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선비 정신의 미학(67)] 퇴계·남명 두 스승 장점 취한 죽유(竹牖) 오운 

국난 극복 앞장, 공동체 위한 삶 실천한 지식인 

임진왜란 때 의병장 곽재우·김성일 돕고 전장에도 나선 문신
배움에는 열린 자세 취해… 집필 [동사찬요]에 기풍 드러나


▎죽유의 15대 종손 오용원 주손이 종택의 유물이 보관된 운양각 앞에 섰다. / 사진:송의호
"정몽주와 더불어 같은 마음으로 시종일관 신하의 절의를 지켰다. 그러나 의지와 절개가 확고하지 못하여 국정에 대한 원대한 의견을 내놓은 게 없었고 학문이 순수하지 못하여 불교를 숭상했다.” 조선 중기 역사서 [동사찬요(東史簒要)] ‘열전’에 나오는 목은 이색에 대한 서술이다. 두 문장은 내용이 서로 충돌한다. 앞은 이색이 신하로서 지킨 절의를 강조하고 있고, 뒤는 절개가 확고하지 못하고 불교를 숭상해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난받았음을 암시하는 부정적인 내용이다. 무슨 까닭일까.


앞 문장은 [동사찬요]의 저자가 여러 역사서를 살핀 뒤 자신의 의견을 쓴 것이고, 뒷 문장은 조선 초기 편찬된 [고려사]의 내용을 옮긴 것이다. 집필자는 역사서를 쓰면서 고증을 중시해 정사(正史) 관련 기술을 지나칠 수 없었다. [동사찬요]는 임진왜란 당시 전장에서 칼을 빼 든 문신 죽유(竹牖) 오운(吳澐, 1540~1617)이 만년에 썼다. 선생은 삼은(三隱) 등 고려말 절의파에 우호적이었다. 죽유는 당대 조선을 대표하는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을 스승으로 모시면서 절의를 숭상하던 사림파의 일원이 됐다. 그래서 그는 목은을 재평가하고 [고려사]에서 아예 빠져 있던 야은 길재를 [동사찬요] ‘열전’에 새로 넣는다.

8월 22일 선생의 자취를 찾아 경북 고령군 쌍림면 송림리 죽유종택을 찾았다. 미숭산 자락 안림천변 마을이다. 한국국학진흥원에 근무하는 오용원 주손을 만났다. 죽유의 15대 종손이다. 종택을 둘러본 뒤 먼저 사랑채 오른쪽 유물이 보관된 운양각(雲陽閣)이 궁금했다. 운양각 편액은 조순 전 부총리가 글씨를 썼다고 한다. 종손이 오랜만에 잠금장치를 해제하고 철문을 열었다. 운양각에는 [죽유집] 등 목판과 고문헌이 보관돼 있다. 보물만 7종 110점이다. 종손이 어두운 내부를 살피다가 목판 하나를 들고 밝은 출입문 쪽으로 나왔다. “이게 용케 되찾은 [동사찬요] 책판입니다.” 목판을 살펴보니 ‘동사권삼(東史卷三) 이십팔(二十八)’, 양쪽에는 신라 관련 본문이 10행씩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동사찬요] 권3 28쪽 목판이다. [동사찬요] 목판은 전체가 1200장이었다고 한다. 목판은 그동안 영주의 한 서원에 맡겨져 있다가 1979년 모두 도난당했다. 종손은 최근 들어 기가 찰 일이 생겼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잃어버린 목판이 글쎄 경매에 나왔어요. 26장을 비싸게 다시 사들였습니다.”

죽유는 영주에서 은거하던 1606년 67세에 [동사찬요]를 편찬했다. 그는 30대 후반 사관(史官)인 춘추관 기사관(記事官)을 지내는 등 역사와 연이 깊었다. 이 책은 단군조선부터 고려까지 우리나라 역사를 다루고 지명에 얽힌 내력, 열전 등을 담고 있다. 그는 75세까지 [동국통감] 등 21종의 책을 참고하며 내용을 여러 차례 수정하고 보충했다. 분량도 방대하다. 죽유는 서문에서 “내가 임진왜란을 겪은 후 궁벽한 시골에 은둔할 때 우리나라 역사를 보고 옛것을 끌어다 지금을 고증하고자 생각했다”며 책을 쓴 배경을 밝히고 있다.

위기 봉착 곽재우, 의병장으로 다시 추대


▎[동사찬요]의 초고 필사본. / 사진:한국국학진흥원
조형도는 죽유 행장(行狀)에서 당시 지도층이 이 책에 주목했음을 언급하고 있다. “오운은 처음 7권으로 엮었으며 류성룡이 이를 보고 찬탄했다. 류성룡은 선조에게 한 본을 봉진(封進, 임금에게 올리는 것)했고, 선조는 유림의 표준이 될만하다는 하교를 내렸다.” [동사찬요]는 지금 국학진흥원이 국역 중이다.

죽유는 53세에 의령에서 임진왜란을 마주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킨 망우당 곽재우는 휘하 장병이 다 흩어지는 위기에 봉착한다. 김수 경상도 관찰사가 곽재우를 토적(土賊, 지방에서 일어난 도적 떼)으로 몰았기 때문이다. 망우당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숨어 지내려 했다. 그때 죽유를 만난다. 곽재우는 죽유에 비하면 12세 아래였으며 재야의 선비였다. 같은 점이 있다면 둘 다 남명의 제자였다. 죽유는 망우당이 의병을 일으킨 것을 칭찬하며 같이 일할 것을 약속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전마(戰馬)와 건장한 종 6, 7명을 주었다.

또한 죽유는 지역 유지들이 장정을 내놓도록 권유하고, 망우당을 다시 의병장으로 추대했다. 대신 자신은 선배임에도 망우당을 도와 군사를 모으고 군량을 조달하는 일을 맡았다. 백척간두에 선 나라를 구하기 위해 자신을 낮춘 것이다. 죽유(竹牖)라는 자호(自號)에서 특히 뒷글자 ‘유’의 뜻은 바라지문 또는 들창이라고 한다. 행장에는 “주자(朱子)의 ‘대나무 바라지문은 햇볕을 향하여 열려 있다’는 뜻에서 취했다”고 적혀 있다. 방안 작은 뒷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의 밝음과 따스함이 떠오른다.

전란으로 죽유는 곽재우에 이어 학봉 김성일을 만난다. 퇴계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학봉이 초유사(招諭使)로 낯선 경상우도에 내려오자 소모관(召募官)을 맡아 그를 돕는다. 인근 지리와 제반 사정을 안내하고 지역 유림과 학봉을 연결한다. 이후 학봉은 전란 중 진주성에서 자신이 병으로 눕게 되자 맨 먼저 죽유를 찾았다. 1593년 학봉이 세상을 떠났을 때 죽유는 그 시신을 염습해 지리산에 가매장했다.

3대에 걸쳐 처가 재산 물려받아


▎[동사찬요] 권3 28쪽 목판. / 사진:송의호
그 뒤 정유재란이 발발한다. 죽유는 이번에는 직접 전란에 뛰어든다. 행장은 이렇게 적고 있다. “정유년(1597) 가을 왜적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호남을 곧바로 공격했다. 곤수(閫帥, 병마절도사) 이하 대부분이 도망가 숨었으나 공(公)은 군의 경계를 벗어나지 않고 정졸(精卒)과 정장(定將)들을 달래 적의 목을 베고 사로잡은 수가 매우 많았다. 도원수 권율이 장계를 올려 통정대부로 품계를 올렸다.” 이순신도 1597년 7월 3일 [난중일기]에 “합천군수 오운이 와서 산성에 관한 일을 많이 이야기했다”고 적었다. 이순신과 전란 관련 정보를 주고받았을 것이다. 1598년 죽유는 명나라 수군 제독 진린(陳璘)의 접반사(接伴使)로 호남 해안에서 활동했다. 흔치 않은 문신의 임진왜란 참전 기록이다. 죽유종택 운양각을 나오자 건물 뒤편으로 수령 300년 배롱나무들이 붉은 꽃을 드리우고 있다. 종택 오른쪽으로 선생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 있었다. 사당 가운데 불천위(不遷位) 죽유 선생 신주에는 ‘통정대부수경주부윤경주진병마절제사(通政大夫守慶州府尹慶州鎭兵馬節制使)’ 관직만 쓰여 있다. 문무 겸직임을 알 수 있다.

죽유 오운은 1540년 함안에서 태어나 18세에 의령에 세거하던 허사렴의 맏사위가 됐다. 장인은 많은 논밭과 노비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아들이 없고 딸만 둘이 있어 맏사위인 죽유가 그 집과 많은 논밭을 상속받는다. 장인 허사렴은 퇴계의 처남이었다. 처가는 죽유의 든든한 배경이 된다. 죽유는 19세에 김해 산해정(山海亭)으로 남명 조식을 찾아가 그 제자가 된다. 25세에는 다시 도산서당으로 퇴계 이황을 찾아가 문하에 들어간다.

죽유는 1566년 27세 때 문과에 급제해 권지성균관학유에 임명된 뒤 벼슬살이를 시작한다. 퇴계 문하 동문인 서애 류성룡은 동방(同榜) 급제한 사이가 됐다. 그러나 죽유는 첫 4년 관직을 지내고 31세에 사직하는 등 이후 사직과 출사를 반복한다. 충주목사로 재직할 때는 파면을 당하기도 했다. 당시 충주에는 관찰사 일가와 관련된 미결 송사가 있었는데 죽유가 원칙대로 해결하자 관찰사의 뜻을 거스른 것이다. 그는 광주목사 시절에도 파면을 당한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죽유의 강직한 성품이 작용했다. 이후 의령 집에 머물 때 임진왜란을 당한다. 1593년 죽유는 상주목사로 임명됐으나 얼마 뒤 병으로 사직한 뒤 새로운 근거지 영주로 돌아왔다. 장인 허사렴의 부친은 영주에 살던 문경동의 맏사위였다. 공교롭게 문경동도 아들 없이 딸만 둘이었다. 그 집과 논밭은 허사렴의 부친이 물려받고 이후 허사렴이 다시 상속했다. 허사렴의 재산은 다시 죽유에게 내려가 영주에도 집과 논밭을 얻게 된 것이다.

종택이 고령에 터 잡은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죽유의 맏아들 오여은이 고령으로 장가들어 종 60명과 일대 전답을 물려받았다. 조선 시대엔 이렇게 사위가 처가 재산을 물려받는 일이 흔했던 것 같다. 그 말에 오용원 종손은 “조선 시대 유력한 집안은 촉망받는 사위를 들여 재산을 물려주고 영향력을 유지한 사례가 상당하다”고 설명했다. 죽유는 임진왜란이 끝난 뒤 영주에 산천서당(山泉書堂)을 짓고 제자들을 기른다. 또 [퇴계문집] 간행에 참여하고 [동사찬요] 보완을 거듭했다. 그와 함께 방대한 [주자대전]을 선비들이 구해 읽기 어려운 실정을 감안해 주자가 지은 잡저(雜著)·서(序) 등을 뽑아 [주자문록(朱子文錄)]을 편찬했다. 산천서당은 훗날 죽유를 주향으로 모시는 산천서원이 된다.

1616년 77세 죽유는 공조참의에 제수된다. 그러나 그는 병으로 사양하고 대신 사직소를 올린다. 그의 강직한 성품은 만년에 더 뚜렷해졌다. 죽유는 광해군의 실정(失政)을 직설적으로 지적한다. 스승 남명의 비판적인 ‘단성소’를 닮은 직언이다. “어리석은 신은 지나치게 염려됩니다. 정치는 자애롭고 어진 것만을 우선하여 상만 있고 벌은 없습니다. 가까이 있어 자주 보는 사람들의 말만 듣고, 여자들의 청탁을 막지 못하여 기강이 해이하고 여러 가지 일이 무너졌습니다. 군사를 다스리는 일은 어지럽고 백성들은 매우 곤궁에 처해 있고, 재력은 다했고 사치는 극도에 이르렀습니다. 공신들의 집은 해마다 증가하고 관아의 힘은 날로 약해져 가고 있습니다.”

죽유는 상소 후반 대북(大北) 일파의 정권 독점을 의식해 “궁궐을 엄하게 단속하고, 치우침과 사사로움을 없애시고, 간쟁(諫諍)을 받아들이시라”라는 대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광해군은 죽유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은 채 끝내 민심을 잃고 만다. 죽유는 이듬해 영주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광해군은 예관(禮官)을 보내 제사를 지냈다. 광해군은 사제문(賜祭文)에서 “도학은 퇴계를 존모하고, 학문은 남명을 으뜸으로 삼았다(道慕退陶, 學宗山海)”고 추모했다.

“공신들의 집은 해마다 증가합니다”


▎오운의 신주가 모셔진 죽유종택 사당. / 사진:송의호
죽유는 청년 시절 남명과 퇴계 두 문하를 출입하기 시작해 두 선생이 서거할 때까지 드나들었다. 동문 누구보다 두 선생의 영향을 많이 받은 제자가 됐다. 오운을 연구한 허권수 경상대 명예교수는 두 선생의 가르침을 이렇게 정리한다. “퇴계에게 받은 영향으로는, 과거를 통해 관계에 진출했으면서도 절조를 지켜 물러나기를 좋아하고, 주자학을 중시하고 저술을 많이 했다는 점이다. 남명에게 받은 영향으로는, 성격이 강직하여 시세에 영합하지 않고 출처(出處)와 대절(大節)을 지켜 벼슬을 탐탁잖게 여겼다. 스스로 군자가 세상에 살아가면서 중하게 여길 바는 출처일 따름이라며 국난을 당해 창의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급은 [죽유집] 서문에 “뇌룡정 앞에서 출발해 암서헌 마당에서 졸업했다”고 표현했다. 죽유가 ‘남명으로 입문해 퇴계에서 꽃을 피웠다’는 뜻이다.

죽유의 강직함과 공동체를 위한 삶은 가풍이 됐다. 그런 정신은 시대와의 불화(不和)로 때로 걸림돌이 된다. 종손은 “가문이 두 차례 큰 시련을 겪었다”고 했다. 인조반정 때가 그랬고, 또 한 번은 현대 들어 좌우익이 이념으로 대립한 시기였다. 근래 지식인 후손들은 일찍이 사회주의를 받아들여 한국전쟁 때는 종택이 인민군 본부 역할을 하기도 했다. 종손은 그래서 사관학교를 가고 싶었지만, 연좌제로 단념한 아픈 기억이 있었다.

퇴계에게서 저술, 남명에게서 강직함 배워


▎사당 오른쪽 공간에 세워진 고창오씨죽유공파세거비. / 사진:송의호
종택의 사랑채 뒤로 ‘백화당(百和堂)’이란 편액이 걸린 큰 안채가 있었다. 백화당 글씨는 지금 종손의 모친(여재분)이 직접 썼다고 한다. 왕희지체로 초서에 능했다는 죽유의 글씨 정신이 집안에 이어지는 것 같았다. 죽유종택 왼편 널찍한 공간에는 한옥 신축이 한창이었다. 한 채는 이미 지어졌고 또 한 채가 다시 벽체 공사 중이다. 종손은 한옥을 건설업체에 맡기지 않고 자신이 직접 설계하고 시공한다고 설명했다. 재목이며 벽돌을 직접 구입하고 공사용 굴삭기까지 장만하니 공사비가 크게 들지 않더라는 것이다. 그 일이 즐거워 보였다. 그는 장차 한 채를 더 지어 여기서 무료로 서당을 운영할 계획이라고 했다. 또 연말쯤엔 운양각에 보관 중인 [죽유집] 목판 120장을 국학진흥원에 맡길 생각이다.

죽유는 편협하지 않았다. 그는 배움의 길에서 한 스승만을 고집하지 않았다. 남명을 찾아가 제자가 된 뒤 다시 퇴계의 문하에 들었다. 그는 열린 자세로 당대 조선을 대표하는 대학자 퇴계와 남명의 장점을 두루 취할 수 있었다. 그래서 역사서를 쓰면서 수정과 보완을 거듭하는 치밀함을 보였고, 국난을 당해서는 창의해 몸을 던질 수 있었다. 그는 스승의 겸양을 본받아 후배를 의병장으로 추대할 줄 알았고, 정유재란 시기에는 직접 전장에 뛰어든 문신이었다. 죽유는 공동체를 위한 삶을 실천한 지식인이었다.

[박스기사] 임진왜란 때 나라 구하기에 큰 힘된 죽유의 인맥 - 경상 좌·우도, 남인·북인 등 지역과 당파 가리지 않아

재지사족(在地士族)이란 말이 있다. 조선 시대 향촌을 지배한 지식계층으로 볼 수 있다. 죽유 오운은 경남 함안의 재지사족 출신이었다. 죽유 가문은 함안을 벗어나 의령, 고령, 합천 등 경상우도 인근은 물론 멀리 경상좌도의 안동, 예안 등지 명문가와 혼인을 맺은 영남의 ‘빵빵한’ 재지사족이었다.

죽유의 조부 오언의는 송재 이우의 사위가 되었다. 이우는 퇴계 이황의 숙부로, 어린 시절 퇴계의 학문 성장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함안에서 이우의 본가가 있는 예안 도산은 200㎞가 넘는다. 그 거리를 뛰어넘은 혼인이다. 죽유 자신은 의령의 재지사족 허사렴의 사위가 됐다. 허사렴은 퇴계의 처남이다. 죽유는 퇴계 가문과 이래저래 연이 만들어진 것이다.

죽유의 맏아들 오여은은 신재 주세붕의 아들인 주박의 사위가 됐다. 또 둘째 아들 오여벌은 학봉 김성일의 아들 김집의 사위가 됐고, 셋째 아들 오여영은 점필재 김종직의 현손 김성률의 사위가 됐다. 죽유의 딸은 생육신 조려의 5대손 조형도와 혼인했다. 또 죽유의 손녀이자 맏아들 오여 은의 딸은 내암 정인홍의 손자 정릉에게 출가했다. 정인홍은 당시 대북파(大北派)의 영수로 광해군의 신임을 독점하고 있었지만, 죽유는 자신의 영달을 위해 혼맥에 기대지 않았다.

죽유는 의병장 망우당 곽재우와도 남이 아닌 사이였다. 망우당은 죽유의 처가와 혼인으로 연결돼 있었다. 망우당의 부친 곽월은 죽유의 처종고모부였다. 또 망우당 휘하에서 싸운 허도는 죽유의 아들 오여은의 사돈이었다. 죽유 가문은 이렇게 낙동강 좌우의 김해 허씨, 진성 이씨, 선산 김씨, 서산 정씨, 순흥 안씨 등과 혼인하고, 당색은 남인과 북인이 됐다. 또죽유 자신은 퇴계와 남명 두 스승을 출입하며 폭넓은 동문 기반까지 만들었다. 그를 둘러싼 씨줄 날줄 인맥은 영남 명문가를 두루 이었다.

죽유의 이러한 재지사족과의 폭넓은 혈연적 유대관계와 학맥은 그가 의병 활동을 수행하는 데 큰 힘이 됐다. 죽유는 자신의 가문은 물론 처가의 재지사족과 유대를 바탕으로 군사를 모으고 군량을 조달해 망우당과 학봉을 도울 수 있었다.

-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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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호 (2021.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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