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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의 상해임정 27년사(11)] 총리 이동휘, 대통령 이승만 탄핵에 앞장서다 

미국의 위임통치 청원 문제 삼은 사회주의 운동가들 

통합임정 주도권 잡으려던 이동휘의 속셈
상해 여론 악화와 안창호 반대로 무위 그쳐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 간부들이 1920년 3월 1일 미국 워싱턴에서 3·1절 1주년 기념식을 마치고 기념촬영을 했다. 앞줄 가운데가 이승만 당시 임정 집정관총재, 그 오른쪽은 김규식 당시 구미외교위원장. / 사진:국가보훈처
안창호 [일기]에 의하면, 1920년 1월 16일 오전 10시경 총리 이동휘가 방문했다. 이유는 러시아 공산당 공작원 포타포프와 교섭할 일 그리고 대통령 이승만에 관한 일을 상의하기 위해서였다. 안창호와 이동휘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상의했는지는 당일 [일기]에 기록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후의 [일기] 내용을 통해 소비에트 러시아 밀사 파견과 이승만 탄핵이 상의 됐음을 알 수 있다.

예컨대 1920년 1월 25일 총리 비서장 김립이 안창호를 방문해 이렇게 말했다. “원세훈, 남공선, 홍도 등 모모인(某某人)이 아령(俄領)으로부터 대의사(代議士·임시의정원 의원) 6인을 오게 하며, 북간도에서 온 대의사에게 동정자(同情者) 되기를 운동하며, 의정회(議政會·임시의정원)가 개회하는 때 이승만 대통령과 현임 총장들을 다 갈고 박용만, 노백린을 중심으로 하여 정부를 승인식으로 조직하기로 음모가 있다.” 이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좀 더 상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우선 대통령 탄핵 음모의 배후자로 언급된 원세훈, 남공선, 홍도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 상해 임시정부의 현황 전반에 관한 안공근의 4월 29일 자구두보고’라는 제목의 1922년 5월 18일 자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 자료에, “문창범은 전직 순사에 술주정뱅이면서 출세에 급급한 인물이었던 원세훈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는 안공근 진술이 있다. 안공근은 안중근 의사의 둘째 동생인데, 그의 진술에 의하면 국민의회 의장 문창범의 배후 조종자가 원세훈이었다. 한편 남공선과 홍도는 한인사회당 간부였다. 따라서 1920년 1월경 이승만 탄핵 음모의 배후 세력은 바로 국민의회와 한인사회당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승만 겨냥해 비난 수위 높인 이동휘


▎1920년 12월 28일 상하이에서 열린 이승만 초대 임정 대통령 환영회 모습. 대통령 이승만(가운데)의 옆에 카이젤 수염을 기른 국무총리 이동휘(왼쪽)와 내무부장 안창호(오른쪽)가 서 있다. / 사진:독립기념관
그런데 안창호에게 이런 음모를 알린 이동휘와 김립 역시 한인사회당 간부였다. 이동휘는 한인사회당의장, 김립은 총비서였다. 따라서 남공선과 홍도가 국민의회 실세 원세훈과 대통령 탄핵을 음모했다는 것은 이동휘 지시하에 했음을 암시한다.

이동휘는 통합임정에 참여하기 위해 상해로 온 후 집요하게 이승만을 공격했다. 예컨대 주요한의 [안창호전서]에는 “이동휘가 상해에 도착해 정부 각 원 취임을 승낙하지 아니하면서, 이승만을 ‘썩은 대가리’라고 공격하기 시작했으니, 그것은 주로 소위 ‘위임통치’ 청원서에 관한 문제였다”는 내용이 있다. 여기 언급된 위임통치 청원서란 이승만과 정한경 명의로 윌슨 대통령에게 보낸 청원서를 지칭한다. 그 청원서는 1919년 2월 25일 작성됐고, 3월 3일 제출됐다.

그 청원서는 “미국 대통령 각하. 대한인국민회(국민회) 집행위원회는 이 청원서에 서명한 대표자로 하여금 아래와 같은 공식 청원서를 각하께 제출하게 했습니다”는 말로 시작하는데, 핵심 내용은 “각하께 청원하는바, 각하는 파리 평화회의에서 우리의 자유를 주창해 평화회의에 모인 열강으로 하여금 먼저 한국을 일본의 학정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장래 완전 독립을 보증하시며, 잠시 한국을 국제연맹 통치하에 두게 해주십시오”라는 구절에 함축돼 있다.

이런 청원서 내용이 미주 한인사회에 알려졌을 때 별문제가 없었다. 이승만과 정한경은 개인 자격으로 위임통치를 청원한 것이 아니라, 국민회 집행위원회 승인에 따라 청원했기에, 그들의 청원은 곧 미주 한인사회의 청원으로 이해됐기 때문이다. 청원 당시 국민회 총회장은 안창호였다. 안창호의 국민회는 미국 본토와 하와이는 물론 멕시코, 연해주, 만주에도 지부를 뒀으므로 국민회의 승인은 곧 해외 한인 동포 전체의 승인이라 할 수 있었다. 또한 청원서가 작성되던 1919년 2월 25일은 아직 3.1운동 이전이라, 임시정부도 없었고 이승만 역시 한성정부의 집정관 총재도 아니었고, 통합임정의 대통령도 아니었기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울러 당시 상황에서 국제연맹 위임통치 청원은 승전국 일본을 대상으로 한국 독립을 성취하기 위한 현실적 방안으로 이해됐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은 상해임정 조직 때 큰 논쟁거리가 됐다. 이승만이 초대 국무총리로 추천되자 신채호는 위임통치 청원을 들어 반대했다. 무력투쟁을 주장하던 신채호는 위임통치를 청원한 이승만이 독립 의지가 없는 사람이라며 반대했다. 이와 관련해 현순 목사의 [현순 자사(自史)]에는 “신채호가 총리로 추천된 인사 즉 이승만, 박영효, 이상재 등을 반대하고 박용만을 추천하니 그때 청년 중에 현창운이 골계적으로 신채호를 추천하매 회중이 제성대소(齊聲大笑)하매 신씨 발노이주(發怒而走)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는 상해임정을 조직하던 대다수 인사가 위임통치 청원을 문제시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다만 신채호, 박용만 등 무력투쟁을 주장하던 일부 인사들이 위임통치를 명분으로 국무총리 이승만에 반대했다. 즉 위임통치 청원이 독립 의지 없음이라는 주장은 이승만 반대파들의 악의적 주장에서 비롯됐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악의적 주장은 상해임정 요원들에게 통하지 않았다. 1차대전 승전국인 일본을 대상으로 실제 독립을 성취하려면, 자체 무력만 가지고는 불가능하므로 열강을 대상으로 하는 외교 활동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게 상해의 주류 여론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통합임정에 참여하기 위해 1919년 9월 상해에 온 이동휘가 새삼스레 위임통치를 쟁점화하며 대통령 이승만을 공격했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통합임정의 독립운동노선을 외교노선에서 군사노선으로 바꾸기 위해서였다. 군인 출신인 이동휘는 오래전부터 무력투쟁을 통한 독립운동을 주장해왔다. 통합임정에 참여하면서도 군사노선을 주장했고, 군사노선을 실현하려면 우선 외교노선을 제압해야 했다. 당시 상해임정의 외교노선은 이승만으로 대표됐다.

통합임정 내 군사노선 세력의 응집


▎대한인국민회 미국 하와이 지방총회 임원들. / 사진:독립기념관
이승만은 외교노선에 따라 상해에 오지 않고 워싱턴에서 구미위원부를 조직했다. 이승만은 구미위원부에서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열강을 상대로 상해임정 승인과 원조 그리고 한국 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을 전개했다. 그런 대통령을 이동휘가 ‘썩은 대가리’라 공격했다. 그것은 곧 이승만의 외교노선은 썩은 대가리나 주장할 수 있는 어리석은 노선이라는 의미와 같았다. 그래서 신채호나 박용만이 위임통치 청원을 구실로 이승만의 국무총리 선출을 반대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동휘 역시 위임통치 청원을 구실로 이승만을 썩은 대가리라 공격하며 외교노선을 제압하려 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

둘째는 통합임정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서였다. 1919년 9월 11일 개정된 임시헌법 제15조에서는 임시대통령의 직권에 대해 “1. 법률의 위임에 기(基) 하거나 혹은 법률을 집행하기 위해 명령을 발포 또는 발포케 함. 2. 육·해군을 통솔함. 3. 관제(官制), 관규(官規) 제정하되 임시의정원의 결의를 요함. 4. 문무관을 임명함. 단 국무원과 주외(駐外) 대사, 공사를 임명함에는 임시의정원의 동의를 요함. (중략) 8. 외국의 대사와 공사를 접수(接受)함. (하략)”이라고 규정했다. 이런 헌법 규정은 임시대통령에게 내치, 외교, 군사 등 통치 대권이 집중됐음을 알려준다. 따라서 헌법대로 한다면 이동휘는 대통령 휘하의 실권 없는 총리에 불과했다. 한인사회당 강령에 따라 사회주의 운동을 추구하는 이동휘와 김립은 이런 총리를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동휘는 위임통치 청원을 구실로 대통령을 공격해 무력화시키려 했다.

이동휘의 대통령 공격에 대해 상해임정 여론이 어떠했는지는 1919년 12월 3일 자의 ‘안현경이 이승만에게 보낸 편지’에 잘 나타난다. 이 편지에 의하면 이동휘는 어떤 환영회 석상에서 “오늘 여(呂)씨 같은 외교가나 자치운동이나 위임통치하는 외교가를 원치 않는다”는 말로 은근히 대통령을 공격했다. 여기 등장하는 ‘여씨 같은 외교가’는 여운형을 지칭한다. 당연히 ‘위임통치하는 외교가’는 이승만이다. 당시 상해임정에서 여운형과 이승만은 외교 노선을 대표하는 입장에 있었다. 이동휘는 이승만의 외교노선만 공격하기가 뭐해 여운형까지 통틀어 공격했다.

하지만 이동휘의 대통령 공격에 상해 여론은 격분했다. 그 사실 또한 1919년 12월 3일 자의 ‘안현경이 이승만에게 보낸 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 편지에 의하면 이동휘가 위와 같은 주장을 하자 상해 민심은 큰 분쟁이 나게 돼 세 차례나 국민대회를 개최했다. 물론 이동휘를 비판하기 위해서였다. 결국 1919년 9월에서 11월까지 두 달에 걸쳐 이동휘가 위임통치 청원을 구실로 대통령을 공격해 무력화시키려던 시도는 민심만 크게 잃고 실패했다.

소비에트 러시아와 손잡은 탄핵 찬성파


▎한성무관학교를 졸업하고 궁전진위대장에 임명된 이동휘(앞줄 가운데). 군인 출신인 그는 통합임정에서 무력투쟁을 통한 독립운동을 주장했다. / 사진:성재이동휘선생기념사업회
그랬던 이동휘가 1920년 1월 다시 위임통치 청원을 구실로 대통령 탄핵을 들고나온 것은 상황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상황 변화란 러시아 공산당 공작원 포타포프의 공작이었다. 1919년 12월 상해에 출현한 포타포프는 중국인,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사회주의 혁명 공작을 벌였다. 특히 한국인들에게는 (파리) 강화회담, 국제연맹 그리고 연합국 정부에 대한 희망이 무익하다고 주장하며 소비에트 러시아와의 관계 수립을 공작했다.

한국인 중에서는 한형권, 안창호, 여운형 등이 포타포프를 만났다. 한인사회당 간부인 한형권은 1920년 1월 15일쯤 이동휘에게 포타포프와의 교섭 문제를 보고했다. 그 자리에는 김립, 남공선 등 한인사회당 간부들이 참석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당연히 포타포프와의 협상 문제도 토의했을 것으로 이해된다. 그 토의를 바탕으로 한형권은 1920년 1월 21일 포타포프와 협상해 4가지를 합의했다. 첫째,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승인할 것. 둘째, 한국과 소비에트 러시아는 제국 침략주의자 일본을 타도하기 위해 적군(赤軍)의 무기와 기타 군수품을 한국 독립군에게 공급할 것. 셋째, 시베리아에 한국 독립군 사관양성소를 개설할 것. 넷째, 소비에트 러시아는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차관을 제공할 것이었다. 이 같은 합의가 실제 성사된다면 통합임정은 친러 정부가 되고, 그렇게 되면 이동휘 등 한인사회당 간부들이 통합임정을 주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대통령이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입장에서 위와 같은 4가지 사업은 아주 중요한 외교적, 군사적 사업이었다. 당연히 대통령에게 보고해 결재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미국, 영국, 프랑스 등과의 열강 외교를 중시하는 이승만이 위와 같은 사업에 동의할 가능성은 작았다. [김철수친필유고]에 의하면, 소비에트 러시아 차관에 대해 안창호는 “소련의 돈은 도둑놈의 돈이다. 준 대로 안 쓴다”라며 반대했다. 안창호보다 강경한 이승만이라 소비에트 러시아 차관에 반대할 것이 명약관화했다. 그래서 한인사회당 간부들은 이승만을 탄핵함으로써 소비에트 러시아와의 교섭을 성사시키고 또 안창호와 제휴함으로써 대통령 탄핵과 주도권 장악을 실현하려 했다. 그 결과 1920년 1월 16일 오전 10시경 이동휘가 안창호를 만나 포타포프와 교섭할 일, 그리고 이승만에 관한 일을 상의했다. 한인사회당 간부들이 안창호와의 제휴를 통해 대통령 탄핵을 성사시키려한 배경과 목표는 아래와 같았다.

첫째, 당시 안창호는 한인사회당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동휘와 김립은 마치 전해 들은 것 같은 태도로 대통령 탄핵 음모를 알림으로써 자연스럽게 안창호 참여를 유도하려 했다.

둘째, 상해임정과 국민의회 통합에 반발해 통합임정에 참여하지 않은 국민의회 의장 문창범이 대통령 탄핵 주범이라 알림으로써, 안창호의 불안감을 불러일으키려 했다. 1919년 후반기의 상해임정과 국민의회 통합 과정에서 안창호는 문창범과 이른바 승인, 개조 논쟁을 벌이면서 통합결렬 상황까지 몰렸다. 그때 이동휘가 통합임정에 참여함으로써 간신히 부분적인 통합이나마 가능했다. 하지만 문창범은 불만을 품고 통합임정에 참여하지 않았다.

따라서 안창호 입장에서 문창범의 대통령 탄핵 음모는 겉으로 이승만을 겨냥했지만 실제는 안창호 자신을 겨냥했다고 해석할 수 있었다. 이승만은 통합임정의 상징 인물인데, 그런 대통령이 탄핵당한다는 것은 결국 통합임정의 약점을 폭로하는 것이고, 통합임정의 약점은 궁극적으로 불완전한 통합임정을 조직한 안창호의 책임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통합임정 불신하는 문창범도 탄핵 음모에 가담


▎일제 주요감시대상 인물카드 문창범 전후면. / 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셋째, 이동휘는 대통령 탄핵 음모에 안창호가 참여하면 안창호와 연대해 주도권을 장악하고, 참여하지 않는다면 문창범과 연대해 대통령을 무력화시키려 했다. 1919년 9월 11일 개정된 임시헌법에 따를 때 문창범과 이동휘의 대통령 탄핵 음모는 불가능했다. 임시헌법 제21조 14항은 “임시대통령의 위법 또는 범죄행위가 유(有)함을 인(認)할 시(時)는 의원 5분의 4 이상의 출석, 출석원 4분의 3 이상의 가결로 탄핵 또는 심판함을 득(得)”이라고 규정함으로써 의정원이 대통령을 탄핵할 수 있게 규정했기 때문이다.

1919년 9월 11일 개정 임시헌법 제20조에 따르면 임시의정원 의원은 경기, 충청, 경상, 전라, 함경, 평안각 도 및 중령(中領) 교민, 아령(俄領) 교민에서 각각 6인 그리고 강원, 황해 그리고 미주 교민에서 각각 3인을 선출하도록 규정됐다. 따라서 임시의정원 의원은 경기, 충청, 경상, 전라, 함경, 평안 각 도 및 중령 교민, 아령 교민에서 선출된 48명과 강원, 황해 그리고 미주 교민에서 선출된 9명을 합친 총 57명이었다. 그러므로 임시헌법에 따라 57명 의원 중 5분의 4 이상인 46명 이상 출석에 출석의원 46명 중 4분의 3 이상인 35명 이상만 찬성하면 대통령 탄핵이 가결될 수 있었다. 임시헌법에 따라 임시의정원은 2월 개회 예정이었다.

김립은 “원세훈, 남공선, 홍도 등 모모인(某某人)이 아령으로부터 대의사 6인을 오게 하며, 북간도에서 온 대의사에게 동정자 되기를 운동”이라 안창호에게 전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문창범과 이동휘는 아령의 임시의정원 6명과 중령의 임시의정원 6명을 합한 12명을 기반으로 대통령 탄핵을 음모했는데, 그 수는 대통령 탄핵에 필요한 46명 이상에 훨씬 못 미쳤다. 그래서 문창범과 이동휘는 박용만과 노백린을 끌어들였다. 박용만과 노백린 역시 통합임정에 불만을 품고 참여하지 않았던 인물들이다. 박용만은 신채호와 연결됐고, 신채호는 경상도와 함경도 사람들이 주축인 신한국동맹단에 참여했다. 따라서 신채호를 매개로 경상도와 함경도 의원 12명을 포섭한다면 포섭 가능한 의원은 24명에 이른다. 여기에 개별적으로 의원 포섭에 나설 경우 30명 내외까지 가능할 수 있지만 탄핵에 필요한 46명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이동휘 속셈 알아채고 안창호는 극력 반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동휘가 대통령 탄핵을 음모한 이유는 설사 성공하지 못해도 탄핵당한 대통령을 무력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만약 안창호가 참여한다면 대통령 탄핵은 충분히 가능했다. 안창호 계열의 의원들이 30명 정도로 다수였기 때문이다. 안창호가 참여해 대통령 탄핵이 성사되면, 이동휘가 대통령이 됨으로써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다. 결국 대통령 탄핵이 가능하든 가능하지 않든 이동휘는 불리할 것이 없다는 계산이었다. 이런 계산에서 이동휘와 김립은 대통령 탄핵 음모를 안창호에게 알렸다.

하지만 안창호는 대통령 탄핵에 극력 반대했다. 대통령이 탄핵당하면 이동휘가 주도권을 장악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신이 허수아비처럼 될 것을 꿰뚫어 봤기 때문이다. 안창호는 자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동휘가 대통령 탄핵을 강행한다면 통합임정에서 사퇴하겠다고 했다. 만약 안창호가 사퇴하고 미국으로 돌아가서 이승만과 임시정부를 조직하게 되면 이동휘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될 수 있었다. 통합임정도 잃고 상해 민심도 잃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계산에 없던 일이었다. 결국 이동휘는 1920년 4월 23일 안창호 앞에서 대통령 탄핵 포기를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하지만 아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잠시 때를 기다린 것일 뿐이었다.

※ 신명호 - 강원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02302호 (2023.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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