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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특별기획시리즈] 다시 기업가정신이다-한국 경제의 개척자들(12)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上 

‘청렴의 화신’ 박태준과 34명의 창립요원들 

“조상 혈세로 짓는 제철소… 실패하면 영일만에 다 빠져 죽자”는 ‘우향우’ 정신
“임자 소신대로 밀고 나가게” 박정희 대통령 전폭적 지원 받으며 제철소 건설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은 “저는 오로지 제철 공장 건설에만 매달려 있는 사람”이라며 정치권의 정치자금 요구를 단칼에 거절했다. 황색 작업복을 입은 박 명예회장. / 사진:포스코홀딩스
'한국의 철강왕’ 고(故) 박태준(1927∼2011)은 1927년 음력 9월 29일 경남 동래군 장안면(현 부산시 기장군 장안읍) 임랑리의 조그마한 어촌에서 근근이 생계를 영위하던 박봉관(부)과 김소순(모)의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부는 장차 큰 인물이 되라는 염원에서 이름을 ‘태준(泰俊)’이라 지었다.

1930년대 초, 부친 박봉관은 일자리를 찾아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웃에 살던 큰아버지 박봉줄이 몇 개월 전에 일본에 가서 건설 관련 일자리를 마련해 동생을 불러들인 것이다. 박봉관은 가족들을 고국에 남겨두고 홀몸으로 현해탄을 건넜다.

박태준은 6세이던 1933년 9월, 모친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부친 박봉관은 형과 함께 이즈반도의 이토센 단나터널 공사장에서 일했다. 박태준은 이듬해 4월 아다미의 다가심상소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총명한 아이로 주목 받았다. 특히 산수, 언어, 미술 실력이 돋보였다. 그러던 중 1936년 가을, 나가노현 이야마로 이사했다. 부친이 나가노현의 자구마가와 수력발전소 건설현장에서 새 일자리를 찾은 것이다. 1940년 봄, 박태준은 나가노현의 이야마북중학교에 입학했다. 그곳에서도 박태준의 수학 재능은 돋보였다. 박태준은 와세다대학 진학을 목표로 정진한 결과 1945년 와세다대학 기계공학과에 입학했다. 이후 박태준은 8·15 광복을 맞아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서울에서 학업을 이어갈 길을 모색했으나 여의치 않자 일본으로 건너갔다. 19세가 되던 1946년 와세다대학 2학년을 마치고 다시 귀국했다. 고향에서 농사일을 돕다가 21세이던 1948년 부산의 국방경비대에 입교했다. 박태준은 당시 박병권의 눈에 띄어 남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전신) 6기생으로 입교했다. 박병권은 창군 시절부터 육군에 투신, 훗날 육사교장과 국방부장관을 역임한 대한민국 육군의 산 증인이다. 훈련병 박태준이 그의 눈에 띄었던 것이다.

남조선경비사관학교는 미군정이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추진하면서 한국군의 장교 양성이 시급해 마련한 사관학교다. 1948년 5월 6일 277명이 경비사관학교 6기생으로 입교, 3개월 단기교육을 받았다. 당시 6기 생도대는 2개 중대로 편성됐는데, 제1중대장이 박정희 대위였다. 당시 박정희 대위는 탄도학 교관이었다. 박태준도 박정희로부터 탄도학을 배웠다. 탄도 궤적 계산에는 해석기하학, 미분, 삼각함수 등의 수학적 지식이 요구됐다. 수학적 재능이 남다른 박태준은 박정희 교관의 눈에 띄었다. 박정희와의 운명적인 첫 대면이었다.

박태준이 맡은 대한중석, 적자에서 흑자로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과 박정희 대통령의 운명적인 첫 만남은 남조선경비사관학교에서 이뤄졌다. 1971년 3월 19일 포항종합제철 건설현장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 / 사진:포스코홀딩스
박태준은 21세이던 1948년 7월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육군 대위로 진급한 1949년에는 7사단 1연대 중대장으로 근무했다. 1950년 6·25전쟁 발발 이후에는 포항 형산강 격전지까지 후퇴했으나 이후 함경북도 청진까지 진격하기도 했다.

육군 중령이던 1953년에는 5사단 참모와 부연대장을 역임했다. 27세이던 1954년에는 육군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했으며, 그해 12월 20일 이화여대를 졸업한 24세의 장옥자와 결혼했다. 1955년에는 육군 대령으로 진급했으며, 1960년 초에는 박정희 소장과 재회했다. 이 자리에서 박정희는 부산에 새로 설치된 군수기지사령부 사령관에 부임할 예정이라며 박태준에게 함께 근무할 것을 제의했다. 1960년 2월 7일 박태준 대령은 박정희 사령관의 부산군수기지사령부 인사참모로 부임했다. 1960년 4·19 이후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박정희는 부산에서 차분히 거사를 준비했다. 박태준 대령은 5·16 이틀 후인 5월 18일 박정희의 부름을 받았다. 그 자리에서 박정희는 “내가 혁명 동지 명단에서 자네를 뺀 이유는 자네를 아끼는 마음 때문이었네. 내가 혁명에 실패해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면 내 처자를 돌봐달라고 자네한테 부탁하려 했던 것이야.”([세계 최고의 철강인 박태준])

그해 5월 24일 박태준은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의 비서실장으로 부임했다. 이후 국가재건최고위원회 상공담당 최고위원, 구라파통상사절단장을 역임했다. 1961년 8월 10일에는 준장으로 진급했다. 1963년 육군소장으로 예편했으며, 이듬해 12월에는 대한민국의 달러 박스로 불리던 대한중석 사장에 취임했다.

중석(텅스텐)은 녹는 점이 높은 금속이다. 중석을 캐내 외국에 수출하는 기업이 대한중석이었다. 1960년대 초, 한국의 총 수출액은 3000만 달러였다. 이 중 500만∼600만 달러가 대한중석의 차지였다. 그럼에도 대한중석은 정치적 스캔들에 말려들어 부실기업으로 전락했다. 박태준은 국방부 물동과장이던 고준식과 군대 후배 황경노, 노중열을 대한중석에 스카우트했다. 박태준은 사장으로서 인재의 적재적소 배치, 외압 배격과 투명인사, 합리적 회계관리, 현장경영, 사원복지 제고 등을 통해 대한중석을 1년 만에 흑자기업으로 전환시켰다.

박정희의 뚝심, 포항종합제철 탄생시키다


▎포항제철 창립식은 1968년 4월 1일 서울 유네스코회관에서 개최됐다. / 사진:포스코홀딩스
한반도에 근대적 제철소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18년 6월 일본이 황해도에 겸이포제철소를 건설하면서다. 겸이포제철소는 주로 조선용 후판을 생산했다. 1937년에는 중·일전쟁에 따른 병기 제조를 위해 함경북도 청진에 제선 35만t의 제철소가 건립됐다. 1943년에는 강원도 삼척에 군수 목적의 제철소가 건립되기도 했다.

1949년 10월 삼화제철 삼척공장 20t급 소형 용광로 8기와 조선이연금속 인천공장 50t급 제강설비 보수공사에 착수했으나, 미완인 상태에서 6·25전쟁이 발생했다. 1952년에는 삼화제철 복구공사에 착수했으며, 1953년 6월에는 조선이연 인천공장을 모체로 한 대한중공업공사가 설립됐다. 1954년 9월에는 한국 정부가 대한중공업에 530만 달러를 투입, 독일 ‘데마크’의 도움을 받아 고철을 원료로 한 50t급 평로 1기와 압연설비를 완성했다. 그럼에도 점증하는 철제품 수요에 턱없이 부족했다.

박태준이 철(鐵)과 인연을 맺은 건 1965년 5월 박정희 대통령이 미국에서 세계적인 철강엔지니어링 업체의 프레드 포이 회장을 만나면서다. 박정희 정부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종합제철소 건립을 포함시켰다. 산업화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핵심 기간산업인 석유와 철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석유는 수입하면 되지만 철은 우리 손으로 직접 만든다는 각오였다. 종합제철소를 1962년부터 1966년까지 건설하기로 했다.

포이 회장은 한국의 종합제철소 건설에 최대한의 협조를 약속했다. 박 대통령은 귀국 즉시 박태준 대한중석 사장을 청와대로 불러 “아무리 둘러봐도 이 일을 맡길 사람은 자네밖에 없네. 나는 경부고속도로를 직접 감독할 거야. 자네는 제철소를 맡아.”([세계 최고의 철강인 박태준])

1965년 하반기부터 코퍼스사는 한국의 제철소 건설 지원을 위한 국제차관단 구성작업을 진행했다. 경제기획원은 이듬해 6월 미국의 코퍼스·블로녹스·웨스팅하우스, 독일의 데마크·지멘스, 일본의 야하다제철·히다치조선소·미쓰비시전기 등 8사에 국제차관단 구성동의서를 발송했다. 1966년 1차 설비(50만t), 1970년 2차 설비(50만t) 착공 및 외자 1억3892억 달러, 내자 2350만 달러 조달 등을 차관단에 위임했다. 제철소 후보지로는 울산 태화강 동쪽, 부산 해운대 공업지대, 삼천포 등이 거론됐다.

같은 해 11월 16일 일본 업체들을 제외한 미국의 코퍼스·블로녹스·웨스팅하우스, 독일의 데마크와 지멘스, 영국의 엘만, 이탈리아의 임피안티 등 4개국 7개 업체로 구성된 대한국제제철차관단(KISA, Korea International Steel Associates)이 발족됐다. 1967년 1월에는 프랑스의 앵시드가 참여해 KISA는 5개국 8개 업체가 됐다.

1967년 4월 6일 경제기획원에서 장기영 부총리와 포이 KISA 대표는 ‘종합제철소 건설 가협정’을 체결했다. 6월 21일에는 경북 포항을 최종 후보지로 결정했으며, 박정희 대통령은 대한중석에 제철소 건설을 맡겼다. 9월 28일에는 한국 정부와 KISA 대표가 기본계약서 합의각서에 서명했다. 기본계약서 합의각서에는 1단계 설비를 1972년 9월에 완공하기로 하고, 소요 재원은 해외차관 1억307만 달러 등 총 1억3070만 달러로 확정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당시 외유 중이던 박태준 대한중석 사장은 1967년 9월 25일 귀국과 동시에 장기영 부총리가 건넨 합의각서를 김홍한 변호사에게 검토하게 했다. 그 결과 5개국 8개 업체의 자금조달시기, 자금배분비율, 책임소재 불분명 등이 확인됐다. 다음 달인 10월 2일, 박태준은 청와대에서 박 대통령에게 합의각서의 문제점을 보고했다.

창립요원 34명, 책상을 침대 삼아 새우잠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은 1969년 박정희 대통령에게 대일청구권자금의 포철 건설용 전환 개연성을 문의했다. 1970년 4월 1일 포항 1기 설비 종합 착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가운데)과 김학렬 부총리(오른쪽), 박 명예회장(왼쪽). / 사진:포스코홀딩스
10월 3일 포항시 공설운동장에서 제철소 기공식이 개최됐다. 10월 8일 정부는 KISA와의 기본협정 체결 교섭권을 대한중석에 위임하고 11월 8일에는 박태준 대한중석 사장을 정식으로 종합제철위원회 위원장에 임명했다. 박태준은 KISA와의 기본협정 체결을 연기하는 한편 제철소의 항만 규모를 정부안인 5만t급 선박 접안시설에서 10만t 규모로 늘렸다.

제철소 건설 및 운영주체와 관련해 박 대통령과 수차례 회의 끝에 박태준의 주장대로 회사는 민간기업 형태로 설립하되, 재원 마련을 위해 정부가 지배주주가 되도록 했다. 박태준은 대한중석을 경영하면서 국영기업의 고질인 관료주의와 각종 이권청탁의 폐해를 몸소 경험했던 것이다. 그 결과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POSCO)가 탄생했다. 정부출자금 3억원과 대한중석 출자금 1억원을 각각 불입하고 1968년 4월 1일 서울 유네스코회관에서 포항제철 창립식을 개최했다. 포항제철은 제철소 건설부지로 경북 영일만 일대의 국유지 11만8800평을 포함한 총 232만6951평에 대한 매수작업을 개시했다. 포항제철의 창립요원은 34명이었다. 그중에는 고준식 전무이사. 황경노 기획관리부장, 노중열 외국계약부장, 안병화 업무부장, 장경환 생산·훈련부 차장, 홍건유, 김규원 등 대한중석의 인재들이 대거 포함됐다.

자금 부족해 대일청구권자금을 건설자금으로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설비 구매 관련 개선방안을 적은 메모지를 건넸다. 사진은 박 명예회장이 박 대통령에게 건넨 메모지. / 사진:포스코홀딩스
같은 해 5월 1일에는 영일만 건설현장의 야트막한 언덕에 슬레이트 지붕의 2층짜리 목조건물 1채(포항사무소)를 완공했다. 낮에는 건설지휘 사령탑 역할을 한 이 건물은 밤에는 직원들이 책상을 침대 삼아 새우잠을 자는 곳이었다. 직원들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 명장 로멜(Rommel)의 야전군 지휘소에 빗대 이 건물을 ‘롬멜하우스’로 불렀다.

이 무렵 박태준을 긴장시키는 뉴스가 불거졌다. KISA와 최종계약서 작성만 남은 상태에서 IBRD(국제부흥개발은행)가 1968년 한국경제 평가보고서에서 ‘한국 종합제철공장의 경제성이 의심된다’고 발표한 것이다. 실제로 박태준이 1969년 1월 31일 KISA와 담판 짓기 위해 코퍼스의 포이 회장을 비롯한 KISA 회원사 대표들을 만날 당시 분위기는 비관적이었다.

한시도 지체할 수 없었던 박태준은 귀국을 서둘렀다. 그런 가운데 포이 회장이 하와이에 있는 코퍼스 부사장 소유 콘도에서 잠시 쉬어갈 것을 권했다. 박태준은 머리도 식힐 겸 와이키키 해변의 콘도에서 머물면서 포철의 자금 문제 해결에 골몰했다. 그러던 중 대일청구권자금의 포철 건설용 전환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무상자금 3억 달러는 일본 정부가 1966년부터 10년에 걸쳐 지급하도록 되어 있는 바, 아직 자금이 남아 있음은 물론 대외협력기금 2억 달러에도 여유가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박태준은 즉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KISA와의 접촉 결과 보고와 함께 청구권자금 전용 개연성을 문의했다. 박 대통령은 “기막힌 아이디어지만, 결정은 일본의 몫”이라며 일본 정부를 설득해 보라고 주문했다.

1969년 2월 12일 박태준은 호놀룰루에서 일본으로 향했다. 도쿄에서 친한파인 야스오카 마사아스 선생부터 찾았다. 도쿄대 출신의 지식인인 그는 일본 정·재계 지도자들의 존경과 신망을 받는 인물이었다. 박태준은 1964년 1월 박정희 대통령의 특사로 일본에서 유력인사들을 두루 만났는데 그중 한 명이 야스오카였다.

야스오카는 박태준에게 야하다제철의 이나야마 사장을 소개했다. 이나야먀 사장은 일본정부가 한국농업발전을 위해 사용하기로 한 대일청구권자금을 제철소 건설자금으로의 전환을 허가하면 야하다제철이 돕겠다고 밝혔다.

박태준은 귀국 직후 청와대에서 이 같은 내용을 보고했다. 박 대통령은 “앞으로 일본의 지지를 끌어내는 것도 임자 몫이야. 우리 정부가 나서겠지만 막후 역할은 자네가 맡게.”([세계 최고의 철강인 박태준])

1969년 8월 22일 일본 정부가 청구권자금 전용에 동의하자 일본철강연맹은 ‘한국제철소건설협력위원회’를 꾸리는 등 발 빠르게 대응했다. 그해 8월 26일 KISA는 한국과의 기본계약 무효를 포철에 통보했다. 1966년 12월 KISA가 발족된 이후 3년 가까이 끌어오던 KISA와의 관계는 완전히 정리됐다.

12월 3일 한국의 김학렬 경제부총리와 가네야마 주한 일본대사는 ‘포항종합제철 건설자금 조달을 위한 기본협약’을 체결했다. 기본협약에는 포철 1기(연산 조강 103만t) 완공을 위해 일본이 향후 3년에 걸쳐 1억2370만 달러를 조달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목숨 걸고 일하자는 ‘우향우’ 정신 탄생 배경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은 1987년 5월 13일 영국 금속학회 연차 총회에서 철강 업계 최고 권위의 상인 ‘베서머 금상’을 수상했다. / 사진:포스코홀딩스
기본협약 체결 직후 박태준은 황량한 영일만의 모래벌판에 전 사원을 모아놓고 “우리 조상의 혈세로 짓는 제철소입니다. 실패하면 조상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 목숨을 걸고 일해야 합니다. 실패하면 우리 모두 ‘우향우’해서 영일만 바다에 빠져죽어야 합니다.”([세계 최고의 철강인 박태준])

한편 포철 임직원들은 인사, 납품, 설비 구매 등 다양한 청탁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박종규 청와대 경호실장까지 설비 구매 관련 청탁메모를 포철 비서실에 전할 정도였다. 그러나 박태준은 ‘조상의 혈세’를 한 푼도 더럽히거나 낭비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을 지켰다.

포철 1기 설비 구매에는 대금 지불과 설비 선정 절차에서 비능률과 잡음을 초래하는 혼선이 내재했다. 청구권자금은 한국과 일본 정부 사이 협정이기에 포철이 직접 사용할 수 없었다. 이 밖에도 상업차관은 계약당사자의 협의를 거친 이후 정부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즉, 포철이 설비 구매의 주체가 아니었던 셈이다. 포철은 정부기관인 ‘주일 구매소’를 통해 설비 구매계약을 할 수밖에 없어 원하는 설비를 구매하는 데 제약이 있었다.

이에 박태준은 1970년 2월 3일 청와대에서 포철의 진척상황을 보고하는 자리에서 박 대통령에게 설비 구매 관련 개선방안을 적은 메모지를 건넸다. 포철이 구매계약 주체로 나서고 정부가 구매 절차 간소화에 동의해 달라는 것이었다. 관료와 정치권의 간섭을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내용을 훑어본 박 대통령은 한 글자도 수정하지 않고 메모지 좌측 상단 모서리에 친필 서명을 했다. 박태준의 의지대로 행하라는 것이었다.

“내 생각에 임자에겐 이게 필요할 것 같아. 소신대로 밀고 나가게.”([세계 최고의 철강인 박태준])

소위 종이마패였다.

정치자금 한 푼 내지 않고 제철소 건설에만 올인

제7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진 1971년, 국내외 이목이 한국 정치판에 쏠렸다. 집권여당인 공화당은 1969년 대통령의 3선 연임을 허용하는 내용의 6차 개헌을 단행하고 1970년부터 선거운동에 돌입했다. 야당인 신민당은 1970년 9월 전당대회에서 김대중을 대선후보로 선출했다. 힘겨운 승리가 점쳐지면서 청와대와 공화당은 표심을 모으기 위해 ‘돈 잔치’를 벌이기로 했다. 이후락 청와대 비서실장,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장기영 경제기획원 장관, 김성곤 공화당 재정위원장 등은 정치자금을 끌어들였다. 김성곤은 막대한 자금으로 한창 설비를 구매하고 있던 포철에 눈독을 들이고 박태준을 신문로에 있는 그의 집으로 불러들였다.

이 자리에서 김성곤은 박태준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박태준은 “제철공장은 지금 남의 나랏돈을 빌려서 짓고 있습니다. 그 이자만 해도 엄청납니다. 그런데 정치자금으로 뺏기고, 당 지원금으로 뺏기면 종합제철 건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정치를 어떻게 해가는지 저는 관심도 없고 잘 알지도 못합니다. 저는 오로지 제철공장 건설에만 매달려 있는 사람입니다”라고 답했다.

화가 머리 끝까지 오른 김성곤은 “왜 당신만 안돼. 당신이 소통령(小統領)이야”라고 소리쳤다. 이에 박태준은 “왜 소통령입니까. 대통령과 소통령 사이에 중통령(中統領)이 있지 않습니까. 중통령이라 불러주시지요”라며 자리를 떴다.(이호 장편다큐소설 1992 [누가 새벽을 태우는가])

박태준은 끝내 정치자금을 한 푼도 내지 않고 포항제철 완성에만 올인했다(다음호에 계속).

※ 이한구 - 고려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경제학 석사를, 한양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를 취득했다. 수원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강의하며 경상대학장, 금융공학대학원장을 지낸 뒤 현재 명예교수로 있다. 국내 기업사 연구의 권위자로 (사)한국경영사학회 부회장을 지냈다. 저서로 [일제하 한국기업설립운동사]와 [한국재벌형성사], [대한민국기업사], [한국의 기업가정신] 등이 있다.

202312호 (2023.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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