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이성우의 청와대와 주변의 역사·문화 이야기(22)] 우레 같은 물소리로 유명한 인왕산 계곡 수성동(水聲洞) 

겸재 정선 그림 속 비경, 아파트 철거 뒤 부활 

진경산수화 대가 사실적 묘사… 세종 셋째 아들 안평대군도 살아
70년대에 지어진 건물이 경관 훼손 논란, 복원 과정서 기린교 햇빛


▎수성동 계곡 뒤편에 인왕산이 자리하고 있다. 선조들은 비 온 뒤 이곳의 물소리가 우렁차 수성동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 사진:이성우
경복궁 지하철역 3번 출구를 나와서 효자동 방향으로 조금만 걸으면 옥인동으로 가는 종로 09번 마을버스를 탈 수 있다. 그리고 10여 분 정도만 버스에 앉아 있노라면 빌딩 숲속에 언제 있었냐는 듯 웅장한 산을 앞에 두고 푸른 숲과 깊은 계곡을 만나게 된다. 그 계곡을 수성동 계곡이라고들 얘기한다. 인구 1000만의 도심 한복판에서 10여 분 만에 마치 깊은 산 속에라도 들어온 듯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대도시가 서울 말고 전 세계 어느 곳에 있기나 한 걸까 싶다. 평상시 자그맣고 음악 같이 조용하게 흐르는, 송사리가 노니는 1급수의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이지만, 한여름 소나기라도 쏟아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큰 물줄기가 폭포수 같은 큰 소리를 뿜어내는 사나운 계곡으로 변한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그곳이 물소리가 유명한 계곡이라 해 수성동(水聲洞)이라는 이름을 붙였는가 보다.

수성동은 현재 누상동과 옥인동의 경계에 있었던 지명이다. ‘동(洞)’은 현재의 행정구역을 의미하는 단어가 아니라 골짜기 또는 계곡이라는 의미로 쓰였다. 수성동은 인왕산 아래 첫 계곡으로, 인왕산에서 발원한 이 물줄기는 수성동 계곡을 시작으로 서촌을 지나 청계천으로 흘러간다.

조선 역사지리서에서 꼽은 아름다운 경관


▎[한양도성도]에 표기된 수성동과 기린교. / 사진:삼성리움미술관
성현(成俔)은 예문관과 성균관의 최고 관직을 역임한 학자이자 관료였다. 폭넓은 학식과 관직의 경험을 바탕으로 고려부터 조선 성종에 이르기까지의 문화·역사·지리·종교·서화 등 문화 전반에 걸친 내용을 다룬 [용재총화]를 저술했다. 그는 이 책에서 “한양도성 안에 경치 좋은 곳이 적은데 그중 놀 만한 곳으로는 삼청동이 으뜸이고 인왕산의 인왕동이 그다음이며 쌍계동·백운동·남산의 청학동이 또 그다음이다. (중략) 인왕동은 인왕산 아래인데, 깊은 골짜기가 비스듬히 길게 뻗어 있다”라고 말했다. 한양도성 내의 5대 명승지 가운데 인왕동과 백운동은 모두 서촌 자락에 있었던 동네였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 역사지리서인 [동국여지비고]나 [한경지략] 등에도 인왕산 수성동 계곡을 조선 시대 도성 안에서 백악산 삼청동과 함께 주변 경관이 빼어나고 아름답기로 첫손가락에 꼽혔다고 한다.

골짜기가 깊다 보니 [조선왕조실록]에는 인왕산에 호랑이가 나타났다는 기록도 종종 등장한다. [세조실록] 9(1463)년 12월 9일의 기록에는 경복궁 취로정 연못가에서 호랑이 발자국이 발견되자 세조가 밤에 입직(入直)한 장수들을 직접 불러 백악산과 인왕산 등지를 살펴서 호랑이가 있는 곳을 알게 되면 직접 가서 잡겠다고 하는 내용이 등장한다. 그다음 해인 세조 10(1464)년 12월 6일에는 실제로 호랑이를 잡았다는 내용도 나온다. 그런가 하면 중종 26(1531)년 12월 12일 실록에는 호랑이를 잡을 때 임무를 소홀히 한 장수를 파직했다고 하며, 인조 4(1626)년 12월 17일 실록에는 인왕산 곡성(曲城) 밖에 호랑이가 나타나 나무꾼을 잡아먹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수성동에서 멀지 않은 곳인 월성위궁에서 살았던 김정희(金正喜)의 [완당전집] 제9권에는 ‘수성동 우중관폭 차심설운(水聲洞雨中觀瀑次沁雪韻)’이라는 시가 수록돼 있다. 완당이 이 시에서 수성동을 “대낮에 걸어가는 데도 밤인 것 같다”라고 표현한 것으로 봐서 수성동은 당시에 인가가 없고 인적이 드문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김정희는 충청도 예산현 입암면 용궁리(현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서 태어났으나 12세 때부터 증조부의 집이었던 월성위궁에서 꽤 오랫동안 살았다고 알려져 있다. 월성위궁의 주인인 월성위 김한신(金漢藎)은 양자 관계로 이어진 김정희의 증조부다. 영조가 재위 8년째인 1732년 11월 29일 둘째 딸인 화순옹주(和順翁主)를 김한신에게 하가하면서 김한신은 월성위에 봉해졌다. 영조 46(1770)년 경에 그려진 ‘한양도성도’에는 월성위궁이 창의궁의 남쪽으로, 적선방 십자각계에 있었던 것으로 그려져 있다.

김정희보다 조금 앞선 시대에 살았던 존재(存齋) 박윤묵(朴允默)은 위항시인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는 자신의 [존재집] 제23권 기(記) 모음집 중 ‘유수성동기(遊水聲洞記)’를 통해서 비 온 후의 수성동이 어떤 상태였는지를 잘 표현하고 있다. 이 시를 보면 이곳을 왜 수성동이라 불렀는지 추측할 수 있다. 수성동은 비가 오고 난 후에 물이 많이 불어 콸콸 흘렀다는 것이고, 수성동의 깊은 계곡을 굽이치며 흘러내려 가는 물살에서 큰 소리가 나니 수성동이라 했을 것이다. 아래 본문 중 서산(西山)은 인왕산을 의미하며, 박윤묵 생전의 경오년은 순조 10(1810)년이다.

“수성동은 물이 많아 물소리라는 뜻의 수성으로 이름이 붙었는데 곧 서산 입구다. 경오년 여름 큰비가 수십 일 동안 내리니 개울물이 넘쳐 평지의 수심도 세자나 됐다. (중략) 백개의 골짜기와 천 개의 개울이 하나도 똑같은 형상을 한 곳이 없고, 이 모든 물이 수성동에 이르게 된 다음에야 하나의 큰 물길을 이룬다. 산을 찢을 듯, 골짜기를 뒤집을 듯, 벼랑을 치고 바위를 굴리면서 흐르니, 마치 만 마리 말들이 다투어 뛰어오르는 듯하고 우레가 폭발하는 듯하다.”([존재집] 제23권 기(記) 모음집 중)

그림으로 수성동을 잘 표현한 사람을 꼽으라면 겸재(謙齋) 정선(鄭敾)을 들 수 있다. 정선은 조선 후기 사대부 출신의 화가였다. 지금의 종로구 청운동 경복고등학교 일대인 북악산 기슭 유란동 난곡에서 태어난 정선은 이곳에서 52세까지 살았으며, 이후 인왕산 아래 인왕곡으로 이사했다. 어렸을 때 집 근처에 살았던 장동 김씨 가문의 일원인 농암 김창협, 삼연 김창흡, 노가재 김창업 문하를 드나들며 성리학과 시·서·화를 배웠으나, 14살 생일에 아버지를 여의고 스승 김창흡마저 낙향하자 출세의 뜻을 버리고 화업(畵業)의 길을 택했다. 그의 탁월한 그림 솜씨는 산수·인물·화훼·풀벌레 등에 두루 정통해 조선 후기 제일의 화가로 꼽히며 특히 서울 주변의 명승지와 금강산을 많이 그렸다. 우리나라의 산하를 직접 답사해 사실적 묘사로 화폭에 담아냄으로써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의 대가로 손꼽힌다.

인왕곡에 살았던 정선의 '장동팔경첩'에 수록


▎2008년 1월 11일 종로구 문화재위원들과 현장을 답사해 확인한 기린교. / 사진:이성우
그의 그림 ‘수성동’은 영조 27(1751)년경 그려진 서울 간송미술관 소장 [장동팔경첩] 내에 포함돼 있다. 장동은 종로구 통의동·효자동·창성동에 걸쳐 있던 마을의 옛 지명인데 원래 이곳에 창의문이 있으므로 해서 창의동이라 하던 것이 변해서 장의동이 됐고, 이것이 줄어 장동으로 불렸다. 조선 후기 명문 안동 김씨의 세거지다 보니 안동 김씨를 장동 김씨로 부르기도 했다. 장동은 넓게는 창의문부터 통의동까지를 포함하다. 간송본의 [장동팔경첩]은 창의문 지역의 자하동, 청송 성수침의 청송당, 지정 남곤의 대은암, 백악산의 독락정과 취미대, 선원 김상용의 청풍계, 인왕산의 수성동, 이항복의 필운대 등 여덟 곳의 경치를 그린 것이다.

정선의 수성동 그림을 살펴보면 거대한 바위들이 보이고, 그 사이사이 계곡으로 개울물이 굽이쳐 흐르며, 좌우 너럭바위 사이의 깊은 계곡 위를 건너갈 수 있도록 장대석 두 개를 붙인 듯한 모양의 돌다리가 놓여 있다. 지팡이를 잡고 안내하는 듯한 선비를 따라 두 선비와 동자 한 명이 이미 다리를 건넌 후 지팡이를 잡은 선비의 설명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풍경을 감상하는 듯 보인다.

현재는 보존을 위해 그 다리를 건널 수만 없을 뿐이지 오늘날 수성동 계곡의 풍경이 정선의 그림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들이 건넌 다리가 [한양도성도]에도 표기된 기린교(麒麟橋)다.

그런데 이 골짜기에는 과연 누가 살았을까? 세종에게는 세자(후일의 문종), 수양대군(후일의 세조), 안평대군, 임영대군, 광평대군, 금성대군, 평원대군, 영응대군 등 8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중 이곳은 세종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의 집이 있던 곳이다.

[한경지략]과 [동국여지비고]에는 수성동을 설명하면서 안평대군의 옛 집터와 기린교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아래의 기록을 통해 인왕산 수성동에 효령대군과 안평대군의 집이 있었고, 그 근처에 기린교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수성동은 인왕산 기슭에 있으니 골짜기가 그윽하고 깊숙해 시내와 암석의 빼어남이 있어 여름에 놀며 감상하기가 좋다. 혹은 이르기를 이 골짜기가 비해당(匪懈堂)의 옛 집터라 한다. 다리가 있는데 기린교라 한다.”([한경지략] 중)

“인왕산 기슭에 있으니 골짜기가 깊고 그윽하다. 곧 비해 당의 옛 집터로, 시내와 바위의 빼어남이 있어 여름에 놀며 감상하기에 마땅하다. 다리가 있는데 기린교라고 한다.”([동국여지비고] ‘효령대군제’ 중)


비해당은 안평대군이 아버지 세종으로부터 받은 당호(堂號)다. 안평대군이 비해당이라는 당호를 받게 된 경위는 아래와 같다.

“세종 24(1442)년 6월 어느 날 안평대군이 신위(宸闈)에 입시했을 적에 임금이 ‘대군의 당명을 무엇이라고 하는가?’라고 조용히 묻자, 안평대군은 당명이 아직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임금이 증민시(蒸民詩)를 외우고 또 서명(西銘)을 들어서 이르기를 ‘편액(扁額)을 비해(匪懈)라고 하는 것이 적합하겠다’고 했다. 안평대군이 손 모아 절하고 머리를 조아린 다음, 한편으로는 기뻐하고 한편으로는 놀라워하다가 드디어 금원(禁垣)의 여러 선비에게 글을 청해 그 취지를 연역(演繹)토록 했다.”

안평대군의 비해당은 ‘임금 한 분만 섬기라’는 의미


▎겸재 정선이 그린 ‘장동팔경’ 중 수성동. / 사진:간송미술관
이 글은 사육신 중 한 명인 박팽년의 시문집을 그의 7대손인 박숭고가 효종 9(1658)년에 간행한 [박선생유고]에 수록된 ‘비해당기’의 내용이다.

비해당이란 뜻은 노나라 헌왕의 둘째 아들인 중산보가 주나라 선왕의 명령을 받고 제나라로 성을 쌓으러 떠날 때 윤길보가 전송하며 지어준 [시경]의 ‘증민(蒸民)’에 나오는 “지엄하신 임금의 명령을 중산보가 받들어 행하고, 나라 정치의 잘되고 안 됨을 중산보가 가려 밝히네. 밝고도 어질게 자기 몸을 보전하며,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게으름 없이 임금 한 분만을 섬기네”에서 마지막 구절 원문인 “숙야비해(夙夜匪解) 이사일인(以事一人)”에서 ‘비해’를 취한 것이다.

즉 세종은 재주가 뛰어난 안평대군이 장자가 아니었기에, 자신이 왕위에 있는 동안은 물론 동궁(후일의 문종)이 즉위한 뒤에도 “게으름 없이 임금 한 분만을 섬기라”는 당부를 하기 위해 비해라는 두 글자를 따서 당호로 내려준 것이다. 안평대군은 문사들을 초빙해 비해당에서 풍류를 즐겼는데, 계유정난으로 사사되면서 비해당도 허물어졌다. 뒤에 효령대군의 소유가 됐고, 다시 월산대군의 소유로 넘어갔다.

한편 비해당을 지은 뒤에 안평대군은 집 안팎의 아름다운 꽃과 나무, 연못과 바위 등에서 48경을 찾아냈다. ‘비해당 사십팔영시(匪懈堂四十八詠詩)’란 안평대군의 집과 그 주변 경치, 사물, 감흥 등을 주제로 지은 48영, 즉 48수의 시다. 이 48영에 대해 태허정 최항의 문집 [태허정집]에는 “사십팔영별인본을 참고하니 안평대군이 7언 율시를 선창하자 태허정이 차운하고, 신숙주, 성삼문, 이개, 김수온, 이현로, 서거정, 이승윤, 임원준 등 여덟 분이 5, 7언 율시로 혹은 5, 7언 절구로 했다”라고 해 모두 10인이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중 현재 48영이 모두 전하는 문인은 최항, 신숙주, 성삼문, 김수온 등이며, 서거정은 3편이 빠진 45영만 전하고, 이개는 [동문선]에 4영만 전한다. 이 시는 성종 대에도 유행해 여러 차운시(이전 시의 운자를 빌려 짓는 시)를 남기게 된다.

우리나라처럼 땅덩어리가 좁은 반면 도시에 인구가 집중한 나라의 경우 아파트는 도시개발 초창기부터 필수불가결한 주거용 건축 양식으로 간주해왔다. 6·25전쟁 이후 1960년대 들어서면서 서울의 인구는 일자리를 찾아 모여든 사람들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 때문에 서울에는 판자촌과 같은 무허가 건물도 넘쳐났다. 이에 박정희 전 대통령은 서울의 무허가 건물을 정비하고 집이 없는 서민들을 위해 많은 아파트를 지어서 분양하게 했다. 이를 주도적으로 시행한 서울시장은 1966년부터 시장직을 수행한 ‘불도저’ 김현옥이었다. 1968년 12월 3일 대대적인 시민아파트 건립계획을 발표하고 1969년 1년 동안 1만5800여 가구 분의 아파트를 건립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심각한 문제가 나타났다. 마포구 창천동에 건립한 아파트 1개 동이 준공 4개월 만인 1970년 4월 8일 새벽에 무너져 70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한 것이다. 6개월이라는 짧은 공사 기간이 부실공사라는 화를 부른 것이다. 이에 책임을 지고 붕괴사고 일주일 만인 4월 15일 김현옥은 서울시장에서 물러났다.

이 당시 ‘중산층 아파트’라 불리던 또 다른 명칭의 아파트가 있었다. 골조공사만을 끝낸 채 분양하는 형식의 아파트라 상대적으로 저렴한 편이었다. 1970년 3월 18일 [조선일보]에 따르면 옥인지구에도 6개 동 규모의 아파트를 짓기로 계획돼 있었다. 그러나 아파트 붕괴사고의 여파로 옥인지구에 지을 예정이던 아파트 건립계획도 취소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하지만 1971년 김현옥의 뒤를 이어 취임한 양택식 서울시장 체제에서 옥인지구에 건립되는 아파트도 중산층 아파트 형식으로 분양됐다. 당시 옥인지구 아파트는 도심에서 가깝지만, 물 좋고 산 좋은 인왕산 계곡을 끼고 건립하는 것이었기에 장안의 화제였다.

중산층 아파트는 어감이 좋지 않았는지 ‘시범아파트’라는 명칭으로 변경됐고, 9개 동 308세대의 옥인지구 아파트도 ‘옥인시범아파트’라는 명칭을 얻게 됐다. 세월이 흘러 2000년대에 들어서자 옥인시범아파트가 인왕산 경관을 훼손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계곡을 콘크리트로 덮었고 건물들이 인왕산의 전경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에 이곳을 원래 모습으로 되살려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다. 우여곡절 끝에 수성동 계곡에서 40년 가까이 자리를 지켰던 옥인시범아파트는 2007년 12월 7일 서울시의 공원 조성 방침에 따라 결국 철거하기로 결정됐다. 결국 아파트는 2008년 8월 말부터 철거를 시작해 2012년 7월 11일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런데 철거 과정에서 확인된 놀라운 일이 언론을 통해 세상에 공개됐다. 정선의 그림 속에 나오는 기린교가 발견됐다는 보도였다. 기린교는 1970년대 초 아파트 건립 과정에 파괴돼 없어졌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그 기린교가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와 관련해 2007년 9월 14일 [문화일보]는 ‘없어진 줄 알았던 기린교, 찾았다’ 제하의 기사를 통해 “서울시가 인왕산 도시자연공원을 조성하기 위해 철거 예정인 서울 종로구 옥인동 185의 4 옥인시범아파트 옆 계곡에서 조선시대 안평대군의 옛 집터에 있었던 기린교로 추정되는 돌다리가 발견됐다”고 전하고 있다.

‘옥인시범아파트’ 2012년 역사 속으로


▎김영상 서울시 시사편찬위원회 상임위원이 1994년 출간한 [서울 육백년]에 수록된 기린교. / 사진:이성우
그러면서 이 다리는 “원래 비해당 안평대군과 효령대군의 집이었던 인왕산 기슭 수성동에 있었는데 현재 옥인아파트 9동 옆 계곡에 위치한 돌다리는 겸재 정선이 그린 장동팔경첩 중 수성동을 그린 그림에 등장하는 돌다리이며, 고 김영상 서울시 시사편찬위원회 상임위원이 1994년 출간한 [서울 육백년] 중 1권에 ‘수성동에 걸려 있던 기린교 돌다리’란 설명과 함께 실린 사진과 똑같다”라고 밝혔다.

김 상임위원은 지금의 서울역사편찬원 전신인 ‘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가 창립할 당시 산파 역할을 했다. 40여 년 동안 서울 구석구석에 흩어져 있는 문화유산을 답사하고 직접 사진을 찍어 신문과 잡지 등에 글을 써왔으며, 그 결과로 출간된 [서울 육백년]을 통해 후학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기린교 사진 역시 그중의 하나로 아파트가 생기기 전인 1950~1960년대에 찍은 것으로 보인다.

[문화일보]는 “정선의 그림이나 [서울 육백년]에 실린 사진을 보면 장대석 2개를 걸쳐 놓은 돌다리의 모습이 현재 옥인아파트 옆 계곡에서 발견된 것과 똑같은 형태임을 알 수 있다”며 “청계천의 원류가 되는 계곡에 위치한 기린교는 원래 1971년 옥인아파트 준공 당시 사라진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 이 지역을 답사했던 사람들의 제보로 다시 햇빛을 보게 됐다”라고 전했다.

필자는 기린교를 최초 보도한 언론이 [문화일보]라고 기억하고 있다. 그렇게 기억하는 것은 기린교의 유래와 존재를 제보한 사람이 필자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기린교를 발견하게 된 계기는 이렇다.

2006년 삼청동과 청운동 지역에서 그동안 그림이나 사진으로만 알려져 있던 몇 가지 문화유산을 발견한 경험이 있기에 인왕산과 서촌 지역에서도 유사한 발견을 한 수 있다고 판단해 지역을 답사하고 토박이 어르신들을 수소문했다. 기린교도 그 대상 중 하나였다. 필자가 기린교에 주목한 것은 그 다리만 찾을 수 있다면 [한경지략]이나 [동국여지비고]의 기록처럼 다리 근처에 안평대군의 집터가 있었음이 역사적 사실에 가깝다고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기린교 보호 차원서 언론 공개 선택


▎2021년 8월 수성동 계곡과 복원된 기린교. 수성동 계곡은 2010년 10월 21일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31호로 지정됐다. / 사진:이성우
필자는 특히 정선의 그림들이 진경산수화인 것에 주목해 김 상임위원의 기린교 사진과 함께 수성동 그림과 유사한 장소를 찾아다녔다. 그러기를 몇 차례, 답사와 탐문 끝에 토박이인 인근의 세탁소 주인으로부터 사진의 다리는 자신이 어릴적 놀았던 곳으로 아직도 남아 있다는 뜻밖의 얘기를 들었다.

그러나 해당 장소에서 기린교는 쉽게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인근을 여러 차례 둘러봐도 사진과 같이 생긴 다리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만지면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듯한 녹슨 난간과 흙과 풀로 뒤덮인 다리의 윗부분만 봐서는 이 다리가 사진의 기린교와 같다는 생각을 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계곡 상류 쪽으로 올라가서 물줄기를 따라 내려오기 시작했다. 계곡 밑에서 올려다본 다리는 계곡 위에서 볼 때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정선의 그림과 김 상임위원의 사진 속 기린교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그 날이 2007년 4월 14일이었다. 2008년 초 종로구 문화재위원들과 현장을 답사한 후 확인해 본 기린교의 규모는 장대석 2개를 붙여 만든 총 너비가 약 70㎝ 정도의 좁은 다리였다. 다리의 좌우에 난간이 박혀 있고 흙과 풀로 덮여 있었지만, 원형이 잘 보존돼 있어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높다고 평가됐다.

이 사실은 2007년 말 발간된 책에 수록됐지만, 언론에 공개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공개해야 할 상황이 발생했다. 2009년쯤 아파트를 철거한 후 공원을 조성한다는 소식과 함께 철거 작업을 시작했다는 사실도 아울러 듣게 됐다. 현장을 방문하니 다행히 기린교 쪽은 손을 대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무관심 속에 공사를 진행하다가는 이 다리가 훼손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기린교를 보호하는 방법으로 언론 공개를 택했다. 기린교가 공식적으로 세상에 알려지면서 지금의 수성동 계곡처럼 복원됐다. 수성동 계곡은 2010년 10월 21일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31호로 지정됐다.

필자는 최근에도 수성동 계곡을 다녀왔다. 많은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며 기린교 사진을 담아가는 모습을 보며 선조들이 남긴 소중한 유산 하나를 보존하는데, 조금이나마 기여했다는 뿌듯함을 느끼곤 한다.

※ 이성우 - 전 청와대 안전본부장.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용인대에서 경호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대통령경호실에서 25년간 근무했다. 2007년 발간된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유산] 대표 저자이며, 그 공로를 인정받아 같은 해 ‘대한민국문화유산상’ 문화재청장 감사패를 받았다. 현재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유산] 개정판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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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호 (2021.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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