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권경률의 사랑으로 재해석한 한국사(19)] 남편이냐 아들이냐, 잔인한 선택 강요받은 혜경궁 홍씨 

사도세자 죽음 묵인한 모정이 정조 구했다 

사사건건 영조의 책망에 울화 쌓인 세자, 살인 등 엽기 행각
뒤주에서 비참한 최후… 세자빈, 정적들 공격 피하기 위해 결단


▎영화 [사도]에서 사도세자 역을 맡은 유아인(왼쪽)과 영조 역을 맡은 송강호. 영화는 왕실에서 벌어진 비극적 사건을 콤플렉스와 트라우마,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사도세자 이야기로 풀어냈다. / 사진:쇼박스
세자빈 간택은 아랑곳없이 9세 소녀는 궁궐 구경에 들떠 있었다. 화사한 노랑 저고리에 다홍치마를 맵시 있게 차려입은 명문가 처녀들이 계단 앞에서 다소곳이 제 순서를 기다렸다. 능참봉 홍봉한의 딸도 단자를 올리고 초간택에 참여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치마는 오빠 혼수에 쓸 베로 만들고 저고리 안에 낡은 옷을 받쳐 입었다. 세자와 동갑이긴 하지만 나이도 가장 어린 축이었다. 될 거라고는 일절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일까? 계단에 오르기도 전에 세자의 어머니가 소녀를 불렀다. 영빈 이씨는 애정이 듬뿍 담긴 얼굴로 다가왔다. 화평 옹주도 함께였다. 간택 자리에서 영조 임금과 정성왕후는 홍봉한의 딸을 발 안에 들여 어여삐 여겼다. 계단을 내려오자 궁인들이 둘러싸고 앞다퉈 안았다. 9세 소녀는 영문도 모르고 심히 괴로웠다. 1743년 9월 28일의 일이었다. 다음 날 홍봉한이 근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이 아이가 수망(首望, 첫째 후보)에 들었으니 어이 할꼬?”(혜경궁 홍씨, [한중록])

아버지는 그저 두려울 뿐이었다. 지난봄 성균관 장(유생 대표)으로서 궁에 들어가 영조를 뵈었다. 왕은 인재를 얻었다고 기뻐했다. 그 의중이 간택으로 이어진 듯싶었다. 부담이 짓눌렀다.

세자빈에 뽑힌다면 근신하고 헤아려야 할 일들이 억만 가지다.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것에겐 가혹하다. 집안도 살얼음판이 될 것이다. 외척은 정쟁의 표적이 되기 쉽다. 권력다툼에 치여 집안이 망할 수도 있다. 그는 등골이 오싹했다.

초간택을 통과하는 인원은 통상 6~10인이다. 재간택에서 3인으로 압축되고 삼간택에 이르러 최종 1인을 정한다. 세자빈에 뽑히지 않은 2인은 후궁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홍봉한의 딸은 초간택 당시 세자빈으로 내정돼 있었다. 10월 28일 재간택, 11월 13일 삼간택은 형식적으로 치렀다. 소문이 돌면서 일가붙이와 동문의 발걸음이 잦아졌다. 예조판서를 지낸 조부 홍현보가 세상을 뜬 뒤에 발길 끊은 이들이다. 세상인심이 그러하다.

간택을 마치면 어의동 별궁에 들어가 세자빈 수업을 받아야 한다. 그 전에 종갓집 사당에 하직 인사를 올리러 갔다. 사당에는 5대조 할머니 정명 공주의 신위가 모셔져 있었다. 선조 임금이 사랑한 딸이 풍산 홍씨 집안에 시집왔고, 그 후손은 영조 임금의 며느리가 돼 왕가로 들어간다. 9세 소녀는 공주 할머니에게 기도했다. 궁중에서 어찌 살지 앞날이 캄캄하지만, 할머니가 든든한 버팀목이 돼주십사 빌고 또 빌었다.

별궁에서는 상궁들에게 둘러싸여 궁중 법도를 배우고 익혔다. 부모도 함께 생활했다. 아버지 홍봉한은 영조에게 하사받은 [소학]을 딸에게 가르쳤다. 어머니는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딸의 마음을 진정시켰다.

50여 일이 지나 혼례가 닥쳤다. 부모와 작별하는 슬픔에 어린 세자빈은 애간장이 녹았다. 1744년 1월 11일 동갑내기 세자가 데리러 왔다.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가 내민 손을 잡고 역사의 격랑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궁중 생활은 하루하루 긴장의 연속이었다. 무엇보다 삼전(三殿)을 지성으로 섬겨야 했다. 영조 임금은 물론 대비 인원왕후, 중전 정성왕후에게 효도를 다 해야 한다.

세자빈은 매일 새벽에 일어나 법도에 따라 예복을 갖추고 아침 일찍 문안 인사를 다녔다. 늦잠을 자면 낭패다. 반드시 잠을 깨워줄 사람이 필요하다. 혜경궁은 친정에서 온 유모에게 그 임무를 맡겼다. 별일 아닌 것 같아도 두 사람에게는 중대사였다. 궁중생활이 잘 풀리려면 삼전의 사랑을 받아야 하고, 이는 문안 인사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영특하고 부지런한 처신은 먹혔다. 세 어른의 총애에 힘입어 궁에 안착한 것이다.

9세 세자빈, 영조·대비·중전 사랑 한 몸


▎혜경궁 홍씨는 남편의 죽음을 묵인하고 자식을 품에서 놓아준 끝에 이들 부자가 국왕 반열에 올라서는 데 일조한 인물로 평가된다. 연희단거리패의 대표작 [혜경궁 홍씨]의 한 장면. / 사진:연희단거리패
1752년 세손(훗날의 정조)을 낳으며 세자빈은 내명부에서 입지를 다졌다. 그사이 아버지 홍봉한도 과거에 급제하고 영조의 측근으로 자리 잡았다. 왕통과 집안을 등에 업은 궁중 여인의 권능은 상상을 뛰어넘는다. 바야흐로 혜경궁의 시대가 오고 있었다. 안팎의 조명이 빛을 발할수록 이면의 불길한 그림자 또한 짙어졌다. 사도세자가 마음의 병을 앓기 시작한 것이다. 아내가 볼 때 그 병의 원인은 영조의 삐뚤어진 닦달과 편벽이었다.

사도세자는 영조가 맏아들 효장세자를 잃고 나이 마흔 줄에 다시 얻은 아들이다. 귀하디귀한 만큼 기대도 컸다. 성군의 재목이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세자는 학문에 관심이 없었다. 대신 개 그림을 그리거나 병장기를 갖고 놀았다. 기대에 어긋나자 아버지는 아들을 뜯어고치려고 했다. 1749년 15세에 불과한 세자에게 대리청정(代理聽政)을 맡긴 건 그래서다. 임금 대신 나랏일을 처리하게 해 완벽한 군주의 자질을 갈고 닦도록 했다.

영조의 엄한 책망이 날마다 이어졌다. 사사건건 트집 잡았고 직성이 풀릴 때까지 야단쳤다. 대리청정이라고 해도 중요하고 민감한 사안은 임금의 뜻을 물어야 한다. 하지만 영조는 그만한 일도 혼자 결단하지 못하냐며 면박했다. 다음에 세자가 알아서 처리하면 또 말을 바꿨다. 어째서 자신에게 고하지 않았느냐고 인상을 구겼다.

“저리 한 일은 이리 아니 하였다가 꾸중하셨고, 이리 한 일은 저리 아니 하였다 꾸중하셨다. 어찌 섧고 섧지 않으리오.”(혜경궁 홍씨, [한중록])

사도세자 병들게 한 영조의 닦달과 편벽


▎MBC 드라마 [이산]에서 정조 이산 역의 배우 이서진.
세자로서는 한창 사춘기 시절에 골치 아픈 국사를 맡아 아버지에게 들들 볶인 셈이다. 그의 마음은 알게 모르게 병들어갔다. 가슴이 막히거나 두근거리는 증세가 나타났다. 그러나 아버지의 다정한 말 한마디에 목말랐을 아들을 영조는 끝없이 닦달하기만 했다. 심지어 나라에 가뭄이 든 것도 세자가 덕이 없어 그렇다고 탓했다.

세자는 어느새 미운털이 단단히 박혔다. 영조는 사람을 치우치게 대하는 편벽(偏僻)이 있었다. 자식도 호불호가 극단적으로 갈렸다. 요절한 화평 옹주와 청상과부 화완 옹주는 끼고 살았다. 반면 사도세자와 화협 옹주는 얼씬도 못하게 했다. 불길한 일이 있을 때는 싫어하는 자식들을 액땜으로 썼다. 공연히 세자를 불러 말 시키고 귀를 씻었다. 사용한 물은 화협 옹주 거처 쪽으로 버렸다. 세자와 화협은 씁쓸한 농담을 나누며 동병상련을 곱씹었다.

“우리 남매는 귀 씻을 준비물이로다.”(혜경궁 홍씨, [한중록])

세자빈은 기막혔다. 시아버지의 닦달이 지나치고, 편벽은 괴이하지 않은가? 남편은 착하고 효성스러운 사람이었다. 뭐라 말도 못하고 가슴앓이 하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세자가 부왕의 눈 밖에 났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권력의 속성이 그렇다. 국본(國本)이 흔들리면 왕통을 넘보는 세력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바꿔 말해 아들의 미래가 불안해진다는 뜻이다. 이건 혜경궁이 용납할 수 없었다.

1752년 세손이 태어난 그해 영조는 궁인 문씨에게 푹 빠져 있었다. 늙은 임금의 승은을 입고 아기를 배자 문씨는 방자해졌다. 아들만 낳으면 사도세자를 제치고 국본이 될 수도 있었다. 우의정 김상로 등 대신들은 벌써 뱃속 아기에게 관심을 보였다. 이 궁인을 혜경궁은 ‘문녀(文女)’라고 불렀다. 영조의 씨를 품은 총첩을 세자빈은 경계하고 깎아내렸다. 12월의 양위 소동은 바로 이 문녀의 불손한 언행에서 비롯됐다.

12월 5일 영조가 뜬금없이 창덕궁을 나가버렸다. 양위(讓位), 곧 임금 자리를 세자에게 넘기겠다는 것이다. 딱히 그래야 할 명분이 없었다. 자신의 불효도 자책하고 정쟁의 폐단도 거론했으나 양위 명분이라기에는 애매했다. 영조가 즉위 전에 살던 창의궁으로 가버리자 세자가 찾아가서 한겨울 눈보라 속에 엎드렸다. 머리를 돌에 찧어가며 회궁을 간절히 청했다. 망건이 찢어지고 이마에 피가 흘렀다. 마치 벌 받는 죄인의 형상이었다.

“차마 듣지 못할 하교를 자꾸 내리시니, 소신이 더욱 죽을죄를 지어 마음이 찢어지는 것만 같습니다.”([영조실록] 1752년 12월 17일)

이 양위 소동의 배후에는 궁중 비사가 감춰져 있다. 영조가 출궁하기 직전에 궁인 문씨가 대비 인원왕후에게 회초리를 맞은 것이다. 문녀가 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와 다투다가 막말을 했다고 한다. 인원왕후는 내명부의 기강을 바로잡고 왕통을 분명히 하고자 했다. 이에 사도세자가 보는 앞에서 궁인 문 씨를 무릎 꿇리고 매질했다(박하원, [대천록]).

소식을 들은 영조는 불같이 화를 냈다. 자신의 아기를 밴 총희가 매 맞고 치욕을 당한 것이다. 그걸 세자가 봤다고 하니 마치 자기가 모욕당한 것 같았다. 양위 선언은 그 죄를 묻기 위해 임금이 벌인 한바탕 푸닥거리였다. 가장 괴로운 사람은 사도세자였다. 아들이 눈보라 속에서 피 흘리며 사죄한 뒤에야 아버지는 몽니를 거두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나마 대비 인원왕후와 중전 정성왕후가 방패가 돼줄 때는 나았다. 1757년 두 사람이 잇달아 세상을 떠나자 사도세자는 진짜 위기를 맞았다. 영조의 몰아세우기식 질책에 무방비로 노출된 것이다. 이제 세자를 변호하고 임금을 만류해줄 어른이 없었다. 혜경궁의 입지도 흔들렸다. 1759년 66세의 영조가 15세 계비를 들인 것이다. 정순왕후 김 씨다.

왕조 국가에서 국모의 자리는 비워둘 수 없다. 1759년 정성왕후의 국상이 끝나자마자 왕비 간택이 이루어졌다. 처녀 단자를 받고 6월 2일 초간택, 4일 재간택, 9일 삼간택을 했다.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진행한 결과 김한구의 딸이 영조의 계비로 정해졌다. 김한구는 충청도 서산의 가난한 선비였다. 그가 홍봉한의 집을 드나든 문객이었다는 설이 떠돌았다. 혜경궁 집안이 권세를 유지하기 위해 만만한 선비의 딸을 국모에 앉혔다는 것이다.

정순왕후의 간택 당시 일화는 의미심장하다. 김씨는 다른 처녀들과 달리 방석을 치우고 자리에 앉았다. 아버지 이름이 적혀 있어 함부로 깔고 앉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영조가 세상에서 가장 깊은 것이 뭐냐고 묻자 그녀는 인심(人心)이라고 답했다. 물은 깊이를 잴 수 있지만, 인심은 측량할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이어 어떤 꽃이 가장 좋으냐고 묻자 백성들을 따뜻하게 해주는 목화가 제일이라고 했다(강효석, [대동기문]).

15세 소녀는 어린 나이에도 속 깊고 지혜로운 면모를 보여주었다. 물론 사전에 누가 가르쳐주고 예행연습을 시킨 티도 난다. 홍봉한의 입김이 있었을까?

또 다른 일화는 정순왕후가 계비로 간택된 후 옷 치수를 잴 때의 일이다. 상궁이 뒤로 돌아달라고 하자 어린 계비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네가 돌아서면 되지 않느냐!” 서릿발 같은 왕비의 위엄이 느껴진다. 홍봉한은 만만한 선비의 딸을 골랐을지 몰라도 정순왕후는 만만하게 볼 여인이 아니었다. 세자빈이 골치 아픈 시어머니를 만난 것이다.

66세 영조가 15세 계비 들여, 혜경궁 입지 흔들


▎조선 21대 임금 영조의 어진. 영조는 숙종과 무수리 출신 숙빈 최씨 사이에서 숙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나이는 세자 부부보다 10세 어렸지만 김씨는 영리하고 강단 있는 왕비였다. 만약 영조의 적자라도 낳으면 서출인 세자의 자리를 흔들 수도 있었다. 거꾸로 동생 영창대군을 죽인 폐주 광해의 비극이 되풀이될지도 몰랐다. 혜경궁의 속내가 복잡해졌다. 사도세자의 병도 깊어졌다.

“저에게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는 울화증이 있습니다. 입시(入侍, 임금을 알현하는 일)를 마치고 나오면 울화가 극심하게 치밀어 미친 듯이 괴롭습니다. 이 병증은 의관들과 상의할 수도 없습니다. 경께서 처방을 잘 알고 계시니 몰래 약을 지어 보내주십시오.”

1753~1754년 무렵 사도세자가 장인 홍봉한에게 보낸 편지다. 임금의 신임을 잃고 안팎의 도전에 직면하면서 세자의 병은 깊어갔다. 출발은 울화증이었지만 갈수록 광기를 드러냈다. 심상치 않은 사건이 터진 것은 1757년 영조와 사도세자가 각각 모후인 인원왕후와 정성왕후의 상주를 맡았을 때였다. 안 그래도 심신이 힘들어 죽겠는데 영조의 격노와 책망이 연일 쏟아지자 세자는 돌아버렸다. 아랫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한 것이다.

“내관을 죽여 머리를 나인들에게 보이시니 흉하고 놀라웠다.” (혜경궁 홍씨, [한중록])

남편이 피가 뚝뚝 떨어지는 내시의 머리를 들고 오자 세자빈은 까무러칠 뻔했다. 계속해서 나인 여럿을 죽이더니 사람 죽이는 데 길이 났다. 혜경궁은 영빈 이 씨에게 세자의 만행을 알렸다. 영빈이 왕에게 고할까 했지만, 세자빈이 말렸다. 자신이 일렀다는 걸 세자가 알면 그예 발길을 끊을까 봐 두려웠고, 자칫 화를 당할까 봐 겁났다. 사도세자의 만행은 살인에 그치지 않았다. 궁녀들이 수시로 봉변을 당했다.

“나인들을 가까이하셨는데, 그 나인들이 순종하지 않으면 치고 때려서 피가 철철 흐른 다음에라도 가까이하시니 뉘 좋아하리오.”(혜경궁 홍씨, [한중록])

사도세자 총첩, 옷시중 들다가 맞아 죽어


▎사도세자가 아버지 영조에 명에 의해 갇혀 죽은 뒤주.
세자는 이미 유혜라는 궁녀를 가까이해 두 아들 은언군과 은신군을 낳은 바 있다. 1357년 9월에는 대비전의 침방 나인 빙애를 ‘무단으로’ 데려왔다. 여러 해 마음에 두고 있다가 인원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실행에 옮긴 것이다. 세자가 빙애를 위해 꾸민 방에는 온갖 세간이 다 갖춰져 있었다. 내수사의 왕실 재산도 ‘무단으로’ 가져다 쓴 것이다.

영조가 이 사실을 알고 노발대발했다. 돌아가신 대비에게 불경을 저지른 셈이다. 게다가 왕실 재산까지 손대다니…. 임금의 엄한 책망이 끝없이 이어졌다. 견디다 못한 세자는 죽어버리겠다고 우물에 몸을 던졌다. 못 볼 꼴을 마침 입시한 신하들이 모두 보고 말았다.

불똥은 혜경궁에게 튀었다. 세자빈은 그동안 임금의 사랑을 누려왔다. 특유의 격한 질책도 며느리에게는 자제했다. 그러나 세자가 함부로 궁녀들을 건드리자 영조는 그녀에게 화살을 돌렸다. 왜 자신에게 고하지 않았느냐고, 너는 투기도 할 줄 모르느냐고, 남편에게 잘 보이려고 그러느냐고 엄히 꾸중했다.

혜경궁은 억울했다. 투기는 칠거지악의 하나이고 궁에서는 더욱 금기시하는데 그걸 안 했다고 뭐라 하니 기가 찰 노릇이다. 허나 어이 하랴. 세자빈은 시아버지에게 욕먹는 한이 있어도 남편을 감싸려고 했다. 그렇다고 사도세자가 고마워하지도 않았다. 1760년 여름 혜경궁에게 바둑판을 던져 왼쪽 눈을 다치게 했으니…. 하마터면 눈망울이 빠질 뻔했다.

그나마 세자빈은 다행이었다. 빙애는 세자의 옷시중을 들다가 맞아 죽었다. 총애하는 첩이라도 그 심기를 거스르면 목숨을 보전하기 힘들었다. 심지어 겨우 돌이 지난 그녀의 아들 은전군도 이때 아버지에게 칼을 맞고 연못에 버려졌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아이는 혜경궁이 거뒀다.

사도세자는 공포스러운 존재가 됐다. 세 살 어린 여동생 화완 옹주도 오빠라면 벌벌 떨었다. 화완은 일찍 남편을 잃었지만, 영조에게 지극한 사랑을 받았다. 딸이 원하는 것을 부왕은 웬만하면 들어줬다. 세자는 여동생에게 칼을 들이대고 협박했다. 영조와 한 대궐에 살 수 없으니 경희궁으로 모시고 가라는 것이었다. 자신은 창덕궁을 차지하고 마음 내키는 대로 살 요량이었다. 과연 뜻대로 됐다.

세자는 화완 옹주를 꼭두각시처럼 부리며 영조를 속이고 방탕하게 살았다. 창덕궁 후원에서 말 달리고 병장기를 휘둘렀다. 여승과 기생들을 궁에 들여 잔치를 벌였다. 잔치에 청상과부 화완을 불러 오랜 시간 데리고 있기도 했다. 갑갑하면 궁 밖으로 나갔다.

1761년 3월에는 몰래 평양에 다녀왔다. 평안감사 정휘량은 공주의 시숙이었다. 세자가 온갖 접대를 받으며 원 없이 노는 동안 혜경궁과 홍봉한은 노심초사 애를 태워야 했다.

사도세자의 엽기 행각은 장인 홍봉한의 정적들에게 좋은 먹잇감이었다. 1762년 5월 경기감사 홍계희 등이 형조판서 윤급의 청지기 나경언을 움직여 세자의 비행을 고변했다. 정순왕후의 친정도 홍봉한에게 등을 돌리고 고변에 깊이 개입했다. 은전군의 어미를 때려죽이고, 평양 등지로 밀행하는 등 10가지 죄목이 펼쳐지자 영조는 격노했다. 죄상이 공론화된 이상 세자는 무사할 수 없었다.

이선 역적으로 죽지 않았기에 세손은 목숨 보전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와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함께 묻힌 융릉. 서울 휘경동에 있던 묘를 정조가 ‘천하제일의 길지’라며 화성시로 이장했다.
세자빈 또한 알고 있었다. 혜경궁은 남편의 생모 영빈과 의논했다. 그 무렵 사도세자는 부왕을 죽이고 싶다는 극언까지 하며 밤에 경희궁으로 가는 수구(水口)를 들락거렸다. 변란을 의심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세자의 운명은 바람 앞 촛불처럼 위태롭게 흔들렸다. 문제는 세손이었다. 더 늦기 전에 세손 이산을 구하는 게 급선무였다. 영빈이 비장한 결심을 하고 임금을 만나러 갔다. 그날 오후 영조가 창덕궁으로 거둥했다.

“여러 신하도 신(神)의 말을 들었는가? (세상을 떠난) 정성왕후가 나에게 이르기를, ‘변란이 호흡 사이에 달려 있다’고 했다.”([영조실록] 1762년 윤5월 13일)

정성왕후의 혼전에서 영조는 세자를 폐하고 뒤주에 가뒀다. 혜경궁과 세손은 홍봉한의 집에서 가슴을 치며 슬픔을 삭여야 했다. 폐세자 이선은 한여름에 숨 막히는 뒤주에서 8일간 버티다가 2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이는 종사를 위한 영조의 결단이었다.

사도세자는 예정된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다만 역적으로 죽지는 않았기에 세손을 건질 수 있었다. 조선은 법도를 중시하는 나라다. 임금이 변란으로 규정하면 역적이다. 그러나 영조는 세상을 떠난 정성왕후의 목소리를 빌렸기에 역적이 아니다. 죄목과 형벌은 연동돼 있다. 그런데 뒤주에 가둬서 죽이는 형벌은 없으므로 죽을죄도 성립되지 않는다.

영조는 총명하고 효심이 지극한 세손을 수렁에서 건졌다. 구제 불능의 세자는 처분하되 세손에게 ‘역적 죄인의 자식’이라는 낙인이 찍히지 않도록 해 왕통을 지켜냈다. 그해 8월 혜경궁은 남편이 죽고 처음으로 임금을 만나 세손을 경희궁에 데려가 달라고 간청했다. 아들을 영조 곁에 둬 음해세력으로부터 지켜주게 한 것이다.

1776년 세손 이산이 효장세자의 양자로서 왕위에 오르니 조선 제22대 왕 정조다. 사도세자는 1899년 후손 고종에 의해 장조로 추존됐다. 남편의 죽음을 묵인하고, 자식을 품에서 놓아준 끝에 혜경궁은 이들 부자가 국왕 반열에 올라서는 데 일조했다. 버림의 미학이요, 비정한 모정이다.

※ 권경률 - 역사 칼럼니스트, 작가. 서강대에서 역사를 공부했다. 사람을 읽고 생각하고 쓰면서 역사의 행간을 채워나간다. 팟캐스트·유튜브·페이스북에 ‘역사채널권경률’을 열어 독자들과 역사하는 재미를 나누고 있다. [시작은 모두 사랑이었다](2019) [조선을 새롭게 하라](2017) [조선을 만든 위험한 말들](2015)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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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호 (2021.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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