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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특별기획시리즈] 다시 기업가정신이다 | 한국 경제의 개척자들(20) 조홍제 효성그룹 창업주 

신중함과 번뜩이는 기지로 기간산업 일군 애국 경영인 

아호 만우(晩愚)… 주요 기업인 중 가장 늦은 나이 56세에 창업
무역과 섬유, 타이어, 중공업 완성해 1970년대에 10대 그룹 도약


▎1956~1959 일본유학 중이던 장남 조석래(왼쪽) 회장과 부친 조홍제 창업주. / 사진:㈜효성
효성그룹 창업주 조홍제(趙洪濟, 1906~1984)는 러·일전쟁(1904∼1905) 직후 조선이 일본의 반(反)식민지로 전환할 무렵 경남 함안군 군북면 동촌리 함안 조씨 집성촌에서 천석꾼 조용돈(趙鏞惇)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조홍제는 유년시절부터 근검절약과 외유내강의 유교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만 15세이던 1921년 하정옥과 결혼한 그는 1924년 서울 중앙고보에 입학했다. 하지만 1926년 6월 ‘6·10 만세운동’에 연루돼 옥고(獄苦)를 치른 후 퇴학당했다. 일본 와세다(早稻田)공업학교에서 학업을 이어간 뒤 1935년에는 일본 호세이(法政)대학 독일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고향에 정착했다. 한 집안의 장손이란 멍에가 인텔리 청년 조홍제를 향리에 묶어둔 것이다.

조홍제는 1936년 12월 3년 임기의 군북금융조합 비상근 이사장에 피선, 1945년 해방까지 9년 동안 연임했다. 지방의 각 행정단위별로 설립된 금융조합은 농민들이 출자해서 조합원들에게 저리의 농업자금을 융통해주는, 소유와 경영이 분리된 근대적인 금융기관이었다. 1942년에는 경영난에 직면한 군북산업조합을 3만4000여원(圓)에 인수해 정미 외에 가마니, 새끼, 비료 등을 취급하는 군북산업(郡北産業) 주식회사로 변경했다. 이후 1945년 해방 무렵까지 경영했다.

1949년 2월 조홍제는 이병철이 1948년 11월 서울 종로2가에 설립한 삼성물산공사의 동업자가 됐다. 조홍제는 이병철에게 두 달 전에 빌려줬던 800만원에 200만원을 추가한 1000만원을 삼성물산에 투자함으로써 부사장이 된 것이다. 이병철보다 5세 연상의 조홍제는 청소년 시절부터 경남 의령 출신의 이병각, 병철 형제와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삼성물산은 설립 1년여 만인 1950년 3월 결산에서 이익금 1억2000만원을 기록해 천우사, 동아상사, 화신산업, 미진상사, 남선무역 등에 이어 7위에 랭크됐다. 조홍제는 삼성물산 직원들 사이에 ‘무역백과사전’이란 별명을 얻을 정도로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최고경영자로 거듭났다. 그는 1953년에 설립한 제일제당의 설립 및 경영에 진력했지만 이병철과 지분 문제로 갈등을 빚어 1962년 9월에 삼성그룹과 결별했다. 결국 조홍제는 효성물산, 한국타이어, 한일나일론 등의 삼성 지분 주식을 분리해서 독자경영에 나섰다. 이병철이 1958년에 동업 청산을 처음 제의한 지 6년 만이다. 조홍제 몫의 자산가치는 당시 가격으로 3억원이었다. 효성물산은 1957년 2월 6일에 설립됐다. 56세 초로(初老)의 조홍제가 독자경영을 개시한 1962년 9월 당시 효성물산의 자본금은 1500만원이었으나 독자경영 1년 만인 1963년 3월 결산에서 1억여원의 이익을 냈다.

이병철과 15년 동업 끝내고 독자경영


▎조홍제 효성그룹 창업주는 1966년 10월 자본금 1억원의 동양나이론㈜을 설립하고 울산공단 내 매암동 12만 평에 공장을 건설했다. / 사진:㈜효성
1962년 12월에는 한국타이어 경영에 참여했다. 한국타이어의 전신(前身)은 일제강점기 말기인 1941년에 일본 브리지스톤타이어가 서울 구로동에 설립한 조선다이야제조㈜다. 군수공장으로 경영되다가 해방 후 미군정에 귀속됐다. 1957년 ICA(미국 국제협력처) 원조자금 35만 달러로 시설을 보수했으나 수요 부진으로 경영난에 허덕이다 1958년에 제일제당이 49.5%의 지분을 확보했다. 이후 1962년 조홍제가 지분을 넘겨받았다. 1962년 한국타어어의 부채는 9억여원으로 주채권자인 한일은행이 관리 중이었으나 1967년 8월 효성물산이 주식 전부를 인수해서 1968년 12월에 기업을 공개, 자본금을 5000만원으로 확대했다.

1968년 12월 경인고속도로 개통 이후 전국적으로 물동량이 점증하면서 국내의 타이어 생산능력은 1966년의 60만 본에서 1971년에는 150만 본으로 무려 2.5배나 증가했다. 한국타이어는 효성이 경영한 지 3년 만에 정상화되었다. 1963년 9월에는 대전피혁 경영에도 참여했다. 조홍제의 아우 조성제가 1961년에 산업은행 관리의 대전피혁을 5000만원에 인수할 당시 조홍제가 자금을 지원한 탓이다. 종업원 200여 명의 대전피혁은 일제강점기인 1917년에 일본인들에 의해 설립된 군화(軍靴) 제조업체로, 해방 후 귀속기업이 돼 1956년 ICA 자금 22만5000달러로 공장시설을 보수했지만 부실화해 1961년에는 산업은행 관리 하에 있었다.

박정희 정부는 시멘트, 화섬, 전기, 비료, 제철, 정유 등의 기간산업 건설을 위해 내자(內資) 동원 극대화와 외국차관 도입을 추진했다. 정부는 해외차관 실수요자들에게 세금 감면, 저금리의 은행 자금 제공과 차관에 대한 정부 지불보증 등의 혜택을 제공했다. 삼성, LG, 현대, 대한양회, 쌍용 등 대기업들이 경쟁적으로 참여했다. 조홍제도 기간산업 건설에 참여하기로 하고 배기은, 홍광표, 송재달 등 인재들을 끌어들여 효성물산 내에 프로젝트팀을 구성해서 1964년부터 나일론 생산사업에 착수했다. 울산공단 내의 매암동 일대 12만 평을 공장부지로 확보했다.

1930년대 미국 듀폰에서 개발한 나일론은 6·25전쟁 중에 미군이 국내에 첫선을 보인 후 1953년부터 나일론 블라우스·티셔츠·양말 등이 국내에 수입됐다. 나일론은 가볍고 값이 저렴하며 내구성이 뛰어날 뿐 아니라 벌레도 먹지 않고, 세탁하면 즉시 물기가 마르는 ‘꿈의 섬유’였다.

일본에서 나일론 원단을 수입하던 이원만(1904~1994)은 1957년에 자본금 2억환의 한국나이롱(코오롱)을 설립하고 1958년 10월 대구 신천동에 국내 최대인 월산 12.6t의 스트레치공장을 완공했다. 수입 원사(原絲)로 나일론 스트레치사(絲)를 생산한 것이다. 또한 내자 1억5000만환과 DLF 차관자금 320만 달러를 투입, 미국 Chemtex사와 기술 제휴하여 1963년 8월 대구에 일산 2.5t의 나일론 원사 생산공장을 건설했다. 1964년부터는 ‘코오롱’ 원사를 생산했다.

자본금 1억원으로 동양나이론 설립


▎효성물산은 삼성물산, 천우사 등과 함께 국내 굴지의 무역업체로 성장했다. 조홍제 창업주는 경영진과 수시로 기술연구소를 방문하고 기술진척도를 보고받았다. / 사진:㈜효성
당시 한일나이론도 나일론 원사를 공급하고 있었다. 이 회사는 국내 최초의 재벌로 불린 태창그룹의 모기업인 태창방직이 1957년에 설립한 한국양모공업으로부터 출발했다. 그러나 과도한 부채로 삼성물산, 한국모방, 대한모방 등에 넘어가 상호를 한일나이론으로 변경하고 1964년 4월 스위스 Inventa사와 Uhag사에서 차관을 도입해서 경기도 안양에 일산 1.3t 규모의 나일론 필라멘트공장을 건설하고 ‘하이론’ 상표의 나일론사를 생산했다.

1960년대는 전 세계적으로 화섬산업이 급성장한 시기다. 당시 화섬산업은 국내에서도 개화기를 맞는다. 1964년 당시 코오롱과 한일나이론이 생산해낸 나일론사는 총 1475t이었으나 수입된 원사량은 3287t으로 국내 자급률은 40%에 불과했다. 나일론사는 작업복지, 학생복지 등 의류는 물론 어망, 로프, 타이어코드지 등 산업용으로 사용되는 등 수요가 급증했으나 국내 생산은 턱없이 부족했다.

효성은 옷감용 나일론사, 타이어코드지, 어망(漁網)사 원료인 카프로락탐을 생산하기로 하고 1964년 11월 해외차관 1715만 달러와 내자 7억원을 들여 울산공단 내에 카프로락탐(일산 20t), 유안(연산 2만8380t), 나일론 원사(일산 5t) 공장 건설허가서를 정부에 제출했다. 선발기업들의 견제를 피하기 위해 카프로락탐 생산에 주력하면서 나일론 원사는 산업용으로만 공급한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이는 코오롱과 한일나이론의 반대에 부딪혔다. 명분은 과잉공급이었으나 실제는 효성이 카프로락탐 외에 원사까지 생산하면 원료 확보에서 효성이 유리하기 때문이다. 정부는 효성의 카프로락탐 생산계획을 불허하고 나일론 원사 생산량도 코오롱 일산 15t, 한일나이론과 효성은 절반 수준인 일산 7.5t으로 조정했다.

효성은 나일론사 생산 규모를 일산 12t으로 늘리는 한편 1965년 말에는 일본 이토추(伊藤忠商事)에서 641만 달러, 그리고 기술 도입선인 서독 Vickers Zimmer사에서 208만 달러의 차관을 확보했다. 서독 차관분은 14년 거치 10년 분할상환에 이자는 연리 7%였으며, 일본차관은 1년 거치 후 연 6%로 8년간 상환하는 내용이었다. 다만 정부 지불보증 건이 국회에서 부결돼 은행 지불보증 형식으로 1966년 7월 7일에 차관도입계약을 체결했다.

1966년 10월 자본금 1억원의 동양나이론㈜을 설립하고 울산공단 내 매암동 12만 평에 공장을 건설했다. 이 무렵부터 조홍제의 장남 조석래가 경영에 참여했다. 그는 일본 와세다대학 이공학부 졸업 후 미국 일리노이공대에서 화학공학 석사학위를 받고 1966년 4월 귀국해서 효성물산 관리부장 및 동양나이론 울산공장 건설을 담당했다.

1967년 10월 타이어코드지 생산공장, 1968년 4월 일산 16t의 나일론 원사 생산공장을 각각 완공하고 같은 해 6월부터 ‘토프론’을 생산했다. 국내 직물업체의 60%가 집중된 대구를 공략했다. 시장 개척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더구나 동양나이론에서 생산한 원사는 독일의 최신기술로 만들어 품질이 월등했을 뿐 아니라 제품 종류도 다양했기 때문이다. 1968년 1월에는 국내 최초로 나일론 타이어코드(T/C)지를 생산했다. 당시 국내에는 한국타이어, 삼양타이어, 흥아타이어, 동신타이어와 자전거타이어 제조업체인 흥아유한공업 등 5개 업체가 주원료인 레이온코드지 외에 나일론코드지를 약간 사용하고 있었으나 타이어코드지는 전량 수입에 의존했다. 생산 첫해인 1968년에 동양나이론의 총매출액은 27억여원이었는데 그중 나일론사 13억원(1648t), 스트레치사 6489만원 등이었다. 설립 이듬해인 1969년에 10만 달러를 수출했다. 동양나이론은 시작부터 국내 나일론업계의 총아로 부상했다.

나일론 산업의 리더기업으로 도약


▎1971년 7월 동양나이론 대구공장 준공식. / 사진:㈜효성
이 무렵 효성물산은 수출드라이브 정책에 힘입어 삼성물산, 천우사 등과 함께 국내 굴지의 무역업체로 성장했으며, 대전피혁과 한국타이어도 흑자로 전환했다. 한국타이어는 1969년 KDFC(한국개발협력자금)로부터 전대차관(轉貸借款) 110만 달러를 획득한 데 힘입어 생산시설도 확장하여 국내 최대의 타이어 메이커로 발돋움했다.

화섬공업은 철강이나 자동차, 전자산업처럼 대량생산의 장치산업이어서 설비 규모가 크고 투자비도 엄청나지만 규모의 경제가 작용한다. 동양, 코오롱, 한일 등 나일론 3사는 1960년대 후반부터 설비 확장 경쟁에 돌입했다. 동양나이론은 1968년 16t에서 1969년에는 23t으로 확장했으나 1969년 말부터 화섬업계에 불황이 닥쳤다. 그럼에도 동양나이론은 확장작업을 지속해 1970년 부도 위기에 몰린 일산 16.1t의 한일나이론을 인수하는 한편 울산공장 규모를 1971년 35t, 1976년 125t 등으로 확장했다.

한편 동양나이론은 일관생산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1972년부터 대구에 최신 설비를 갖춘 공장을 짓고 한복지와 양장지를 생산하는 한편 국내 시판을 목적으로 1973년 2월 자본금 6억6000만원의 ㈜토프론을 설립했다. 1973년 5월에는 일본 아사히카세이와 50:50 합작으로 자본금 48억원의 동양폴리에스터를 설립했다. 폴리에스터는 나일론보다 고가(高價)이나 원가 절감(節減)은 물론 우수한 물성 탓에 전망이 양호했다. 내자 68억원과 외자 3000만 달러를 들여 울산공장 내에 필라멘트사(絲) 일산 30t 규모의 공장을 건설하고 1975년 3월부터 시제품을 출하, 그해에 2100만 달러의 수출 실적을 기록했다.

동양나이론은 1973년 6월 기업을 공개하고 같은 해 9월 일본 미쓰비시(三菱)상사, 사카이(酒伊)상사 등과 합자해 자본 5억원의 동양염공을 설립했다. 동양나이론은 총 27억원을 투자, 연 2800만 야드의 화섬직물 염색가공 능력을 갖춘 공장을 경북 경산시에 건설하고 1975년 5월부터 공장을 가동함으로써 원사제직염색 등 일관생산체제를 완비했다. 그 결과 1973년에는 선발업체 코오롱을 제치고 국내 원사 시장의 61.5%를 장악했다. 이후 1974년에는 타이어코드지 수출 1000만 달러를 돌파했다.

동양나이론은 다각화의 일환으로 1970년부터 컨베이어벨트지를 생산했다. 당시 국내에는 5개의 컨베이어벨트 메이커가 있었으나 전부 100% 면(綿) 벨트지를 사용하고 있었다. 동양나이론은 국내 최초로 나일론벨트지를 출시, 면벨트지를 완전히 대체하는 등 컨베이어벨트지와 타이어코드지 독점생산업체로 거듭났다. 1978년에 카페트용 나일론BCF사를 개발하고 1979년 5월 안양공장 내에 일산 1.3t의 카페트용 원사생산 체제를 갖췄다. 또 같은 해에 수지사업과 성형사업을 동시에 추진, 1979년에는 국내 최초로 PET병 생산체제를 구축했다. 1973년 제1차 석유파동 이후 원가 상승과 수요 감퇴를 타개하기 위함이었다. 1979년 4월에는 월산 500t 규모의 강선(鋼線)사업에 진출했다. 레디얼 타이어의 사용이 확대되면서 섬유코드가 스틸(steel)코드로 대체되는 점에 주목, 울산공장에 강선(鋼線)제품부를 발족하고 세계적인 강선 기술을 보유한 일본 고베제강과 기술제휴했다. 1977년 3월에는 국내 최대의 와이셔츠 메이커인 원미섬유를 인수했다. 1965년 10월에 설립된 원미섬유는 대전에 편직봉제 등 섬유제품관련 일관생산체제를 구축하고 내수는 물론 미국, 일본, 유럽 등지에 수출망을 형성하고 있었다. 1979년에는 동양나이론 내에 전자사업부를 발족하고 일본 히타치(日立)와 기술제휴하여 5월부터 사무용 컴퓨터 제조 및 판매에 착수했다. 1970년대에 동양나이론은 불황과 호황이 반복하는 격랑 속에서도 규모 확대 및 일관생산체제를 구축하고 다각화에 박차를 가해 나일론 산업의 리더 기업으로 도약했다.

사업 다각화 성과 내며 효성그룹 완성


▎울산 공장에서 타이어코드를 검수하고 있는 조홍제 창업주. / 사진:㈜효성
효성그룹 차원의 다각화 작업도 병행돼 1969년 12월 부동산관리 전담사인 경남개발을, 1973년 4월 효성증권(신한투자증권)을 설립했다. 1975년 3월에는 동원철강을, 9월에는 피혁생산업체인 (주)동성을 각각 설립하고 10월에는 한영공업(효성중공업)을 인수했다.

한영공업은 대한제분 창업자 이한원(李漢垣)이 부정축재 환수금 명목으로 1962년 5월 14일에 변압기, 전동기, 펌프 등 중전기 제품 수입 대체를 위해 자본금 2억8388만원으로 설립했다. 같은 해 7월 미국 웨스팅하우스와 기술제휴하고 1964년 12월 서독에서 상업차관 250만 달러를 확보해 1966년 8월 서울 영등포구 당산동5가 4번지에 5745평의 공장을 완공해서 국가에 헌납했다.

한영공업은 1969년 10월 국내 최초로 154㎸ 초고압변압기를 개발, 한국전력에 납품하는 한편 1970년 12월에는 펌프시험장과 중기 주조공장을 준공했으나 1975년 10월 정부의 국영기업 민영화 방침에 따라 동양나이론에 인수됐다. 인수 당시 이 회사의 부채비율은 107.8%였으며 매출액 71억3700만원에 순이익은 11억8700만원으로 양호했다. 한영공업은 창원공단 내에 부지 8만1000평을 확보하고 내·외자 300억원(외자 2000만 달러 포함)을 투입해 1976년 7월 대단위 중전기공장을 완공했다. 1976년 8월 국내 최초로 154급 변압기를 수출했으며 1977년 11월 상호를 효성중공업으로 변경했다.

효성물산은 1976년 종합무역상사로 지정됐다. 정부가 1975년에 처음으로 종합무역상사제를 시행한 이후 한국의 수출이 비약적으로 증가해 1975년 50억 달러이던 수출액이 1977년에 100억 달러를 기록했다. 효성물산은 종합무역상사로 지정된 1976년 11월에 ‘1억불 수출탑’을, 1979년에는 ‘5억불 수출탑’을 수상하는 등 급성장했다.

1976년 12월에는 동성개발을 인수했다. 이 회사는 1963년 12월에 부동산 거래를 목적으로 설립됐는데, 효성이 인수한 후 부동산 매매 및 임대, 주택건설, 스포츠 및 레저시설 운영 등으로 사업내용을 다양화시켰다. 1977년 10월에는 대동건설을 인수, 효성건설로 변경했다. 대동건설은 1970년 2월에 설립된 토건업체다.

효성은 1977년 12월에 진일공업을, 1978년에는 대성목재를 각각 인수했다. 대성목재는 일제강점기하인 1936년 6월 제재소로 출발한 합판제조업체다. 1945년 해방과 동시에 정부에 귀속됐다가 1975년 8월에 신동아그룹으로 경영권이 넘어갔다. 그러나 1978년 세계적인 합판메이커 동명목재가 도산하는 등 합판업계는 위기에 직면했다. 인도네시아 등 원목 수출국들이 직접 합판까지 제조, 덤핑 수출하였기 때문이었다. 경영난의 대성목재는 조흥은행 관리하에 있다가 1978년 8월 동양나이론이 48% 지분을 확보했다.

한국타이어, 국내 최대 타이어 메이커로


▎조홍제 효성그룹 창업주가 작고 (향년 78세)한 1984년 1월 16일 후계상속문제가 주목됐다. 다행히 그는 사전에 세 아들에 대한 지분문제를 마무리했다. 앞줄 오른쪽 첫 번째가 조홍제 창업주. / 사진:㈜효성
대전피혁은 1968년에 본사를 대전시 태평동 513으로 이전하고 1973년에는 제지(製紙)공장 및 가공공장을 확장했다. 그해 12월에는 폴리우레탄(PU) PVC공장을 준공, 국내 최대의 피혁제조업체로 성장했다. 대전피혁은 1976년 12월 제화부문을 분리하여 대성제화와 ㈜대성을 각각 설립했는데 ㈜대성은 본사 및 공장을 대전시 대화동1-14에 두고 피혁제품과 이륜차(오토바이)를 생산했다.

대전피혁은 1978년에 경화건설을 인수해서 동성종합건설로 변경했다. 경화건설은 1958년 9월 서울 장교동10에서 자본 825만원의 ㈜삼화공무소로 설립되어 1973년에 경화건설로 상호를 변경했다. 대전피혁은 1978년 6월 이륜차 생산업체인 효성기계를 설립하고 본사 및 공장을 경남 창원시 성산동77에 뒀다. 1979년 일본 스즈키자동차(주)와 기술제휴하여 국내에 ‘스즈키 오토바이’를 선보이면서 대림그룹의 ‘혼다’와 함께 국내 오토바이 시장을 양분했다.

한국타이어의 약진도 주목된다. 1973년 제1차 석유파동으로 동신타이어가 법정관리로, 흥아타이어는 1973년 5월에 원풍산업에 인수되어 국내 타이어시장은 한국타이어와 금호그룹의 삼양타이어 등 2강 체제로 정비되었다. 한국타이어는 1976년에는 일산(日産) 타이어 5000본과 튜브 3500본을 생산하는 국내 최대의 타이어 메이커가 됐다. 한국타이어는 1977년 11월 차량용 및 산업용 배터리를 생산하는 한국전지를 인수했다. 일제강점기 말인 1944년에 이산주식회사로 설립돼 해방 직후인 1946년 10월에 조선전지로, 1952년 9월에는 한국전지로 상호가 변경됐다.

이외에도 효성은 동양산업, 효성정유 등을 설립하고 1979년 5월 일본 히타치와 기술제휴, 국내 최초로 구미공단 내에 컴퓨터공장을 건설했으며, 9월에는 부도가 난 율산그룹의 금융기관 차입금 700억원을 승계하는 조건으로 울산중공업과 율산알미늄을 인수해서 효성금속과 효성알미늄으로 상호를 변경했다. 율산알미늄은 1969년 3월 한국카이저알미늄으로 설립된 회사다. 신진그룹에 넘어간 이후 신진알미늄이 됐다가 1977년에는 율산그룹에 인수됐다. 1978년 12월 온산에 연속주조설비, 냉간압연기 등을 갖춘 연산 1.8만t의 공장을 준공, 창호용 알루미늄 새시 ‘칼칼라’를 생산하기도 했다.

1979년 11월 일본 미쓰비시상사와 합작으로 효삼콘트롤을 설립했으며 12월에는 신갈관광을 설립, 관광업에도 진출했다. 1970년대에 동양나이론의 급성장 및 효성물산의 종합상사 지정을 계기로 효성그룹은 설립 10여 년 만에 10대 대기업집단으로 도약했다.

나라 먼저 생각한 견리사의(見利思義) 경영

조홍제의 아호인 ‘만우(晩愚)’는 ‘늦되고 어리석다’는 의미다. 국내 기업 역사상 가장 늦은 나이인 56세에 창업하면서 본인 스스로 지었다. 그는 36세이던 1942년에 고향에서 소규모 정미업체를 경영했으며 1949년부터 15년 동안 삼성그룹의 동업경영자로 종사했기에 사업과의 인연은 늦지 않다. 그러나 그가 자기 책임 하에서 사업을 독자적으로 영위한 것은 1962년 9월부터다. ‘만우’가 지나친 표현이 아닌 이유다. 공과 사를 분명히 하고 외형보다 내실을 중시하며 사치와 화려함보다는 검소와 소박함을 즐겼던 조홍제는 스스로를 “학업도, 기업도 다 늦었던 만진자(晩進子)의 평생이었지만 오히려 인생의 깊은 묘리를 깨달은 바 적지 않다”고 자평(自評)했다.

그는 사업을 시작할 당시 이 사업이 국가와 사회에 도움이 되는지에 대해 우선 고려하는 견리사의(見利思義)의 경영자였다. 기업은 이윤추구를 위한 목적이 아니라 인격 완성을 위한 수단으로 존재한다고 믿는 선비이기도 했다. 조홍제는 인재를 중시하고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는 신중함과 번뜩이는 기지로 무역과 섬유, 타이어, 중공업 등의 국내 기간산업을 10년이라는 짧은 시간 내에 완성했다.

조홍제가 작고(향년 78세)한 1984년 1월 16일 후계상속문제가 주목됐다. 다행히 그는 사전에 세 아들에 대한 지분문제를 마무리했다. 차남 양래에게는 한국타이어계열을, 3남 욱래에게는 대전피혁과 효성기계 등을 상속하게 했다. 마지막으로 효성물산과 동양나이론을 비롯한 그룹의 주력은 장남 석래가 맡는 것으로 결정했다. 효성그룹이 후계 상속 관련 ‘형제의 난’으로부터 자유로웠던 비결이다.

※ 이한구 고려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경제학 석사를, 한양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를 취득했다. 수원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강의하며 경상대학장, 금융공학대학원장을 지낸 뒤 현재 명예교수로 있다. 국내 기업사 연구의 권위자로 (사)한국경영사학회 부회장을 지냈다. 저서로 [일제하 한국기업설립운동사]와 [한국재벌형성사], [대한민국기업사], [한국의 기업가정신] 등이 있다.

202408호 (2024.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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