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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의 문명기행 | 한류의 기원을 찾아서(2)] 우리의 무지로 저평가된 '남명증도가' 공인본의 비밀 

금속활자 기술, 고려의 불교문화를 성리학적 윤리로 대체 

목판본으로 알려졌던 [남명증도가] 공인본, 과학 기술에 의해 금속활자본으로 증명
정도전 축출한 태종 이방원, 신하들 반대 무릅쓰고 계미자 제작해 보급용 인쇄 시작


▎조선 3대 임금 태종의 묘인 헌릉. 태종은 과격한 이미지로 알려져 있지만 서적의 대량 보급을 위해 금속활자의 필요성을 깨닫고 있는 인물이었다. / 사진:이훈범
비운의 [직지심체요절] 이야기로 이 시리즈의 문을 열었다.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오래된 금속활자본으로 대한민국 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자랑스러워하는 것인데, 정작 이 땅에는 없고 프랑스의 국립도서관 금고에서 깊은 잠을 자고 있는 책 말이다. 그래서 비운이라고 한 것은 아니다. 만국박람회라는 더 말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에 세상 사람들 앞에 귀한 모습을 선보였음에도, 그 가치를 제때 온전하게 인정받지 못했기에 한 말이었다.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 병사들에게 약탈당한 [외규장각 의궤]와는 달리, [직지]는 서울에 주재하던 프랑스 외교관이 국내에서 구매해 가져간 것이다. 안타깝지만 국제법상으로 반환을 요구할 근거가 없다. 고 박병선 박사에 의해 [직지]의 존재가 드러난 뒤 한동안 국내에서 직지 반환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그것을 애국심의 발로라고 하기는 좀 민망하다. 그저 금세 끓어올랐다 이내 식어버리는 양은 냄비와도 같은 우리 특유의 ‘쏠림’이라는 게 더 가까울 터다.

남한테 귀한 대접을 받으려면 스스로 귀하게 처신해야 하듯, 귀한 물건은 그것의 가치를 알아보고 또 그것을 지킬 수 있는 힘이 있는 사람이나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당시 우리는 프랑스 외교관도 알아본 우리 보물의 가치를 몰랐고, 설령 알았다 하더라도 그것을 지켜낼 힘도 없었다. 프랑스 외교관도 그 진가를 의심해 믿지 않았지만, 우리는 아예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관심이나 여력도 없었다.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자주독립을 확보할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한 것도 내주었을 게 분명하다.

'직지' 이전에 '남명증도가'가 있었다


▎조선 태종의 무덤인 헌릉의 홍살문과 정자각. 뒤로 보이는 쌍릉 중 왼쪽이 태조, 오른쪽은 원경왕후 민씨의 무덤이다. / 사진:이훈범
우리가 힘이 있었다면 [직지]를 잃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다 팔려나가 소유권은 넘어갔더라도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의 주인공은 [직지]가 됐을 것이다. 무시와 무관심 속에서 외면되지 않고 경탄과 질투가 가득 담긴 세계인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에 만약이란 없고, 생각도 없는 사람한테 자꾸 말해봐야 구차하게 떼쓰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기보다는 가진 것이나 잃지 않고 잘 찾고 보존하려 노력하는 게 현명한 자세일 것이다. 우리에게는 [직지]만큼이나 값진 것들이 더 있지 않나 말이다. 같은 금속활자만 봐도 그렇다. [직지]가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본이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현존하는 것들 중에서 그렇다. 우리에게는 [직지]보다 더 오래된 것들이 있다.

문헌상으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은 [상정고금예문(詳定古今禮文)]이라는 책이다. [상정고금예문]은 고려 인종 때 그때까지 내려온 우리나라와 당나라의 법식과 예의를 모아놓은 전례서로, 총 50권이지만 안타깝게도 전해지지 않는다. 세월이 흐르면서 [상정고금예문]의 책장이 떨어져 나가고 글씨가 이지러져 보기 어렵게 되자, 최씨 무신정권의 개창자인 최충헌이 두 질을 새로 만들었다. 하나는 담당 부서인 상서예부에 두고 다른 하나는 자기 집에 보관했다고 한다. 그러다 몽골의 침략으로 강화로 급히 천도하면서 예부에 있던 것은 미처 가져나오지 못하고 최충헌 집에서 보관하던 것만 강화도로 옮길 수 있었다.

최충헌에 이어 집권한 아들 최우가 [상정고금예문] 스물여덟 질을 더 만들어 배포했는데 이것이 금속활자로 찍은 것이었다. 지금 남아있는 것은 없지만 최충헌에 의해 중용됐던 문신 이규보가 책의 말미에 최우를 대신해 쓴 발문에서 금속활자로 인쇄했다는 문구를 남겼다. ‘(…) 그 책이 없어지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그래서 주자를 사용해 28본을 인출(遂用鑄字 印成二十八本)하여 각 기관에 나누어 보내 간수하게 하니, 모든 관련자들은 일실되지 않게 삼가 전하여 나의 통절한 뜻을 저버리지 말지어다.’ ([동국이상국집후집] 제11권)

발문에는 “진양공을 대신해 지었다”는 설명이 있다. 당시 최이로 개명한 최우가 1234년에 진양후에 봉해졌고 이규보가 세상을 뜬 것이 1241년인 점을 감안하면 1234~1241년 사이에 출간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규보가 몰년에 발문을 썼다 해도 1377년에 청주 흥덕사에서 찍은 [직지]보다 136년 빠른 것이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당시 몽골의 침략으로 강화도로 달아나 있는 상황에서 금속활자를 새로 만들어 주조할 여력이 있었겠는가 하는 점이다. 따라서 고려가 강화도 천도 이전에 이미 금속활자 사용 기술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제조된 금속활자 역시 보유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남아있는 것이 없으니 그저 추정일 뿐이다.

아니, 추정일 뿐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상정고금예문]과 비슷한 시기에 인쇄된 금속활자본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 책이 발견됐다. [남명증도가]라는 책이다. 정식 명칭은 [남명천화상송증도가(南明泉和尙頌證道歌)]다. 문자 풀이를 하자면 ‘남명선사법천이라는 고승이 읊은 도를 깨닫는 노래’라는 뜻이다. 당나라의 진각대사 현각이 육조 혜능을 친견하고 깨우친 오도의 경지를 칠언시로 표현한 게 [영가진각대사증도가]다. 혜능의 유일한 설법서인 [육조단경]과 함께 선종의 2대 경전으로 꼽히는 수행지침서다. [남명천화상송증도가]는 송나라의 남명선사 법천이 증도가의 각 구절 끝마다 알기 쉽게 게송으로 구체적인 해설을 붙인 것이다.

1239년 제작된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


▎[남명증도가]. / 사진:문화재청
국내에 현존하는 [남명증도가]는 여섯 가지이며, 그중 4책이 동일본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중 삼성출판박물관에 있는 것을 ‘삼성본’, 공인박물관에 있는 것을 ‘공인본’으로 칭한다. 그동안 [남명증도가] 4책 모두 목판본이라는 게 학계의 정설이었다. 책 말미에 최우가 직접 쓴 발문 때문이었다. 내용은 이렇다. ‘[남명증도가]는 선가에서 매우 중요한 서적이다. 그러므로 참선을 배우는 후학들이 누구나 이 책을 통해 입문하고 높은 경지에 오른다. 그런데도 이 책이 전래가 끊겨 유통되지 않고 있으니 옳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공인을 모집해 주자본을 다시 판각하여(重彫鑄字本) 길이 전하게 한다. 기해년 9월 상순, 중서령 진양공 최이는 삼가 적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중조주자본’이라는 구절이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그것을 ‘금속활자본을 토대로 다시 판각한다’는 의미로 해석했다. 금속활자본을 번각해 목판본으로 다시 만든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런데 4개의 동일본 가운데 하나, 공인본의 소장자 생각은 달랐다. 그는 경남 양산에 있는 사찰 대성암의 주지 원진 스님이다. 평생 수집한 7000여 점의 보물과 유물을 보관하기 위해 ‘공인박물관’을 설립했던 그는 [남명증도가]를 살펴보다 그것이 목판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에 미쳤다. 공인본에 금속활자본에서나 볼 수 있는 여러가지 특징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에 원진 스님은 2012년 문화재청에 “공인본이 금속활자본일 수 있다”며 국가문화재 지정 신청을 했다.

하지만 당시 문화재위원회는 공인본이 금속활자본이 아닌 목판본이라는 판정을 내렸다. 게다가 삼성본과 동일본으로 삼성본보다 나중에 찍은 후쇄본으로 판단했다. 1984년 삼성본이 얻은 보물 지정번호 758에 ‘-2’가 붙은 이유다.

그러던 것이 최근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 공인본이 금속활자본이라는 연구 결과가 나오고 있는 것이다. 원진 스님의 의뢰로 [남명증도가] 공인본을 연구한 박상국 동국대 석좌교수는 “공인본이 조계산 수선사(현 송광사)에서 1239년에 제작된 세계 최초이자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이라고 단언했다. “동일본으로 알려진 4책을 검토한 결과 다른 3책은 목판 번각본이지만 공인본은 금속활자본으로 나머지와 다른 판본”이라는 것이다.

박 교수는 “공인본에는 초창기 금속활자본에서나 볼 수 있는 정도의 너덜이(금속 찌꺼기), 획의 탈락, 활자의 움직임, 뒤집힌 글자, 활자의 높낮이에 따른 농담의 차이 등의 특징이 많이 나타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목판본인 삼성본에는 그런 것들이 없다. 동일본으로 보이는 글자도 확대해서 자세히 보면 차이가 있어 다른 판본임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금(金)자의 경우 삼성본은 입(入)자에 가깝게 판각된 반면 공인본은 인(人)자로 돼있다. 특히 공인본의 일(一)자를 자세히 살피면 조판공의 실수로 활자가 뒤집혀서 인쇄된 사례가 여러 군데서 발견된다. 이런 실수는 [직지]에서도 발견되는 사례다. 삼성본은 공인본에서 거꾸로 찍힌 걸 바로잡은 것도 있고 구분하지 못하고 그대로 넘어간 것도 있다.

아울러 공인본에서는 위 또는 아래, 왼쪽 또는 오른쪽이 더 진하게 찍힌 활자들도 자주 보인다. 밀랍으로 활자를 고정하는 과정에서 평평하게 식자가 되지 못한 까닭이다. 그래서 한쪽으로 기운 활자들도 많다. 이러한 금속활자의 특징들이 공인본에만 나타날 뿐 삼성본에는 보이지 않는다. 글자의 특정 부분이 탈락한 경우도 있는데 인쇄 후에 알아보기 어렵게 심하게 탈락한 글자에 붓으로 가필한 것도 있다. 심지어 가필하는 과정에서 잘못해 다른 글자로 바뀐 경우도 있다. 예컨대 무(舞)자가 알아보기 어려워 가필을 했는데 파(波)로 잘못 써넣었다. 이것도 삼성본에서는 무(舞)로 바로 잡힌다.

유우식 박사의 증명


▎ 사진:조선일보
무엇보다도 공인본에는 금속활자를 주조하는 과정에서 기술 부족으로 너덜이가 달라붙은 채 인쇄된 글자들이 다수 보인다. 이런 하자가 공인본을 삼성본보다 후대에 인쇄된 목판본으로 판정하게 된 결정적 이유일 터다. 여러 번 인쇄해 닳아버린 목판으로 찍어 인쇄 상태가 좋지 않은 것으로 여긴 것이다. 하지만 너덜이는 활자 주조 기술이 부족한 초기의 금속활자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현상이다. 오히려 나중에 목판으로 찍은 삼성본이 이것을 깔끔하게 다듬어 찍은 것이다. 박 교수는 공인본이 목판본으로 오인된 계기 중 하나인 최우의 발문 역시 중조주자본의 뜻이 “주자본을 다시 목판으로 새겨”가 아니라 “주자본으로 다시 만들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외뢰한 중국인 학자들 역시 그렇게 해석하더라는 것이다.

지난해에는 스위스에 본부를 둔 세계적인 학술지 ‘헤리티지(Heritage)’에 [남명증도가]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본임을 증명하는 논문이 실리기도 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소재한 반도체 측정장비 개발회사인 ‘웨이퍼마스터스’ 대표인 유우식 박사(경북대 객원연구원)가 자체 개발한 이미지 분석 소프트웨어인 ‘픽맨'(PicMan)’을 사용해 밝혀낸 것이다. 유 박사는 논문에서 공인본과 다른 목판번각본의 글자를 겹쳐 대조함으로써 공인본의 활자체가 다른 것임을 증명해냈다. 유 박사의 논문은 학술지에 실린 지 3주 만에 전 세계에서 1445명이 읽고 618명이 다운로드함으로써 최단기간 최다 조회 및 다운로드된 논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90년 가까이 잘못된 해석이 고쳐지지 않은 걸까. 그만큼 선입견의 뿌리가 깊었던 것이다. 전해지는 [남명증도가] 책의 대부분이 목판본이다 보니 공인본도 당연히 목판본일 것이라고 여기고 금속활자본일 가능성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다 보니 최우의 발문을 목판 번각본의 발문으로 해석하고 아무도 의심하지 않은 것이다. 아울러 [직지]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이라는 사실도 놀라운 마당에 [직지]보다 더 앞선, 그것도 130년 이상 앞선 금속활자본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정도전의 혜안


▎유우식 박사가 이미지 분석 소프트웨어인 픽맨의 비교한 [남명증도가] 3개본. 동그라미 부분에서 확연한 차이를 볼 수 있다. / 사진:양산신문
1239년이라면 해인사에서 [팔만대장경]을 열심히 새기고 있을 때(1233~1248년) 아닌가. 당시 인쇄법의 대세는 목판 인쇄였다. 구리 같은 금속보다는 목재가 구하기도 쉬웠고, 재질도 부드러워 글자를 깔끔하게 새기기도 편했다. 그런데 왜 [남명증도가]는 금속활자로 찍은 것일까. 박상국 교수는 [팔만대장경] 때문에 오히려 금속활자 인쇄를 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당시 [팔만대장경]을 만들기 위해 목판제작 기술이 있는 전국의 각수들을 작업장인 남해로 차출했다는 것이다. [팔만대장경] 제작은 몽골의 침략을 불력으로 이겨보려는 목적으로 진행된 국책사업이었다.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인 상황이었던 만큼 고려는 목판본 제작에 총력을 기울였을 것이다. 당시 인쇄의 중심지가 사찰이다 보니 전국 각 사찰의 인력이 총동원됐을 테고 불가에서 기본적으로 필요한 [남명증도가] 등의 서적 인쇄가 뒤로 미뤄졌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최고 실력자인 최우가 불교계를 위무하기 위해 대안을 모색했을 테고, 금속활자가 그 방법으로 부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금속활자 인쇄는 여전히 초보적인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앞서 지적한 여러 가지 문제점에 노출됐을 테고, 여러 차례 시행착오를 겪은 뒤에야 금속활자 책인 공인본이 인쇄돼 나왔을 것이다. 그래서 무신정권의 최고 실력자인 최우가 직접 발문까지 썼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것이 단지 기존 판본의 목판 번각본이었다면 최우가 발문을 쓸 까닭이 없을 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속활자 기술의 발전은 더뎠다. 금속활자의 인쇄 품질이 떨어지다 보니 품질이 우수한 목판 인쇄로 쉽게 되돌아갔다. 금속활자의 주조와 인쇄는 특별한 수요에 맞춰 지방 사찰에서 간헐적으로 이뤄졌을 뿐이었다. [남명증도가]나 [직지] 이후 문헌상으로나마 남아있는 금속활자본이 없는 이유다.

그러다 150여 년이 지난 고려 말에 이르러서야 한 선각자가 금속활자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나선다.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일으켜 세운 혁명가 정도전이다. 그는 이렇게 외친다. ‘대저 선비가 학문을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더라도 책을 얻지 못한다면 어떻게 학문을 할 수 있겠나. 우리나라는 서적이 매우 적어 배우는 사람들이 모두 독서 범위가 넓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긴다. 나 또한 이 사실을 아프게 생각한 지 오래다. 간절한 바라노니 ‘서적포’를 설치하고 동활자를 만들어 무릇 경·사·자·서·제가(諸家)와 시·문은 물론 의·병·율의 서적까지 모조리 인쇄해 학문에 뜻을 둔 사람들이 누구나 책을 구해 읽어 학문의 시기를 놓치는 한탄을 면했으면 한다. 여러분 모두 사문(斯文)을 일으키는 일을 자신의 책임으로 삼아 모쪼록 이 일에 공감해주기 바란다.’ ([삼봉집] 제1권)

정도전의 혜안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정도전은 유학자지만 의학이나 군사, 법률 서적까지 관심을 갖는 실용주의자였다. 서적의 다양성을 중시하다 보니 더욱 금속활자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 것이다. 목판 인쇄는 한 가지 책만을 위한 것이지만 금속활자는 한 가지 책의 인쇄를 마치면 활판을 해체하고 다시 조립해 다른 책을 인쇄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당시 구리가 귀한 금속이었고 비용이 많이 드는 관계로 정도전은 일종의 모금 운동을 벌였다. 이를 위해 칠언시까지 붙였다. 조금 길지만 읽어볼 가치가 있다.

‘묻노니, 무엇이 사람에게 지혜를 보태줄까
타고난 자질이 없으면 학문으로 만드는 것
한스럽게 우리나라에는 책이 적어서
열 상자 넘는 책을 읽은 사람이 없네
늘그막에 못 본 책 얻는다 해도
읽고 나서 덮으면 돌아서서 잊는 걸
다짐해 바라노니 서적포를 설치해
후학에 널리 읽게 해 무궁토록 전했으면
그대, 윤리 해치는 오랑캐를 보라
그들 책이 서가와 들보에 가득 찼네
저들 성하고 우리 쇠했다고 한탄 마오
우리 스스로 의지가 강하지 못한 걸
여러분께 청하노니 서적 인쇄 비용을 도우시어
부디 사도가 빛을 발하게 하오’ ([삼봉집] 제1권)


태종 이방원의 주자소 설치


▎[삼봉집] 조선 개국공신인 정도전의 문집. 지금 남아있는 [삼봉집]은 1791년 정조의 명으로 재간한 것이다. /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정도전은 고려 사회의 불교문화를 성리학적 윤리로 대체하고자 주력했지만, 아울러 학문의 발전 없이는 사회 개혁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학문의 발전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 서적의 보급이었고, 다양하고 많은 서적을 보급하기 위해서는 금속활자가 필수 불가결한 요소였다. 하지만 이러한 정도전의 뜻이 실현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정적인 태종 이방원에 의해서였다. 정도전은 이성계가 막내아들 의안대군 이방석을 세자로 선택하자 이를 지지해 이방원과 화해할 수 없는 사이가 됐고, 요동정벌을 추진하면서 사병을 혁파하는 과정에서 사병 없이는 두 팔 없는 신세로 전락하는 이방원과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1398년 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을 죽인 이방원은 2년 뒤 임금의 자리에 오른다. 이어 3년 뒤인 1403년 주자소(鑄字所)를 설치한다. 고려 시대에도 서적원이 있었지만 목판 인쇄를 주로 한 기관이었다면 명실상부하게 ‘주자’를 내세우는 금속활자 인쇄 전문 관청이 설립된 것이다. 태종실록에도 간단한 설립 취지가 나오지만 권근의 문집 [양촌집]에 더 자세한 얘기가 실려 있다. 활자 제작에 맞춰 쓴 발문 ‘주자발(鑄字跋)’에서다. “영락 원년 봄 2월 전하께서 좌우 신하에게 말씀하셨다. ‘나라를 다스리고자 한다면 반드시 전적을 널리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뒤에야 이치를 캐보고 마음을 바로잡아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해외에 있어 중국의 서적이 드물게 전해지고, 판각(板刻·목판 인쇄)한 책은 쉽게 훼손된다. 천하의 책들을 판각으로는 다 출판할 수도 없다. 그래서 내가 구리를 녹여 활자를 만들고 책을 얻으면 반드시 인쇄하여 책을 널리 보급하고자 하니, 정말 무궁한 이익이 될 것이다. 사업에 드는 비용을 백성에게 거두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나와 종친·훈신들 중에서 뜻이 있는 사람과 같이 그 비용을 댄다면 아마도 성공할 수 있으리라.’”

앞서 정도전의 말과 거의 같은 얘기다. 태종이 정도전을 미워했지만 그의 철학에는 깊이 공감했다는 뜻이다. 그래서 정도전을 죽였지만 그의 이념은 고스란히 취한 것이다. 태종이 신하들에게 동활자를 말했을 때 신하들은 이루기 어렵다고 입을 모아 반대를 했다. 그때까지도 금속활자 제작 및 인쇄 기술이 별반 나아진 게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태종은 주자소 설치를 밀어붙였다. 세종의 말을 빌리자면 “억지로 우겨서 만들게(세종실록 1434년)” 한 것이다.

그렇게 억지로 우겨서 주자소가 설립된 지 9개월 만에 조선조의 첫 금속활자 계미자(癸未字)가 나온다. 계미자는 성현의 [용재총화]에 1407년에 주조했다는 기록이 나와 정해자(丁亥字)라고도 하는데, 권근의 ‘주자발’이 1403년 11월에 쓰였으니 계미자로 보는 게 맞을 듯하다. 계미자를 만들고 나서도 정작 인쇄를 하는 데까지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던 듯하다. 1410년에 가서야 시험판 인쇄를 끝내고 보급용 인쇄가 시작되니 말이다. ‘비로소 주자소에 명하여 서적을 인쇄해 팔게 하였다.’ ([태종실록] 1410년 2월 7일 자

한글, 금속활자에 어울리는 글자

계미자는 [직지]의 금속활자와 비교할 때 바탕 글자를 새기고 금속물을 부어 넣는 과정과 방법이 대폭 개량됐다고는 하나, 여전히 활자의 크기와 획의 굵기가 일정하지 않고 글자 모양이 고르지 않아 인쇄 상태가 가지런하지 못하다. 또 조판술도 개량됐지만 크기와 두께가 일정하지 않은 활자를 배열하다 보니 옆줄이 맞지 않고 윗글자와 아랫글자의 획이 물려있는 경우도 있다. 그것은 여전히 밀랍을 이용한 조판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인쇄할 때 반드시 먼저 밀랍을 판 밑에 펴고 그 위에 글자를 차례로 맞추어 꽂는다. 그러나 밀랍의 성질이 본디 부드러우므로 식자(植字)한 것이 굳지 못하여 겨우 두어장만 인쇄하면 글자가 옮겨 쏠리고 많이 비뚤어져서 매번 고르게 바로잡아야 하므로 인쇄하는 자가 괴롭게 여겼다.’ ([세종실록] 1434년 7월 2일 자)

밀랍을 사용했기 때문에 활자가 확실하게 고정되지 않았고, 인쇄 도중 자주 활자가 움직이고 기울어졌으며 그때마다 밀랍을 새로 녹여 부어가며 바로잡아야 했다. 따라서 밀랍의 소비량은 엄청나게 많으면서도 하루에 찍어낼 수 있는 양은 고작 몇장에 불과했다.

계미자는 세종대인 1420년 주자소에서 여러 차례 개량을 거쳐 훨씬 정교한 금속활자 ‘경자자(庚子字)’를 만들어냄으로써 짧은 기간 동안만 사용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칠사찬고금통요] [동래선생교정북사상절] [송조표전총류] [도은선생시집] 등 다수의 책을 인쇄, 보급해 조선 문화의 발전에 적잖은 영향을 남겼다.

그것은 조선의 창업 공신 정도전의 아이디어를 계승한 태종의 혜안과 뚝심 덕분이었다. 그것은 결국 조선을 500년이나 지속하게 만들어 줄 동력이 될 터였다. 조선 초 주자소에서 계미자를 사용해 인쇄를 거듭하고 있을 때 독일(당시 신성로마제국) 마인츠에서 요하네스 구텐베르크는 10대의 시절을 보내며 금속활자에 대해서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20대로 접어들 무렵 조선에서는 역사상 가장 걸출한 왕이 등극해 앞으로의 활약을 예고하고 있었다. 금속활자의 필요성을 누구보다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으며 또한 금속활자에 보다 어울리는 글자, 즉 ‘한글’을 만든 인물이었다.

※ 이훈범 - 남들이 못 보는 세상을 보고 싶어 기자가 됐고, 기자로 살며 본 세상을 칼럼에 녹였다. 얽매이지 않고 세상을 떠다니는 구름을 동경했지만, 32년을 중앙일보에 얽매였다 지난해 해방됐고 이제 새로운 글쓰기에 도전하고 있다. 역사에서 혜안을 얻는 게 삶의 기쁨이다. [역사, 경영에 답하다], [세상에 없는 세상수업], [품격] 등 책을 몇 권 펴냈다.

202302호 (2023.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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