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선비 정신의 미학(68)] 17세기 조선 대표 성리학자 여헌(旅軒) 장현광 

벼슬에 정착 않은 나그네, 학문과 우주를 떠돌다 

30여 차례 관직 받고도 거절, 피란 중에도 역서 챙기는 등 주역에 매진
평생을 학자로 일관… 성리학 바탕 독창적 우주론 펼친 과학사상가


▎인동장씨남산파종회 장세영 총무국장(왼쪽)과 동락서원 장진수 운영위원이 동락서원 강당인 중정당 앞에 섰다. / 사진:송의호
"도망친 사람은 모두가 밤에 밥을 지어 먹고 꼭두새벽이면 숨는데 해가 지고 왜적이 물러간 뒤 숲에서 나왔다. 낮에 산을 뒤지는 왜적이 소나 말, 개 짖는 소리나 아이들 울음소리를 추적하자 샛길에 숨은 사람들은 소·말·개는 물론 심지어 어린아이까지 버렸다.” 임진왜란 당시 피란을 한 선비가 자신이 목격한 참상을 적은 [용사일기(龍蛇日記]의 한 부분이다. 군졸의 전투 실상도 그려져 있다. “풍문을 듣거나 멀리서 바라만 보고도 스스로 무너져 버리니, 적을 향해 진을 치거나, 화살을 쏘는 군졸이 있음을 듣지 못했다. 임금에 충성하거나 존장을 위해 죽으려는 기풍은 아예 없었다.” 군졸은 고을로 왜적이 쳐들어온다는 소문을 듣기만 해도, 멀리서 보기만 해도 스스로 무너지고 마는 꼴이 됐다는 뜻이다.

이 일기를 쓴 선비는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1554~1637) 선생이다. 당시 그가 살던 경북 칠곡군 인동(仁同)과 주변 왜관 지역은 왜적이 쳐들어오는 길목이어서 피해가 극심했다. 전쟁 전 1000여 명이던 인동 고을은 피란에서 돌아오니 6~7명밖에 없었을 정도였다. 장현광은 임진왜란이 나기 6개월 전 모친상을 당한다. 전란이 발발하자 39세 여헌은 어머니 신주를 등에 메고 상복 보따리, 역서(易書) 한 권을 챙겨 가족과 함께 금오산으로 피란했다. 역마살이 낀 삶의 시작이다. 이후 금오산이 위험해지자 다시 가야산, 성주, 의성 등지로 떠돌다가 전란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인동 집은 잿더미로 변해 있었다.

9월 16일 여헌이 태어난 구미시 인동 종택을 찾았다. 구미공단 외곽에 자리한 종택에서 인동장씨남산파종회 장세용 회장과 장세영 총무국장을 만났다. 종택 왼쪽으로 모원당(慕遠堂)이 있었다. 제자 장경우가 여러 친척과 의논해 전란으로 소실된 집터에 여헌이 정착할 수 있도록 소박함을 담아 서향으로 다시 지은 건물이다. “당시 형편이 넉넉잖아 관청을 짓고 남은 기와를 얻어와 지붕에 얹었다고 해요.” 모원당 앞에 당시를 지켜보았을 수령 400년 가까운 회화나무가 있었다.

모원당 뒤쪽 건너편은 산자락이다. “저기가 남산(南山)입니다.” 그곳엔 수영장 등 대형 시설이 들어서 산의 모습은 찾기가 쉽지 않다. 근래 새로 지은 口형 종택에는 ‘남산고택(南山古宅)’이란 편액이 걸려 있다. 인동장씨 남산파란 명칭은 여기서 유래한다. 종택으로 들어가 선생 관련 이야기를 들었다.

여헌은 집이 잿더미가 된 탓에 다시 떠나야 했다. 그는 풍기 소백산 등지를 전전한다. 돌아보면 그는 조선 역사상 가장 불행한 시기를 살았다. 39세에 맞닥뜨린 임진왜란을 시작으로 43세엔 정유재란, 74세엔 정묘호란 그리고 83세엔 병자호란을 겪어야 했다. 그뿐이 아니다. 55세 이후 14년은 상식을 벗어난 광해군 시대를 살았고 70세엔 인조반정이란 쿠데타를 거쳤다. 말 그대로 내우외환(內憂外患)의 연속이었다.

임진왜란·병자호란 등 가장 불행한 시기에 살아


여헌은 험난한 시대를 학자의 길로 헤쳐 나간다. 그는 9세에 자형 노수함한테서 처음 글을 배운다. 이어 14세엔 집안 어른 장순에게 [주역]을 배우다가 [성리대전] 황극편(皇極篇)을 보고 난 뒤 스승 없이 학문을 파고든다. 여헌은 특히 [주역] 공부에 매달렸다. 임진왜란으로 피란을 가면서도 어머니 신주와 함께 역서를 챙겨 갈 정도였다. 그러한 열정으로 학문은 일찍이 자리를 잡아 그는 18세에 이미 ‘우주요괄십도(宇宙要括十圖)’를 지어 재주와 행실이 알려졌다.

여헌은 처음에는 과거시험을 생각한 것 같다. 21세에 안동 하과(夏課)에 응시했고, 28세엔 향시에 합격했다. 이후 과거를 본 기록은 없다. 여헌은 38세에 모친상을 당한 이후 전옥서(典獄署) 참봉을 제수받는다. 조정이 내린 첫 관직이다. 하지만 상례가 끝나지 않아 부임하지 않았다. 조정은 이후 30여 차례 학덕으로 그를 내·외직에 임명한다. 그러나 여헌은 대부분 상소를 올리고 사직한다. 특히 70세 이후 인조 시기엔 형조참판, 이조판서, 공조판서, 의정부 우참찬 등 고위직에 임명되지만 계속 사직했다. 다만 42세에 보은현감과 50세에 의성현령 자리는 부임한다. 두 고을 수령을 맡은 11개월이 벼슬살이의 사실상 전부였다. 그는 이렇게 평생을 벼슬 대신 학자로 일관했다.

여헌이 보은현감에 제수된 것은 1595년(선조 28). 관직으로 네 번째 내려진 자리다. 여헌은 조정의 명을 마냥 거부할 수 없어 관로(官路)로 나아갔다. 그는 첫 부임지에서 나이 많은 어른과 자제를 모아 놓고 예의를 강론하고 효제를 권장하며 덕을 베풀었다. 그러나 상부의 지시는 현지 사정과 맞지 않은 게 많았다. 정령(政令)을 따르려면 서류 행정을 해야 할 형편이었다. 그는 관찰사에게 사직원을 냈다. 조치가 없자 거듭 사직원을 제출한다. 그러고도 답이 없자 그는 결단한다. 여헌은 이듬해 부임 5개월 만에 관직을 버리고 낙향해 버렸다. 덕치(德治)는 짧았지만 애민정신은 전해진 것일까. 향민은 여헌이 떠나는 날 남녀노소가 길을 따라 나와 더 머무르기를 원했다.

사직원 제출에 답이 없자 ‘무단 낙향’


▎한국국학진흥원에 보관돼 있는 장현광의 ‘피란록’. / 사진:한국국학진흥원
조정은 여헌의 무단 사직을 내버려 두지 않았다. 여헌을 금부로 압송한다. 죄명은 허락을 받지 않고 임의로 관직을 버린 것은 임금을 모독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다행히 경연관들이 그의 편에 서서 변론했다. “선비를 나치(拿致, 죄인을 관서로 잡아 옴)해 추국하는 것은 옳지 못한 태도입니다.” 당시 순안어사 이시발도 거들어 여헌은 석방됐다. 보은 향민은 그 뒤 청덕비(淸德碑)를 세워 덕을 기리고 살아 있는 여헌의 사당을 지어 칭송했다. 그 뒤 50세엔 의성현령으로 부임했지만, 문묘(文廟)의 대성 이하 3위판이 분실돼 그 책임을 지고 6개월 만에 물러났다.

여헌은 학문의 길을 걸으면서 폭넓게 교유한 편이었다. 학맥을 따지면 처음 글을 배운 노수함이 박영의 문인이고 박영은 다시 정붕-김굉필-김종직으로 계보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면서도 그는 남명 조식 문하를 드나든 한강 정구의 조카사위가 되고, 퇴계 이황의 제자인 서애 류성룡의 아들 류진을 가르쳤다. 거기다 미수 허목을 제자로 두어 기호학파와도 교유했다. 그는 그렇게 경상 좌·우도는 물론 기호학파와도 두루 소통했다.

종택을 떠나 서쪽으로 3.5㎞ 떨어진 낙동강변 여헌기념관으로 이동했다. 사단법인 여헌학연구회가 시비 8억원 등 24억원을 들여 2014년 개관한 공간이다. 입구에 초상화를 형상화한 여헌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연구회는 동상 옆에 여헌을 “성리학자이자 과학사상가”라고 새겨 놓았다. 성리학적 자연철학을 바탕으로 독창적인 우주론을 펼쳤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발발한다. 43세 장현광은 전란을 피해 청송 속곡으로 들어갔다. 그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여헌(旅軒)’이라는 자호를 쓰고, 내력을 담은 ‘여헌설’을 짓는다. 여헌은 ‘나그네의 집’이라는 뜻이다. 난리를 피해 정처 없이 떠돌던 자신의 신세를 나그네로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 ‘헌’은 집, 정처(定處)라는 뜻이니 역설적이다. 그는 소유에 얽매이지 않은 산림처사로, 가서 머무는 곳을 자신의 집으로 여겼고 궁극에는 우주를 집으로 삼았다.

여헌은 이듬해 봉화 도심촌으로 옮겨 자연과 더불어 지낸다. 그때 가까이 와 머무르던 서애 류성룡을 찾아간다. 서애는 여헌의 됨됨이를 익히 듣고 있었다. 백형인 겸암 류운룡을 통해서다. 겸암은 7년 동안 인동현감으로 있으면서 여헌의 인품을 유심히 관찰했다. 여헌을 보은현감으로 추천한 이도 인품을 전해 들은 서애였다. 서애는 여헌을 만난 뒤 아들 류진을 그 아래서 공부하도록 한다. 서애는 여헌이 “신념이 확고하고 기상이 온화해 그 뜻을 빼앗을 수 없다”고 소개했다.

1606년(선조 39) 인동에는 모원당이 완공되고 죽장 입암에는 제자 정사진 형제가 주도한 만활당(萬活堂)이 지어졌다. 이때부터 여헌은 인동과 입암을 거점으로 안정을 찾고 어려운 가운데 갈고닦은 학문은 일가를 이룬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여헌은 인동에서 90㎞나 떨어진 입암으로 들어가 방대한 [역학도설(易學圖說)]을 쓰기 시작한다. 사육신 하위지의 묘갈명도 짓는다. 1623년 인조가 즉위하면서 70세 여헌은 주목을 받는다. 반정을 한 인조가 덕을 베풀 목적으로 초야에 묻힌 학덕 있는 선비를 널리 초빙한 것이다. 인조는 여헌을 사헌부 지평에 제수한 뒤 교자를 내려보냈다. 그러나 여헌은 이번에도 상소하고 사직했다. 인조는 이후에도 여헌에게 형조참판, 사헌부 대사헌, 이조판서, 공조판서, 의정부 우참찬 등 20여 차례 관직을 내렸으나 그때마다 사직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류성룡, 여현의 인품 보고 아들 스승으로 모셔


▎여헌 장현광의 종택인 경북 구미시 인동 남산고택. / 사진:송의호
여헌이 관직에 수없이 임명되고도 그토록 거절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 황위주 경북대 교수는 그 이유를 “50대 이전은 학덕에 걸맞지 않은 말단 자리가 많았고, 광해군 시기는 폭정으로 나아가기 어려웠으며, 70세 이후엔 나이가 너무 많아 관직을 맡기가 어려웠을 것”이라며 “그러나 더 핵심적인 이유는 역시 어린 시절부터 몰두한 학문에 대한 정열과 애착 때문이었을 것”으로 분석한다. 여헌은 관직을 사양한 뒤 원회당(遠懷堂)·입암정사(立巖精舍)·부지암정사(不知巖精舍)를 중심으로 제자들과 학문을 강론하고 저술하는데 대부분 시간을 보냈다.

1628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는 강화도로 피란하면서 여헌을 호소사(號召使)로 삼는다. 여헌은 명을 받고 의병과 군량을 모아 행재소(行在所, 임금이 임시로 머무르는 곳)로 가려다가 적과 화해했다는 말을 듣고 그만두었다. [영조실록]은 여헌 등의 덕망으로 그 무렵 나라가 일촉즉발 위기를 벗어난 기록을 전한다. “정묘호란 시기 호병(胡兵)이 황해도 평산까지 왔다가 김장생·장현광·정경세 등이 조정에 있음을 듣고 즉시 군사를 거두어 돌아갔습니다. 사직의 안위와 민심의 거취에 그 중대함이 이와 같습니다.” 원로는 자리에 있기만 해도 나라에 큰 힘이 된다는 것이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난다. 청병(淸兵)이 서울로 침입해 임금이 남한산성으로 피란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는 여러 고을에 통문을 돌려 의병을 일으키게 했다. 그러나 그는 이듬해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했다는 말을 다시 듣는다. 84세 여헌은 세상에서 은퇴하는 뜻으로 죽장 입암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6개월 뒤 세상을 떠났다. 인조는 부고를 듣고 조회와 민간의 저자를 이틀 동안 파하도록 했다. 상례는 입암에서 발인해 인동으로 돌아올 때 상여를 따르는 선비가 500여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여헌은 “우주 간 사업으로 임무를 삼겠다”는 18세 당시의 다짐 그대로 평생 생명과 문화의 기원을 탐색했다. 그가 이룬 학문 세계는 여헌기념관 제1전시실에 소개돼 있다. 그의 역학(易學)과 성리설(性理說)은 17세기 조선을 대표한다는 평가를 듣는다. 장세영 국장은 “[성리설]은 국역 중이지만 필생의 역작인 [역학도설]은 관련 학자들이 여태 손을 대지 못할 만큼 어렵다”고 소개했다. 평생을 역학 연구에 몰두한 여헌은 수많은 학설을 종합하고 정리한 뒤 간간이 자신의 견해를 곁들이고 350여 개 그림을 붙여 [역학도설] 9권을 집필했다.

그는 78세 만년에는 [우주설]을 짓는다. “대지가 두텁고 무거우면서도 추락하지 않는 것은 하늘을 둘러싸고 있는 대기가 쉬지 않고 빠르게 돌면서 대지를 떠받치기 때문”이란 이론이다. 이 설은 조선 후기 홍대용 등의 우주설에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그래서 여헌은 국립과천과학관에 관련 안내문이 설치되고 과학사상가로 재평가되고 있다. 그의 저술은 자제도 그 이름을 다 알지 못할 정도로 많다고 한다.

대표 저술 <역학도설> 국역은 “학계의 난제(難題)”


▎동락서원 묘우(廟宇)에 모셔진 여헌의 초상화. / 사진:송의호
기념관을 나와 수출대로를 건너니 널찍한 낙동강을 옆에 둔 동락서원(東洛書院)이 나왔다. 여헌을 기리는 공간이다. ‘동락’은 ‘동쪽의 이락(伊洛, 송나라 유학 중흥지)’이란 뜻이다. 강당인 중정당(中正堂)을 돌아 묘우로 올라가는 왼쪽에 비각이 보였다. 제자 허목이 지은 여헌의 신도비다. 허목은 스승이 정승 이정귀가 시정(時政)에 우선할 일을 묻는 말에 “오늘날 나라의 큰 근심거리는 남을 의심하는 데 있다”는 답변으로 정곡을 찔렀다고 적었다. 묘우에 들러 참배했다. 위패 왼쪽으로 큼지막한 철문이 보였다. 굳게 닫힌 문을 열자 눈에 익은 선생의 초상화가 나타났다. 서원 오른쪽으로 여헌이 제자를 가르친 3대 강학당 중 하나인 부지암정사가 있었다.

여헌은 부나 명예보다 학문과 자연을 가까이한 유학자였다. 또 내적인 수양을 통해 사람을 감복케 하는 낙천적인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그의 이력에 아쉬운 대목도 있다. 일부 후손은 ‘조상이 관직에 나가 업적을 남긴 게 없고, 전장에서 공훈을 세운 것도 없는데 무엇이 대단한가’ 의문을 던진다고 한다. 이유야 어떻든 수백 명 제자를 둔 여헌은 임진왜란·정유재란 시기에 나라를 지키는 데 앞장서기보다 피란으로 그친 기록만이 전한다. 그렇더라도 그의 학문적 성취는 별개로 연구하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박스기사] 어떤 사람도 받아 들이는 ‘나그네의 집(여헌·旅軒)’ - 44세에 처음 쓴 여헌이라는 호에 인생관 집약돼

장현광은 44세에 처음으로 ‘여헌(旅軒)’이라는 호를 스스로 썼다. 이전까지 그는 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여헌설(旅軒說)’이란 글에서 여헌이라는 호를 쓰게 된 까닭과 여헌이라는 호가 지닌 의미 등을 서술하고 있다. 여기엔 여헌의 인생관이 집약돼 있다. 김기탁 전 상주대 총장은 “그런 점에서 ‘여헌설’은 여헌을 이해하는 가장 확실한 기록”이라고 말한다.

장현광은 여헌설에서 더 일찍 호를 쓰지 않은 것은 자신의 덕과 지식이 무르익지 않아 호를 부를 만한 자격이 없었다고 적었다. 그러나 존비(尊卑)와 장유(長幼)가 뚜렷한 시대에 호가 없으면 자신은 물론 타인에게 여러모로 불편을 줄 수 있어 호를 쓴다고 밝히고 있다.

여헌은 ‘나그네의 집’이라는 뜻이다. 여헌은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임진왜란 등을 당하면서 많은 곳을 옮겨 다녔다. 그래서 여헌에서 ‘여(旅)’ 자를 택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뜻이 자신의 생애에 한정되지 않고 천지간 존재하는 만물이 모두 나그네 아닌 것이 없다고 덧붙인다. 천지도 생성 소멸하니 이 또한 여(旅)의 개념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헌(軒)’은 집을 뜻한다. 그러면 전전하는 형편에 무슨 헌이 있을까. 여헌은 이렇게 말한다. “높은 당우(堂宇)만이 헌이 아니다. 그늘을 드리우는 나무 밑도 내 헌이요, 흰 구름이 머무는 바위 위도 내 헌이다. 풀이 우거진 개울가도 내 헌이요, 맑은 바람이 부는 산기슭도 내 헌이다. 하루 동안 헌도 있고 더러는 며칠간의 헌도 있고, 또 몇 달간 헌도 있고, 때로는 한 계절을 지나는 집도 있다.”

여헌은 이렇게 대자연을 자신의 집으로 생각했다. 이 헌에서 여헌은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하는가? 그는 이렇게 답한다. “학문을 좋아하는 선비도 만나고, 시를 좋아하는 한량도 만나고 농사꾼도 만난다. 더러는 생각이 딴판인 몹쓸 인간도 마다하지 않는다. 만나 무엇을 하는가? 문사를 만나면 글을 이야기하고 시인을 만나면 시를 읊고 농부를 만나면 농사일을 말하고 어부를 만나면 고기잡이를 이야기한다.”

여헌은 이렇게 선, 불선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을 받아들이고 어떤 사람과도 마음을 열어 함께 즐길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여헌은 나아가 “생성 소멸하는 형기(形氣)의 세계는 우주의 객이요. 불변의 이(理)는 우주의 주인”이라며 자신의 마음을 우주와 동체로 만드는 자유인을 지향했다.

-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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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호 (2021.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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