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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우의 청와대와 주변의 역사·문화 이야기(19)] 사도세자 생모 영빈 이씨의 사당 선희궁(宣禧宮) 외전 

아들 밀고한 어머니 ‘의열(義烈)’ 시호 받았지만… 

영조 “임금·종사 지킨 의롭고 장렬한 행위” 뒤주 참극 정당화
사도세자 아들 정조, 할머니 사당 의열궁서 선희궁으로 개칭


▎옛 선희궁 정당. / 사진:이성우
조선 제21대 임금인 영조와 관련한 유적이 경복궁 주변 여러 곳에 있다. 경복궁 지하철역 가까이에는 영조의 잠저였던 창의궁, 궁정동 1번지의 칠궁에는 영조가 어머니 숙빈 최씨를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 육상궁(毓祥宮)이 있다. 칠궁과 이웃한 청와대 영빈관 지역에는 영조의 첫 번째 후궁이자 효장세자의 생모인 정빈 이씨의 사당 연호궁(延祜宮)이 있었다. 후일 진종(眞宗)으로 추존된 효장세자는 사도세자의 일곱 살 터울 이복형으로 열 살이 되던 해인 영조 4(1728)년 11월 16일 사망했다. 효장세자 사후 7년 만에 태어난 영조의 아들이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다.

칠궁을 나와 서쪽으로 무궁화동산과 청운효자동 주민센터를 지나면서 마주하는 큰길은 경복궁 지하철역에서 세검정 삼거리에 이르는 자하문로다. 그 길을 건너면 동네 이름이 신교동으로 바뀐다. 신교동에는 영조의 두 번째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 선희궁(宣禧宮)이 있었다. 칠궁 내로 옮겨오기 전 선희궁이 있던 곳이다. 신교동은 주변에 신교, 즉 ‘새로 만든 다리’가 있었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다. 신교라는 명칭이 1760년대 이전 영조 시대에 만들어진 한양도(漢陽圖)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영조 46(1770)년경의 지도인 한양도성도(漢陽都城圖)에는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 언제인가에 다리를 새로 놓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은 하천이 복개돼 모습을 찾아볼 수 없지만, 지금도 이 다리가 있었다면 적어도 250년은 족히 됐을 것이다.

영빈 이씨 세상 떠나자 후궁 제일의 예로 장례


▎영화 ‘사도’에서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전혜진 분)가 자식의 죽음을 슬퍼하는 장면. / 사진:쇼박스
이 옛 선희궁과 담장을 마주하고 있는 청운초등학교의 정문 안쪽에는 옛날 돌다리의 난간에 사용됐던 기둥 6개와 난간의 맨 귀퉁이에 사용됐던 것으로 보이는 둥근 공 모양의 돌 2개가 놓여있다. 원래의 자리가 어디였는지 명확히 알 수 없는 이 부재는 석재의 가공 솜씨가 좋고 문양까지 곁들여져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의 경우 왕실과 관련된 곳, 즉 왕궁·왕릉·왕실 등의 사당에 사용됐던 다리의 일부로 추정된다. 다리가 지도에 등장하는 시기 등을 종합하면, 왕실에서 선희궁을 참배할 때 이용하기 위해 이 다리를 특별히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영조는 영빈 이씨가 영조 40(1764)년 7월 26일 6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매우 애통해하면서 후궁 제일의 예로 장례를 지내줬다. 같은 해 9월 3일에는 사도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영빈의 고변이 임금과 종사를 위해 내린 결단이기에 그 행위가 정당하다는 취지의 책을 써 서고에 보관하게 했다. 이 책의 이름이 [어제표의록(御製表義錄)]이다. ‘어제’란 임금이 직접 지었다는 뜻이다.

책의 서두에 ‘어필(御筆) 표의록’이라고 돼 있어 영조의 글씨임을 알려주고 있다. 이후 본문은 ‘위 종국서시후(爲 宗國書示後)’, 즉 ‘종국을 위해 후세에 써서 보인다’라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종국이란 정통을 계승한 임금의 나라라는 의미다. 이어 영빈 이씨의 덕행을 말한 뒤에 영빈이 그날(영조 38(1762)년 윤5월 13일) 아침 사도세자의 비행을 자신에게 고변한 덕분에 나라가 안정됐으며 세손을 보호했고 만백성을 편안하게 했으니, 이 모든 일이 다 영빈의 공이라고 한껏 추켜세웠다. 끝부분에는 영빈의 사당에 ‘수의보사(守義保社)’라는 네 글자를 써서 내린다고 하면서 “이는 영빈을 위해서가 아닌 종국을 위한 것임을 후세에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영빈묘는 서교(西郊)의 연희궁(延禧宮)으로 정하라고 명했다.

서교의 연희궁이란 한성부 북부 연희방 대야동, 지금의 연세대학교가 자리하고 있는 지역이다. 오늘날 연희동이라는 동명(洞名)이 생겨나게 한 연희궁은 세종 2(1420)년 세종이 당시 상왕이던 태종을 위해 서쪽에 중건한 이궁(離宮)이며, 서이궁으로 불리다가 세종 7(1425)년 연희궁으로 개칭됐다. 그러나 연산군 11(1505)년 연산군이 연희궁을 연회장으로 꾸미는 바람에 이궁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했다. 광해군일기 9(1617)년 4월 28일 기록에 “화재로 연희궁이 모두 불탔다”는 내용이 등장하는데, 이후 재건되지 않은 채로 있다가 영조에 의해 영빈 이씨의 묘역으로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연희궁 지역은 영조의 첫 세손이었던 의소세손의 장지를 결정할 때도 검토 대상이었다. 영조가 어느 날 갑자기 연희궁 지역을 영빈 이씨의 묘역으로 결정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영조, 책까지 지어 ‘사도세자 비행 고변’ 옹호


▎조선 제21대 임금 영조의 어진.
사도세자의 맏아들이기도 했던 의소세손은 3살이 되던 영조 28(1752)년 3월 4일 갑자기 훙서(薨逝)했다. 영빈 이씨가 세상을 떠나기 12년 전이다. 이때도 영의정 김재로에게 연희궁을 봉심(왕명을 받들어 왕실의 묘우나 능침을 살피고 점검하는 일)하게 하고, 그 결과를 보고받았다는 영조실록 28(1752)년 3월 11일의 기록이나, 같은 해 3월 15일 옛 연희궁과 근처에 묘터로 적절한 장소를 살펴보게 한 실록의 기록으로 보아 연희궁 지역은 영조가 묘역으로 미리 생각해 둔 장소라고 볼 수 있다. 같은 해 영조실록 5월 12일의 기록에 의하면, 의소세손의 초장지(初葬地)였던 의소묘는 양주 안현의 남쪽 기슭에 있었다고 한다. 지금의 서대문구 북아현동 중앙여고 자리다. <묘소도감>에서 봉심해 살펴봤다던 옛 연희궁의 동남간에 있는 사축서(조선시대 잡축(雜畜)을 기르는 일을 관장했던 관서)의 옛터 우록이 바로 그곳이다. 이곳은 영빈 이씨의 묘역으로 정해진 옛 연희궁 터에서 그리 멀지 않은 위치에 있었다. 의소묘의 지역이 정해지면서 남겨져 있던 옛 연희궁 터가 영빈 이씨의 묘역으로 결정된 셈이다. 도성에서 그리 멀지 않으면서, 손자와 할머니의 묘역이 지근거리에 있기에 행행(임금이 대궐 밖으로 거둥함)에 용이했음도 고려대상이지 않았을까 싶다.

영조는 영빈 사후 1년이 지날 무렵인 영조 41(1765)년 7월 11일 영빈 이씨에게 의열(義烈)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따라서 영빈의 무덤도 의열묘로 칭하게 됐다. 그러나 의열묘라는 호칭은 그 이전부터도 사용되고 있었다. 그보다 먼저인 같은 해 1월 24일 실록에 “영조가 의소묘에 가면서 지나는 길에 의열묘에도 들렀다”고 기록해 시호를 내리기 전부터 영빈 이씨의 무덤을 의열묘로 호칭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영조 40(1764)년 9월 26일 영조가 창경궁 공묵합(恭默閤)에서 대신들을 소견하며 “영빈의 행위가 종사의 대의를 위한 의롭고 장렬한 행위이기에 의열로 표시한다”고 했기에 비록 시호를 내리기 전일지라도 의열묘로 호칭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영빈의 사당인 선희궁의 경우도 의열묘와 비슷하다. 한성부 북부 백운동에 세워졌던 사당 역시 내려진 시호에 따라 의열묘로 불리지만, 이미 영빈 사후 몇 달 지나지 않았던 영조 40(1764)년 11월 5일 실록의 기록을 비롯해 이후 여러 기록에서도 영빈의 사당을 의열묘 또는 의열궁(義烈宮)이라고 호칭한다. 시호를 내리기 전 이미 의열이라는 묘호가 사용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영조가 의열궁이라고 호칭한 것은 다만 영빈 이씨에게 성의를 보여주기 위해 붙인 이름일 뿐, 당시 영빈의 묘는 정식으로 봉원되지 않은 상태였다. 정조는 재위 12년째인 1788년 12월 26일 영빈 이씨의 사당 이름을 의열궁에서 ‘복을 넓게 펼친다’는 의미의 선희궁으로 고쳤지만, 이 역시도 정식으로 봉원되지 않은 상태에서 묘호 명칭만 바꾼 것이다. 의열이라는 시호는 할아버지이자 선대 임금인 영조가 내린 시호였기에 임금이라고 쉽게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의열이라는 시호가 어떤 결과에 의해 내려진 시호인지 잘 알고 있는 정조로서는 참배시마다 불편한 마음이 계속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일정 기간 경과 후에는 묘호만이라도 고쳐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후 135년 뒤 ‘임금을 낳은 어머니’로 격상


▎경모궁구묘도. / 사진:국립문화재연구소
선희궁이 정식으로 봉원된 것은 고종 36(1899)년 9월 1일 사도세자가 장종대왕(莊宗大王)으로 추존되고 같은 해 12월 7일 다시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로 추존되면서부터다. 이는 추존이라는 형식을 통해 영빈 이씨가 임금(황제)을 낳은 어머니의 신분이 됐기 때문이다. 이에 영빈 이씨의 무덤도 의열묘에서 수경원(綏慶園)으로 격상돼 정자각과 비각이 새로 건립됐으며, 사당인 선희궁도 격에 맞게 새로 지어졌다.

[승정원일기]에는 영조 32(1756)년 12월 3일 임금의 가마가 세심궁방궁(洗心宮傍宮)에 들어간 뒤 승정원에서 안부를 물었다거나, 영조 37(1761)년 5월 6일 세심궁 근처 토박이 2명을 대령하라는 전교를 내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영조실록 38(1762)년 6월 15일에는 “임금이 돌아올 때 육상궁에 나아갔다가 세심정에 들렀다”라고 하는가 하면, 영조 40(1764)년 7월 12일의 실록에는 영조가 다시 옮겨 지은 사도세자의 사당 수은묘에 전작례(奠酌禮)를 행하는 자리에서 “내가 세심궁에서 묘를 너무나 사치스럽게 짓는 것을 보고 사치를 미워해 고치라고 명했었다”라고 말했다는 것으로 보아 세심궁이나 세심정 등이 모두 같은 지역을 지칭하는 의미였던 것으로 보인다.

원래 세심궁 지역은 홍산 현감을 지낸 용인 이씨 이향성의 집인 세심정이 있었는데, 임란 당시 소실된 것을 이향성의 3남 이정민이 재건했다. 이는 광해군 재위 후반기에 왕실 소유로 편입됐다. 이후 세심정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다가 영조 대에 이르러 다시 등장한다. 영조 28년인 1752년 1월 16일 [승정원일기]에 세심궁 근처에 거주하는 양인 최준방이 호랑이를 봤다는 진술 내용에서다.

이로부터 10년 후인 영조 38(1762)년 1월 9일 [승정원일기]에서 영조는 세심궁 수직중관(守直中官)은 필요치 않은 관직이니 장래에 처리하고 그 외의 관리도 수를 줄이라는 전교를 내린다. 이어 같은 해 5월 13일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영조는 세심궁에 대해 “세심궁은 어느 때인가 세워졌는데 궁인이 몸조리하기 위한 곳이었다. 지금은 이름만 남았으니 내수사에 속하게 하라”고 명했다. [의조별등록(儀曹別謄錄)] 제1책 기사년 10월 19일 기록에 의하면 “서인 민씨가 질병가로 옮겼는데 질병가는 장의동 세심궁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세심궁은 숙종의 제1 계비였던 인현왕후가 폐위돼 서인이 된 후 몸을 조리하는 질병가로 사용하던 곳이란 뜻이다. 기사년은 숙종 15(1689)년으로 인현왕후가 폐위돼 서인 신분으로 된 해다. 세심궁은 인현왕후 사망 후 제2계비였던 인원왕후 소속이었으나, 인원왕후도 5년 전인 영조 33(1757)년에 이미 사망해 이젠 그 기능이 필요 없어 비용 절약 차원에서 그 외의 버려진 다른 궁들과 함께 내수사로 속하게 한 것임을 분명하게 하고 있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죽자 사도의 사당을 어디에 쓸 것인가에 대해서도 미리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내수사 소관이 된 세심궁이 생각나 세심궁의 여건이 어떤지 살펴보고자 했을 것이다. 사도가 죽은 지 약 한 달 후인 영조 38(1762)년 6월 15일 영조는 육상궁을 전배한 후 여러 신하와 함께 세심궁에 들렀다. 그리고 대청에서 바라보는 주변의 풍경과 지세를 칭찬한 후 여건과 비용을 고려해 사도의 탈상 후 사당을 세울 자리로 세심궁을 지정했다. 한 달 전 영조가 향후 세손 등 왕실의 궁가를 설치할 때 지출되는 비용을 줄이고자 내수사로 속하게 했던 세심궁이 결국 아들의 사당인 사도묘가 된 셈이다. 그러나 사도묘는 다시 자리를 옮기게 된다.

사도세자 사당 허물고 옮긴 숨은 이유는?


▎한양도성도에 그려진 선희궁과 신교. / 사진:삼성리움미술관
공사는 영조 40(1764)년 2월 18일 시작해 3개월 만인 5월 19일에 마쳤다. 영조는 수은(垂恩)이라는 시호까지 내렸으나, 규모가 크고 단청이 화려하다는 이유로 철거하고 상례 기간이 끝나는 7월에 맞춰 창경궁 홍화문의 동쪽, 지금의 서울대학병원 자리로 다시 옮겨 짓도록 했다. 그러나 사도묘의 이건 이유가 영조의 지적대로 사도묘의 규모가 크고 단청이 화려해서만은 아닌 것 같은 뉘앙스를 풍기는 기록이 존재한다. 영조 40(1764)년에 그려진 경모궁구묘도(景慕宮舊廟圖)를 보면 영조의 뜻이 반영된 표시인 붉은 글씨의 ‘어필(御筆)’이 군데군데 눈에 띄는 것으로 보아 사도묘의 규모가 크고 화려했음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수은묘영건청의궤(垂恩廟營建廳儀軌)]에 수록된 수은묘전도(垂恩廟全圖)와 비교해보면 구묘란 경모궁으로 개건 되기 전, 특히 수은묘로 옮겨 세워지기 전의 사당인 사도묘를 지칭한다.

그런데도 정조실록에 의하면 누군가 영조에게 사도묘를 옮기도록 바람을 넣었다는 의미의 기록이 등장한다. 정조실록 15(1791)년 3월 17일 기록을 보면, 정조가 세심대에 올라 잠시 쉬면서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처음 사도묘를 세울 땅을 결정할 때 세심대의 아래쪽으로 하려 했는데 (누구라고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이 땅이 좋은 것을 꺼려서 동쪽 기슭에 옮겨지었으니, 지금의 경모궁(景慕宮)이 그것이다. 그러나 궁터가 좋기로는 도리어 이곳보다 나으니 하늘이 하신 일이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어쨌거나 정조는 옮긴 경모궁터가 이전의 사도묘 터보다 더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건한 사도묘는 수은묘로 불리다가 정조가 즉위하고 10일 후인 1776년 3월 20일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莊獻)’이라 올리면서 무덤인 수은묘의 봉호는 ‘영우원(永祐園)’으로, 사당인 수은묘는 ‘경모궁’으로 각각 고친 바 있다.

사도묘가 한성부 동부 숭교방으로 이건된 후 세심궁 자리는 한동안 실록에 등장하지 않다가 사도묘 이건 약 3년째인 영조 42(1766)년 7월 26일 영빈의 탈상에 맞춰 영빈의 사당이 세워졌다. 이것은 영조의 첫 번째 후궁이자 효장세자의 생모였던 정빈 이씨의 사당이 이 당시까지도 영조의 잠저였던 창의궁 내에 있었던 것과 대비된다. 참고로 정빈은 정조 재위 시에야 온희(溫僖)라는 시호를 받으며 육상궁과 이웃한 별도의 공간에 연호궁(延祜宮)이라는 묘호의 사당이 세워진다.

계속 옮겨지던 선희당, 1908년 현재 자리에 정착


▎영빈의 고변이 임금과 종사를 위해 내린 결단이라는 내용을 담은 어제표의록. /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고종실록 7(1870)년 1월 2일의 기록에 따르면, 선희궁은 고종의 명에 의해 같은 해 육상궁 별묘로 이전됐다. 그 후 선희궁은 다시 옛 선희궁 자리인 한성부 북부 순화방으로 옮겨졌다가 고종 33(1896)년 육상궁 별묘로 다시 이전됐다. 선희궁이 이처럼 자주 이전됐던 이유는 영빈 이씨의 묘가 이때까지도 정식으로 봉원되지 않아서였다. 또한 왕실의 여러 사당을 통합하고 축소하는 과정에서 비롯됐다고 보인다.

특히 고종 34(1897)년 4월 24일에는 고종이 지난해 선희궁을 육상궁 별묘로 옮긴 것을 미안하게 여겨 옛 선희궁으로 되돌려 모시라는 조서(詔書)를 내렸다. 이와 관련해 전해지는 이야기도 있다. 영왕(영친왕)을 임신 중인 귀인 엄씨(후에 순헌황 귀비 엄씨)의 꿈에 영빈 이씨가 나타나 폐지한 자신의 사당을 다시 지어달라고 간곡히 부탁하며 태중(胎中)의 왕자를 돕겠다는 말을 했다는 이야기다. 꿈에 나타나 돕겠다던 영빈 이씨의 간곡한 부탁이 잊혀지지 않은 귀인 엄씨는 고종에게 부탁해 사당을 원래의 자리에 새로 짓게 했다는 것이다.

선희궁을 옮겨 짓는 공사는 고종 34(1897)년 6월 19일 완료되고, 같은 해 6월 25일 정당에 신위를 모셨다. 그리고 고종 36(1899)년 8월 23일에 정조·순조·익종·헌종·철종의 어진을 선희궁 내 망묘루(望廟樓)에 옮겨 모셨다. 고종 36(1899)년 9월 1일 영빈 이씨의 아들 사도세자가 장종대왕(莊宗大王), 같은 해 12월 7일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로 추존됐다. 이에 영빈 이씨는 임금(황제)을 낳은 어머니의 신분으로 격상돼 그 신위도 높이고 묘도 정식으로 봉원됐다. 이에 영빈 이씨의 사당 선희궁도 새로 지었다. 선희궁은 고종 연간에 몇 번의 자리 이동이 있기는 했지만, 사당이 세워진 1766년 이래 140여 년간 거의 세심궁 지역의 자리를 지키다가 순종 2(1908)년 왕실의 여러 신위와 함께 지금의 칠궁 내 육상궁 별묘 지역으로 최종 이건됐다.

이건 후 선희궁 자리에는 대일항쟁기인 1912년 조선총독부 산하 제생원 양육부(濟生院 養育部)가 들어섰으며, 그 후 신이 지금의 국립서울맹학교와 농학교다. 지금도 이곳에는 영빈 이씨의 신위를 모셨던 정당(正堂)을 비롯해 담장, 각종 장대석과 초석·은행나무·느티나무 등이 남아 있다.

※ 이성우 - 전 청와대 안전본부장.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용인대에서 경호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대통령경호실에서 25년간 근무했다. 2007년 발간된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유산] 대표 저자이며, 그 공로를 인정받아 같은 해 ‘대한민국문화유산상’ 문화재청장 감사패를 받았다. 현재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유산] 개정판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2107호 (2021.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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