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신명호의 근·현대 건국운동사 | 근·현대 건국 담론(10)] 폐위 위험 무릅쓰고 을사늑약 무효화 극비 작전 

고종, 헤이그 특사 파견 일생일대 도박 실패 

평화회의 소식 안지 열흘 만에 ‘상동파’ 이회영에 친서 전달
밀사, 러시아 황제와 면담 좌절… 국제여론 호소도 무위로


▎헤이그 밀사 3인(왼쪽부터) 이준·이상설·이위종은 고종의 친서와 신임장을 받고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접견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이후 헤이그에 도착해 제2차 평화회의 참석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이루지 못했다. 특사 3인은 기자 회견을 열고 호소문을 배포하는 등 국제 여론에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
1907년 4월 10일 자 대한매일신보에는 ‘평화회의와 군비안(軍費案)’이라는 외신기사가 실렸다. 그것은 “런던통신에서 말하기를, ‘러시아가 헤이그 평화회의 사건으로 외국에 발송한 통첩에 의거한즉, 해당 회의는 6월 15일부터 개회하는 뜻을 제의하였고, 또 해당 통첩에는 해당회의에서 의논할 안건을 게재하였으나 군비감축 안건은 삭제하였더라’고 했다”는 내용이었다. 다음날인 4월 11일에도 대한매일신보는 로이터통신을 인용해 같은 외신을 전했다.

당시 대한매일신보가 전한 헤이그 평화회의는 제2차 평화회의였다. 제1차 평화회의는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주창으로 1899년 헤이그에서 개최됐다. 그런데 제2차 헤이그 평화회의는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열릴 수 있었다.

제2차 헤이그 평화회의를 처음 주창한 주인공은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였다. 그는 1904년에 제2차 헤이그 평화회의를 개최하자고 주창했지만, 러·일전쟁이 발발함으로써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1905년 9월 5일, 루스벨트의 중재로 러·일전쟁이 막을 내리자, 니콜라이 2세는 전후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제2차 헤이그 평화회의를 러시아가 주관하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를 루스벨트가 양해함으로써, 니콜라이 2세가 다시 제2차 헤이그 평화회의를 주관하게 됐는데, 그때가 1905년 10월 10일이었다. 이후 러시아 정부는 회의일정을 준비해 1906년 8월에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이 소식은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1906년 3월 1일 대한제국에도 알려졌다. 하지만 의제에 불만을 품은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불참을 선언해 회의는 다시 연기됐다.

고종, 일본 압력에 밀려 을사늑약 굴욕


▎고종 황제는 러·일 전쟁 이전부터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와 친서를 주고받는 등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헤이그 제2차 평화회의 개최 소식을 접하자 러시아에 기대 일본과 맺은 을사늑약의 무효화 외교를 시도했다.
대한매일신보의 1907년 4월 10일, 11일 자 외신은, 그렇게 연기에 연기를 거듭하던 제2차 헤이그 평화회의가 드디어 1907년 6월 15일 개최된다는 소식을 전한 것이었다. 이 소식은 고종황제와 민족주의운동 세력들에게 큰 희망을 줬다. 제2차 평화회의 개최 소식이 전해진 당시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강탈당한 보호국 신세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종황제는 제2차 헤이그 평화회의에 남다른 관심을 기울여왔다. 그 이유는 러·일전쟁 이후 1905년 9월 5일 체결된 포츠머스 조약의 제2조와 단서조항 그리고 을사늑약 때문이었다. 포츠머스 조약 제2조는 “러시아제국 정부는 일본이 한국에서 정치상, 군사상 및 경제상 탁절(卓絶)한 이익을 소유함을 승인하고 일본제국 정부가 한국에서 필요하다고 인정하는지도, 보호 및 감리의 조치를 집행하는 것을 방해하거나 간섭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단서조항은 “대한제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조치는 일본이 대한제국 정부와 합의 하에 할 수 있다”고 적시돼 있다. 이 같은 포츠머스조약 제2조와 단서조항을 근거로 일본 정부는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을 강압해 고종황제의 외교권뿐만 아니라 재정권 등을 박탈했다. 을사늑약 이후 고종은 사실상 연금된 상태로서 국제정보, 왕실자금, 인사권 등에서 배제됐다.

이런 상황에서 1906년 3월경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가 드디어 제2차 헤이그 평화회의를 개최하게 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 고종은 큰 희망을 품었다. 당시는 을사늑약이 체결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고, 고종과 니콜라이 2세와는 러·일전쟁 이전부터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친서(親書)를 주고받는 관계였다. 러·일전쟁 직후 고종은 비록 엄정중립을 선언했지만, 러시아의 승리를 예상하고 니콜라이 2세와 밀약을 맺어 놓기도 했다. 따라서 러·일전쟁에 관해서는 고종황제와 니콜라이 2세와 운명공동체였다. 니콜라이 2세는 러·일전쟁에서 패배함으로써 패전국 황제가 되어 일본과 굴욕적인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해야 했다. 고종 역시 러·일전쟁 중 일본압력에 밀려 굴욕적인 ‘한일의정서’, ‘한일협정’ 등을 체결해야 했고, 전후에는 ‘을사늑약’을 강요당했다.

그런데 포츠머스 조약 직후, 니콜라이 2세가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의 양해를 얻어 제2차 헤이그 평화회의를 주관하게 되자, 고종은 이를 아주 희망적으로 해석했다. 우선 포츠머스 조약 자체에 불만을 품은 니콜라이 2세가 제2조 같은 독소조항을 개정하기 위해 제2차 평화회의를 주관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던 것이다. 게다가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 역시 그런 니콜라이 2세에게 동조했기에 루스벨트는 자신이 주창하던 회의를 양보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고종황제의 입장에서는 니콜라이 2세가 청·일전쟁 직후 독일, 프랑스의 동의를 얻어 시모노세키 조약을 무효화했듯, 이번에도 서구열강의 동의를 얻어 포츠머스 조약 자체를 무효로 하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고종은 국권 회복을 위해 제2차 헤이그 평화회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을사늑약 무효화 외교를 펼치는 것이 당연했다.

양반출신 ‘상동파’ 이상설·이회영·이동녕 밀사 파견 주도


▎우당 이회영은 단독으로 헤이그 특사 파견을 추진했다. 회의 개최 소식을 접한 지 10여일 만에 고종황제로부터 신임장과 러시아 황제에게 전할 친서를 전달받았다.
하지만 1906년 3월 당시 고종은 외교권도 박탈당하고 재정권도 박탈당한 상황이었다. 국제 정보도, 자금도, 인맥도 없는 상황이라 고종은 손을 쓰기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고종을 도와 밀사 파견을 주동한 세력이 상동파였다. 전덕기 목사가 시무하는 상동교회에는 청년학원이 있었고, 그 상동청년학원에는 구 독립협회 출신이 많이 있었다. 그들 중에는 명문대가 출신의 양반계열도 적지 않았다. 대표적인 인물이 이상설, 이회영, 이동녕 등이었다.

이상설은 경주 이씨 출신으로 인조 때 판서를 지낸 이시발의 후손이었다. 본인 역시 과거시험에 합격한 후 승승장구해 참판까지 지냈는데, 상동청년학원 교육활동에도 열심이었다. 이회영 역시 경주 이씨 출신인데, 임진왜란 때의 명신으로 유명한 백사 이항복의 후손이었다. 이회영은 한양 굴지의 명문 출신이자 부호 출신으로 유명했고, 청년학원 책임자로 활동했다. 이상설과 이회영은 공히 경주 이씨 출신에 더해 신학문까지 함께 공부함으로써 절친한 사이가 됐다. 그들의 친분은 독립협회 활동을 넘어 상동교회 청년학원으로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이동녕은 연안 이씨 출신으로 전통학문을 공부했지만, 독립협회에 가담해 개화운동을 하다가 상동교회 청년학원 교육자가 됐다. 이처럼 이상설, 이회영, 이동녕은 공히 명문대가 양반 출신으로 상동교회 청년학원에서 교육활동을 펼쳤다. 하지만 그들은 평민 출신에 비해 양반의식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 그 양반의식은 자연스럽게 고종에 대한 충성심으로 이어졌고, 공화제보다는 군주제에 경도되는 성향으로 나타났다.

당시 상동교회 청년학원의 교육자들은 매주 수요일 오후 7시 교회에 모여 지하실에서 예배를 본 후, 시국 토론을 벌이곤 했다. 따라서 청년학원 교육자들에게 상동교회 지하실은 예배실이자 시국 토론실이기도 했다. 1906년 3월,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제2차 헤이그 평화회의 소식이 알려지자 이상설, 이회영, 이동녕 등은 전덕기 목사와 밀사 문제를 논의했다. 당시는 아직 신민회가 창설되기 이전이라 공화제에 대한 논의가 공론화되기 이전이었다.

따라서 이상설, 이회영, 이동녕 등은 헤이그 밀사를 통해 국권과 함께 고종 황제권을 되찾으려는 차원에서 밀사 문제를 논의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 당시 이회영은 고종의 측근인 조익승, 조익남, 안호영 등을 통해 고종과 연락을 주고받았다. 조익승과 조익남은 흥선대원군의 사위인 조정구의 큰아들과 둘째아들이었다. 즉 고종이 조익승과 조익남의 외삼촌이었다. 고종은 조익승과 조익남을 시종 등 측근으로 두었다. 안호영 역시 고종이 신임하는 환관이었다. 당시 흥선대원군의 사위 가문으로 명문대가 출신인 조익승, 조익남은 같은 명문대가 출신인 이회영과 가까이 어울렸다. 이런 인맥을 이용해 이회영은 고종에게 밀사 파견을 건의했다. 이에 이회영과 가깝기도 하고 고종 역시 신임하는 이상설을 정사로 삼아 파견하려고 했다.

하지만 은밀하게 추진되던 밀사 파견은 1906년 4월 19일 자 대한매일신보의 연기 소식에 따라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그 결과 이상설은 이동녕, 정순만 등과 함께 만주 용정촌으로 망명해 서전서숙을 세우고 국권 회복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 후 이동녕은 수시로 국내를 드나들며 이상설과 상동교회 청년학원을 연결했다. 반면 이회영은 여전히 상동교회 청년학원에 남아 근대민족운동을 벌였다.

이회영, 혼자서 움직여 전광석화 진행


▎고종이 미국인 헐버트 편으로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알리고자 했던 친서가 미국 컬럼비아대 도서관에서 발견됐다. 가로 30㎝, 세로 40㎝ 크기로 한문, 영문으로 쓰여있다.
그러던 중 1907년 4월 10일 자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제2차 평화회의 소식이 알려지자 이회영은 신속하고 은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6월 15일 헤이그에서 개최예정인 제2차 평화회의에 고종 특사가 참여하려면 늦어도 4월 안에 모든 준비를 끝내고 출발해야 했다. 그렇다면 20일 내외의 여유밖에 없었다. 이처럼 촉박한 상황에서 이회영이 어떻게 움직였는지를 이관직의 [우당(友堂) 이회영 실기(實記)]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선생은 동지들에게 발설치 않고 혼자서 총총(悤悤) 하였다. 고종황제에게 주품(奏稟)하여 대표의 임명과 신임장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적의 감시와 중중(重重)한 경계의 망을 피하여 궁중을 통한다는 것은 절대의 비밀 보장이 되어야만 가능하였다. 중간에서 거래 교섭할 인물을 엄선하여 선생은 대한협회 이래 친신(親信) 하는 내시 안호형으로 하여금 이 계획을 상주케 하였다. 신임장이 미국인 헐버트를 통해 선생에게 수교 되었다.”

위에 의하면 이회영은 동지들에게 발설치 않고 혼자서 제2차 헤이그 평화회의 특사파견을 주동했다. 그렇게 한 이유는 시간이 촉박하기도 하지만 불필요한 논쟁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짐작된다. 당시는 도산 안창호가 귀국해서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공화제 실현을 목표로 하는 신민회 국내조직을 한창 준비 중이었다. 이회영의 절친 이동녕 역시 그 신민회의 핵심 발기인으로 참여할 정도로 신민회의 공화제 주장이 힘을 얻는 상황이었다. 이회영 역시 신민회 창설 움직임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런데 만약 이회영이 공화제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도산 안창호와 밀사 파견을 논의한다면, 분명 안창호는 밀사 파견으로 만에 하나 국권을 회복할 경우, 그다음 어떤 나라를 만들 것인지 물을 것이 분명했다. 그럴 경우 고종의 군주권을 그대로 유지해야 하는지, 아니면 입헌군주제로 할 것인지 또는 공화제로 해야 하는지 복잡한 논쟁을 야기할 수 있었다. 당시 이회영이나 이상설은 여전히 군주제에 경도되어 있었기에, 공화제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안창호와 큰 논쟁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따라서 이회영은 이런 논쟁을 피하면서 속히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자서 일을 주동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 결과 안창호는 헤이그 특사파견 문제에서 철저하게 소외됐다.

이처럼 개인적으로 움직인 이회영의 활약에 힘입어 일은 전광석화처럼 진행됐다. 일본 정보당국이 조금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 이 같은 극비작전 덕분에 이회영은 제2차 헤이그 평화회의 소식을 안 4월 10일부터 겨우 열흘만인 4월 20일에 고종의 신임장과 친서를 받을 수 있었다. 친서는 고종이 니콜라이 2세의 도움을 간청하는 편지로서 조남승이 작성하였다. 나중에 일본 정보당국은 프랑스 교회 안의 문서고에 숨겨진 고종의 친서 원본을 압수했는데, 그 내용이 [일한합방비사(日韓合邦祕史)]에 실려 있다. 친서 내용을 살펴보면 당시 고종이 어떤 마음에서 무엇을 목표로 헤이그 특사를 파견했는지 잘 보여준다.

“짐은 오늘의 상황이 점점 더 간난(艱難) 하지만 돌아보건대 그것을 하소연할 곳이 없습니다. 오직 폐하에게 이를 자세히 알리니 또한 못 본 체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나라는 진흥할 수 있는 기회가 전적으로 폐하의 돌보심에 달려 있습니다. 또 지금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되므로, 이 회의에서 우리나라는 (일본에) 당한 일이 진실로 이유 없음을 성명(聲明) 하고자 합니다. 대한제국은 일찍이 러·일전쟁 전에 중립을 각국에 성명(聲明)하여, 모두 승인했습니다. 이는 즉 세계가 모두 아는 바인데, 현재 정세는 심히 개탄스러워 견딜 수 없습니다. 폐하는 우리나라가 아무 이유 없이 화를 당한 실정을 특별히 유념하시고, 짐의 사절로 하여금 우리나라 형세를 해당 회의 개최 때 설명할 수 있도록 힘써 주십시오. 그렇게 함으로써 만국의 공공연한 여론을 얻는다면, 그 여론에 힘입어 우리나라의 원권(原權-외교권)을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과연 그렇게 된다면 진실로 짐과 우리 한국 국민은 감격하여, 폐하의 은혜로운 덕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귀국의 전 주한 공사가 철수할 즈음 원망(願望)의 심충(深衷)을 아울러 진술합니다. 겸하여 해당 공사에게 부탁하는 바가 있습니다. 오직 폐하께서 깊이 헤아려 주시길 바랍니다.”

고종, 군주권 박탈에 분노, 특사 제안에 동조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는 고종 황제의 친서와 신임장을 받은 헤이그 특사 3인의 접견을 거부했다. 아울러 헤이그 제2차 평화회의 의장인 러시아인 넬리토프도 특사의 회의 참석 요구를 거절했다.
이 친서에 의하면 고종은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한 현실에 깊이 분노하고 있었다. 하지만 고종의 깊은 분노에 동조하는 나라는 없었다. 그래서 고종은 이전부터 친서를 주고받던 니콜라이 2세의 호의와 국제여론에 힘입어 국권을 회복하고자 했다. 이런 점에서 헤이그 특사는 고종에게 일생일대의 도박이라 할 만했다. 만약 희망한 대로 특사가 성공한다면 고종은 일제로부터 외교권을 되찾고 그럼으로써 온전한 군주권을 확보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만약 특사가 성공하지 못한다면, 이를 빌미로 일본당국은 고종을 폐위시킬 수도 있었다. 이런 위험을 무릅쓸 정도로 당시 고종은 깊이 분노했기에 이회영의 특사파견 제안에 동조했던 것이다.

1907년 4월 20일 고종의 친서 신임장을 확보한 이회영은 이것을 특사 이준에게 전달했다. 당시 특사는 정사 이상설, 부사 이준 그리고 통역관 이위종으로 결정됐다. 이 중에서 정사 이상설은 만주 용정에 있었고, 통역관 이위종은 러시아 수도 페테르부르크에 있었다. 당시 국제어는 영어가 아니라 프랑스어였다. 그래서 제2차 헤이그 평화회의에 특사가 참여해 활동하려면 반드시 프랑스어 통역관이 필요했다. 그 당시 프랑스어를 통역할 정도의 실력을 갖춘 한국인은 이위종이 유일했다. 이위종은 전 주러시아 공사 이범진의 아들로서 프랑스어를 비롯해 영어, 러시아어 등 여러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기에 통역관으로 발탁됐다.

따라서 누군가 신임할만한 사람이 고종의 친서 신임장을 이상설과 이위종에게 전달해야 했다. 이회영은 상동교회 청년학원에서 함께 활동하던 이준을 신임해 특사로 추천했다. 법률을 전공한 이준은 을사늑약의 법률적 문제점들을 설명할 수 있기에 부사로 결정됐다.

특사 이준은 1907년 4월 21일 기차를 타고 한양에서 출발해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다. 고종의 친서와 신임장이 4월 20일에 전달된 사실을 고려하면, 그다음 날 이준이 곧바로 출발했음을 알 수 있다. 시간도 촉박하고, 한양에 더 있다가 혹시라도 일본 정보당국에 발각될까 우려해서였다. 한편 이상설은 5월 14일 만주 용정을 출발해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다. 당시 이상설에게 특사 소식을 전한 연락원은 이동녕이었을 것이다. 이동녕은 수시로 국내를 드나들며 상동 청년학원과 이상설을 연결해왔기 때문이다. 이상설은 일본 정보당국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훈춘에 학교를 세우려 한다는 말을 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출발했다고 한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이동녕, 정순만 등이 동포들로부터 답지한 기부금을 특사에게 전달하며 성공을 기원했다.

이준 열사 병사 직전 “조국을 구하라”


▎헤이그 특사 3인(이준·이상설·이위종)은 참가국의 거부로 제2차 평화회의에 참석하지 못했으나 기자회견을 열고 호소문을 배포하는 등 국제 여론의 관심을 받기 위해 노력했다.
정사 이상설과 부사 이준은 5월 21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베리아 열차를 타고 페테르부르크로 향했고, 6월 4일 통역관 이위종과 페테르부르크에서 합류했다. 3명의 특사는 니콜라이 2세와 면담해 고종의 친서를 전달하고 협조를 구하고자 했다. 사실상 헤이그 특사의 성공 여부는 니콜라이2세와의 면담 여부에 달려있었다. 만약 니콜라이 2세가 3명의 특사를 면담하고 도와주겠다고 약속한다면 성공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성공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니콜라이 2세가 3명의 특사를 면담하지 않는다는 것은 일본과의 분쟁을 더는 원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고, 그것은 곧 고종을 돕지 않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러시아도 일본과 분쟁을 원하지 않는다면, 당시 세계열강 중 그 어느 나라도 일본과 분쟁을 벌이면서까지 고종을 도울 리가 없었다. 불행히도 니콜라이 2세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면담을 거절했다. 3명의 특사는 니콜라이 2세와 면담하기 위해 무려 15일간이나 페테르부르크에 머물렀다. 하지만 더는 늦출 수 없게 된 3명의 특사는 고종의 친서를 외무성에 접수하고 6월 19일 페테르부르크에서 출발해 헤이그로 향했다. 아마도 그때 3명의 특사는 이미 실패를 예감했을 듯하다. 하지만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헤이그로 갔다. 마지막 희망 즉 국제여론에 기대를 걸었기 때문이다.

3명의 특사는 1907년 6월 25일 헤이그에 도착했다. 그들은 평화회의 의장 넬리토프를 찾아 본회의에 참여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의장 넬리토프는 러시아인었고, 본국으로부터 특사는 공식적인 대표가 아니니 접촉을 삼가라는 훈령을 받은 상태였다. 이에 따라 의장 넬리토프는 본회의 참여를 거절했다. 다른 나라 대표들에게 부탁해도 결과는 같았다.

결국 3명의 특사는 국제여론에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 1907년 6월 27일부터 3명의 특사는 각국 기자들에게 호소문을 배포하기 시작했고, 이위종은 기자회견을 벌이기도 했다. 그 결과 특사의 호소문이 유력한 외국신문에 실리기도 했고, 을사늑약의 부당성이 제기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3명의 특사가 을사늑약 자체를 취소시킬 수는 없었다.

게다가 7월 14일에는 부사 이준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는 비극까지 더해졌다. 이준 열사는 숨을 거두기 직전 “조국을 구하라. 일본이 끊임없이 유린하고 있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이렇게 고종의 일생일대 도박인 헤이그 특사는 실패하고 말았다. 이제 고종은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었다.

※ 신명호 - 강원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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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호 (2021.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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