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생활

Home>월간중앙>문화. 생활

[유민호의 ‘미(美)의 원점, 예(藝)의 기원, 술(術)의 원조를 찾아서’(23)] 고대 그리스 식민지 현장에서 만난 로마 건축물과 속성 

대제국 로마, 건축은 하루아침에 이뤄질 수 있었다 

건축 재료 ‘포졸라나’ 덕분에 초대형 건축물도 간단하게 뚝딱
남부 이탈리아 어촌서 탄생한 ‘로마 콘크리트’가 수도 근간 돼


▎나폴리 위성도시 포추올리에서 만난 2000년 전 로마 건축 흔적. 대리석이나 돌을 부분적으로 사용하지만, 벽돌과 포졸라나로 땜질하는 식의 건축법이 대세다. / 사진:유민호
'미뤄왔던 일 도와주기’. 최근 재미있게 본 일본 TV 프로그램이다. 머릿속에 떠돌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실행·실천을 못하고 내일로 미루는 사안이 있다. 단기적 사안이 대부분이지만, 일생을 통틀어 주저하면서 5~10년 뒤로 떠넘기는 것들도 있다. 의지와 시간·돈이 주된 이유지만, 주변 눈치나 사회적 공기도 지체 원인 중 하나다. 당장 안 해도 큰 변화가 없다는 안도감도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필자의 경우 치석 제거를 2년째 미루고 있다. 바이러스 때문이지만, 치석 제거 때 들리는 굉음을 생각하면 더 가기 싫어진다.

일본 프로그램 PD는 거리에서 아무나 붙잡고 “최근 미룬 일이 뭐냐?”고 묻는다. 비용과 시설·도구를 무료로 제공하면서 미룬 일을 해결하는 과정과 그 결과를 시청자에게 보여준다. “혼자 사는 아버지가 청소를 안 하고 쓰레기 더미 속에서 살고 있다. 내가 가서 말끔히 청소를 해야겠다고 1년 전부터 생각해왔지만, 아직이다.” PD는 지금 당장 실천할 의향이 있는지 물어본다. 동의를 얻은 뒤 곧바로 카메라와 함께 아버지 아파트로 달려간다. 문도 못 열 정도의 쓰레기 더미 속에서 사는 아버지와 재회한 뒤 곧바로 청소에 들어간다. 시청자는 카메라를 통해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 왜 아버지가 쓰레기 더미 속에서 살아가는지, 일찍 세상을 뜬 어머니는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관한 인간 드라마를 접하게 된다. “우린 행복해요”를 밤낮으로 외치는 가면부부 스타일의 자기 자랑이 아니다. 미뤄왔던 일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우여곡절 가족사의 재발견이 TV 화면에 펼쳐진다. 가면부부 입을 통한 일방주입 스토리가 아니라, 화면을 보면서 스스로 판단해 나가는 시청자 관찰기인 셈이다.

그리스 식민지였던 마그나그라이키아


▎그리스 도시 쿠마 산 아래 만들어진 길이 130m의 시빌(Sybyl) 지하 동굴. 그리스인이 판 인공동굴로, 에게해 그리스 동굴 양식과 같다. 영원한 생명을 가진 아폴로 신전 여성 신관 시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한다. / 사진:유민호
쓰레기 아파트 에피소드를 보면서 ‘내가 PD를 만난다면 어떤 사안을 얘기할 수 있을까’ 상상해봤다. PD에게는 한물간 ‘꼰대 기획’으로 처리되겠지만, 이미 10여 년 전부터 미뤄왔던 사안이 하나 있다. 이탈리아 ‘마그나그라이키아(Magna Graecia)’ 여행이다. 이탈리아 남부를 지칭하는 라틴 지명으로, 구체적으로는 나폴리 주변에서부터 아래 남쪽으로 이어진 땅과 시칠리아를 포함한 곳이 마그나그라이키아다. 영어로 풀면 ‘위대한 그리스(Greater Greece)’란 의미로, 과거 그리스 식민지였던 땅이다. 유럽 고대사에 관심이 있다면, 로마가 그리스를 식민지로 만든 얘기에 익숙할 것이다. 반면 처음 듣는 사람도 있겠지만, 로마가 그리스를 장악하기 600년 전 거꾸로 그리스가 이탈리아를 식민지로 만들었다. 그리스는 늑대 젖을 먹고 자란 로마 건국 주인공 로물루스와 레무스(Romulus and Remus)가 등장하기 전부터 이탈리아에 진출했다. 그러나 로물루스 형제의 영토인 현재 로마 땅까지 진출하지는 않았다. 그리스 지형과 비슷한 나폴리 이하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가 그리스 식민지 영역이다.

올해 초부터 10년 동안 미뤄왔던 마그나그라이키아 방문에 나섰다. 자동차가 아닌 기차와 버스 그리고 도보를 통한 현지 탐사다. 사실 자동차로 이미 두 번 경험한 곳이지만, 워낙 광활한 땅이라 주마간산(走馬看山)식으로 스쳐 지나갔을 뿐이다. 걸으면서 천천히 자세히 살펴보려고 여행 기간도 길게 잡았다. 필자가 잡은 마그나그라이키아 여행 출발점은 그리스 최초 식민지 ‘쿠마(Cuma)’다. 기원전 8세기 그리스인들이 건너와 세운 이탈리아 반도 내 최초 식민지다. 쿠마는 나폴리에서 서쪽으로 25㎞ 떨어진 바닷가 작은 마을이다. 그리스 풍수지리 출발점은 바다 수평선을 통해 일몰과 일출을 매일 만날 수 있는 땅에 있다. 신전은 파노라마 풍경을 가진 바닷가 최고 높은 산에 세웠다. 배를 타고 가면 산 모양이나 신전을 통해 자기 땅이란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리스 전통에 따른 것이지만, 로마는 로마 문화와 그리스어를 모르는 이방인을 ‘바바리안(Barbarian)’이라 불렀다. 로마 당시 제작한 조각상으로 치면 수염을 길게 기르고 바지를 입은 식으로 묘사한 이들이다. 오늘날 야만인으로 해석되는 말이지만, 그리스와 로마는 ‘바바리안 거주지=바다와 무관한 내륙’으로 규정했다. 특히 나무가 울창한 게르만계가 바바리안 대명사로 통했다. 로마는 바바리안 지역을 영토로 흡수하지 않았다. 숲이 우거진 곳을 국경선으로 하면서 바바리안과 대치했다.

나폴리 중앙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20분 정도 나가자 곧바로 바다가 펼쳐졌다. 모든 도시가 그러하듯 도심부 바깥에 가야만 현지인의 생활과 모습을 알 수 있다. 철로를 따라 높은 아파트가 끝없이 이어져 있다. 쿠마로 가려면 일단 어촌 도시 포추올리(Pozzuoli)에 내린 뒤 다시 버스를 타야만 한다. 기차에서 내리자 바다에서 신선한 냄새가 불어왔다. 유럽의 올해 겨울은 유난히 따뜻하다. 온난한 날씨 탓에 푸틴 러시아 대통령 의도와 달리 가스와 유류 가격도 하락한다고 한다. 포추올리는 건축학도라면 알고 있을, 로마 콘크리트 ‘포졸라나(Pozzolana)’의 탄생지다. 21세기 콘크리트보다도 훨씬 강력한 건축 재료로, 베수비오 화산재에다 석회와 바닷물을 섞어 만든다. 그러나 여러 재료가 첨가되고 배합 비율도 복잡하기 때문에 구체적 제조방법은 수수께끼다. 21세기 콘크리트보다도 강하고 오래가는 로마 콘크리트 덕분이겠지만, 포추올리 주변에는 서기 1세기 세워진 로마 건물이 곳곳에 들어서 있다. 포졸라나는 콘크리트는 물론 시멘트와 같은 접착제로도 활용 가능하다. 작은 벽돌을 이어 붙여 수십 미터 높이 건물도 만들 수 있다. 바닷가로 나가자 작은 카페가 즐비하다. 나폴리 시민의 주말 여행지로 활용되는 곳으로, 20유로 정도면 로마 건축물 아래 카페에서 와인과 나폴리 해산물을 즐길 수 있다.

21세기 콘크리트보다 강한 건축재


▎쿠마의 아폴로 신전. 그리스 최고 건축가 다이달로스가 만든 당대 이탈리아 반도 내 최고 신전 중 하나였다. / 사진:유민호
버스를 타고 쿠마로 향했다. 관광객 유치를 위해 쿠마행 무료버스가 30분마다 순환한다. 25분 만에 도착했다. 지중해 고대 도시를 관찰할 때 주목할 부분은 지세(地勢)와 물이다. 적이 쳐들어올 경우에 대비한 방어망과 도시를 먹여 살릴 물의 존재 여부다. 그리스는 강과 무관한 도시국가다. 산 위에 올라가 살기 때문에, 배후의 더 높은 산에서 역류한 물과 빗물에 의존한다. 그리스는 농산물을 외부에서 구입하고, 해상무역을 통해 살아가는 나라다. 반면 로마는 기본적으로 강을 끼고 발전했다. 산에서 내려와 들판에서 산다는 의미다. 버스에서 내려 쿠마 전체를 조망했다. 그리스인이 정복한 바닷가 산 위 도시와 평지에 들어선 로마 거주지로 이분화한 구도다. 로마가 쿠마를 장악한 것은 대략 기원전 4세기 때다. 로마에 패한 쿠마의 그리스인은 곧바로 나폴리로 옮겼다. 그리스어로 나폴리는 ‘네아폴리스(Neapolis)’, 즉 새로운 도시라는 의미다. 그러나 나폴리도 100여 년 뒤인 기원전 3세기 로마에 정복된다. 쿠마에 들어선 평지 거주지는 기원전 4세기부터 진출한 로마인의 흔적으로 볼 수 있다.

그리스 도시는 로마 평야 거주지에서 걸어서 30분 정도 거리에 있다. 경사 20도 정도 산을 타고 올라가자 돌로 만든 로마 길이 나타났다. 바퀴가 지나간 듯한 푹 파인 흔적이 돌 위에 남아 있다. 로마 당시 건설한 진짜 로마 도로다. 작은 산이라 생각했지만, 큰 나무로 뒤덮인 가파른 숲길이다. 쿠마 방문과 관련해 관심을 가진 부분은 그리스 신전 양식이다. 이미 접한 에게해 주변 그리스 신전과 식민지 신전이 얼마나 다른지 알고 싶었다. 비슷할 듯하지만, 신전용 건축 재료가 다르면 신전 양식도 바뀐다. 에게해 그리스 신전은 배를 이용해 대리석을 싣고 와 기둥을 세우고 조각도 만들었다. 마그나그라이키아 지역은 원래 대리석과 무관한 땅이었다. 이탈리아 반도 내 원주민의 청동 제품과 대리석 대신 진흙으로 만든 테라코타 조각이 대세인 곳이었다. 로마가 대리석에 눈을 뜬 것은 그리스를 정복한 기원전 2세기 이후다.

쿠마 간판 명소 중 하나인 아폴로 신전에 도착했다. 코발트블루 바다가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아름답고도 신성한 땅이다. 발을 딛는 순간 영혼을 파고드는 신비로운 그 무언가를 느낄 수 있다. 눈부신 바다와 함께 새소리·바람 소리만 퍼져나간다. 신전은 전부 부서지고 기반만 남은 상태다. 예상했던 대로 대리석과 무관하다. 근처 산에서 채굴한 듯한 돌이 신전 기반으로 남아 있다. 그리스 신전이 쿠마에 살던 토착민의 공격으로 무너지자 이후 로마가 와서 재건립했다고 한다. 그리스와 로마 건축 차이점은 기반 하나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리스는 종이 한 장안 들어갈 정도의 면도날로 자른 듯한 돌로 연결돼 있다. 돌 하나하나에 혼이 숨 쉰다. 로마는 다르다. 대략 모양만 그리스와 비슷할 뿐 일직선 아닌 울퉁불퉁 틈새가 확연하다. 로마 기록에 따르면 쿠마 아폴로 신전은 그리스인 ‘다이달로스(Daedalos)’가 건립했다고 한다. 크레타섬의 미노타우로스가 살던 미로(迷路)를 만든 건축가다. 다이달로스는 아들 이카로스와 미로에 갇히자 새 깃털과 밀랍으로 날개를 만들어 하늘로 날아오른다. 그러나 아들은 태양에 너무 가까이 접근하다 추락해 목숨을 잃는다. 인류 최초 비행 인간이 다이달로스 부자(父子)다. 대 발명가이자 건축가 이름이 오르내린다는 점에서 원래 쿠마의 아폴로 신전이 그리스 최고 수준 건축법에 의해 세워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폴로 신전을 뒤로하고 산 정상에 올랐다. 무성한 나무를 뚫고 제우스 신전이 눈에 들어왔다. 바닥의 기반을 보면 가로 40m, 세로 25m에 달하는 비교적 큰 공간의 신전이다. 그러나 로마가 멸망한 뒤 비잔틴 교회로 활용됐기 때문에 바닥을 제외한 나머지는 교회 양식으로 변한 상태다. 벽돌을 포졸라나가 지탱하면서 아치형 예배당과 기도실이 들어서 있다. 제우스 신전이라기보다는 교회 흔적이라 말하는 게 정확할 것 같다. 그러나 그리스인이 남긴 신비로운 신전의 분위기가 곳곳에 표류한다. 아폴로 신전에서 본 것보다 한층 더 넓고 깊으며 푸른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제우스 신전은 쿠마 바닷가에서 가장 높은 곳에 세워져 있다. 바다 멀리서도 지켜볼 수 있는 위치다. 그리스인은 신의 서열을 정하지 않았다. 형식적으로 제우스를 올림푸스산의 최고신으로 분류했지만, 실제 신에 대한 자세는 모두에게 평등했다. 제우스만 한층 더 섬기고 다른 신은 대충 대하거나 무시하는 식의 신앙이 아니다. 신을 하나로 규정하고, 나머지를 전부 부정하는 기독교의 일신교와는 전혀 다르다. 제우스가 가장 높이 있지만, 아폴로 신전도 제우스와 똑같이 대하면서 섬겼다.

원하는 구조의 공간을 마음대로 창작


▎흔적만 남은 제우스 신전. 싸구려 벽돌로 개조한 비잔틴 교회의 그림자만 남아 있다. / 사진:유민호
2800년 전 그리스 신전 흔적을 쿠마에서 관찰하려던 생각은 애초부터 무모했다. 그리스 신전은 기반을 통해서만 만날 수 있을 뿐 로마와 기독교가 들어서면서 원래 모습을 180도 바꿔놓은 상태다. 미적으로 결코 아름답지 못한 유적지다. 에게해나 아나톨리아에서 본 대리석 중심 그리스 유적과 달리 싸구려 벽돌로 적당히 땜질한 듯한 느낌이다. 그리스인이 살아 돌아와 자신의 신전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들지 궁금하다. 아마 신전 가치와 개념에 대한 원론적 설교부터 시작할지 모르겠다. 싸구려 땜질 신전에 신이 살 수 있겠냐고 호통을 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리스 쿠마의 ‘추한 변신’을 보면서 왜 로마가 당대 대제국으로 올라설 수 있었는지에 대한 답 하나를 찾아낼 수 있었다. ‘싸구려 누더기 땜질 건축’, 즉 포졸라나와 벽돌의 결합을 통한 로마 건축의 파워와 기능이 핵심이다.

마그나그라이키아에서 탄생한 포졸라나 건축법은 이후 수도 로마로 확산된다. 1세기 건립된 로마 콜로세움에 가면 지상 4층 초대형 건물 재료를 구석구석 관찰해보길 바란다. 그리스·로마 건축을 상징하는 대리석 건물로 보기 쉽지만, 외장을 제외한 실상은 벽돌이 대부분인 것을 알 수 있다. 중간에 대리석을 사용하고, 황제를 위한 관람석 주변에도 대리석이 들어서 있기는 하다. 그러나 대부분 재료는 가로 40㎝, 세로 25㎝, 두께 10㎝ 정도 벽돌이다. 작은 벽돌을 높고 넓고 두껍게 쌓도록 도와준 재료가 포졸라나다. 그리스 아테네 신전과 같은 대리석 전용 건축물에 익숙하다면 날림 공사로 이뤄진 싸구려 건물처럼 느껴진다. 워낙 크기 때문에 압도될 뿐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뜯어보면 벽돌로 만든 연립주택처럼 보인다. 심하게 얘기하자면 그리스는 건축이라 볼 수 있지만, 로마는 건축이 아닌 건물로 부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건축은 아름다움으로서의 미식, 건물은 기능으로서의 밥이다. 그러나 그 같은 심미안적 세계관은 로마 당시에는 통용되지 않았다. ‘빨리 싸게 쉽게 크게 넓게 안전하게’ 만들 수 있는 공간이 로마가 추구한 건축의 기본 정신이기 때문이다.

로마 건축 정신 ‘쉽게 크게 넓게 안전하게’ 가능


▎로마 군인은 무기를 든 건설 노동자이기도 했다. 어디로 가든 도로·다리·병참·건물을 군인들이 직접 만들었다. 빨리 싸게 간단히 건설하는 것이 로마 건축물의 특징이다. / 사진:유민호
로마가 대제국에 오를 수 있게 된 이유는 수십, 수백 가지에 달한다. 역사학자, 문화인류학자, 고고학자, 철학가, 나아가 문학가와 예술가들도 자신의 전문 영역 하에서 대제국 로마의 성공 비결을 수십 개 정도 제시할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필자는 ‘싸구려 누더기 땜질 건축’이야말로 대제국 로마를 가능케 한 요소 중 하나라 믿고 있다. 대제국 수도 로마는 ‘싸구려 누더기 땜질 건축’의 집산지다. 서기 1세기 로마 시민 이외 이민족 지방 출신이 수도 로마에 들렀다고 치자. 포졸라나 벽돌로 세운 초대형 건축물을 보는 순간 혼을 빼앗긴 정신적 노예로 변했을 것이다. 이집트 피라미드를 보는 순간 터지는 탄성은 ‘어떻게 저런 엄청난 건축물을!’이 될 것이다. 그러나 피라미드는 신과 동격인 파라오를 위한 무덤이다. 신을 위한 공간이니까 큰 곳이라고 당연시할 수 있다. 콜로세움이나 로마의 심장 ‘포로 로마노(Foro Romano)’ 주변, 1직선으로 뻗은 ‘아피아도로(Via Appia)’는 크고 넓으며 길다. 피라미드처럼 ‘어떻게 저런 엄청난 건축물을!’이라고 탄성을 지르며 보겠지만, 하나 더 추가해서 감동할 부분이 있다. 바로 엄청난 건축물이 갖는 콘텐트다. 그냥 엄청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살거나 적극 활용한다는 점에서 피라미드와 다르다. 엄청난 인원을 수용할 수 있고 장사꾼과 생필품이 퍼져나가는 살아 있는 건축물이다. 로마 외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크고 넓고 활기찬 분위기가 포졸라나 건축물을 통해 지중해 전체로 확산돼 나간다.

포졸라나와 벽돌 건축물은 가볍고 싸다. 공정 기간도 짧다. 원하는 구조의 공간도 마음대로 창작해 낼 수 있다. 건립한 뒤 개조도 쉽게 할 수도 있다. 초대형 건축물을 지지하는 기둥마저도 포졸라나 벽돌로 간단히 만들어낼 수 있다. 로마스럽다고 볼 수 있지만, 포졸라나 벽돌 기둥 바깥쪽은 얇은 대리석으로 장식을 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통째로 만들어진 대리석으로 보일 정도로 교묘히 장식한다. 그리스 대리석 건축은 다르다. 종이 한 장 들어갈 틈이 없을 정도의 정밀한 대리석을 사용한다. 깎고 또 깎으면서 혼을 되새긴다. 수십 톤 대리석 기둥은 채굴 현장에서의 고생은 물론 밤을 새면서 수많은 사람을 동원해 옮겨야만 한다. 시간도 오래 걸리고 지진이 닥치면 이미 건립한 건축물이 통째로 무너질 수도 있다.

강력한 로마 파워의 실체 포졸라나 건축물

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이 보여준 힘은 군사력과 경제력에 그치지 않았다. 이른바 소프트 파워를 통한 미국 문화가 한층 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여섯 살 때 필자의 기억이지만, 아버지와 함께 미군 부대에 들른 적이 있다. 어린 나이인데도 당시 미군 부대에서 접했던 미국 문화의 휘황찬란한 모습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코카콜라와 햄버거를 나눠주던 미군 식당은 전부 스테인리스로 장식돼 있었다. 그처럼 투명하고 반짝이는 쇠를 본 적이 없다. 깨끗하고 아름다운 정교한 보석처럼 와 닿았다. 청결한 화장실과 처음 만져보는 푹신한 화장지, 큰 스피커에서 울려 퍼지는 노랫소리는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기억 속에 남아 있다. 반짝거리는 삼각형 모자와 입으로 불면 말려드는 피리도 여섯 살 어린이 머리와 가슴을 움켜잡았다. 미국 군사력과 경제력이 아니라 미군이 향유하는 문화 그 자체에 압도됐다고 볼 수 있다. 서기 1세기 로마 포졸라나 건축물은 여섯 살 어린이의 미국 소프트 파워 체험보다도 한층 더 강력한 로마 파워의 실체였다.

이탈리아 반도 문명화는 그리스에 의해 시작됐다. 기원전 8세기 시작된 마그나그라이키아 역사가 출발점이다. 그러나 로마는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를 정복하고, 마침내 기원전 146년 아테네까지 점령한다. 영화 [300]으로 유명한 스파르타는 아테네에 앞서 기원전 192년 너무도 간단하게 정복된다. 점령당한 스파르타는 어린이를 채찍으로 때리는 스파르타 교육을 관광 상품으로 내세우면서 로마 귀족을 유혹했다. 로마가 물리적으로 그리스를 정복했지만, 정신적으로는 그리스가 로마를 정복했다는 말이 있다. 틀리지 않은 말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리스는 로마를 보충하는 존재일 뿐 ‘결코’ 대제국의 주체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리스는 콜로세움을 만들지 못했고, 만들 생각도 안 했기 때문이다. 콜로세움을 인간 사냥터라 비난하면서 천박한 야만인 문화공간으로 비하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리스는 세련된 문명 문화의 주인공이다. 그러나 대제국 그리스를 만들 만한 역량까지는 타고나질 못했다.

21세기 미국이 그러하듯 로마는 품위나 고상한 미적 감각과는 무관하다. 반대로 무식하고 거칠며 단순하다. 전쟁에 나서 이기는 것이 최고이자 유일한 자랑거리일지 모르겠다. ‘싸구려 누더기 땜질 건축’으로 도배를 한 로마 유적은 대제국의 기본 유전자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만드는 증거이자 모델이다. 지금 당장 사용 가능하면서도 싼값에 제공될 편리한 기능이 먼저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나 로마 건축은 하루아침에 세워질 수 있었다.

※ 유민호 - 미국 워싱턴에 있는 에너지·IT 컨설팅 회사 ‘퍼시픽21’의 디렉터. ‘딕 모리스 선거컨설턴트’ 아시아 담당.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방송(SBS) 기자로 일하다가 1994년 일본 마쓰시타정경숙 15기로 입숙해 5년 과정을 마치는 동안 125개 나라를 순회했다. 조지워싱턴대학 E-Politics 프로젝트 디렉터, 일본경제산업성 연구소(RIETI) 연구원을 지냈다. [백악관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국 소프트파워] [미슐랭을 탐하다]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202302호 (2023.01.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