)’는 공자가 손수 심은 나무를 상징하고, ‘경회’의 ‘회(晦)’는 호가 회암인 주자를 가리킨다. 공자와 주자의 연원을 잇는 서원이란 뜻이다. 주자는 조선 선비들이 닮고 싶은 이상이었다. 경회당은 대원군이 회연서원을 훼철할 때도 용케 보존됐다.

퇴계는 주자의 학문을 잇는다. 한강은 퇴계에다 남명까지 두 스승의 학문을 발전적으로 계승한다. [국역 한강집]의 해제를 쓴 고 이우성은 “선생은 출처·의리 등 남명적 체질 위에 학문 태도나 수양 방법에서 퇴계적 함양을 가했다”며 “후일 선생이 퇴계학의 탁월한 계승자가 된 이유”라고 정리한다. 한강이 선조 앞에 두 스승의 차별점을 밝힌 그대로다. 경상 좌·우도의 학문적 소통이다.

퇴계의 ‘경(敬)’ 사상은 남송(南宋)의 [심경(心經)]과 이어진다. 한강은 퇴계의 권유로 [심경]을 천착했다. 이를 토대로 1603년(선조 36) [심경발휘(心經發揮)]를 저술한다. 그의 또 다른 관심은 예설이었다. 퇴계는 당대 최고의 예학자였고 한강은 그것을 계승하려 했다. 그 결실이 1629년(인조 7) 정이와 정호, 사마광·장재·주희 등 다섯 선생의 예설을 모아 펴낸 [오선생예설(五先生禮說)]이다. 서원 강당에는 편액 ‘경회당’ 왼편에 그림 같은 전서체 글씨가 걸려 있다. ‘望雲庵(망운암)’ 이다. 전서체의 대가 미수 허목의 글씨다. 허목의 [미수기언]에는 성주 회연서원 유생의 요청으로 1681년(숙종 7) 망운암 액자를 썼다는 기록이 나온다. 한강은 1605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회연초당을 복설한 뒤 초당 동쪽에 작은 초가 망운암을 지었다고 한다.

한강은 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회연급문록(檜淵及門錄)]에는 문인 300여 명의 이름이 나온다. 퇴계 이후 영남의 최대 학파라 할 수 있다. 이윤우·최항경·장현광·허목 등이 고제(高弟)다. 이 중 이윤우는 회연서원에 종향돼 있고, 장현광은 한강의 조카사위다. 허목은 경기 연천 출신이다. 1617년 부친이 거창 현감에 임명되자 부친을 따라와 인근의 한강을 스승으로 모셨다. 허목은 이후 한강의 실사구시적 경향을 이익에게 전한다. 안정복·정약용 등은 이익의 학문을 다시 경세치용으로 꽃피운다. 한강과 허목이 근기남인(近畿南人, 서울·경기 지역 남인)·실학파와 닿아 있는 연유다. 근기남인은 조선 후기 실학의 주류를 형성한다.

62세에 관직 내려놓고 낙향해 저술에 집중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된 [오선생예설] 목판. / 사진:한국국학진흥원
한강은 기호학파와도 소통했다. 율곡 이이는 1583년(선조 16) 비변사를 통해 한강을 천거한 적이 있다. 또 율곡의 동생 이우와는 편지를 주고받은 사이였다. 한강은 창녕 현감으로 1년 반을 지낸 뒤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다. 그는 이 무렵 회연 옆에 초당을 마련하고 매화 100그루를 심어 ‘백매원(百梅園)’으로 이름 지었다. 그리고는 1583년(선조 16) 봄 서화로 이름을 얻은 이우에게 산수(山水) 그림을 그려 달라고 편지를 보낸다.

강당 경회당 앞에는 동재와 서재가 있다. 동재는 ‘명의재(明義齋)’, 서재는 ‘지경재(持敬齋)’라는 당호가 걸려 있다. ‘의’를 밝히고 ‘경’을 지니는 집이라는 뜻이다. 정 교수는 거기서 동행한 문중 어른들에게 “고증이 잘못돼 동서재의 이름이 바뀌었다”며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들 당호는 본래 선생이 만년을 보낸 대구 사양정사(泗陽精舍)에 딸린 집의 이름이었다. 성주 유림이 회연서원을 건립하면서 그 이름을 옮겨 온 것이다.

한강은 창녕 현감 이후 여러 관직을 거치지만 얼마 되지 않아 사직하는 일을 반복했다. 그러면서도 임진왜란 시기엔 통천군수, 동부승지 등 내·외직을 두루 거치며 나라 위해 관직 생활에 치중한다. 1596년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해서는 산성을 수축하는 등 유사시 백성들의 대피 장소로 이용하게 했다. 그는 전쟁으로 멍든 백성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다시 일어설 힘을 북돋웠다. 특히 가는 곳마다 읍지를 편찬해 고을 백성이 지역에 자긍심을 지니도록 했다. [창산지(昌山志)] [함주지(咸州志)] [통천지(通川志)] [관동지(關東志)] 등이 그것이다. 한강이 열정을 쏟은 심학과 예학에 이은 3대 학문 축인 지역학의 성과들이다.

한강은 30대 한강정사 시기를 거쳐 회연초당에서 40~50대에 후학을 양성한다. 그러다가 1604년 그의 나이 62세에 관직을 내려놓고 성주 수륜면 대가천 계곡으로 들어간다. 한강은 대가천 계곡을 ‘무흘’이라 이름 짓고 그곳에 무흘정사를 지은 뒤 8년간 은둔하며 저술에 힘쓴다. 무슨 까닭일까. 우선은 주자를 닮고 싶었다. 주자의 ‘무이구곡’을 본 따 ‘무흘구곡’을 노래하고 ‘무이지’를 지었다. 그 이유가 전부는 아니었다. 그 무렵 남명의 제자 정인홍은 광해군을 등에 업고 북인(北人)의 전면에 나서고 있었다. 권력을 장악한 정인홍은 스승 조식의 문집 [남명집]을 편찬하면서 이언적과 이황의 학문을 폄훼했다. 또 정구를 향해 스승이 이황이냐 조식이냐, 즉 퇴계학파인지 남명학파인지 정체성을 밝히라고 요구했다. 정구가 일찍이 두 스승을 모신 게 짐이 된 것이다. 정구는 결국 정인홍과 절교를 선언했다. 그러나 한강은 이후에도 남명의 문인으로 도리를 다한다.

정구는 예학으로 성리학적 이념을 현실정치에 적용하려 했다. 그 실험이 벽에 부닥치자 은둔한다. 회연서원을 나와 대가천을 따라 무흘구곡을 답사할 때 정 교수는 “저 산을 넘으면 바로 합천”이라고 설명했다. 한강은 정인홍이 사는 합천과 가까운 곳에 더는 있고 싶지 않았다. 1612년(광해 4) 한강은 8년을 보낸 무흘을 떠나 팔거현 노곡(蘆谷)으로 거처를 옮긴다. 지금의 칠곡군이다. 정인홍과의 절교에다 박이립의 모함으로 관아에 나가 상소하고 대죄하면서 고향 성주는 더 이상 지내기 거북한 곳이 됐다. 그러나 옮겨간 노곡에서도 오래 머물 수 없었다. 1614년 하인의 실수로 노곡정사에 큰불이 났다. 선생이 그동안 저술하고 편찬한 방대한 서책은 졸지에 잿더미가 됐다. 그는 “하늘이 나를 버린다”며 한탄했다. 한강의 저작이 성리학·예학·역사·전기·지리·의학·문학 등에 걸쳐 이름만 전하는 게 많은 까닭이다. 그러나 남은 것만으로도 그의 저술은 퇴계·남명학파 중 앞자리란 평가를 듣는다. 이름만 남은 책 중에 [광사속집(廣嗣續集)] 이란 게 있다. 임진왜란 이후 인구가 급격히 줄면서 아이를 낳아 대를 잇는 방법을 쓴 실사구시 저술이다.

생애 마지막 6년, 대구에 문풍(文風) 일으키다


▎‘한강 정선생 태지(胎地)’ 바윗돌이 있는 유동서당 주변 모습. / 사진:송의호
한강은 화재를 당한 이후 노곡 동쪽으로 수십 리 떨어진 사수(泗水)로 다시 거처를 옮겼다. 한강이 생애 마지막 6년을 보낸 지금의 대구 북구 사수동이다. 그 자리엔 ‘한강 근린공원’이 조성돼 있다. 한강은 그곳에 사양정사(泗陽精舍)를 짓고, 불타 버린 저술을 복원하는데 우선 매달렸다. 가장 애착을 보인 것이 [오선생예설]이다. 한강은 중풍으로 몸이 마비되고 있었지만, 힘들게 구술하면 제자들은 받아 적었다.

한강은 대구에서 서사원·손처눌 등 제자를 배출한다. 대구에 문풍(文風)이 일어난다. 가르침에 목말랐던 대구 사람들은 손자까지 업고 와 선생의 문하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요청할 정도였다. 한강이 제자로 받아주기만 하면 퇴계로 학맥이 이어지고 다시 주자를 거쳐 공자에까지 닿는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조선 초기만 해도 대구는 문과 급제자가 거의 나오지 않는 인재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그런 지역 분위기를 한강이 바꿔나간 것이다.

회통(會通)이란 말이 있다. 언뜻 보기엔 서로 어긋나는 뜻이나 주장을 해석해 조화롭게 한다는 뜻이다. 한강은 기호·영남 상하와 낙동강 좌우를 아우른 회통의 성리학자였다. 좌우 회통은 성리학의 폭과 깊이를 더했고, 기호와의 회통은 후일 실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싹틔우는 밑거름이 됐다.

[박스기사] 한강의 자연애호 사상 담긴 무흘구곡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되는 구곡문화

한강 정구의 흔적을 더듬으면서 무흘구곡 전 구간을 둘러봤다. 구곡문화를 연구한 정우락 교수가 앞장을 섰다. 시원(始原)은 주자(朱子)가 설정한 무이구곡이라고 한다. 선비들이 자연 속에서 심신을 수양하는 문화다. 정 교수는 제1곡 봉비암이 있는 회연서원을 나서면서 한국의 구곡문화를 소개했다. 우리나라에는 구곡이 163곳 설정돼 있다고 한다. 구곡을 노래한 시는 1000수가 넘는다. 그 중 무흘구곡은 전체 길이 35.8㎞로 세계 최장이다.

한강은 62세인 1604년(선조 37) 관직을 내려놓고 성주 수륜면 대가천 계곡으로 들어간다. 그는 대가천 계곡을 ‘무흘’이라 이름 짓고 무흘정사를 지어 1612년까지 8년간 자연과 어우러졌다. 무흘정사에는 수많은 서책을 간직한 장서각 서운암을 뒀다. 산중도서관이다. 주자 관련 책만 1000여 권이 있었다. 성섭은 서운암을 보고 그 진귀함을 “페르시아 보물 가게에 온 듯하다”고 비유했다. 한강은 또 ‘무흘구곡’을 짓는다. 가야산에서 발원한 대가천을 따라 생긴 아홉 굽이 절경은 7언 절구 시가 됐다.

제4곡 입암은 이렇다.

넷째 굽이라 백 척 바위에 구름 걷히니/바위 위 화초는 댓바람에 머릿결 날리고/이 가운데 싱그럽기 이 같음을 뉘 알꼬/저 하늘 달 그림자 못 속에 떨어졌네

한강이 구곡을 내다본 안목은 400년이 지나면서 그 가치를 더해 가고 있었다. 제5곡 사인암에 이르렀다. 여기서 행정구역은 성주군 금수면에서 김천시 증산면으로 바뀐다. 무흘구곡은 2개 시군에 걸쳐져 있었다. 김천으로 들어가 마지막 9곡 용추가 나왔다. 그 계곡에 있을 것 같지 않은 웅장한 폭포였다. 거기까지 쉬엄쉬엄 2시간이 걸렸다. 무흘구곡이 장장 60리를 거슬러 올라간 까닭을 알 것만 같았다.

한강이 세상을 떠나자 후세 사람들은 무흘구곡을 정립한 뒤 바위에 곡명을 새겼다. 1784년(정조 8) 무흘구곡은 실경산수화로 그려졌다. 정 교수는 구곡문화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 일을 준비하고 있다.

-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202107호 (2021.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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