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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의 근·현대 건국운동사 | 근·현대 건국 담론(8)] 매국조직으로 변질된 통합 일진회 갈라치기 

손병희, 동학을 근대종교 천도교로 개혁 

국내 동학조직 친일 행보로 지탄받자, 망명생활 접고 특단의 대책
교주 견제할 의회 두고 여성 지도자 허용… 민족종교로 교세 급팽창


▎손병희는 이용구의 결정에 따라 동학이 매국조직으로 변질되자 교인을 수습하고 재조직하기 위해 천도교 이름을 바꾸고 개혁을 단행한다.
1905년 11월 한 달은 고종황제나 손병희에게 충격과 공포의 한 달이었다. 1905년 11월 5일, 통합 일진회가 ‘보호청원선언서’를 발표함으로써 손병희의 동학은 매국조직으로 지탄받게 됐다. 또한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됨으로써 고종황제는 망국군주가 될 위기에 처했다.

이 같은 충격과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종황제나 손병희는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일본에 망명 중이던 동학교주 손병희는 타개책을 구상했다. 첫째는 동학을 근대종교인 천도교로 개혁하는 것이었고, 둘째는 고종황제와 협상을 벌여 천도교를 합법화 하는 것이었다. 이 같은 특단의 대책들은 역설적으로 통합 일진회 때문에 가능했다. 1905년 11월 5일, ‘보호청원선언서’를 발표한 통합 일진회는 민권향상을 명분으로 고종황제의 권력을 더더욱 약화시키려 들었다. 당연히 고종황제는 통합 일진회에 분개했다. 손병희 역시 마찬가지였다.

손병희는 이용구를 일본으로 불러 ‘보호청원선언서’의 뜻을 물었다. 그러자 이용구는 “대한으로 하여금 일본의 보호를 받아서 완전 독립을 하고자 하는 시의(時宜)에서 나온 것”이라 대답했다. 그때 손병희는 “보호를 받고자 하면 독립을 버려야 하고, 독립을 하고자 하면 보호를 버려야 하니, 어찌 보호라는 이름 아래 독립을 하고자 하느냐?”라고만 하고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대신 마음속으로 ‘교도의 수습과 재조직을 결심’했다고 한다. 이용구가 장악하고 있는 국내 동학조직을 수습하기 위한 특단의 대책을 결심했다는 의미라 할 수 있다.

당시 손병희가 구상한 특단의 대책은 우선 동학을 근대종교인 천도교로 개혁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1905년 12월 1일 [대한매일신보]와 [제국신문]의 광고를 통해 세상에 공개됐다. 손병희는 ‘보호청원선언서’가 발표된 직후 이용구를 불러 만났으므로 11월 중순이나 하순쯤 만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손병희는 이용구를 만난 직후 통합 일진회와 결별하기 위해 동학을 천도교로 개혁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 당시 천도교 대도주(大道主) 손병희 명의로 실린 광고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최제우의 ‘천도(天道)’에 ‘교(敎)’ 한 글자 추가


▎지방교구와 중앙조직에 각각 의회(議會)를 두어 교주의 전횡을 견제했다는 점에서 천도교는 근대 종교라 평가할 수 있다. 사진은 천도교 경전.
“무릇 오교(五敎)는 천도(天道)의 대원(大原)이기에 천도교라 한다. 천도교가 창도된 지 이제 46년이다. 신봉(信奉)하는 사람이 이처럼 넓고, 이처럼 많은데 교당(敎堂)을 아직 건축하지 못해 그 유감이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이제 인문(人文)이 천명(闡明)하여, 각 종교를 자유로이 신앙하는 것이 만국의 공례(公例)이고, 그 교당을 자유로이 건축하는 것 또한 성례(成例)이다. 그러므로 우리 천도교의 회당을 크게 건립하는 것 또한 하늘에 순응하고 인심에 따르는 일대 표준이다. 바라건대 우리 동포 제군(諸君)은 잘 양해하길 바란다. 교회당 건축 착공은 내년 2월부터 시작할 것이다. 천도교 대도주 손병희.”

위에서 ‘천도교가 창도된 지 이제 46년’이라 한 언급은 1860년 수운 최제우에 의해 창도된 동학을 이제부터 천도교로 바꾼다는 의미이다. 손병희는 최제우가 논학문(論學文)에서 “내가 동에서 태어나고 동에서 받았으니, 도(道)는 비록 천도(天道)라 해도, 학(學)은 즉 동학(東學)이다.”라고 한 언급을 근거로 기왕의 동학을 새로이 천도교(天道敎)로 바꾸었다. 즉 ‘천도교’란 최제우의 ‘천도(天道)’에 손병희가 ‘교(敎)’라는 글자 하나를 추가해 만든 용어였다. 손병희가 ‘천도’에 ‘교’ 자를 추가한 이유는 “이제 인문이 천명하여, 각 종교를 자유로이 신앙하는 것이 만국의 공례이고”에 함축돼 있다. 손병희는 천도교를 근대종교로 개혁함으로써 종교 자유를 획득하고자 천도교라고 개명했던 것이다.

손병희는 동학을 천도교로 개혁하면 종교자유를 획득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 듯하다. 우선 당시 서구 선진 국가에서 종교자유는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 이상으로 고종황제 설득에 유리할 것이란 판단에서다. 당시 고종황제는 통합 일진회를 제압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통합 일진회의 주력이 동학이고, 또 통합 일진회 배후에 일본 군부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손병희가 실제 동학 주력은 이용구가 아니라 손병희 자신이고,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동학 주력은 천도교로 개혁해 종교 활동에만 주력하겠다고 한다면 고종황제는 반대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었다. 그 이유는 손병희를 중심으로 하는 동학 주력이 천도교로 개혁해 통합 일진회에서 빠진다면 통합 일진회는 그만큼 약화될 것이고, 또 천도교는 더 이상 정치활동을 하지 않을 것이므로 대한제국에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손병희는 이런 판단에서 일단 1905년 12월 1일 천도교를 세상에 광고했다고 이해된다. 신문에 천도교가 광고되면서 대한제국 정부 당국자들 역시 손병희의 정체를 알게 됐고, 그들은 손병희와 천도교를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했을 것 역시 분명하다.

한편 손병희는 천도교를 세상에 광고하는 동시에 개화파 망명객들을 측근으로 포섭해 천도교 개혁을 추진하고자 했다. 개화파 망명객들은 조선을 개혁하려던 당대 최고의 개혁가들이기에 천도교를 근대종교로 개혁하기 위해서는 이들의 식견이 필요했다. 동학 자료에 의하면 “그날 일본신문은 지금 이상헌은 예전의 손병희라고 크게 게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손병희가 국내의 [대한매일신보]와 [제국신문]에 천도교를 광고하자, 일본 신문에도 손병희 기사가 크게 실렸다는 의미라고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동학 자료에는 “이때에 권동진·오세창·양한묵 등이 손병희에게 ‘동학이 천도교로 현도(顯道) 되고, 교주는 손병희라고 했는데, 손병희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때 손병희는 ‘바로 이 자리에 있지 않소?’라고 대답하자 이 말을 들은 권동진·오세창·양한묵 세 사람은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다시 ‘이 자리에 누가 있습니까? 선생님은 이상헌씨라고 하시면서…’라고 말했다. 그러자 손병희는 ‘사람의 이름은 사람이 짓는 것인데 때를 따라 이렇게도 짓고 저렇게도 지을 수 있지 않소. 사실은 내 본명이 손병희였소’라고 대답하니 세 사람은 옷깃을 여미고 큰 절을 한 후에 곧 입교식을 지내고 제자가 될 것을 맹세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런 기록으로 본다면 그동안 손병희는 망명 개화파 인사들과 천도교의 이상헌이라는 이름으로 교류하다가 이날에야 자신의 정체를 완전히 밝혔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을 천도교 교도로 받아들여 측근으로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세 사람은 옷깃을 여미고 큰 절을 한 후에 곧 입교식을 지내고 제자가 될 것을 맹세하였다”는 기록은 그날부터 권동진·오세창·양한묵 세 사람이 손병희의 제자가 되었음을 알려준다.

개화파 망명객 측근으로 영입해 조직 개혁


▎천도교’란 명칭은 최제우의 ‘천도(天道)’에 손병희가 ‘교(敎)’라는 글자 하나를 추가해 만들었다. 사진은 구 천도교 중앙총부.
손병희는 이들 세 사람에게 [천도교대헌(天道敎大憲)]을 편찬하게 했다. 권동진·오세창·양한묵 세 사람이 [천도교대헌]을 편찬하기 전까지는 개화파 망명객으로서 손병희와 협력관계에 불과했었다. 하지만 천도교에 입교하고 손병희 제자가 되면서, 그들은 개화파 망명객이 아니라 손병희의 핵심 측근으로서 천도교의 주요 실세가 되었다. 그들이 편찬한[천도교대헌]은 근대종교인 천도교의 헌법과 같은 책으로서, 천도교의 이념과 조직, 활동 전반을 규정하고 있다. 이렇게 1906년 12월 초부터 권동진·오세창·양한묵 등이 편찬하기 시작한 [천도교대헌]은 손병희가 귀국한 뒤인 1906년 2월 10일 반포됐다. 천도교가 근대종교로 평가되는 이유는 [천도교대헌]이라는 명문법으로 천도교가 조직되고 또 운영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천도교대헌]에 의하면 천도교는 크게 교주, 중앙조직, 지방조직으로 구성되었다. 교주는 대도주(大道主)로 불렸고, 중앙조직은 ‘중앙총부(中央總部), 지방조직은 교구(敎區)로 불렸다. 중앙총부에는 교리를 담당하는 현기사(玄機司), 교육을 담당하는 이문관(理文觀), 사법을 담당하는 전제관(典制觀), 재정을 담당하는 금융관(金融觀), 서무를 담당하는 서응관(庶應觀) 등 1사(司) 4관(觀)이 배속되었다. 지방 조직의 교구는 교인 10만명 이상의 대교구, 2만명 이상의 중교구 그리고 4000명 이상의 소교구로 구분됐다.

지방교구 책임자 ‘여성’도 가능하도록 교리 규정


▎손병희가 천도교 교구를 통폐합한 1906년 12월, 천도교 교인은 200만명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은 천도교 신도들.
그런데 [천도교대헌]에서 눈에 띄는 사실은 교주인 대도주의 권한이 아주 강력하다는 점이다. 우선 대도주는 ‘천(天)의 영감(靈感)으로 계승함’이라고 규정했는데, 이는 교주가 후임 교주를 임명한다는 의미였다. 아울러 교주는 교리 선포권, 명령권, 임명권 등 다양한 권한을 행사했다. [천도교대헌]은 특이하게 원직(原職)과 주직(住職)이라는 직위를 뒀는데, 원직은 양반관료제의 품계와 같은 역할을 하고, 주직은 관직과 같은 역할을 했다. 아마도 [천도교대헌]을 편찬한 권동진·오세창·양한묵 등이 양반관료 출신이라 원직과 주직이 들어가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원직은 양반의 품계가 당상관, 참상관, 참하관의 3단계로 구분되듯이 천선(天選), 도선(道選), 교선(敎選)의 세 종류로 구분됐다. 천선(天選)에는 성도사(誠道師), 경도사(敬道師), 신도사(信道師), 법도사(法道師) 및 대교구의 대교령(大敎領)이 포함됐다. 도선(道選)에는 교장(敎長), 교수(敎授), 대도집(大都執), 종집강(宗執綱), 대정(大正), 중정(中正) 등의 6인으로 구성됐다. 마지막으로 교선(敎選)에는 대교구의 대교령, 중교구의 중교령 그리고 소교구의 소교령이 포함됐다. 이 천선(天選), 도선(道選), 교선(敎選)의 원직 중에서 중앙조직의 간부와 직원은 천선과 도선 중에서 교주가 임명하도록 규정했다. 다시 말해 교주가 천도교의 중앙조직인 1사 4관의 간부와 직원들의 임명권을 장악했다는 의미다.

이런 면에서 천도교 교주는 마치 당상관 이상의 임명권을 장악한 조선의 왕과 같은 존재였다. 게다가 조선시대 왕의 정당성은 ‘천명(天命)’으로 정당화됐는데, 천도교 교주의 정당성 역시 ‘천(天)의 영감(靈感)으로 계승함’이라는 규정에서 보듯 ‘천(天)’에 의해 정당화되었다는 점에서도 조선의 왕과 같은 절대 권력을 가진 존재였다. 다만 [천도교대헌]에는 지방교구와 중앙조직에 각각 의회(議會)를 두어 교주의 전횡을 견제했다는 점에서 천도교가 근대 종교라 평가될 수 있다.

한편 [천도교대헌]에서 눈에 띄는 사실은 부인교령(婦人敎領)을 두었다는 사실이다. [천도교대헌]에서 지방교구인 대교구, 중교구, 소교구는 임명제가 아니라 자립제로 규정됐다. 즉 교인 중 누군가가 10만명 이상의 교인을 모으면 대교구가 되고 본인이 대교령(大敎領)이 되며, 2만명 이상을 모으면 중교구가 되고 본인이 중교령(中敎領)이 되고, 4000명 이상을 모으면 소교구가 되고 소교령(小敎領)이 되는데, 만약 부인이 10만명 이상을 모으면 대교령, 2만명 이상을 모으면 중교령 그리고 4000명 이상을 모으면 소교령이 되도록 했던 것이다. 이 규정은 현재 상황에서도 아주 선진적인 규정이라 할 수 있다. 세계의 주요 종교에서는 지금도 종교지도자가 남성이고 여성은 지도자가 될 수 없는 것이 현실인데, 1905년 단계에서 지방교구의 교령을 부인이 맡도록 규정했다는 사실은 획기적이라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아울러 [천도교대헌]에서 중요한 규정은 민회(民會)에 참여할 때는 천도교 지도부의 승인을 받아야만 한다는 규정이었다. 물론 이 규정은 통합 일진회를 겨냥한 규정이었다. 이 규정대로 한다면 통합 일진회에 참여한 동학교도들은 모두가 손병희의 승인을 받아야만 했다. 그런데 장차 새로운 천도교는 종교 활동에 주력할 것임을 천명한 손병희가 통합 일진회에 참여한 동학교도들을 그대로 승인할 리는 만무했다. 그러므로 [천도교대헌]은 교주 손병희에게 교권을 집중시킴으로써 통합 일진회에 참여한 동학교도들을 제압하려는 목적에서 편찬되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고종황제와 천도교 합법화 담판


▎손병희는 통합일진회의 세력 약화를 원하는 고종황제의 의중을 파악하고 천도교의 합법화가 가능할 것으로 내다봤다. 사진은 충북 청원군에 위치한 의암 손병희 선생의 생가.
손병희는 12월 1일 최초로 천도교를 광고한 다음, 12월 19일까지 총 16차례에 걸쳐 같은 신문에 같은 광고를 계속했다. 그동안 손병희는 암중으로 고종황제와 천도교 합법화를 놓고 협상했다. 협상 역시 권동진·오세창·양한묵 등이 주도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들은 고종황제의 큰아들 의친왕 이강, 철종의 부마 박영효 등과 연결됐고, 그 의친왕 이강과 박영효 등을 통해 고종황제와 협상했을 것으로 이해된다. 당시 권동진·오세창·양한묵 등과 고종황제가 어떻게 협상했는지는 구체적인 자료가 없어 확인할 수 없다. 다만 “고종황제는 일진회의 자행을 미워하여, 사람을 시켜 일진회의 오세창, 권동진, 최강(崔岡) 등을 유인하여 돈을 많이 주면서 일진회에서 탈퇴하게 하고 드디어 그들이 일진회를 해산시키니 총애하여 벼슬을 주었다. 오세창 등이 손병희와 도모하니, 손병희가 기뻐하여 그 무리로 하여금 일진회에서 탈퇴하게 하였다”는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의 융희 4년(1910) 7월 기사는 고종황제와 손병희 사이에 일진회 해산을 두고 협상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또한 대한매일신보 1906년 1월 5일자 기사에 “천도교주 손병희씨가 유람 외국이 지금 10여년에 오는 2월 초순 내로 환국을 예정이라더라”는 내용이 실린 것을 통해, 그 즈음 고종황제와 손병희 사이에 협상이 마무리됐음을 추정할 수 있다. 천도교주 손병희가 조만간 귀국한다는 사실이 신문에 실렸다는 것은, 손병희의 귀국이 허락됐음을 의미함과 동시에 천도교 역시 합법화됐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손병희는 혼자 귀국하는 것이 아니었다. 권동진, 오세창과 동반 귀국하였다. 본래 권동진은 1895년의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연루돼 일본으로 망명한 대역 죄인이었으며, 오세창은 1902년 유길준이 일본 유학생들과 의친왕 이강을 옹립하려던 사건에 연루된 대역 죄인이었다. 따라서 손병희를 비롯하여 권동진이나 오세창은 고종황제의 허락이 없으면 합법적으로 귀국할 수 없었다. 아마도 고종황제는 천도교를 합법화함으로써 통합 일진회를 견제하고 천도교 또한 우호세력으로 만들겠다는 심산에서 천도교를 합법화했을 것으로 이해된다. 고종황제는 귀국하는 손병희를 위해 청계천 수표교 주변의 민영철(閔泳喆) 가옥을 하사했다. 이런 사실로 보면 고종황제와 손병희 사이의 협상은 아주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906년 1월 22일 아침에 손병희는 권동진, 오세창 등과 함께 오사카 역에서 열차를 타고 귀국길에 올랐다. 일본으로 온 1901년부터 어언 5년만이었다. 일본에 올 때 41살이던 손병희는 어느덧 46살이 됐다. 일본 정보당국의 보고에 의하면, 오사카 역을 출발한 손병희 일행은 오전 10시 고베 역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내린 손병희는 박영효를 방문해 몇 시간을 담화한 후, 오후 6시 45분에 다시 고베 역에서 기차를 타고 히로시마로 향했다.

손병희 일행은 1월 25일 부산항에 도착했다. 동학 측 기록에는 당시 손병희를 환영하기 위해 4만여 인파가 운집했다고 기록돼 있다. 하지만 이는 큰 과장이고 실제는 4000여 명의 환영인파가 모였는데, 당시로서는 4000여 명도 어마어마한 인파였다. 그들은 주로 동학교도들과 일진회 회원들이었다. [구한국일진회역사]에 의하면 한양에 있던 통합 일진회 회장 이용구는 손병희를 영접하기 위해 23일 부산에 갔다고 한다. 송병준은 손병희를 영접하기 위해 26일 대전까지 갔다. 부산에서 이용구를 만난 손병희가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는 기록이 없어 확인되지 않는다.

이용구 포함 ‘매국’ 62명 천도교 출교 처분


▎근대 종교 개혁과 교권을 장악하고 천도교 조직을 정비한 손병희는 이용구를 포함한 62명을 출교시킴으로서 매국 이미지를 벗어나 민족종교로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손병희는 부산에서도 기차를 타고 한양으로 향했다. 대구, 대전을 거쳐 1월 28일 오후 1시 35분 남대문 역에 도착했다. 동학 측 기록에는 남대문 역에 8만여 환영인파가 모였다고 기록돼 있지만 실제는 6000명 내외였다. 손병희는 남대문 주변 상다동(上茶洞) 2통 10호에 마련된 자책으로 들어갔다. 일본 정보당국의 기록에 의하면, 남대문 역에 도착한 손병희 일행 중에서 가장 시선을 끈 인물은 20대 초반의 일본여성이었다. 화려한 양장차림의 그 일본여성은 황하청(黃河淸)이었고, 손병희의 첩이었다. 손병희는 훗날 ‘풍류 교주’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수많은 여성을 섭렵했다. 일본에 유학 중에도 손병희는 ‘풍류 본능’을 이기지 못하고 젊은 일본여성을 첩으로 들였던 것이다.

한양에 도착한 손병희는 동학을 천도교로 개편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1906년 2월 1일 손병희는 종령(宗令) 1호를 공포해 중앙총부를 설치했다. 뒤이어 2월 10일 종령 5호로 [천도교대헌]을 공포했다. 2월 16일에는 한양 무교동에서 천도교 중앙총부 현판식을 거행하고, 3월 3일에는 지방의 72대교구까지 정비했다. 72대교구는 12월에 23대교구로 통폐합되었는데, 당시 1개의 대교구 당 10만 교인으로 계산하면 23대교구에 200만명 정도의 천도교 교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울러 손병희는 천도교 기관지로 만세보(萬歲報)를 창간해 오세창을 사장으로 임명하고, 천도교 출판사로 보문관을 설립해 권동진을 사장으로 임명했다.

이렇게 교권을 장악하고 천도교 조직을 정비한 손병희는 이용구를 설득해 일진회에서 탈퇴하게 만들려 했다. 하지만 이용구는 “우리가 일진회를 조직한 것은 보국안민 하라는 선사의 유훈을 따른 것입니다. 선사께서 순교한 후 아직 신원되지 않았고, 정치가 아직 개혁되지 않아 사회가 퇴보하는데도 다만 종교만 믿는다면 분명 훗날의 압제가 다시 올 것입니다. 일진회의 목적이 달성되기 전에는 절대 해산할 수 없습니다”라며 거부했다. 이용구는 이용구대로 자신의 소신을 꺾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손병희는 1906년 9월 20일 이용구 등 62명을 천도교에서 출교 처분했다. 출교된 이용구 등은 시천교(侍天敎)를 창립했다. 이로써 기왕의 동학은 손병희의 천도교와 이용구의 시천교로 양분되기에 이르렀고, 손병희의 천도교는 근대 민족종교로 급팽창하기 시작했다.

※ 신명호 - 강원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02108호 (2021.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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