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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운의 기후와 문화 그리고 작품을 찾아서(7)] 구한말 외국인들은 왜 한양의 민둥산에 놀랐을까 

17C 소빙기에 너도나도 ‘온돌’ 설치… 무분별한 벌채로 산 헐벗고 홍수 빈번해져 

온돌은 시베리아 일대 문화, 삼국시대 고구려 통해 유입
8~9냥하던 땔나무, 정조 때부터 30~40냥으로 가격 뛰어


▎노르베르트 베버 신부가 1911년 찍은 북한산성 내 산영루. 산영루는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유실됐다. 17세기 소빙기가 조선을 강타하자 온돌이 보편화됐고, 이에 쓸 땔감을 구하려 산에 나무를 무분별하게 벌채해 홍수가 빈번해졌다. / 사진: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이곳 사람들은 밤에는 펄펄 끓는 방바닥 위에서 빵처럼 구워지는 게 아주 익숙하다.”

“조랑말의 말린 똥까지 때는 여관의 방은 언제나 과도하게 따뜻하다…. 나는 어느 끔찍한 밤을 방문 앞에 앉은 채로 새운 적이 있는데, 그때 방 안의 온도는 섭씨 39도였다. 지친 몸을 거의 지지다시피 덥혀주는 이 정도의 온도를 한국의 길손은 아주 좋아한다.”

각각 구한말 조선을 방문했던 스웨덴 언론인 아손그렙스트와 영국인 여성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코레아 코레아]와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이라는 저서에 남긴 한국에 대한 인상기다. 온돌은 당시 한반도를 찾은 서양인들의 눈에 들어온 이색적인 문화였던 모양이다. 찜질방의 여전한 인기가 보여주듯이 방을 뜨겁게 데워 그 안에서 몸을 지지며 피로를 푸는 것은 한국인에게 매우 익숙한 고유의 문화다. 해외에서 온 외국인들이 가장 경험해보고 싶은 체험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온돌의 기원은 한국이 아니다


▎영조의 청계천 준설을 그린 [어전준천명첩]. / 사진:부산시립박물관
우리는 온돌이 한국 고유의 문화라고 알고 있지만, 처음 시작된 곳은 한반도가 아니다. 고고학계의 연구에 따르면 만주, 시베리아 일대에서 활동하던 여진, 숙신 같은 유목민족에 의해 처음 시작된 온돌은 삼국시대에 고구려 영토였던 동해안 북쪽을 따라 내려오면서 한반도에 보급됐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러다 보니 고구려나 발해 유적에서 발견되는 온돌 유적이 백제나 신라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온돌이 처음부터 한국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던 것도 아닌 듯하다. 삼국시대 유적을 살펴보면, 하위 계층의 주거지나 군인들의 주둔 시설에서는 온돌을 찾아볼 수 있는 반면 왕궁이나 사찰 등의 유적에서는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온돌이 제대로 된 주거시설로 인정받지는 못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왜 그랬을까. 여기엔 우리의 상식과 다소 다른 모습이 숨어있다. 중국 사극을 보면 침대와 식탁을 사용하는 장면을 흔히 볼 수 있다. 그런데 조선 시대 사극을 보면 양반들은 소위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채온돌방 위에 이불과 밥상을 두고 생활한다. 중국에서 많은 문화를 수입했는데 왜 유독 이것만은 달랐을까.

학자들에 따르면, 우리 조상들은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침상이나 탁자를 사용하는 입식(立式) 생활을 했다고 한다. 중국과 비슷했다는 것이다. 즉, 과거 ‘용의 눈물’ 같은 사극에서 이방원이나 정몽주 같은 인사들이 방에 방석을 깔고 앉아서 밀담을 나누는 등의 장면은 실제와는 달랐던 셈이다. 이때만 해도 양반들은 바닥을 데워 좌식(坐式) 생활을 하는 것은 하층민의 생활 방식으로 여겼다고 한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상류층도 온돌을 사용하기 시작했을까. 기록으로 보면 17세기부터 온돌이 도입되는 조선의 풍경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어른들의 말을 들어보면 ‘전에는 사람들이 흔히 마루에서 잠을 자고 오직 늙고 병든 자만 온돌에 거처했다’ 하였는데”(이익, [성호사설] 중)

이익은 17세기부터 18세기에 걸쳐 활동한 실학자다. 여기서 마루는 방안에 마루가 깔려있었다는 이야기다. 즉 그 위에 침상을 놓고 살았다는 이야기다. 그보다 앞 세대만 해도 온돌에서 거처하는 것은 노인이나 병자에게만 해당하는 드문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면 왜 조선에는 갑자기 온돌이 깔리기 시작했던 것일까. 이익이 태어난 17세기는 소빙기가 조선을 강타했던 시기였다. 유럽, 아시아 등을 강타한 소빙기는 기존의 생활 문화를 많이 바꿔놓았다. 특히 온도와 직결된 시설은 말할 것도 없다. 이전의 난방시설로는 저온 현상에 대처하기 어려워졌을 것이다. 이때 사대부들의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온돌이었다.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원래 상류층은 우아하게 침대나 식탁을 놓고 살았다. 하지만 유례없는 추위가 찾아들자 더는 체면만 따지긴 어려웠던 것 같다. 그래서 온돌은 하층민들이 사는 움집이나 초가집을 거쳐 양반들의 기와집으로 이동했고, 결국에는 국왕이 사는 궁궐까지 진출했다. 최근 몇몇 연구에 따르면, 17세기 궁궐의 특징 중 하나는 내전에 온돌이 설치된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한반도 전역에 퍼진 온돌은 조선을 따뜻하게 데워준 고마운 존재였음이 틀림없다. 하지만 모든 것에는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다.

“(이원익이 아뢰기를) 선대의 나인들이 모두 말하기를 ‘사대부 집 종들도 온돌에 거처하는데 나인으로서 마루방에 거처해서야 되겠는가’ 하여 이때부터 궐 내에 온돌이 많아졌다 하니, 마루방으로 바꾸면 낭비를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인조실록] 2년 3월 5일)

“(이경여가 아뢰기를) ‘선조 대에는 대궐의 방에 온돌을 놓는 것이 매우 적었기 때문에 땔나무가 오늘날처럼 많이 필요하지 않아 백성들에게 징수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마땅히 폐단을 줄이는 방도를 생각해야 합니다.”([인조실록] 8년 1월 28일)

온돌의 역습


▎영조의 청계천 준설로 만들어진 가산이 그려진 [도성도] 중 일부. / 사진:규장각한국학연구원
온돌로 추운 소빙기에 적응하는 것은 좋았지만, 그대가가 만만치 않았다. 하층민의 초가집부터 궁궐까지 모두가 온돌을 사용하면서 이에 넣을 땔감의 수요도 급증할 수밖에 없었다. 이 무렵 중국은 이미 석탄을 사용하기 시작했지만, 조선은 땔감에 들어가는 연료를 마련하기 위해 나무를 벨 수밖에 없었다. 이전에도 목재는 넉넉한 편이 아니었다. 집이나 배, 가마 등 주거시설과 교통수단을 만드는 주요 재료였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온돌의 확산과 함께 무자비한 벌목이 시작된 것이다.

급기야 영조 때가 되면 “모든 산이 민둥산이 되어 땔감이 10배는 귀해졌다”는 기록이 등장하는가 하면 그다음 정조 때는 “옛날에 8~9냥이면 사던 땔나무가 지금은 30~40냥”이라는 탄식 어린 기록도 나온다. 왕이 거처하는 대전에 사용하는 온돌용 나무만 해도 연간 1만6074근이 소비됐다고 한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국왕만 온돌을 쓴 건 아니다. 당시 서울(한양)은 이미 30만명 가까이 거주하는 대도시였다. 이들이 국왕처럼 1년에 1만6000여 근이나 되는 땔감을 쓸 수는 없었겠지만, 아무리 아껴 쓴들 30만명이 사용하는 땔감을 합치면 막대한 양이 투입됐을 거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문제는 또 있었다. 조선은 봉산(封山)이라고 해서 벌채를 금지하는 산을 지정하긴 했다. 하지만 이는 궁과 관련된 극히 일부 산에 그쳤다. 또한 지금처럼 체계적으로 나무를 심고 숲을 관리하는 시스템도 갖추지 않았다. 서울에서 나무가 마르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여기에 17세기의 한랭한 기후는 나무의 생장에도 좋지 않았으리라. 그래서 영조 때가 되면 온돌 사용이 삼림 황폐화의 주범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한다.

“지금은 비록 검소하거나 가난한 집이라도 반드시 모두 서너 칸에 온돌을 둡니다. 집을 짓는데 절제가 없으므로 서울 소재 수백 곳의 산에는 풀뿌리가 거의 다 사라졌습니다.”([승정원일기] 영조 11년 3월 20일)

산에 나무가 사라지면 홍수가 빈번해지고 피해도 급증한다. 흙을 단단하게 지탱해주던 나무가 사라지면서 빗물에 쉽게 흘러내리기 때문이다.

“북쪽 산기슭은 민둥산이 되어 장마철이 되면 번번이 산사태가 일어나니…도성 안 개천과 도랑이 막히는 것은 전적으로 여기에서 말미암은 것이다.”([승정원일기] 영조 11년 5월 14일)

서울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도시다. 이렇게 흘러내린 흙과 모래는 작은 개울을 따라 청계천에 쌓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토사가 쌓인 청계천은 영조가 즉위할 무렵엔 하천 바닥이 거의 평지와 같은 높이였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 무렵이 되면 이곳에 밭을 만들고 채소를 심는 이들까지 나타났을 정도다. 심지어 집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찾아들어 움막을 짓고 사는가 하면 그 집을 매매하기도 했다.

영조의 청계천 준설


▎서울 종로구청이 폐한옥을 재단장해 개관한 한옥문화관. 바닥을 유리로 만들어 당시의 온돌 시설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지대는 조금만 비가와도 범람하기 일쑤였다. 툭하면 청계천이 넘쳐흐르니 그 혼란과 인명피해는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지난해 여름 폭우로 인해 강남역 일대가 침수되는 등 큰 피해를 겪었는데, 그와 같은 풍경이 18세기에는 청계천 일대에서 다반사로 벌어졌던 것이다. 결국 보다 못한 영조가 1760년 대대적인 준설작업에 나섰다. 이 사업은 20만명을 투입해 57일간 벌인 대역사였다.

기록에 따르면 개천에서 퍼내 양쪽 기슭에 옮겨 쌓았는데 그 양이 어마어마했다고 한다. 그 흙으로 만들어진 큰 언덕이 마치 산 같다고 해서 가산(假山)이라고 부르다가, 그곳에 꽃을 심자 향기가 그윽하다고 해서 방산(芳山)으로 부르게 됐다고 한다. 현재 서울 방산시장이 자리 잡은 곳이다.

그렇지만 영조의 노력은 충분한 효과를 발휘하지는 못했다. 1873년 봄 영의정 이유원이 “도끼로 나무를 찍는 것이 날로 심하여 산에 씻은 듯이 나무가 없어졌으니 이것은 다 법령이 해이해졌기 때문”이라고 말하자, 고종은 “도성 안을 놓고 보더라도 사산(四山, 서울 도성의 성터로 연결된 백악산·인왕산·남산·낙산)에 소나무가 몇 그루인가를 셀 수 있을 만큼 적어졌다”고 개탄했다.

구한말 조선을 방문한 외국인들도 민둥산이 된 서울의 모습에 경악했다. 1894년 이사벨라 비숍은 서울의 첫인상에 대해 “(산이) 거의 벌거벗었다”([조선과 그 이웃나라들])고 적었으며, 호머 헐버트 박사도 “반도의 어느 곳을 가나 벌거숭이산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광경은 활엽수로 가득 찬 일본의 풍경과는 극히 대조적”([대한제국멸망사])이라고 썼다.

조선이 산림을 살리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대책이 필요했다. 하나는 에너지 전환이다. 중국처럼 석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이다. 석탄 생산이 어렵다면 적극적이고 체계적인 산림 관리를 해야 했다. 하지만 조선은 오로지 함부로 나무를 베지 말도록 했을 뿐, 산림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총체적으로 관리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러니 그저 탄식과 민둥산만 남았을 뿐이다. 산림에 대한 제대로 된 대책은 훗날 박정희 정부가 들어선 뒤 비로소 수립됐다.

※ 유성운 - 중앙일보 기자.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기후환경학과 석사 과정을 밟고 있다. 저서로 [걸그룹 경제학], [리스타트 한국사도감], [사림, 조선의 586]이 있으며 [당신이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면], [세계사 속 중국사도감] 등을 번역했다.

202302호 (2023.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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