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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정신의 미학(83)] 병자호란의 ‘삼학사’ 화포(花浦) 홍익한 

청 태종 앞에서 목숨 대신 의리를 선택하다 

이정구 문하에서 수학하고 인조반정 직후 반대하는 명나라 글로 설득
군신 관계 요구하는 청 사신 목 벨 것 상소, 호란 뒤 척화파로 잡혀가


▎홍승은 후손이 사랑채 응신당에서 홍익한의 생가와 관련된 내력을 설명하고 있다. / 사진:송의호
"너는 어찌하여 동맹을 배반하고 척화(斥和) 소를 올려 두 나라를 이간질했는가?” 병자호란 직후 선양(瀋陽)으로 압송된 삼학사 화포(花浦) 홍익한(洪翼漢, 1586~1637)은 1637년 3월 홍타이지(皇太極) 청나라 태종 앞으로 끌려 나와 신문을 받는다. 분위기는 삼엄했지만 죽음을 각오한 홍익한은 무릎을 꿇지 않고 선 채로 황제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답한다. “너희 나라와 우리나라는 이미 형제 되기를 약속했는데 황제라 자칭하니 약속을 배반한 실책이 너희에게 있느냐, 우리에게 있느냐?” 화포는 10년 전 정묘호란 당시 두 나라가 군신(君臣) 아닌 형제나라로 화의(和議, 화해)한 것을 상기시킨 것이다.

청 태종이 다시 몰아세우며 묻는다. “네가 척화를 주장한 뜻은 청나라를 섬멸하려는 것인데 왜 우리를 맞아 무찌르지 않고 도리어 사로잡혀 이 꼴이 되었는가?” 화포가 다시 담담히 대답한다. “나는 다만 대의를 다툴 따름이요, 성공과 실패, 존망은 논할 필요가 없다.” 그는 이어 옷을 벗어 땅에 던지고는 “들으니 너희 나라 형(刑)은 죽일 때 반드시 살코기를 저민다고 하던데, 왜 빨리 내 살을 저미지 않느냐”고 한 뒤 붓을 청해 글을 써 내렸다. ‘명나라와 청나라, 하늘과 땅 사이에 어찌 천자(天子)가 둘이 있을 수 있느냐’며 척화를 직언한 것은 신하의 직분일 따름이라고 써 보였다. 글은 ‘오직 속히 죽여주기 바란다’로 끝이 났다.

청 태종은 좌우를 돌아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어렵겠다. 이 사람은….” 그러면서 홍익한이 올린 척화소를 내보이며 덧붙였다. “나는 어찌하여 황제가 될 수 없는가?” 화포가 바로 답했다. “너는 천조(天朝, 명나라)를 배반한 도둑인데 어찌 황제가 될 수 있겠는가?” 그 말에 홍타이지는 크게 노했다. 신문은 끝나 버렸다. 형 집행관 둘이 즉시 홍익한의 양쪽 겨드랑이를 붙들고 나갔다. 그리고 형이 집행됐다.

우암 송시열이 지은 홍익한 행장(行狀)에 서술된 내용이다. 화포가 항거한 문답은 그를 구금해 청나라로 호송한 장초(張超, 임경업 아래 무관)가 알렸다고 한다. 또 수행한 하인이 처음부터 끝까지 곁을 떠나지 않고 일기를 거두고 목격한 대강을 전했다. 다만 형 집행 당시는 하인이 별관에 구금돼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지 못했다고 한다. 이후 홍익한의 유해는 불귀의 객이 됐다. 다만 화포가 타고 간 말안장과 옷가지만 통역관을 통해 하인에게 전해져 조선으로 돌아왔다. 평택의 홍익한 묘소에는 그래서 의복만 묻혀 있다.

봉화에 세워진 14자 붉은 글씨 충렬비


12월 18일 화포 홍익한의 자취를 찾아 선생이 태어나고 자란 경북 봉화군 봉화읍 문단마을을 방문했다. 오전 11시 기온은 영하 5도에 길에는 눈이 얼어붙어 있었다. 400년 전 화포의 겨울 압송길이 문득 떠오른다. 생가터에 들어선 동호당(東湖堂)에서 홍승은 후손을 만났다. 그는 인근 영주 대영고등학교에서 교장으로 은퇴한 뒤 그 집을 지키고 있다. “250년 내려온 집이라 대들보 등을 살려 고쳐지었어요. 화포 선조가 태어난 터입니다.”

따뜻한 대추차를 마신 뒤 함께 동호당 뒤 충렬비를 둘러보았다. ‘有明朝鮮國學士/洪公翼漢忠烈碑(유명조선국학사/홍공익한충렬비).’ 비각 안에 우암이 썼다는 14자 붉은 글씨가 두 줄로 돌에 새겨져 홍 학사를 기리고 있다. 명·청 교체 시기 조선은 이렇게 빗돌에까지 명나라의 제후국임을 굳이 밝혀뒀다. 후손들은 설 명절에 한 번씩 이곳에 꽃을 바친다고 한다.

이 집의 사랑채는 응신당(凝神堂)이다. 편액 끝에 ‘회옹(晦翁)’이란 낙관이 있다. 주자(朱子)가 쓴 글씨란 뜻이다. 후손은 편액의 유래는 알지 못했다. 응신당 기둥에 차례로 주련이 보인다. “화포 선조가 처형되기 사흘 전 남긴 7언 율시입니다.” 제목은 ‘3월 3일 선양에서 근심에 잠겨 외로이 율시 한 수를 읊었다’로 돼 있다.

양지바른 언덕에 돋아나는 풀 뾰족뾰족 얼굴 내밀고/ 새장에 갇힌 외로운 새 구슬피 우네/ 옛 풍속 답청은 마음 밖의 일/ 금성(錦城, 서울)은 희미하게 꿈속에 떠오르네/ 바람 불어 밤을 휘저으니 그늘진 산이 움직이는 듯하고/ 눈 잦아들고 봄이 다하니 월굴(月窟, 달 속 바위굴)이 열리는 듯/ 배고프나 실낱같은 목숨 겨우 보전하고/ 백 년 후 오늘도 눈물이 가득할까?

사신 용골대의 목을 벨 것을 상소


▎홍익한의 봉화 생가터에 세워진 삼학사 충렬비. 송시열이 글씨를 썼다. / 사진:송의호
죽음을 앞둔 홍 학사의 스산한 심경이 담겨 있다. 이 시를 짓기 사흘 전 화포는 청나라 장수 용골대(龍骨大)의 신문을 받는다. “네가 척화론을 주창했기 때문에 잡혀 왔노라. 관원 중 척화한 사람이 많을 텐데 어찌 너 한 사람뿐인가?”

화포가 답한다. “나더러 다른 사람을 대란 말이냐, 내가 죽음이 두려워 어찌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겠느냐.” 용골대가 끈질기게 되묻는다. “너 말고 다른 사람이 더 있을 것이니 숨기지 말고 바로 말하라.” 화포가 다시 답한다. “작년 봄 네가 우리나라에 왔을 때 네 목을 벨 것을 상소한 사람은 오직 나뿐이었다.”

여기서 화포가 걸어간 길을 돌아보기 위해 1년 전으로 더 거슬러 올라가 보자. 1636년(인조 14) 봄 홍익한은 사헌부 장령 겸 춘추관 편수관으로 임명된다. 언관의 자리다. 당시 북방의 후금(後金)은 내몽골을 복속시키고 황제라 일컬으며 국호를 청(淸)이라 했다. 이후 청나라는 조선에 용골대를 사신으로 보내 황제를 섬기라고 요구한다. 조정의 척화파는 격앙됐다. 화포는 명과의 의리로 청을 물리치고 교제를 끊어야 한다며 사신을 목 벨 것을 앞장서 주장했다. 반면 최명길은 화의를 주장하며 선양에 사람을 보내 적의 정세를 탐지할 것을 청했다. 그해 12월 9일 청 태종이 군사 12만을 거느리고 조선을 엄습한다. 선봉 부대는 선양을 떠난 지 10여 일 만에 한양을 눈앞에 뒀다. 형세가 급박해지자 조정은 최명길을 적진에 보내 기세를 늦추고, 먼저 왕자와 비빈을 강화도로 피신시켰다. 인조 임금도 곧 뒤따르려 했지만 다음날 이미 길이 막혀 방향을 틀어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언관 화포는 이때부터 선양으로 끌려갈 때까지 일기 <서정록(西征錄)>을 쓴다.

전란 중인 12월 13일 화포는 직할시장 격인 평양서윤(平壤庶尹)으로 임명됐다. 화포가 화의를 배척해 이 지경이 된 만큼 그를 적의 침입로에 배치해야 한다는 논의가 나오면서다. 그는 다음날 어머니와 가족을 강화도로 대피시키고 도성을 나와 혼자 말을 타고 평양으로 향했다. 화포가 청나라 군대가 지나간 평양성에 도달한 것은 20여 일만이다. 관아의 군사와 관속은 흩어져 달아난 뒤였다. 그는 격문을 지어 백성을 안심시키고 도망친 군병과 관속이 돌아와 충성하면 죄를 씻겠다고 독려했다. 다행히 인심은 점차 안정되고 달아난 관속들도 모여들어 평양성은 온전해졌다.

그러나 인조가 화를 피해 가까스로 들어간 남한산성은 다음날 바로 적에게 포위됐다. 성안에는 군사 1만3000여 명과 백관(百官) 1000여 명 등 1만4000여 명과 식량 50여일 분이 전부였다. 지원병은 올 수 없고 추위와 굶주림으로 상황은 처절했다. 고립된 성안은 대처를 놓고 화전(和戰) 양론이 팽팽했다. 급기야 이듬해 1월 23일 강화도가 함락된다. 더욱이 그곳에 피란해 있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세자의 맏아들과 세자빈 거기다 옥새까지 적의 손에 넘어갔다. 인조는 당시 상황이 의병도, 명나라 지원군도 기대할 수 없게 되자 화의를 선택했다.

1월 30일 마침내 인조는 삼전도에 나가 청나라 황제를 향해 3배9고두를 하는 굴욕적인 항복을 했다. 강화(講和) 조건은 가혹했다, 청나라를 상국(上國)으로 섬기며 두 왕자를 볼모로 보내고, 화의에 반대한 신하들을 잡아서 보내는 내용이었다. 청 태종은 조건이 충족되자 2월 군대를 철수하기 시작했다. 화포는 척화에 앞장선 우두머리로 꼽혀 청나라에 잡혀간다. 그는 그때부터 [북행일기]를 썼다. 일기 앞부분에 잡혀가는 모습이 나온다. 인조는 2월 12일 평안도 도사인 전벽에게 평양 두리도에서 그를 형구로 얽어매 청나라에 보내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북송 5일 뒤 일행은 의주에서 부윤 임경업 장군을 만난다. 친명반청(親明反淸)에 투철한 임경업이 화포에게 말한다. “무슨 말을 하겠는가 (…) 이 행차는 참으로 남자다운 일이다. 살아서는 이미 대의(大義)를 세웠고 죽어선 역사에 이름이 빛나게 되었으니 비록 죽는다고 하더라도 무슨 한이 있으리까.” 화포가 답한다. “나의 상소로 말미암아 국사를 크게 그르쳤으니 어찌 그 밖의 일을 논하겠소.” 임경업은 화포의 행차를 챙기고 장초를 붙여 압송케 했다.

화포 홍익한은 1586년(선조 19) 경북 봉화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진사 홍이성이며 고조는 좌찬성, 증조는 관찰사, 할아버지는 현감을 지낸 명문가 출신이다. 홍익한은 어릴 때부터 효도하고 충직했으며 경전과 사서(史書), 제자백가의 문집을 즐겨 읽었다. 특히 고사(古史)를 보다가 절의(節義)로 죽은 사람이 있으면 본받으려 했다.

부인과 두 아들, 며느리까지 순절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에 들어선 병자호란 삼학사 홍익한·윤집·오달제를 기리는 사당 현절사(顯節祠). 척화파 김상헌과 정온도 함께 배향돼 있다. / 사진: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에 들어선 병자호란 삼학사 홍익한·윤집·오달제를 기리는 사당 현절사(顯節祠). 척화파 김상헌과 정온도 함께 배향돼 있다.
그가 15세가 됐을 때 백부가 후사가 없어 양자 들면서 평택으로 옮겨갔다. 거기서 영의정을 지낸 월사 이정구의 문하로 들어간다. 1606년 화포는 생부(生父)가 세상을 떠나자 여묘를 살았다. 그 뒤 생모(生母)가 돌아가시자 화포가 천릿길을 달려왔다. 하지만 형제들이 ‘전염병에 걸릴 수 있다’며 시신 모신 곳을 못 들어가게 하자 화포는 염습하지 못한 죄인이라며 끝내 들어가 곡을 했다. 생가 터를 지키는 후손은 “화포 선조는 평택으로 옮기고도 낳아 준 부모가 계신 봉화를 1년에 한두 번은 내려와 교류가 이어졌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화포는 1615년(광해 7) 생원시에 합격한 뒤 성균관에서 6년을 공부하고, 1621년 알성문과에 급제했다. 그러나 같은 해 불명확한 사유로 취소당하고 만다. 당시 홍익한 가문인 서인(西人)은 광해군의 중립 외교와 인목대비 문제로 집권 세력과 대립하고 있었다. 3년 뒤인 1624년(인조 2) 화포는 공주정시 문과에 장원 급제했다. 성균관 전적과 사헌부 감찰을 거쳐 그해 명나라 황제에게 인조의 책봉을 요청하는 성절사 서장관으로 배를 탔다. 명나라 수도 베이징으로 갔다. 이때 화포는 [조천항해록(朝天航海錄)]을 썼다. 당시 명나라는 인조 책봉에 이론(異論)을 제기했다. 그러자 화포는 재삼 글을 올리는 등, 힘을 다해 마침내 인준을 받아낸다.

삼학사의 절의는 정신적 유산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에 있는 홍익한 묘. 시신 없이 말 안장과 옷이 묻힌 무덤이다. 무덤 아래 홍익한의 신도비와 묘비, 아들 효자비, 부인의 열녀비가 세워진 포의각(褒義閣)이 있다. / 사진:평택시
1627년 정묘호란 당시 화포는 고령현감으로 있었다. 그는 청나라 군사가 국경을 넘어와 강화도에서 강홍립이 화의를 주선한다는 말을 듣고 군병을 발동시켜 밤낮을 달렸다. 그는 한양에 미처 도착하지 못했는데 벌써 화의가 성립됐다는 말을 듣고 통곡했다. 당시의 분함은 9년 뒤 병자호란 직전 ‘사신 용골대의 목을 베라’는 상소로 이어졌다.

병자호란은 화포 집안을 일거에 휩쓸었다. 화포가 뜻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릴 때 강화도에 있던 가족 넷도 순절했다. 화포의 아들 수원은 청 군사가 어머니를 덮치려 하자 막아서다 창에 찔려 목숨을 잃었다. 이를 본 어머니 허씨는 강물에 뛰어들어 죽음을 택했다. 수원의 동생 수인도 순절했다. 수원의 처 이씨도 남편이 순절하자 자결했다. 동호당 후손은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우리 선조 가족은 효자·열녀 등 4개 정문(旌門)을 동시에 받았다”고 말했다.

[조선유학사]를 쓴 현상윤은 “임진왜란을 계기로 조선에선 모화사상이 크게 일어나 명나라를 옹호하고 청나라를 배척하는 것이 대의가 됐다”고 말한다. 병자호란은 냉철히 보면 청나라를 중심으로 새롭게 재편된 동아시아 질서를 거스른 조선의 맹목이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에서 조선을 구한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킨 삼학사의 절의 또한 오래 기억할 정신적 유산일 것이다. 선비의 기개와 장부의 언행이 어떠해야 하는지 시대를 뛰어넘어 보여 주기 때문이다. 홍익한의 충렬비가 잊힐 수 없는 까닭이다.

[박스기사] 청나라도 인정한 삼학사의 애국충절 - 韓·中에서 복원된 홍익한·윤집·오달제 추모비

삼학사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의 화의를 끝까지 반대하고 선양으로 잡혀가 갖은 회유와 협박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절의를 지키다 순국한 홍익한(52)·윤집(32)·오달제(29)를 가리킨다. 이들이 보여 준 애국충절의 기개에 감복한 청나라 조정은 선양 성곽 서문 밖에 ‘三韓三斗(삼한삼두, 태산처럼 높고 북두칠성처럼 빛남)’라는 휘호를 내려 추모비를 세우고 그들의 넋을 위로했다.

그러나 이 비는 청나라가 멸망하고 세월이 흐르면서 파괴됐다고 한다. 1935년 비석 머릿돌이 발견됐다. 현지 동포들은 선양에 비를 다시 세웠는데 문화혁명 시기에 또 파손됐다.

다행히 한 동포가 이를 수습해 요녕발해(遼寧渤海)대학에 보관했다. 계룡장학재단은 이를 안타까이 여겨 중건해 보전하기로 하고 고증을 거친 뒤 원비를 재현했다. 재단은 두 기를 만들어 한 기는 요녕발해대학에 세우고 한 기는 독립기념관에 기증했다. 한편 우암 송시열은 ‘삼학사전(三學士傳)’에 ‘홍·윤·오’를 ‘삼학사’로 이름 붙이고 그들의 방대한 자료를 수집해 충절을 실었다. 교리(校理) 윤집은 최명길이 반론 제기를 싫어해 승지와 사관을 물리칠 것을 청원하는 말을 듣고 분개하는 상소를 올렸다. 수찬(修撰) 오달제는 용골대의 신문에 “몸을 굽히는 치욕이 도리어 죽음보다 심한 것”이라고 답했다.

-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202302호 (2023.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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