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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의 문명기행 | 한류의 기원을 찾아서(20)] 세계 해군사 전설로 통하는 이순신(1) 

“일본이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 될 기회를 빼앗은 인물” 

왜군에게 충무공은 불구대천의 원수이면서도 경외의 대상
일제강점기 진해 일본 해군요새사령부, 이순신 제사도 지내


▎서울 광화문 광장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 조각가 김세중의 작품으로, 1968년 설치된 이후 한자리를 지키고 서 있다. 고증이 잘못됐다는 논란이 있었지만, 당당한 자세와 위엄 있는 얼굴은 외세의 발걸음을 한 치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는 듯하다. / 사진:이훈범
기록으로 남아 있는 역사상 세계 최초의 해전(海戰)은 기원전 1175년 나일강 하류에서 벌어진 ‘삼각주 해전(Battle of the Delta)’이다. 고대 이집트 제20왕조의 2대 파라오인 람세스 3세가 전함을 타고 침입한 해양 민족(Sea People)을 물리친 전투로, 이집트가 당대 세계 최강국으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된 전투였다.

이집트는 뱃길을 이용해 세력을 확장하기는 했지만 본질적으로는 나일강에 의존한 내륙국이었다. 육지에서는 주변의 패권을 장악한 강국이었음에도 바다를 통해 수시로 이집트 연안에 침입하는 해양 세력에 대해서는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었다. 왜구들의 끊임없는 노략질에 골머리를 썩이던 고려와 조선, 중국을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이 해양 민족이 오늘날 어떤 민족의 조상들인지는 아직 명확하게 규정되지 못했다. 청동기 시대 에게해 일대에 거주하던 민족으로 추측할 따름이다. “청동기 시대 말기, 특히 기원전 13세기 무렵에 지중해를 거쳐 아나톨리아 동부와 시리아, 팔레스타인, 키프로스, 이집트를 침략한 호전적인 해양 세력의 총칭”이라고 브리태니커 사전은 정의한다. 이들은 고대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번성하던 히타이트 문명을 무너뜨린 세력으로 알려져 있다.

람세스 3세는 이집트에 상륙하려던 이들 침입자를 바다에서 저지했다. 그래서 엄격한 의미로는 해전이라고 규정하기 어렵다. 영미권에서 해전(Naval battle)이란 문자 그대로 ‘전함 대 전함’의 교전을 일컫는다. 하지만 람세스 3세의 치적을 기록한 메디넷 하부 신전의 그림과 기록을 살펴보면 삼각주 해전은 이집트 군이 해안에 상륙하려는 적을 육지에서 반격해 물리치고 있다. 물론 이집트 전함도 없지 않았겠지만 주력은 지상군이었다. 삼각주 해전을 영어로 ‘해전(naval battle)’이 아닌 ‘전투(battle)’로 표기하는 이유다.

이집트를 공격한 해양 민족이 이집트보다 뛰어난 항해술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들 역시 본격적인 해전에 능숙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당시의 기술로 만든 소형 선박으로 대양을 항해하는 것은 바다의 심술에 목숨을 맡겨야 하는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그런 바다 위에서 전투를 벌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고대 세계에는 해전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장거리 무기라고는 활과 창이 전부였는데, 그것의 사거리는 드넓은 바다에서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불화살을 이용한 화공을 생각해볼 수 있지만 그것 또한 생각만큼 효과적인 공격 수단은 아니었다. 사거리만 벗어나면 아무 소용이 없었고 바람의 방향에 따라 자칫 아군의 배에 불이 붙을 가능성도 적지 않았다. 손권과 유비의 연합군이 조조의 대군을 맞아 화공으로 눈부신 승리를 이끌어낸 그 유명한 적벽대전이 있지만, 바다가 아닌 강에서 벌어진 전투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중국의 장강이 아무리 넓다한들 바다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게다가 그것은 삼각주 해전보다 1400년이나 뒤에 일어난 일이다.

고대 세계의 선박은 전함이 아니었다. 단지 병력을 실어 나르는 이동수단이었을 따름이다. 당시의 해전 방식은 선박을 동원해 목표 지점까지 병력을 이동시킨 뒤 육지에 상륙해 지상전을 벌이는 것이었다. 해군력은 얼마나 많은 병력을 얼마나 빨리 수송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었다.

왜구들 노략질에 골머리 앓던 조선과 중국


▎충무공 이순신 표준 영정 일부. 1954년 월전 장우성(月田 張遇聖, 1913~2001)이 그렸다. 1973년 표준 영정으로 지정됐으며, 현재 충남 아산 현충사에 소장돼 있다. / 사진:현충사
기원전 480년 살라미스 해전 때 페르시아의 전략 또한 압도적으로 많은 전함과 병력으로 그리스 연합군의 방어망을 뚫고 해안에 상륙한 뒤 그리스를 초토화시키는 것이었다. 크세르크세스 1세의 이런 느긋한 전략은 그리스 전함의 충돌 전략에 여지없이 당하고 만다. 전함의 선수에 금속 충각(衝角)을 설치한 그리스 전함들은 전속력으로 페르시아 전함의 옆구리를 들이받아 흘수선(吃水線, 선체가 잠기는 한계선) 아래 취약한 부분에 구멍을 냈고, 공격을 받은 페르시아 전함들은 침몰을 피할 수 없었다.

전함 대 전함의 교전이라는 본격적인 해전 양상으로 발전한 것이다. 하지만 이때의 해전 역시 적선에 가까이 붙은 뒤 사다리를 놓고 넘어가 백병전을 치르는 것이 기본 방식이었다. 충각을 이용한 충돌 전략을 쓰기 위해 배의 방향을 조정하기가 쉽지만은 않았고, 만약 충돌에 실패할 경우 적군의 전방위 공격에 노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후로도 아주 오랫동안 같은 양상이 계속된다. 살라미스 해전에서 2000년 넘게 지난 임진왜란 때 일본 수군의 전략도 크게 발전한 것이 없었다. 연안에서 적선을 만나면 갈고리를 던져 적선을 끌어당긴 뒤 적선으로 넘어가 백병전을 벌이고, 연안에 상륙해 약탈 또는 지상전을 펼치는 것이다.

당시 조선이나 중국 수군도 크게 나을 것이 없었다. 왜군은 물론 조선군이나 중국군 모두 해군(海軍)이 아니라 수군(水軍)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도 그래서다. 수군의 역할이 연안을 순시하고 방비하는 데 그쳤기 때문이다. 게다가 선박을 건조하는 데 비용이 많이 들고 바다의 파도에 익숙한 수군을 육성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 때문에 수군 무용론이 끊임없이 제기됐고, 실제로 임진왜란 발발 후 조선 조정에서는 수군을 해체하고 육군에 합류하라는 지시를 내려 보내기도 했다.

생각만 해도 아찔한 조정의 ‘수군 무용론’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과 도체찰사로 오늘날 국무총리와 국군총사령관에 해당하는 최고책임자였던 서애 류성룡이 “미리 징계해 후환을 경계한다(懲毖)”는 의도로 자신이 겪은 임진왜란의 원인과 7년간의 전황을 자세하게 기록한 책 〈징비록〉은 근세 일본인에게 임진왜란을 알려주는 주요한 사료로 인식돼 많이 인용됐다. / 사진:이훈범
“해도(海道: 경상, 전라, 충청 등 하삼도)의 수군을 없애고 수군 병력은 육지에 올라와 싸우도록 명하였는데, 전라수사 이순신이 급히 아뢰기를 ‘수륙의 전투와 수비 중 어느 하나도 없애서는 안 된다’고 하므로 호남의 주사만은 온전하게 되었다.”([선조수정실록] 1592년 4월 14일자 기사)

수군을 없앤다니 생각만 해도 아찔한 결정이 아닐 수 없다. 만약 당시 수군을 폐지했다면 우리는 임진왜란 때 패망했고 지금 일본어를 모국어로 사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역사적으로 전쟁에서 해전이 차지하는 비중이 지상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은 게 분명하지만 그 효과와 영향력은 육지전보다 훨씬 컸다고 할 수 있다. 해군 병력이 얼마나 강한지가 국가의 흥망성쇠를 좌우하고 단 한 번의 해전으로 전쟁의 판도가 뒤집히는 사례는 수없이 많았다. 페르시아 전쟁에서 살라미스 해전이 그랬고, 나폴레옹의 몰락을 가져온 트라팔가 해전이 그랬다.

국토의 3면이 바다인 우리나라에서 해군의 중요성은 두 말 할 필요가 없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국토가 초토화되면서도 조선 수군이 바다를 지배해 왜군의 병참을 끊어놓았기에 조국의 강산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한 수군의 중요성을 당시의 조선 조정에서 대다수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딱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생각은 조선 초에 비해서 오히려 후퇴한 것이었다. 세종 12년(1430) 병조참의 박안신은 왜구를 막을 병선을 건조하기를 청하는 상소를 올리며 이렇게 말한다.

“(왜구가) 대규모로 배를 몰고 와 곤남(남해 일대의 옛 지명)에 이르렀는데 우리 병선 10여 척이 막으니, 저들은 많고 우리는 적어서 상대가 안 된다고 신이 나서 달려들었습니다. 우리 병선이 화포를 쏘아 적선을 태워버리고 큰 배 9척을 빼앗으니 (중략) 육병(陸兵) 수십만이 적을 방어하는 것이 병선 수척으로 적을 제어함만 같지 못함은 이 경험을 밝은 거울로 삼을 만합니다.”([세종실록] 1430년 4월 13일자 기사)

하지만 이후 150년이 지나도록 조선 수군은 발전은커녕 나날이 옹색해져만 갔다. 박안신의 말대로 수군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전함을 건조하고 병사들을 훈련시켰더라면 임진왜란 초기 경상좌수사 박홍, 경상우수사 원균이 적선을 보자마자 배의 바닥에 구멍을 뚫어 자침시킨 뒤 달아나는 어이없는 사태는 없었을 것이다.

“경상좌수사 박홍은 바로 성을 버리고 경주로 달아났다. 왜적이 군대를 나눠 서생포와 다대포를 함락시켰다. 다대포 첨사 윤흥신이 대항해 싸우다 죽으니 바닷가 군현을 지키는 병사들이 소문을 듣고 모두 달아나 흩어졌다.”([선조수정실록] 1592년 4월 14일자 기사)

손을 써보지도 못한 채 자멸한 경상 수군


▎19세기 중반 임진왜란을 소재로 일본에서 출간된 [에혼조선정벌기 (繪本朝鮮征伐記)]에 있는 이순신 장군의 삽화. 이순신이 수군절도사가 돼 거북선을 만들었으며, 충성스럽고 용맹했다는 등의 설명이 달렸다. / 사진:이상출판사
“원균은 적의 형세가 큰 것을 보고 감히 나가 치지 못하고 전선 100여 척과 화포, 병기를 모두 바다에 가라앉힌 뒤 비장 이영남, 이운룡 등만 데리고 배 4척에 나누어 타고 달아났다. 곤양 바다 어귀에 이르러 뭍으로 올라가 적군을 피하고자 하니 그가 거느린 수군 1만여 명이 모두 무너지게 됐다.”([징비록] 유성룡)

손을 써보지도 못한 채 경상도 수군이 자멸하고 만 것이다. 이는 원균과 박홍이 계급만 수군 사령관이었을 뿐 병선들을 어떻게 배치하고 어떻게 기동해 적선의 침입을 격퇴시킬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배와 수군은 있었으나 운용할 방법을 모르니 지레 겁을 먹고 도망친 것이다.

먼 길을 돌아왔지만 이제 본론을 시작할 때다. 결론부터 당겨 말하자면 당시 조선에서 병선을 어떻게 운용하고 수군을 어떻게 지휘할지, 즉 구체적인 해전 전략을 이해하고 있는 진정한 해군 장수는 오직한 사람뿐이었다. 충무공 이순신이다. 앞서 말했듯 왜란 초기에 조정에서 수군을 폐지하려고 했을 때 이순신은 장계를 올린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오늘날 적의 세력이 이처럼 왕성하여 우리를 업신여기는 것은 모두 해전으로 막아내지 못하고 적을 마음대로 상륙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지난번 부산과 동래의 연해안 여러 장수들이 배를 잘 정비하고 바다에서 가득 진을 벌여 엄격한 위세를 보이면서 정세를 보아 전선을 병법대로 알맞게 진퇴하여 적을 육지에 기어오르지 못하게 했더라면 나라를 욕되게 한 환란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순신이 장계를 쓴 날은 왜란이 발발한 지 열하루가 된 1592년 4월 24일로, 그의 전승 신화가 시작되기도 전이다. 그만큼 그는 왜군을 바다에서부터 막아낼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역사에 만약이란 없지만 당시 이순신이 전라좌수사가 아니라 경상좌수사였다면 전쟁 발발 보름 만에 임금이 수도를 버리고 달아나는 치욕은 겪지 않았을 것이다.

임진왜란 때 의정부 수반인 영의정과 군 총사령관인 도체찰사를 겸직했던 유성룡은 [진사록]에 “왜군은 수전에서는 우리보다 뒤떨어지는데 애초에 생각이 얕은 사람들이 우리 군사가 수전에 유리하지 않다고 망령되이 말했다”고 썼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 반만 맞는 말이었다. 조선 수군의 장수가 누구냐에 따라 맞는 말일 수도, 틀린 말일 수도 있었던 것이다. 어찌 보면 수전에 유리하지 않다는 말이 오히려 현실을 제대로 본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수전을 치를 줄 아는 장수가 이순신 말고는 없었으니 말이다. 조선이 온 국토가 유린되는 상황 속에서도 일본의 침략을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은 조선의 수군이 일본보다 강해서가 아니라, 천우신조로 그때 조선에 이순신 같은 장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의 수군이 처음부터 강했던 게 아니라 전 세계 해군사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명장 이순신이 조선 수군을 강하게 만들어 기적을 이뤄낸 것이다.

임란 당시 이순신이 경상좌수사였다면…

이순신은 전 세계 해군사에서 그야말로 전설이자 군신(軍神)이다. 미국의 해군사가 조지 해거만은 1967년 펴낸 [거북선의 신(Lord of the Turtle Boats)]이란 글에서 “이순신으로 인해 일본의 동아시아 정복이 300년 동안 미뤄졌다”고 말했다. 미국의 리더십 전문가인 짐 프리드먼은 “한국의 다윗(이순신)이 일본 골리앗(히데요시)의 해군을 어떻게 패배시켰는지 배워야 한다”면서 이순신을 “일본이 영국처럼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 될 기회를 빼앗은 인물”로 평가했다. 또 미국의 종군기자 출신 작가 윌리엄 위어는 세상을 바꾼 50명의 군사 지휘관에 손자, 알렉산더, 한니발, 진시황, 카이사르, 칭기즈칸, 나폴레옹, 넬슨, 몰트케, 마오쩌둥 같은 영웅들과 함께 이순신을 포함시켰다.

이순신이 “이 적들과는 같은 하늘 아래서 살지 않기로 맹세했다(誓不與此賊 共戴一天)”고 한 불구대천의 원수, 왜군의 후손들에게도 이순신은 경외의 대상이었다. 일제강점기 진해에 있던 일본 해군요새사령부는 놀랍게도 이순신에 대한 제사를 공식 연례행사로 열었다. 통영에 있는 이순신 사당 충렬사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은 물론 일본 해군 장성들의 사당 참배도 수시로 이어졌다.

“진해에 일본 해군 요새사령부가 있었던 때 사령부가 중요하게 여겼던 연중행사의 하나에 이순신 진혼제가 있었다. 사령부 장병은 그때 통영에 가서 제사를 지냈다.”([이순신 각서] 후지이 노부오 1982)

“일본 해군 장성들은 시간이 날 때마다 이순신의 사당과 전적지를 둘러보았다. (중략) 이후 장성들의 이순신 사당 참배는 진해해군기지의 연중행사가 되었다.”([이조멸망] 가타노 쓰기오 1990)

“이순신의 진혼제가 있었다. 해군성은 그 경비를 예산 항목으로 편성해 사령부의 장병들이 당일 통영에 가서 제사를 봉행했다.”([히데요시의 야망과 오산] 가사야 기즈히코, 구로다 게이이치 2000)

위의 일본 서적들의 언급은 언론인 출신으로 일본 전문가인 이종각 교수의 책 [일본인이 본 이순신]에서 재인용한 것이다. 이 교수는 이 책에서 재미있는 사례를 하나 소개한다.

1905년 5월 일본 해군 연합함대는 한국 진해만에 잠복해 북유럽 발트해의 군항인 리바우를 출발한 러시아의 발틱함대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러·일전쟁의 향방을 가른 쓰시마 해전의 전야였다. 당시 연합함대에는 수뢰정에 배속된 가와다 이사오(川田功 1882~1931) 소위가 있었는데, 그는 소좌로 퇴역할 때까지 줄곧 진해에서 근무했다. 퇴역 후 작가가 된 가와다는 1925년 자신이 경험한 러·일전쟁을 바탕으로 [포탄을 뚫고서]라는 소설을 썼다. 주인공인 교 분키치(京文吉)라는 해군 수병이 이순신의 혼령에 빌고 용기를 얻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조선 다윗이 일본 골리앗 물리친 법 배워야”


▎일본의 국민 작가 시바 료타로 (司馬遼太郎). 본명은 후쿠다 데이이치 (福田定一)이지만, ‘사마천을 존경하지만 그에게는 한참 못 미친다’는 뜻으로 시바 료타로라는 필명을 썼다. / 사진:이훈범
“당연히 세계 제일의 해장인 조선의 이순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인격, 전술, 발명, 통제술, 지모와 용기 어느 한 가지 상찬하지 않을 것이 없다. 특히 분키치를 움직인 것은 일본 측이 쏜 탄환에 왼쪽 어깨를 맞아 피가 발뒤꿈치까지 흘러내렸는데도, 순신이 고통을 입 밖에 내지 않고 전투가 끝난 뒤에야 비로소 칼로 살을 잘라 탄환을 빼낸 장면이었다. (중략) 이 일을 떠올리자 분키치의 인내력은 10배나 되어, 통증을 느낄 때마다 그는 마음속에 ‘순신, 순신’이라 부르며 그것을 견뎌낼 용기를 진작시켰다. (중략) 300년 후의 오늘 순신의 이름은 분키치의 아픔을 치유해주는 힘이 되었다.”

가와다는 우리나라 작가인 김소운을 만난 자리에서 자신이 곧 분키치였음을 털어놓았다.

“매년 이순신 장군 제사 때는 통영까지 갔으며, 그 제사는 사령부의 주요한 연례행사였다.”

그는 “실례되는 말씀이나 현재의 조선인은 이순신의 위대함을 알고 있을까”라고 반문한 뒤, “넬슨 열명을 모아놓아도 이순신 한 명에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더라는 것이다.([아시아공론] 1976년 7월호/ 1977년 10월호, 김소운)

일본의 해군 장성들이 300년 전 자국의 야망을 짓밟은 적장의 혼령에 제사를 지내고 무운을 빈 것이다. 다윗인 일본제국 해군이 러시아제국의 발틱함대라는 골리앗과의 싸움을 앞두고 있는 절박한 상황에서 비록 적장이지만 자신들과 같은 입장에 섰던, 그리고 자신들이 싸움을 앞두고 있는 그 자리에서 자기 조상을 무참하게 깨뜨린 천하의 명장 이순신에게 빌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을 것이다.

[료마가 간다], [언덕 위의 구름] 등 일본인들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역사소설을 많이 써 아사히신문으로부터 ‘지난 1000년간 일본 최고의 문인’으로 선정되기도 한 유명 작가 시바 료타로(司馬 遼太郎)는 이순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명장이란 한 민족의 긴 역사 가운데 두세 명 있으면 많은 편입니다. 하물며 바다의 명장이란 더욱 드물어서 적어도 쓰시마 해전까지의 일본사에서는 단 한 사람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 때 조선에서는 이순신이라는 훌륭한 사람이 어드미럴(Admiral 해군제독)로 크게 활약합니다. (중략) 당시(메이지 시대) 한국인들은 이순신이라는 이름도 잘 몰랐습니다. 아주 먼 옛날에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이순신을 발견한 것은 메이지의 일본 해군이었습니다. 그에 대한 연구를 한 것도 메이지의 일본 해군이었습니다. (중략) 러·일전쟁 기간 일본 해군사관들은 이순신이라는 이름을 학교에서 배우고 책에서 읽어 잘 알고 있었습니다.”([메이지라는 국가] 1994 [일본인이 본 이순신]에서 재인용)

그는 1980년대 고병익(전 서울대 총장), 선우휘(전 조선일보 주필) 등 한·일 지식인들과의 대담에서도 메이지 해군의 장교가 이순신의 혼령에 빌었다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양국 사이에서 가능한 매우 감동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아군이냐 적군이냐를 떠나 명장을 존경해 추모하고 그에게 무운을 비는 것은 훌륭한 태도가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한 열린 자세가 일본 해군에게 쓰시마 해전의 승리를 가져왔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순신을 발견한 것은 메이지의 일본 해군”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통영 충렬사. 선조 39년(1606)에 7대 통제사 이운룡이 세웠다. 현종 4년(1663)에 임금으로부터 ‘충렬사’라는 현판을 받은 사액사당이 된 이래로 역대 수군통제사들이 매년 봄, 가을에 제사를 지냈다. 러·일전쟁(1904~1905) 전후의 시기에는 일본 해군 장성들도 연례행사로 이곳에서 이순신 제사를 올렸다. / 사진:이훈범
그렇다고 일본에서 본격적으로 이순신에 대한 연구가 진행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러·일전쟁 이전까지 30여 년 동안 일본에서 발행된 이순신 관련 서적은 두 권에 불과하다. 일본인이 쓴 사상 첫 이순신 전기인 [문록정한수사시말조선이순신전]과 일본해군대학교의 전사 과목 교재인 [일본제국해상권력사강의]다.

1892년 발간된 첫 번째 책은 ‘임진년 한국 정벌 수군의 전말 조선 이순신전’이라는 거창한 뜻과는 어울리지 않는 52쪽 분량의 소책자다. 저자 역시 학자나 군사전문가가 아니라 당시 조선 남해안에 파견된 측량기사였던 세키 고세이(惜香生)다. 당국의 지시로 조선 남부 연해지방을 측량하면서 그곳이 일본 수군이 피를 흘렸던 곳임을 알게 되고, 그렇게 만든 장본인인 이순신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이순신을 흠모해서라기보다는 “제국 해군이 임진, 정유 두 전쟁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뜻에서 쓴 책에서 세키는 이순신과 넬슨을 처음으로 비교한 사람이 된다.

“영국을 굳게 지켜 나폴레옹의 전화를 입지 않게 한 것은 영국의 이순신이라고 할 수 있는 넬슨의 전공이요, 조선을 지켜 국운의 쇠락을 면하게 한 것은 조선의 넬슨이라고 할 수 있는 이순신의 위대한 전역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후 16년이 지난 뒤 단재 신채호가 대한매일신보에 이순신을 넬슨에 비유한 것이 한국인으로는 처음이라는 사실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1902년 일본 해군대학교 교관인 오가사하라 나가나리(小笠原長生)가 쓴 [일본제국해상권력사강의>는 24쪽에 걸쳐 임진왜란을 다루면서 이순신에 관한 내용을 비교적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이순신은 13척의 선대로 조류를 이용해 포화를 퍼부으며 독전해 (중략) 다른 부대들도 이순신이 나왔다는 말을 듣고 기가 꺾여 섬 구석이나 만안에 잠복해 해상권은 다시 이순신이 점령하게 됐다. (중략) 수군이 패해 해상권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육군은 더욱 어려워졌다.”

충무공의 인품과 공적 제대로 기억해야

어디서나 그렇지만 너무 나가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있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한 이순신인데, 없는 사실을 보태 쓸데없이 과잉 포장된 우상화 작업을 벌이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일본이나 영국 해군사관학교에서 이순신을 가르친다거나, 세계 4대 해전의 하나로 한산도 대첩이 들어간다는 식의 근거 없는 희망사항들이 마치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고개를 드는 것이다.

메이지 시대에도 일본 전체가 이순신에 대해 존경심과 경외감을 가지고 그를 흠모한 것은 아니었다. 해군대학교에서도 이순신만을 별도로 가르치는 과목은 없었다. 쇼와(昭和 1926~1989년) 시대 초기, 즉 일본이 점차 군국주의로 치닫던 시절인 1920년대 후반부터는 일본 해군에서도 이순신에 대한 외경은 이미 사라지고 있다. 메이지 해군의 이순신 제사도 결국 자신들의 필요에 의한 것이었을 뿐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어디 이순신이 사라지는 것이겠나. 여기저기 군살을 붙여 이순신을 볼썽사나운 우상으로 만드는 맹목적 애국주의보다는, 그의 인품과 공적을 제대로 이해하고 기억하는 것이 우리의 충무공을 영원히 살아있게 만드는 길일 것이다. 이를 위해 다음 회에 23전 23승이라는 이순신의 전승 신화가 과연 어떻게 가능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 이훈범- 남들이 못 보는 세상을 보고 싶어 기자가 됐고, 기자로 살며 본 세상을 칼럼에 녹였다. 얽매이지 않고 세상을 떠다니는 구름을 동경했지만, 32년을 중앙일보에 얽매였다 2022년 해방됐고 이제 새로운 글쓰기에 도전하고 있다. 역사에서 혜안을 얻는 게 삶의 기쁨이다. 2023년 초 첫 소설 [화살 끝에 새긴 이름]을 발표했다. [역사, 경영에 답하다], [세상에 없는 세상수업], [품격] 등을 펴냈다.

202408호 (2024.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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