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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경률의 노래하는 한국사(11)] '용비어천가'에 담긴 여말(麗末) ‘역사 바로 세우기’ 

“조선 건국은 천명”… 백성의 말 모아 쓴 노래로, 왕실 권위 높이고 태조 창업 정당화한 세종대왕 

[용비어천가] 앞세워 훈민정음 반포 밀어붙이자 신하들 감히 토 달지 못해
역사 기록이 엉성한 것 참지 못한 세종, 신하들에게 역사 쓰는 법도 가르쳐


▎영화 [천문]에서 조명된 세종대왕의 모습. 정인지는 [훈민정음] 서문에서 세종을 가리켜 “하늘이 내리신 성인”이라고 했다. /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흔들릴새 꽃 좋고 열매 많나니 / 샘이 깊은 물은 가물에 아니 그칠새 내가 되어 바다로 가느니”([용비어천가] 2장)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는 역사 기록에 등장하는 최초의 한글 시가(詩歌)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반포하기 1년 5개월 전에 우리말 노래와 한역시(漢譯詩), 그리고 사적(事跡)을 엮어 첫선을 보였다([세종실록] 1445년 4월 5일).

저 유명한 2장은 순수한 우리말이 한글을 만났을 때 얼마나 아름다운 시상과 율격을 빚어내는지 보여준다. 여기 세종의 가르침이 오롯이 담겨 있다. 뿌리 깊은 나무와 샘이 깊은 물은 모든 일에 그 근원이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

‘훈민정음(訓民正音)’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다. 세종이 백성에게 가장 먼저 가르치고 싶었던 것은 바로 선대의 공덕을 높이 찬양하고 창업의 정당성을 널리 알리는 조선 건국의 노래 [용비어천가]다. 막대기로 땅을 두드리며 이 노랫말에 어울리는 곡도 지었다. [치화평(致和平)]과 [취풍형(醉豐亨)], 그리고 [여민락(與民樂)]이다. 세종대왕은 그렇게 교화(敎化)를 실현하고자 했다. 시작은 이러했다.

세종이 황산대첩 목격담을 채록한 까닭


▎〈용비어천가〉는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대왕이 신하들을 가르치며 짓게 한 최초의 한글 시가다. / 사진:국립한글박물관, 한국학중앙연구원
1442년 봄 세종이 경상도와 전라도 관찰사에게 다음과 같은 전지(傳旨)를 내렸다.

“홍무 13년 9월에 왜구가 떼를 지어 육지로 올라와 우리의 경계를 침략한 바 있다. 태조께서 군사를 이끌고 운봉에 이르러 단숨에 소탕했으니, 그 훌륭한 공과 위대한 업적은 후세에 전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당시 군마(軍馬)의 수효와 적을 제어한 방책과 접전한 숫자와 적을 함락시킨 광경 등을 반드시 본 사람이 있을 터, 경들은 도내 여러 고을의 늙은이들을 방문하여 상세히 기록하고 아뢰어라.”([세종실록] 1442년 3월 1일)

세종은 할아버지 이성계의 대표적인 공적을 자세히 알고자 했다. 홍무 13년(1380) 7월 왜선 500여 척이 금강 하구 진포로 몰려왔다. 왜구들은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를 휩쓸며 닥치는 대로 노략질하고 잔혹한 만행을 일삼았다. 9월에 이성계가 삼도도순찰사로 출정해 운봉의 황산에 웅거한 왜구들을 비로소 섬멸했다. 황산대첩이었다.

이 승전은 태조가 변방의 무장에서 구국의 영웅으로 거듭나는 전환점이었다. 덕분에 그는 중앙 요직으로 진출해 출세가도를 달렸다. 정몽주, 정도전, 조준 등 신진사대부와 손잡고 역성혁명의 야망을 키웠다. 애초에 황산대첩이 없었다면 대업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기념비적인 공적에 대해 세종은 현지 실사를 명했다. 고을을 다니면서 노인들의 목격담을 채록하라는 특명이었다. 운봉은 지리산 아래 자리한 고장이다. 당시 왜구가 경상도 함양에서 지리산을 넘어 전라도 운봉에 이르렀기에 양도의 수장에게 전지한 것이다. 세월이 흘러 60여 년이 지난 뒤였다. 직접적인 목격담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주로 구전(口傳), 백성이 살을 붙인 무용담이나 영웅담을 채록했을 것이다.

그 이야기들을 어디 쓰려고 했을까? 실록의 사관은 임금이 [용비어천가]를 짓기 위해 왕명을 내린 것이라고 밝혔다([세종실록] 1442년 3월 1일). 이성계의 황산대첩뿐만이 아니었다. 세종은 선조들의 거룩한 공덕을 발굴하고 정리해 널리 알리고자 했다.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창업의 정당성을 확고히 할 목적이었다. 이런 일에는 노래만큼 빠르고 효과적인 수단이 없었다. 이 사업은 훈민정음 창제로 날개를 달았다.

“해동 육룡(六龍)이 나르샤 일마다 천복(天福)이시니 고성(古聖)이 동부(同符)하시니”([용비어천가] 1장)

마침내 육룡이 날아올랐다. ‘용의 노래’는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 ‘훈민정음(訓民正音)’과 짝을 이뤘다. 세종은 1443년 12월 친히 훈민정음을 창제했다는 사실을 알리고, 1446년 9월 10일(양력 10월 9일)에 이를 반포했다. 그 사이에 우여곡절이 적지 않았다. 한자를 숭상하는 유자(儒者)들이 들고일어났다.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이 상소해 ‘언문(諺文)’의 부당함을 아뢨다.

“이는 대국을 따르는 도리가 아닙니다. 따로 글자를 가진 건 일본, 여진, 몽고 등 오랑캐들입니다. 중국을 버리고 오랑캐와 같아지려는 것입니까?”([세종실록] 1444년 2월 20일)

'용비어천가' 앞세워 훈민정음 반포 밀어붙여


▎전북 남원시 운봉읍에 자리한 황산대첩비지. 조선 후기 학자 정약용은 이 비문을 읽고 한시를 남겼는데 “위화도 회군을 기다릴 것도 없었다”고 했다. 황산대첩으로 태조가 이미 대세를 이뤘다는 뜻이다. / 사진:문화재청
최만리는 집현전의 실질적인 수장이었다. 위로 대제학, 제학이 있었지만 모두 고관이 겸직한 것으로 실권은 부제학이 갖고 있었다. 따라서 이 상소는 세종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 조선의 학문을 관장해온 집현전의 반란으로도 볼 수 있었다. 반발의 수위도 높았다. “상스럽고 무익한 글자”, “새롭고 기이한 기예일 뿐”이라고 매도했다. 임금이 친히 만든 글자를 상당히 과격하게 깎아내린 것이다. 이는 집현전뿐 아니라 유자들의 공론이기도 했다.

세종도 예상치 못한 바는 아니었다. 훈민정음 창제를 사전에 알리지 않고 다 만들고 나서 기습적으로 발표한 것도 그래서다. 일단 기정사실이 되면 유자들이 반발해봤자 찻잔 속의 태풍이다. 게다가 훈민정음은 그들에게도 유익했다. 골칫거리였던 한자음의 혼란을 극복해준 것이다. 같은 한자도 스승마다 지역마다 발음이 달랐는데, 한글 표음을 기준으로 자전을 만들면 손쉽게 통일할 수 있었다. 학문에 도움을 주니 유자들의 반발도 수그러들었다.

세종에게는 계획이 다 있었다. 훈민정음 첫 작품으로 [용비어천가]를 내놓은 것은 다목적 승부수였다. 제목은 임금이 직접 지은 것이다. 선대 육룡이 공덕으로 날아올라 조선의 왕업을 일구는 성스러운 시가다. 육룡은 세종의 직계 선조인 여섯 임금이다. 조선의 창업자 태조 이성계를 중심으로 고조부 목조 이안사, 증조부 익조 이행리, 조부 도조 이춘, 부친 환조 이자춘, 그리고 아들 태종 이방원을 가리킨다. 세종은 [용비어천가]를 앞세워 훈민정음 반포를 밀어붙였다. 신하들은 ‘용의 노래’에 치여 감히 토를 달지 못했다.

세종 27년(1445) 4월 5일 우찬성 권제, 우참찬 정인지, 공조 참판 안지 등이 임금에게 [용비어천가]를 올렸다.

“신 등은 외람되게 문한(文翰)의 임무를 더럽혀 민속의 칭송을 삼가 채록했습니다. 또 목조부터 태종까지 거룩하고 기이한 사적(事跡)을 빠짐없이 찾아 모으고, 옛일을 근거로 왕업의 어려움을 자세히 갖췄습니다. 편찬한 시가는 총 125장으로 노래는 국어를 썼으며 한시를 지어 풀이했습니다. 아들과 손자에게 전하시어 대업이 쉽지 않음을 알게 하소서.”

두만강의 기적? 동북면에서 왕업 일구다


▎국보 제70호 〈훈민정음〉. 간송미술관 소장. / 사진:문화재청
조정의 문장가들은 우리말 노래와 한역시, 그리고 사적을 엮어 [용비어천가] 125장을 편찬했다. 한글 가사는 대부분 2행으로 이뤄졌다. 앞절에선 중국 제왕의 고사를 끌어오고 뒷절은 이와 견줄 만한 육룡의 공덕을 노래했다. 공덕을 뒷받침하는 사실과 행적은 한문 주해로 달았다. 세종에게 [용비어천가]를 올린 권제, 정인지, 안지 등은 [고려사] 편찬의 주역들이기도 했다. 사적을 찾아 모으고 역사를 기술한 경험이 풍부했다.

“관기(官妓)로 노하심이 관리(官吏)의 탓이언마는 조기삭방(肇基朔方)을 뵈아시니이다 / 서울 사자(使者)를 꺼리사 바다를 건너실 제 이백호(二百戶)를 어느 뉘 청(請)하니”([용비어천가] 17~18장 뒷절)

목조 이안사의 노래는 이성계 집안이 동북면에서 왕업을 여는 경위가 담겨 있다. 시작은 불미스러웠다. 전주 호족 이안사가 기녀를 두고 관리와 다투는 바람에 삼척으로 도망갔다. 그를 믿고 따르는 백성 170여 호가 함께 옮겨갔다. 그 관리가 강원도 안렴사로 부임하자 이안사는 배를 타고 다시 덕원(원산)으로 피신했다. 백성들은 이번에도 붙좇았다. 목조는 그 후 원나라에 귀부하고 두만강 건너 알동에 가서 오천호소 다루가치가 됐다. 동북면 사람들이 모두 그의 덕을 우러러 심복하니 왕업이 여기서 비롯됐다.

“꾀 많은 도적을 모르사 보리라 기다리시니 센 할미를 하늘이 보내시니 / 삼한(三韓)을 남을 주리요 바다에 배 없거늘 여투시고 또 깊이시니”([용비어천가] 19~20장 뒷절)

목조의 뒤를 이어 익조 이행리가 세력을 키워나가자, 여진족 천호들이 시기해 군사를 일으켰다. 아무 것도 모르는 이행리에게 머리가 센 노파가 경고해줬다. 익조는 두만강의 섬으로 달아나려 했지만 물이 깊고 배도 없어 연안에 발이 묶이고 말았다. 절체절명의 순간, 갑자기 강물이 빠지는 이변이 일어났다. 이행리 일가는 물이 얕아진 틈을 타 강을 무사히 건넜다. 곧이어 적이 들이닥쳤을 때는 다시 강물이 불어나 추격을 막았다. 홍해, 아니 두만강의 기적이었다. 하늘이 하신 일이라며 경흥 사람들이 익조를 따랐다.

“내 백성 어여삐 여기사 장단(長湍)을 건너실 제 흰 무지개 해에 꿰니이다 / 치진(置陣)이 남과 다르사 알아봐도 나아오니 물러가던들 목숨 마치리이까 / 청(請)으로 온 왜와 싸우사 투구 아니 벗기시면 나라 소민(小民)을 살렸으리이까”([용비어천가] 50~52장 뒷절)

선조들의 덕업과 하늘의 도우심으로 태조 이성계는 ‘화가위국(化家爲國)’의 큰 결실을 맺었다. 집안이 변해 나라가 된 것이다. 이성계의 공덕은 [용비어천가]에서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한다. 황산대첩은 앞서 세종이 관찰사에게 명해 목격담을 모은 바 있다. 태조가 출정해 장단을 지날 때 상서로운 흰 무지개가 떴다. 대승의 징조다. 그가 진을 치는 걸 보고 왜장 아지발도는 다른 장수들과 다르다며 경계했다. 결국 태조는 화살을 쏘아 투구를 벗기는 신무(神武)로 적장을 죽이고 왜구를 섬멸했다.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해낸 것이다.

“창의반사(唱義班師)이실새 천리인민(千里人民)이 모이더니 성화(聖化)가 깊으사 북적(北狄)이 또 모이니 / 광부(狂夫)가 사학(肆虐)할새 의기(義旗)를 기다리사 단사호장(簞食壺漿)으로 길에 바라옵나니 / 위화진려(威化振旅)하므로 여망(輿望)이 다 모이나 지충(至忠)이실새 중흥주(中興主)를 세우시니”([용비어천가] 9~11장 뒷절)

위화도 회군은 민심, 조선 창업은 천명(天命)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의 위화도회군 관련 장면. 위화도회군으로 이성계는 권력을 장악하고 창업의 기회를 잡았다. / 사진:SBS
대업을 이루는 데 가장 결정적이면서도 정치적으로 민감한 장면은 위화도 회군이었다. 이성계는 왕명을 어기고 군사를 돌려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권력을 잡았다. 조선의 창업은 고려의 멸망을 대가로 치렀기에 각계각층의 반감이 적지 않았다. 그 빌미가 위화도 회군이었으므로 각별히 옹호하고 미화해야 했다. 천 리 회군 길에 백성들이 모여들었고 심지어 여진족까지 동참했다고 한다. 신하들은 도시락과 음료를 마련해 의로운 군대를 환영했다. 방자하고 포학한 우왕에게 민심이 등을 돌린 것이다. ‘목자득국(木子得國)’, 이씨가 나라를 얻는다는 노래가 세간에 나돌았다. 태조는 오히려 공양왕을 중흥 군주로 세워 사심이 없음을 보여줬다.

이 대목에서 [용비어천가]는 중국의 은주혁명(殷周革命)을 견준다. 은나라 주왕이 잔혹한 폭정을 거듭하자 천하의 민심은 덕망 높은 서백(西伯), 곧 주나라 문왕에게 쏠렸다. 그러나 서백은 죽을 때까지 주왕을 섬기며 충심을 지켰다. 반기를 든 것은 그의 아들이었다. 주나라 무왕은 태공 망과 주공 단의 보필을 받으며 제후들을 거느리고 은나라를 정벌했다. 하늘이 주왕을 버렸으니 천명(天命)을 받들겠다는 것이었다.

[용비어천가]에서 창업의 명분으로 삼은 것도 바로 천명이었다. 위화도 회군 당시 이성계가 군사를 돌려 강을 건너자마자 그동안 머물던 섬이 물에 잠겨버렸다고 한다. 요동정벌이고 뭐고 하마터면 다 죽을 뻔했는데 하늘이 도우사, 살아난 것이다. 불세출의 무공으로 외적을 다 물리쳐준 영웅을, 과감한 토지개혁으로 이(李)밥을 먹게 해준 은인을, 민심은 붙좇았다. 민심이 곧 천심이니, 조선 창업은 천명이었다.

[용비어천가]가 최종적으로 완성된 것은 1447년 2월의 일이었다. 훈민정음이 반포되기 전에 정인지 등이 올린 초본을 세종은 계속 보수(補修)하게 했다. 최항,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강희안 등 집현전 관리들에게 이 일을 맡겼다. 왕은 특히 육룡의 사적이 담긴 역사 주해에 관심을 쏟았다. 세종은 실무자들을 감독하며 다음과 같은 주문을 남겼다.

“용비시(龍飛詩)에 태조께서 승천부에서 (왜구와) 접전하던 상황을 보태어 넣은 것은, 속언(俗言)에는 전함이 있으나 역사에 기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빠지거나 샌 것들이 더 있을 터. 사관들과 더불어 사초(史草)를 자세히 상고하라. 선대부터 태조까지 행사한 자취를 구석구석 뒤지고 찾아서 아뢰어라.”([세종실록] 1446년 10월 11일)

불세출의 대학자였던 세종 임금은 역사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는 송나라의 사마광이 편찬한 [자치통감]을 애독했다. 정사(正史) 외에도 풍부한 자료와 고증이 담긴 294권의 방대한 저술이다. 세종은 역사를 공부하는 데 [자치통감]만큼 자세한 것이 없다며 집현전에 명해 해설서를 편찬했다. 밤늦도록 원고를 검토하고 교정하느라 눈병에 시달리기도 했다.

역사 주해, '자치통감'처럼 자료와 고증 자세히


▎[고려사]는 고려시대 역사를 전반적으로 다룬 기전체 관찬 사서다. 세종의 치세 내내 개찬이 이루어졌으며 문종 1년(1451)에 완성됐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 사진:문화재청
세종은 역사 기술이 자세하지 못한 것을 참지 못했다. 전 왕조의 공식 역사서인 [고려사]가 그의 치세 내내 완성되지 못하고 개찬(改撰)을 반복한 것도 그래서다. 1423년 [수교고려사], 1442년 [고려사전문]이 완성됐지만 세종에게 퇴짜를 맞았다. 칭호, 공정성 등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공통된 지적사항은 바로 이것이다.

“[고려사]는 찬술이 소략하여 유루(遺漏)된 것이 많다.”([세종실록] 1446년 10월 11일)

꼼꼼하지 못하고 엉성하다는 뜻이다. 자료와 고증을 빠뜨려 허술하다는 뜻이다. 세종은 [용비어천가] 편찬을 통해 신하들에게 역사 쓰는 법을 가르쳤다. 지방관들에게 명해 목격담을 채록하게 했다. 속언, 백성들이 입으로 전하는 구전도 모으도록 했다. 사관들의 협조를 받아 사초를 자세히 상고하게 했다. 고려시대 실록, 비문, 문집 등을 구석구석 뒤지도록 했다.

역사를 대하는 자세도 남달랐다. “우리 전하께서는 이와 같은 사적이 비록 역사책에 실려 있다고는 하나 사람들이 다 펴보기가 어려운 일이라고 근심하셨다.”(최항, ‘용비어천가발’) 당시의 관찬 역사서는 아무나 펴볼 수 있는 책이 아니었다. 이에 세종은 [용비어천가]를 대중적인 역사서로 만들고자 했다. 그가 역사 주해에 공을 들인 까닭이다.

1447년 10월 드디어 세종은 [용비어천가]를 10권의 책으로 간행했다. 모두 550질을 인쇄해 신하들에게 나눠줬다. 노랫말에 곡을 붙인 [치화평]과 [취풍형], 그리고 [여민락]도 궁중과 민간의 연향에 쓰이기 시작했다. 육룡의 공덕을 높이 찬양하고 창업의 정당성을 널리 알리는 세종의 역사 이야기다.

1449년 1월 세종은 우찬성 김종서, 이조판서 정인지 등에게 마지막으로 [고려사]의 개찬을 명했다. [고려사]는 문종 1년(1451)에 편찬을 마쳤다. [용비어천가]에 넣은 고려 말 이성계와 선대의 사적이 자세히 실렸다. 이미 사람들이 읽고 노래하는 역사 이야기를 정사에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용비어천가]는 세종의 ‘역사 바로 세우기’ 사업이기도 했다. 왕권 중심으로 조선 건국사를 쓰고 후대에 가르침을 남겼다.

※ 권경률 - 역사 칼럼니스트이자 작가. 서강대에서 역사를 공부했다. 새로운 해석과 기발한 상상력으로 한국사에 숨결을 불어넣는다. 유튜브·페이스북에 ‘역사채널권경률’을 열어 독자들과 역사하는 재미를 나누고 있다. [시작은 모두 사랑이었다](2019), [조선을 새롭게 하라](2017), [조선을 만든 위험한 말들](2015) 등을 썼다.

202302호 (2023.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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