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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석의 조선 후기史 팩트추적(24)] 조선시대 사형제도는 어떤 식으로 집행했나 

사형에 해당하는 중범죄는 반드시 국왕의 재가 받아야 

우발적 살인엔 교수형… 고의 살인한 경우에는 참수형
최대한 사정 참작해 사형 집행 피할 방도 찾았던 정조


▎정조는 중죄인을 심리할 때 낮이고 밤이고 그 정황을 생각하며 의심스러운 것이 있는지 따져봤다고 한다. ‘정조대왕 능행차 공동 재현’ 행렬이 2022년 10월 9일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노송지대를 지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한국 형법상 법정 최고형은 사형이다. 하지만 1998년 이후 사형을 집행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국제적으로는 실질적 사형 폐지국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사형제도에 대해 일반 시민은 물론 법률가 사이에서도 찬반 의견이 매우 팽팽하다고 한다.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법률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아주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시대 이전 법률에 이미 이런 조항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사법과 행정이 분리된 것이 아니어서, 행정기관이 재판을 맡아 처리했다. 예를 들어 곤장을 치는 정도 죄는 각 지방 군수나 현감 정도 관리가 독단으로 처리할 수 있었다. 이보다 큰 죄는 각 도 관찰사가 처리했다. 그러나 죄가 유배에 해당하는 정도가 되면 중앙으로 올려 보내야 했다. 특히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는 국왕의 재가를 받아야 했다. 조선은 잘 정비된 법률체계를 가진 나라지만 국왕이 통치하는 국가였다. 따라서 대부분 국정 사항의 최종 결정 권한은 국왕이 갖고 있었다.

조선시대 중요한 법령집인 [대명률]에 따르면 ‘다투다 때려 살인하면 교수형에 처하고, 고의로 살인하면 목을 베는 형에 처한다’고 했다. 법률 집행을 맡은 관리들은 가능한 법조문에 나와 있는 대로 처벌하기를 원했다. 따라서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는 사형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겼다. 반면 국왕은 가능하면 사정을 참작해 죄인을 죽이지 않을 방도를 찾았다.

정조는 자신이 통치하는 기간 사형에 해당하는 죄인을 심사한 기록을 모아 [심리록]이라는 책을 남겼다. 여기에는 1000건이 넘는 사건을 하나하나 심사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 기록을 검토한 연구자들에 따르면 정조는 3.2%만 사형을 확정했다고 한다. 조선 전기 90% 정도였던 사형 확정 비율이 영조 때 60%대로 낮아졌고, 정조 때는 3%대로 떨어졌다는 것이다(문준영, 심재우 등의 연구에 의함). 정조가 판결한 사건 몇 가지를 통해 사형 비율을 낮춘 판결의 구체적 내용이 무엇인지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 신여척 사건이다. 이 사건의 요지는 정조 13년(1789) 전라도 장흥에 사는 신여척이 같은 동네 사람 김순창을 발로 차 이튿날 죽게 했다는 것이다. 사건의 내막은 다음과 같다. 김순창은 아우 김순남에게 집을 봐달라고 하고 부부가 밭에 나가 김을 매었는데, 아내가 돌아와서 보니 보리 두 되가 줄어 있었다. 아내에게 그 말을 들은 형이 동생을 도둑이라고 꾸짖었고 동생은 억울하다며 울었다. 급기야 형이 절구로 동생의 머리를 때려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이를 본 이웃 모두 화가 났지만 아무도 말을 하지 못하던 가운데 신여척이 김순창을 찾아가 꾸짖었다. 이에 김순창이 신여척을 발로 차 몸싸움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신여척의 발에 차인 김순창이 죽었다.

법조문대로 처벌하길 원했던 관리들


▎조선시대 중요한 법령집인 [대명률]에 따르면 ‘다투다 때려 살인하면 교수형에 처하고, 고의로 살인하면 목을 베는 형에 처한다’고 했다. / 사진:문화재청
처음에는 김순창 집안에서 이 일을 밖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한 달 후 일이 알려져 신여척이 체포됐다. 살인죄인 만큼 전라도와 형조에서 조사해 임금에게 보고했다. 형조에서는 사람을 죽였다고 범인이 자백한 만큼 사형시킬 수밖에 없다는 의견을 올렸다. 의견서에서는 이웃집에서 형제 사이에 싸움이 났을 때 참견한 것이 문제고, 싸움을 말린다고 남을 때려서 죽게 한 것도 문제라고 했다.

형조에서 올린 의견서를 본 정조는 신여척이 고의로 사람을 죽인 것은 아니니 다시 자세히 조사해 보고하라고 했다. 그러나 형조에서는 비록 신여척이 사람을 죽이려는 마음으로 한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살인을 했으니 죄를 가볍게 할 수 없다는 의견서를 다시 올렸다. 정조는 신여척이 사람을 죽였으니 법에 따라 처벌할 수밖에 없지만 다시 한 번 여러 관계자가 이 문제를 논의하라고 회신한다. 정조의 회신에 따라 다시 논의를 거쳐 올라온 의견은 신여척의 행위는 잘못이라는 것이었다.

이처럼 국왕이 여러 차례 사건을 다시 논의하라고 돌려보냈지만 신여척 행위에 대한 신하들의 의견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중간에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는 기록이 없어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여러 차례 국왕과 신하 사이 의견이 오간 후 정조가 내린 최종 판결은 다음과 같다.

“세상에는 가끔 이상한 죽음과 우스운 살인이 있으니 신여척이 김순창을 죽인 것이 그런 것이다. 동기간에 싸우는 것은 인간 윤리와 삼강오륜 문제다. 신여척이 김순창을 책망하자 김순창이 발길질을 했고, 신여척도 맞받아 발길질을 하다 김순창이 죽은 것이다. 신여척은 재판관이 아니면서 형제간 서로 공경하지 않은 죄를 다스린 자라고 할 수 있다. 신여척을 풀어줘라.”

이렇게 사건이 마무리 돼 남의 집 형제 싸움에 끼어들어 그 중 형을 죽인 범인 신여척은 방면이 됐다. 그런데 이 판결은 해당 사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김은애 사건이나 김계손 사건에서도 판례로 이용된다.

정조, 사형 집행 최대한 줄이려 노력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화령전에 있는 정조 초상화. / 사진:문화재청
김은애는 전라도 강진에 사는 여자였다. 18세 때인 정조 13년 윤 5월 이웃에 사는 안 씨 노파가 거짓말을 꾸며 자신을 모함한 것에 화가 나 노파를 칼로 찔러 죽였다. 김은애는 살인범으로 사형당할 처지에 놓였다. 이 사건 전말은 다음과 같다. 김은애 마을에 사는 안 씨 노파는 은애 어머니에게 양식을 빌리곤 했는데, 때로는 꿔주지 않기도 해 원한이 있었다. 안노파는 손자뻘 되는 친척 아이 최정련에게 은애를 아내로 얻게 해주겠다며, 정련과 은애가 사통했다는 소문을 냈다. 은애는 소문 때문에 시집가기 어렵게 됐지만 이런 말을 믿지 않은 마을 사람과 결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결혼한 지 2년이 지나도록 안 노파는 은애가 사통했다는 거짓말을 계속 퍼뜨렸다. 거짓말과 모욕을 참을 수 없었던 김은애는 안 노파를 칼로 찔러 죽인 후 체포됐다.

강진현 현감은 안 노파 시체를 검사해 열여덟 군데 칼로 찔린 상처를 확인하고 공범이 있는지 김은애에게 물었다. 은애는 자신이 혼자 저지른 짓임을 고백하고 사람을 죽였으니 사형을 당하겠다고 말했다. 전라도 관찰사가 다시 신문했지만 앞서 말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관찰사는 완곡하게 보고서를 써서 중앙에 올렸다. 형조에서는 살인자인 김은애의 죄를 감면할 수 없다고 했다. 정조는 이 사건이 사형에 해당하는 살인죄가 분명하지만 참작할 수 있는 자료가 있는지 좌의정 채제공과 상의하라고 말했다.

그러자 좌의정 채제공은 “안 노파가 근거 없는 말을 지어내 김은애를 모함했으니 김은애로서는 노파를 죽이고 싶었을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법률에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이라 했고 정상을 참작해 용서해주라는 조항은 없습니다. 원한이 있으면 관청에 고발해 안 노파의 무고죄를 다스리게 해야지 제 손으로 죽여서는 안 됩니다. 김은애는 살인죄를 저질렀으니 용서하자는 건의를 드리기는 어렵습니다”고 말했다.

김은애가 안 노파를 죽인 사건이 발생한 지 1년 3개월이 지난 정조 14년 8월 10일 정조는 이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은 판결을 내린다.

“이 사건은 18세도 안 된 여자가 자신의 정조를 비방하는 모욕을 가한 자를 죽인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행위에 대해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았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애걸하지도 않았다. 김은애의 기개와 지조는 본받을 만하며 그가 생사를 초월해 인간으로서 윤리와 절개를 지키고자 한 행동은 남자로서도 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김은애를 특별히 석방하는데, 이는 나라 풍속과 교화에 도움이 될 것이다.”

정조는 이 판결에서 앞의 신여척 사건 판례를 들면서 김은애 사건과 신여척 사건은 같은 맥락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정조는 그리고 당대 최고 문장가 이자 학자이며 자신이 아끼는 신하 이덕무에게 김은애와 신여척의 전기를 지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심리록]에는 사건에 대한 간단한 개요만 들어 있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다. 반면 김은애와 신여척 사건은 이덕무가 지은 [은애전]에 비교적 상세한 내용이 들어 있다.

백성의 법 감정도 고려한 정조


▎2022년 7월 14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열린 헌법재판소 사형제도 공개변론에 대한 종교·시민·사회단체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손팻말을 들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김은애와 신여척 사건에 대한 판결을 내린 1780년 한 해 동안 정조가 처리한 사형수 관련 사건은 93건이었다. 각 지방별로는 서울 10건, 경기도 3건, 충청도 14건, 전라도 8건, 경상도 6건, 황해도 30건, 평안도 14건, 함경도 4건 등이다. 국왕이 각 사건에 대해 여러 차례 의견을 제시했던 만큼 사형에 해당하는 죄인 사건을 검토하는 일이 상당히 힘든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정조는 재위 기간 23년 동안 약 1100건 정도의 사형에 해당하는 죄인 사건을 검토했다. 한해 평균 약 50건 내외를 처리한 셈인데, 1780년에는 거의 두 배 정도 많은 일을 한 것이다.

정조는 판결 외에도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매우 섬세하게 신경을 썼다. 김은애 사건에서는 사후 문제까지 잘 처리할 것을 지시했다. 김은애는 애초 안 노파뿐만 아니라 자신과 사통했다는 거짓말을 퍼뜨린 안 노파의 손자뻘 되는 최정련도 죽이려고 했다. 정조는 이 문제까지 고려해 만약 김은애를 살려주면 은애가 다시 정련을 죽이려고 할지도 모르니 은애에게 정련에게 손대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아두라고 전라도 관찰사에게 지시했다. 정조가 판결을 할 때 윤리나 의리 같은 추상적 개념만 이용한 것이 아니라 백성의 법 감정까지도 고려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사례의 하나가 정조가 신여척 사건에서 인용한 ‘담뱃 가게 살인사건’이다. 이 사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 후기 서울 종로 담뱃가게는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이어서 여기에는 소설을 읽어주는 사람도 있었다. 어느 날 이야기꾼이 임경업 장군 이야기를 읽어주다가 스토리 클라이맥스인 김자점의 모함으로 장군이 죽는 대목에 이르게 됐다. 그런데 듣고 있던 사람 중 하나가 화가 머리끝까지 나 미친 듯이 일어나 “네가 자점이로구나”라고 하며 담배 써는 칼로 소설 읽는 사람을 찔러 죽였다. 이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임경업이라는 인물과 정조 무렵 소설을 읽어주는 사람에 대한 약간의 지식이 필요하다. 먼저 임경업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만주족에 패해 임금이 항복한 병자호란은 오랫동안 조선인 모두에게 수치였다. 이 시기 조선 무장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인물이 임경업이었다. 당대 많은 사람은 만약 이 전쟁에서 임경업이 제대로 활약할 수 있었으면 조선은 만주족에게 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임경업은 병자호란에서 싸움다운 싸움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 심지어 청나라에 잡혀갔다가 조선으로 송환돼서는 바로 반역죄에 연루돼 고문을 당하다가 죽었다.

임경업이 연루된 심기원의 역모 사건은 정확하게 그 전모가 밝혀지지 않았다. 따라서 그가 실제로 반역 사건과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도 자세히 알 수 없다. 임경업은 죽은 지 약 50년이 지난 숙종 때 관작이 회복됐다. 또한 이후 조정에서 대대적으로 그를 선양하는 작업을 한 것으로 보면 임경업이 이 사건에 연루됐다는 것이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이와 같은 국가의 정치적 복권과 관계없이 임경업은 민간에서도 대단히 추앙을 받았다. 특히 임경업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 [임장군전]은 매우 인기 있는 작품이었다. 임경업은 소설 속에서 청나라 장수와 국왕을 혼내주고 청나라 공주의 청혼도 거절하는 인물로 형상화된다. 그리고 소설 속에서 임경업을 죽이는 음모를 꾸민 자가 바로 김자점이다.

중죄인 심리 때 밤낮으로 정황 살펴

18세기 후반 서울 거리에는 직업적으로 소설을 읽어주는 사람이 꽤 있었다. 연암 박지원의 글에도 서울 거리에서 [임장군전]을 읽어주는 사람에 관한 얘기가 나온다. 또 여러 기록에 다른 사람에게 소설을 읽어주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정조가 항간에 전하는 이야기라고 말한 것이 바로 이 소설 읽어주는 사람과 관련된 것이다.

서울 종로 담뱃가게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이 언제 일어났고 실제로 살인이 발생한 것인지 아니면 과장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기록이 전하고 또 정조가 신여척의 판결문에서 이 이야기를 민간에 전하는 것이라고 인용한 것으로 보면 순전히 꾸며낸 일이라고 볼 수 없다. 정조가 신여척 사건을 판결하면서 첫머리에 이 사건을 언급한 이유는 당대 민간에 잘 알려진 이야기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서울 시민들은 담뱃가게에서 이야기꾼을 찌른 사람을 단순한 살인자라기보다는 김자점을 미워하는 의로운 사람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사형에 해당되는 사건 판결문 1000여 개를 모아 놓은 [심리록] 전체에서 살인을 저지른 죄인을 풀어주면서 그 살인자들에 관한 자세한 전기를 써 후세에 전하라고 한 대상은 김은애와 신여척 두 사람뿐이다. 이덕무는 두 사람의 전기를 짓고 나서 다음과 같이 정조를 찬양하는 말을 덧붙였다. “우리 임금께서는 중죄인을 심리할 때면 자신 몸이 아픈 것처럼 생각해 낮이고 밤이고 그 정황을 생각하며 의심스러운 것이 있는지 따져봤다. 김은애와 신여척은 이러한 임금을 만나지 못했으면 죽었을 것이다.”

이덕무가 써놓은 정조를 찬양하는 내용을 봉건시대 신하가 임금을 찬양하는 흔한 내용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정조가 이덕무에 갖고 있던 애정과 이덕무의 정조에 대한 존경을 생각한다면 이런 정조 찬양은 진정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정조가 죄인 심사에 얼마나 많은 시간과 공력을 들였고 또 백성을 구하려고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는지는 이덕무에 의해 더욱 잘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 이윤석 - 한국 고전문학 연구자다. 연세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2016년 연세대 국어국문학과에서 정년 퇴임했다. [홍길동전]과 [춘향전] 같은 고전소설을 연구해서 기존의 잘못을 바로잡았다. [홍길동전] 이본(異本) 30여 종 가운데 원본의 흔적을 찾아내 복원했을 뿐만 아니라 작품 해석 방법을 서술했다. 고전소설과 관련된 저서 30여 권과 논문 80여 편이 있다. 최근에는 [홍길동전의 작자는 허균이 아니다]와 같은 대중서적도 썼다.

202302호 (2023.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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