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이윤석의 조선 후기史 팩트추적(9)] 유리, ‘애지중지’ 보배였던 반전 과거 있다? 

지금은 흔해빠진 유리병, 신라 땐 귀한 금실로 수리 

황남대총서 출토된 국보에 흔적, 조선 때는 수입 사치품
국권 상실 후 일본인 제조 독점… 20세기 말에야 흔해져


▎전남 무안에 있는 초당대학교 본관 4층에 마련된 안경박물관. 관람객들이 조선시대의 금속코실다리 안경을 살펴보고 있다.
요즈음도 유리병에 넣어서 파는 우유가 있기는 하지만, 플라스틱이나 종이로 만든 용기에 담아서 파는 것이 훨씬 일반적이다. 배달해주는 우유도 대부분 플라스틱이나 종이로 만든 용기에 담은 것이다. 유리병에 넣은 우유를 배달하던 시절에는 배달하는 사람이 빈 우유병을 수거하는 일도 맡아서 했다. 우유 회사에서는 빈 우유병을 다시 세척해서 쓰는 것이 경제적으로 더 유리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정부에서는 유리병의 재활용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법률을 제정하고, ‘빈용기보증금제도’를 만들어서 시행하고 있다. 빈 병의 회수율과 재활용 횟수가 환경 선진국 만큼은 높지 않지만, 우리나라도 앞으로는 점점 더 높아질 것으로 예상한다. 어쨌든 이제 한국에서는 유리병이 그렇게 귀중한 물건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유리병뿐만 아니라 거울이나 유리잔 같은 유리로 만든 물건도 특별히 이를 귀중하게 여기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유리로 만든 여러 가지 물건이 이렇게 흔한 것이 되면서, 명품 회사에서 만든 유리제품이라야 겨우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게 됐다.

우리나라에서 유리 제품이 이렇게 흔한 물건이 된 것은 아무래도 20세기 말이었던 것 같다. 그 전까지는 유리를 그렇게 하찮게 보지는 않았는데, 이것은 아마도 조선시대에 우리 선조들이 유리를 귀하게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신기한 물건 거울, 우스운 이야기도 많아


▎고려 초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청동거울의 뒷면 모습.
잘 알려진 거울 이야기를 하나 보기로 한다. 홍만종(洪萬宗, 1643~1725)이 쓴 [명엽지해(蓂葉志諧)]라는 우스운 이야기를 모아놓은 책이 있는데, 이 책에는 부부가 거울 때문에 다투다가 원님 앞에 가서 재판한다는 이야기가 들어 있다.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어느 시골 여자가 남편에게 서울 가면 ‘거울’이라는 물건을 사다 달라고 해 남편이 사다 줬다. 평생 거울을 보지 못한 아내가 남편이 사다 준 거울을 보니 어떤 여자가 남편 옆에 앉아 있었다. 아내는 남편이 첩을 하나 데리고 왔다고 생각해 크게 화를 냈다. 남편이 이상해서 거울을 보니 아내 옆에 어떤 남자가 앉아 있었다. 남편은 아내가 샛서방을 얻었다고 화를 냈다.

두 사람이 싸우다 거울을 가지고 원님에게 가서 이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했다. 원님이 거울을 보니 관복을 입은 원님 한 사람이 있어서, 신관 사또가 교대하러 왔다고 생각하고 급히 업무의 인수·인계를 하려고 했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전국적으로 많이 알려져서 다양한 버전이 있다. 남편과 아내 그리고 원님 모두가 거울을 처음 봤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인데, 원님까지도 거울을 처음 보았다는 설정은 조금 무리가 있다. 이 이야기는 불경에 있는 거울 이야기에서 온 것이라고 하니 근원이 오래된 이야기다.

중국과 일본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는 것으로 봐 인도에서 시작돼 동아시아로 퍼진 것이다. 원래 불경의 이야기는 실상과 가상을 혼동하는 어리석은 사람의 비유였던 이야기가 전해오면서 이렇게 우스운 내용이 됐다.

그런데 [명엽지해]의 이야기에서 남편이 서울 가서 사 온 거울은 유리 거울이 아니라 청동거울이다. 원문에는 청동경(靑銅鏡)이라고 돼 있다. 청동거울은 둥그런 청동의 한쪽 면을 곱게 갈아서 거울로 사용하는 것으로, 유리 거울이 사용되기 전에는 모두 이 청동거울을 썼다. [명엽지해]의 이야기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홍만종이 살던 시대에는 거울이라고 하면 이 청동거울을 뜻하는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조선에서는 언제부터 유리 거울을 사용했으며, 이 유리 거울은 어디서 온 것일까?

병자호란 이후 조선에서는 중국을 장악한 만주족의 청나라에 일 년에 몇 차례씩 사신을 보냈는데, 이를 일반적으로 연행(燕行)이라고 하고, 이들 사신을 연행사(燕行使)라고 부른다. 연행이란 중국 북경을 달리 이르던 연경(燕京)을 간다는 의미인데, 조선시대 약 250년 동안 여러 가지 명목으로 청나라에 간 사신의 행차는 500회가 넘는다.

연행의 공식 사절은 세 사람으로, 정사와 부사 그리고 서장관이다. 이들 공식 관리 외에 이들을 수행하는 통역관, 군인, 짐꾼 등을 합하면 대개 200~300명 정도의 대규모 사절단이 청나라를 방문하는 것이었다.

연행에서 돌아오면 공식적인 보고서를 조정에 제출했는데, 주로 서장관이 작성했다. 공식 보고서 중에 유명한 것도 있지만, 현재 잘 알려진 연행록은 개인적으로 이 연행사 행차를 따라갔던 사람들이 쓴 것이다. 그중에 가장 잘 알려진 것이 바로 박지원의 [열하일기]다.

연행사는 지금으로 치면 외교사절이지만, 당시에는 정부에 특별히 외교관이 정해진 것이 아니므로, 그때그때 적당한 인물이 뽑혀서 연행사가 됐다. 이들 세 명의 관리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사람이나 친척 등을 데려갈 수 있었다. 공식 사절은 정해진 구역 이외에는 나갈 수가 없지만, 개인적으로 따라간 사람들은 자유롭게 북경 시내를 다닐 수 있었기 때문에 많은 곳을 구경할 수 있었다.

박지원은 8촌 형인 박명원이 1780년 연행의 정사가 돼 북경을 갈 때 그를 따라 중국여행을 하면서 자유롭게 중국 구경을 할 수 있었다. 18세기 말에 이런 방식으로 북경 여행을 한 사람이 많은데, 그들 중에 박지원·이덕무·홍대용 같은 사람들이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이다. 19세기 초에는 추사 김정희도 아버지의 수행원으로 북경을 다녀왔다.

이들이 쓴 글에 유리를 언급한 대목이 있다. 홍대용은 러시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비달자(大鼻㺚子)는 곧 아라사니몽고의 별종이다. 그 사람들은 모두 코가 크며 흉하고 사납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코가 큰 오랑캐’라고 부른다. 이 나라는 사막 밖의 먼 지역에 있다. 그 땅에서는 모피와 유리 거울이 나는데, 우리나라가 북경의 시장에서 사 오는 것이다.”

러시아산 거울, 중국 통해 유입


▎19세기, 앉아서 얼굴을 볼 수 있게 경사지게 만든 화장용 거울 좌경(坐鏡).
18세기 후반부터 조선에서는 유리 거울을 중국에서 수입했는데, 이 거울은 러시아에서 제작한 것이었다. 거울에 대한 기록은 19세기 초에도 이어지는데, 1832년 서장관으로 북경에 간 김경선은 아라사(러시아)를 설명하면서 “북경의 시장에서 사 가지고 오는 유리 거울과 모피 대부분은 그 나라 산물”이라고 말했다.

속담에 “배꼽에 어루쇠를 붙인 것 같다”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어루쇠는 거울을 말한다. 이 속담의 의미는 배에 거울을 붙이고 남의 속을 훤히 본다는 의미로, 눈치가 빨라서 남의 속을 잘 알아차리는 것을 말한다. 사전에는 어루쇠를 “구리 따위의 쇠붙이를 반들반들하게 갈고 닦아서 만든 거울”이라고 했다.

그런데 1828년에 연행사의 수행원이 기록한 글에는, “아라사(俄儸斯)의 중국 발음은 어라시(於羅澌)이고, 우리나라에서는 유리 거울을 어리쇠(於里衰)라고 한다. 이것은 아라사에서 생산되는 아주 두꺼운 유리를 가리키는 말이 여러 번 잘못 전해지면서 이렇게 된 것”이라고 했다. 현재 표준어로 ‘어루쇠’라고 하는 말이 19세기 초반에는 ‘어리쇠’라고도 발음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와 같은 어원의 추정이 맞는지 틀리는지는 알 수 없으나, 중국에서 들여오는 유리 거울이 러시아제인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1830년에 작성된 공문서에 수입을 금지하는 물품의 목록을 적은 것이 있는데, 여기에는 산호·호박·수정·유리·대모 등의 보석류가 들어 있다. 그러나 수정으로 만든 안경과 유리로 만든 면경(面鏡)은 제외했다. 이것으로 19세기 초에 조선에서는 상당한 양의 안경과 거울을 수입했음을 알 수 있다.

유리는 대단히 아름답고 신비한 물질로 과거에는 값비싼 귀중품이었는데, 지금은 값싸고 흔한 물건이 됐다. 만약 현대인에게 유리를 보배라고 생각하느냐고 묻는다면, 대부분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일곱 가지 보배를 말하는 칠보(七寶)는 금·은·유리·진주·거거·마노·매괴를 말하는데, 거거(硨磲)는 거거조개의 껍질이고, 마노(瑪瑙)는 석영 계통의 보석이며, 매괴(玫瑰)는 붉은색 보석이라고 한다.

칠보는 불경에 나오는 말로 진주나 매괴 대신에 산호 같은 보석이 들어가기도 하는데, 유리가 여기에 포함돼 있다는 것은 신기하다. 불경에서 말하는 칠보 중의 유리는 청금석을 말하는 것이지,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인공으로 만들어낸 유리는 아니다. 그런데 자연석이 아닌 인공적으로 만든 ‘유리’도 오래전부터 귀중한 것이었다.

신라 때부터 유리는 아주 귀중한 것이었다. 유리제품이 얼마나 귀중한 물건이었나 하는 것은, 국보 제193호로 지정된 유리병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공식 명칭은 ‘경주 98호 남분 유리병 및 잔’으로 정해진 이 국보는 높이 25㎝ 정도 되는 병 하나와 지름이 10㎝쯤 되고 높이도 약 10㎝ 정도인 잔 세 개다.

국보로 지정된 병과 잔은 1973년부터 2년 동안 진행된 경주 황남대총 발굴 때 나온 물건이다. 그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유리병은 봉황의 머리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해 ‘봉수형 유리병’이라고 한다. 이 유리병은 발견 당시 이미 깨어져 있어서 180개의 조각이 난 상태였다고 한다. 1980년대 1차 복원을 해서 원형을 찾았으나, 30년이 지나면서 문제가 생겨 2014년에 해체해서 다시 조립했다.

이 유리병이 얼마나 귀중한 것이었나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있는데, 유리병의 손잡이에 감겨 있는 금으로 된 실이다. 병의 손잡이에 감겨 있는 금실은, 깨어진 손잡이를 고정하기 위해서 감아놓은 것이라고 한다. 이 유리병의 손잡이는 무덤에 묻기 전에 이미 세 조각으로 깨져 있었기 때문에, 이를 금실로 묶어서 수리해놓은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정하고 있다. 이 금실의 순도는 22K(약 92%)라고 한다.

황남대총은 약 1500년 전에 조성된 무덤이다. 그러니까 5~6세기 무렵 신라에서는 파손된 유리병의 손잡이를 금실로 감아서 수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 이는 유리가 금처럼 귀중한 물건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가야·마한·백제·신라의 무덤에서는 많은 유리구슬이 출토되는데, 당시 신분이 높은 사람들은 이 귀중한 유리구슬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유리제품의 상당수는 현재의 중동 지역이나 동남아시아에서 제작한 것이라고 한다.

조선 후기 유리 제품은 모두 수입품


▎경주 황남대총 남분에서 출토된 7점의 유리 용기 중 하나인 ‘봉황 모양 유리병’. 손잡이 부분에 금실이 감겨 있다.
조선 후기에 국내에서 소비된 유리 제품은 모두 수입품이었으므로, 유리 제품은 가격이 비싼 사치품이었다. 19세기 후반에 편찬된 것으로 알려진 [동국여지비고]라는 책에 “안경방(眼鏡房)과 석경방(石鏡房, 석경은 유리거울을 말함)이 서울의 여러 곳에 있다”고 한 것으로 보면, 안경과 거울을 판매하는 가게가 꽤 여러 군데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가게는 단순히 수입한 물건을 판매하는 곳이지, 유리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었다.

고전소설 [춘향전]에도 유리로 만든 제품이 여러 가지 등장한다. 춘향의 어머니 월매가 이도령이 온다는 말을 듣고 술상을 준비할 때 중국에서 수입한 유리병이 나오고, 춘향이 이도령에게 술을 따라줄 때는 유리잔에 부어준다. 월매와 춘향은 기생으로, 그 집에서 쓰는 물건들은 당대 최고급이다. 이 소설에 유리병과 유리잔이 나타나는 것은, 이 두 가지가 고급 사치품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변사또의 생일잔치를 화려하게 장식하기 위해 걸어놓은 등 가운데 유리 등이 있는데, 이것 또한 고급 물건이다.

[춘향전]에는 고급 물건의 예로 유리 제품이 나타날 뿐만 아니라, 방안에서 밖을 내다보기 위해 방문에 붙여놓은 유리도 나온다. 새로 부임한 변사또가 춘향을 잡아 오라고 해 포졸들이 춘향의 집에 들어가면서 큰 소리로 춘향을 찾으니, 춘향이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 앉아 유리 구멍으로 엿보니” 포졸들이 들이닥친다.

요즈음에는 거의 보기 어렵지만, 한옥에는 밖에서 인기척이 나면 방안에서 밖을 내다보기 위해 문에 붙여놓은 조그만 유리가 있었다. 1960년대까지 한옥에서는 모두 이 유리를 통해 밖을 내다봤지, 문을 열고 밖을 보지는 않았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반에 유리 제품이 수입되기 시작하면서, 19세기 중반이 되면 서울을 중심으로 광범위한 유리제품의 소비가 이뤄졌다. 유리 거울·유리잔·유리병·유리 등잔 등이 바로 이를 증명한다. 그리고 외국에 문호를 개방하면서 서양인들에 의해 장지문에 창호지를 바른 문이 아닌 창틀에 유리를 끼운 건물들이 속속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에 조선에서도 유리를 자체적으로 생산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1883년 8월에 주사 박제순을 용진(龍津) 파리국(玻璃局) 봉판(幇辨)에 임명한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파리국’은 유리 제조를 위해 세운 회사라고 한다. ‘파리’는 ‘유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박제순은 이 해에 과거에 급제했으므로, 이때는 낮은 직급이었다. 파리국에 관한 기사는 1885년에 또 한 번 나오는데, 양화진에 이 관청이 있었다는 내용이다.

소설 '춘향전'에도 최고급 유리잔 등장


▎프랑스 절대왕정 시기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베르사유 궁전 안에서도 백미로 꼽히는 ‘거울의 방’. ‘태양왕’ 루이 14세 때 조성돼 궁정 의식을 치르거나 외국 특사를 맞을 때 사용됐다.
전우용의 ‘서울 이야기’에서 파리국을 다룬 내용을 보면, 파리국에 서양인을 고용해서 유리 만드는 일을 하려고 했으나 흐지부지됐다고 한다. 또 1902년에는 이용익이 국립유리제조소를 설립했으나, 이 또한 큰 성과 없이 폐쇄됐다고 한다.

이처럼 유리를 자체적으로 생산하려던 여러 가지 시도는 모두 무위에 그쳤다. 1908년 어떤 잡지에 실린 유리에 관한 전문적인 글에서는 동양에서는 좋은 유리를 제조하지 못한다고 하며 “우리나라에서는 지금까지 보통 유리도 제조하지 못하니, 정말로 개탄할 일”이라고 했다. 결국 조선에서는 유리를 독자적으로 생산하지 못했고,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이후에는 일본인이 유리 제조를 독점하게 된다.

신라나 백제가 유리 제조 기술을 자체적으로 가지고 있었다는 연구도 있지만, 설사 그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조선 시대까지 전승되지는 못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전문 연구자들의 연구를 통해서 밝혀질 수 있을 것이다.

2022년은 유엔이 정한 ‘국제 유리의 해’이다. 전문적으로 유리를 다루는 사람이 아니면 별로 관심이 없는 것이겠지만, 유리라는 물질이 인간의 생활과 얼마나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가는 내년이 국제 유리의 해라는 사실을 통해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International Year of Glass 2022’의 홈페이지에는 유리가 우리 사회에 주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해 놓았는데, 스마트폰의 액정화면을 보호해주는 데 강화유리가 쓰이고 있고, 또 강화유리로 만든 용기가 코로나19 백신 연구의 용기로 쓰이고 있다는 것을 얘기한다. 그리고 고고학자들이 고대 무역 경로를 연구하는 데도 유리는 도움을 주고 있으며, 또 우주망원경을 통해 우주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데도 유리가 이용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유리는 매우 신비한 물질로, 딱딱함에도 불구하고 유리는 고체가 아니라 액체로 분류한다고 한다. 남편이 사다 준 유리 거울을 들여다보고 첩을 데리고 왔다고 생각한 시골 아낙네가 거울 속의 여인이 자기 자신인 줄 알기 위해서는 유리 거울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유리가 액체라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입자의 배열에 관해 알아야 한다. 아무래도 유리 공부를 좀 해야 할 것 같다.

※ 이윤석 - 한국 고전문학 연구자다. 연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2016년 연세대 국어국문학과에서 정년 퇴임했다. [홍길동전]과 [춘향전] 같은 고전소설을 연구해서 기존의 잘못을 바로잡았다. 30여 종의 [홍길동전] 이본(異本) 가운데 원본의 흔적을 찾아내 복원했을 뿐만 아니라 작품 해석 방법을 서술했다. 고전소설과 관련된 30여 권의 저서와 80여 편의 논문이 있다. 최근에는 [홍길동전의 작자는 허균이 아니다]와 같은 대중서적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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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호 (2021.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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