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생활

Home>월간중앙>문화. 생활

[유민호의 일본 직설(直), 요설(妖) 그리고 곡설(曲説)(13)] ‘에로그로’ 문화로 본 일본 성문화와 인구 대책 

인간의 본능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양날의 칼 

‘에로그로’는 에로틱과 그로테스크를 합친 일본식 조어
일본 선진 성문화, 섹스리스·저출생이라는 부작용 양산


▎21세기 버전 에로그로 문화의 무게 중심은 ‘그로’가 아닌 ‘에로’에 집중된다. 애니메이션에서 여자 주인공이 될 필수 요건은 머리가 아닌 몸매다. / 사진:유민호
"36.1 %.’ 한국인 부부의 평균 섹스리스 수준이다. 한 달간 성관계 횟수가 1회 이하면 섹스리스로 구분된다. 한국인 3명 중 1명은 한 달 내내 부부간 육체관계가 ‘거의’ 없다는 의미다. 8년 전인 2016년 통계라는 점을 감안하면 2024년 섹스리스는 한층 더 많을 듯하다. 신문·방송만 보면 ‘한국=섹스천국’으로 비친다. 그러나 막상 부부간 성관계 횟수를 보면 황량하다.

다른 나라 상황은 어떨까? 2006년 콘돔회사 듀렉스(Durex)가 조사한 글로벌 설문 조사 결과를 보자. 세계 41개국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1년간 글로벌 평균 섹스 횟수가 103회다. 대략 1주일에 두 번 정도다. 세계 1위는 그리스(138회)로 1주일에 2.7회 정도다. 10위인 미국은 113회, 일본은 45회로 세계 최저다. 한국은 당시 듀렉스 조사 대상에서 빠져 있다. 그러나 여러 상황을 고려할 때 일본보다 조금 높은 세계 최하위권 수준으로 추정된다.

6월 19일 윤석열 대통령이 핑크빛 무대의 중심에 앉았다. 대통령 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와 함께 ‘저출생 추세 반전을 위한 대책’을 발표했다. 올해 합계 출산율이 0.6명대까지 주저앉으면서 마침내 국가비상사태로서의 인구대책이 공표됐다. 한국의 일상이지만, 일이 터지면 일단 ‘정부 대책’부터 묻는다. 모든 정책을 국가가 주도하는 ‘큰 정부’가 한국의 상식이다. 국민 스스로가 알아서 판단 대응해 가는 ‘작은 정부’는 없다. 안전 부주의로 아파트에 화재가 발생해도 정부 대책을 묻는 판이다. 1960년대 산업화, 1980년대 민주화, 2020년 팬데믹을 통해 정부의 역할과 기능은 한층 더 비대해진다. 2024년 인구절벽, 인구소멸이 현실로 나타나면서 출생 문제까지 정부 책임으로 몰아가는 판이다.

과연 정부가 자식을 낳을지 말지를 결정할 정도의 능력, 아니 책임을 질 수 있을까? 북한이나 과거 루마니아처럼 독재나 강권 정치가 아닌 한, 정부가 부부간 문제에까지 끼어들어 참견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돈을 뿌리고 다자녀 가정에 특혜를 아무리 준다고 해도 최종 결정권은 부부에 있다. 1억원을 주면서 애를 낳으라는 기업이 나타나고 있다. 인구 위기를 잠시 늦출 수는 있겠지만, 곧 2억~10억원을 준다고 해도 거부할 사람이 나타날 것이다. 내가 싫으면 그만이다. 저출생은 돈 문제만이 아닌, 수많은 원인과 배경 하에서 나타난 결과물이다. 한국이 저출생 세계 1위인 것은 산적한 문제와 배경이 세계에서 최고로 복잡다단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유럽 선진국에서 보듯 돈의 역할과 기능은 보조적 수단에 불과하다. 윤 대통령의 저출생 대책이 그 나물에 그 밥이라면서 비판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신이라도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인간 출생률이다. 떨어지는 속도를 늦출 수야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합계 출산율 0.5명도 초읽기에 들어서 있다.

무슨 일이건 ‘정부 대책’ 부터 따지는 한국


▎인간 피부에 준하는 색감과 촉감은 일본 캐릭터나 피규어가 가장 중시 여기는 요소다. 눈으로 보는 것만이 아닌 손으로, 코로, 입으로 느끼는 오감체험이 에로그로의 출발점이다. / 사진:유민호
윤석열 정부의 저출생 대책을 보면서 떠오른 단어가 ‘섹스리스’다. 아이를 낳을 경우 정부 지원이나 돈에 관한 얘기는 넘치지만, 막상 출산의 출발점이 될 부부관계에 대한 논의 자체가 없었다. 자식에 이어 부부관계까지 정부가 개입한다는 것이 언어도단이기는 하다. 그러나 대책이나 대안이 아닌 상황 설명으로서 한국인의 섹스리스에 관한 얘기도 필요할 듯하다. 아무리 작은 물건 하나를 만든다고 해도 핵심천연자원에 관한 얘기가 반드시 들어간다. 별을 따기 전 하늘부터 봐야 한다. 섹스리스 지수가 높아지는 상황에서 아무리 돈을 뿌리면서 별을 따려고 해도 불가능하다. 농담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에 준하는 조직으로 섹스리스위원회 신설을 제안한다. 앞서 강조했듯이, 아무리 정부가 돈을 퍼부어도 인구 감소 속도를 다소 늦추는데 그칠 뿐이다. 비아그라를 무료로 제공하면서 섹스리스 대책을 수십 수백 가지 내놓는다고 해도 부부관계 횟수까지 ‘왕창’ 끌어올리긴 불가능하다. 그러나 떨어지는 스피드는 늦추고 저출생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는 될 수 있다. 21세기 세상사 관찰법이지만, 50%는커녕 10% 해결도 이미 불가능하다. 이해관계가 얽힌 상태에서 명확한 답 하나로 압축하기 어렵다. 마이너스가 아니라는 점에 감사하면서 1%라도 향상된다면 그나마 성공이다.

섹스리스와 저출생은 한국과 일본 두 나라가 동시에 겪고 있는 21세기 신종 사회 현상이다. 전 세계 인구·사회·보건학자들의 지대한 관심 속에서 진화되고 있는 흥미로운 소재이자 주제이기도 하다. 2024년 현재 섹스리스는 일본이, 저출생률은 한국이 앞서 있다. 그러나 가까운 시일 내 섹스리스 비율도 한국이 더 높아질 가능성이 크다. 섹스리스와 저출생 모두 일본에서부터 시작됐지만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는 곳은 한국이다. 자살이 좋은 본보기다. 원래 일본은 자살의 대명사 국가다. 할복(腹切)문화 탓이기도 하지만, 자살도 삶의 연장으로 생각하면서 간단히 해치운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일본보다 한국의 자살률이 더 높아진다. 부모보다 먼저 저세상에 가는 것을 최악의 불효로 믿는 유교 전통국이지만, 청년 자살률도 전 세계 수위에 올라서 있다. 영어로도 통하는 ‘이지메(ijime)’도 마찬가지다. 왕따를 의미하는, 괴롭힌다는 뜻의 일본어 이지메(イジメ)에서 왔다. 개인 주도 하의 한국 왕따에 비해 일본 이지메는 집단적으로 이뤄진다는 점에서 다르다. 주기적으로 등장하는 학폭 얘기에서 보듯 일본발 이지메를 이미 넘어선 ‘왕따 나라’가 2024년 한국이다.

일본이 왜 섹스리스·저출생 원조가 됐는지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수많은 배경이 있겠지만, ‘일본=섹스천국’이 큰 이유 중 하나라는 분석이 있다. 한국도 시골 골목에까지 성매수가 판을 치고, 해외원정 섹스투어가 넘친다. 그러나 필자가 보면 일본에 맞선 한국의 성문화 지수는 유치원 수준에 불과하다. 일본이 100이라고 할 때 한국은 10 정도 수준이라고 할까? 2009년 중국인을 상대로 성문화 체감지수를 물어봤다. 베이징과 상하이 주민을 상대로 ‘성문화 발달 선진국’이 어디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응답자의 60%가 일본이 글로벌 1위라고 답했다. 2위는 미국(7%), 3위는 한국(5%) 정도다. 아마 한국에서 비슷한 질문을 할 경우라도 일본이 압도적 1위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1980년대 처음 일본에 들렀을 때의 필자 경험이지만, 편의점에서 잡지판매대에 늘어선 초등학생 네 명을 볼 수 있었다.

섹스리스와 저출생은 한·일 공통 사회 현상


▎유령이나 귀신을 다룬 그림과 문학은 에도시대의 전통이자 자랑이다. 공포·엽기 등 기묘한 분위기가 뒤섞여 있다. / 사진:유민호
비닐로 밀봉된 요즘과 달리 당시 잡지는 전부 오픈된 상태로 팔리고 있었다. 어린이들이 읽던 잡지는 플레이보이와 같은 누드 전문지였다. 말리는 사람도 없었다. 누드 사진 속 여성을 서로 비교하던 초등학생들의 천진난만한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2024년 한국 기준으로 보면 대수롭지 않은 풍경일 것이다. 그러나 인터넷이 없던 1980년대 어린이 모습이란 점을 감안하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일본 성문화가 남녀노소 구별 없이 즐기는 대중오락물이란 사실을 절감한 순간이기도 했다. 스포츠를 대하듯 수많은 종류의 성문화를 일상화하면서 비즈니스로 바꾼다. 이미 한국에서도 초청 이벤트로 행해지고 있지만, 투철한 직업정신으로 무장한 일본 성인비디오(AV) 여배우들의 해외 공연이 줄을 잇고 있다. 한국뿐만 아니라 대만, 중국, 필리핀, 태국 등 아시아 전체가 일본 AV 여배우들의 활동 무대가 되고 있다. 아무리 개방 자유시대라고 해도 AV 배우라고 공표하면서 외국 공연까지 나서는 한국 여성은 아직 없다. 남자 호스트도 마찬가지다. 이미 시작됐을 수도 있겠지만, 가까운 시일 내 일본 남자 호스트의 한국공연도 일상화할 것이다.

그렇다면 성문화 지수가 어떻게 해서 섹스리스·저출생으로 연결될 수 있을까? ‘일본=섹스천국’이란 점이 섹스리스·저출생에 어떤 영향을 준다는 것일까? 간단히 말해 동일 함수관계라고 보면 된다. 성문화 지수가 높은 섹스천국일수록 섹스리스·저출생 상위권에 올라선다는 의미다. 야동을 많이 볼수록 섹스리스로 나아가고 마침내 출생률도 떨어진다는 해석이다. 일본인 대부분이 동의하지만, 유니클로와 100엔숍이 임금 저하의 최대 원인이라고 말한다. 유니클로의 경우 대략 2만엔만 주면 속옷과 양말은 물론 사계절 의류 전부를 장만할 수 있다. 100엔숍도 1만엔 정도로 생활용품 전부를 구입할 수 있다. 한국인이 일본 여행 중 경험하는 엄청난 저물가의 주범이 이미 30여 년 전부터 일상화한 유니클로와 100엔숍에 있다는 것이다. 결국 돈 들어갈 일이 없기 때문에 임금이 오를 이유도 없고 고가품을 만들어 생산할 의욕도 사라진다는 의미다.

섹스리스·저출생도 마찬가지다. 섹스천국에 살면서 일찍부터 성에 눈을 뜨고, 다양한 성문화도 편견 없이 즐기게 된다. 성을 부정하거나 터부시하는 문화도 없다. 그러나 정작 가정을 갖는 순간 섹스리스부부로 가면서 자식도 낳지 않는다. 역설적이지만, 부부간 섹스리스로 갈수록 불륜이 넘치고, 기묘한 발상으로 채워진 성문화 공간도 등장한다. 눈과 머리로 즐기는 성문화는 넘치지만, 육체를 통한 접촉 그 자체는 멀리하는 사회적 분위기도 일상화한다. 일본 2030세대의 성에 관한 인식 중 하나지만, ‘섹스=불결’로 대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마음을 열고 섹스로 나아갈 경우 서로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도 강하다. 따라서 뭔가에 얽매이고 싶지 않은 분위기가 지배하는 상황에서 섹스 자체를 터부시하는 공기도 생긴다. 돈이나 술 한 잔과 함께하는 캐주얼 스타일은 좋지만, 서로를 책임질 육체관계는 멀리한다는 의미다.

일본의 선진 성문화가 거꾸로 섹스리스·저출생이란 부작용을 낳고 있지만, 사실 그 같은 상황이 나타난 것은 20세기 후반부터다. 피임이 가능해지면서 출산율이 낮아지지만, 원래 섹스천국 문화야말로 인구 증가를 적극 도운 공헌자다. 에도(江戸)시대 춘화인 우키요에(浮世絵)의 노골적 성애 그림을 보자. 21세기에는 예술로 취급되지만, 원래는 남녀 간 육체관계를 적극 지원·조장한 도우미로 활용됐다. 일본 인구가 폭증한 것은 메이지(明治)시대를 이은 다이쇼(大正時代) 천황 이후다. 민본주의와 자유주의를 중심으로 한 서방 사상이 열도 전체에 입식된 시기로, 1912년 7월부터 1926년 12월까지 14년 5개월에 걸친 역사다. 사회주의 사상도 퍼져나가면서 조선 지식인들이 ‘독립=사회주의 운동’으로 해석하기 시작한 때이기도 하다. 다이쇼 시대는 무거운 사상만이 아닌, 패션·음식·음악·문학·영화·스포츠 같은 소프트 문화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야동’ 많이 볼수록 섹스 기피, 출생률 하락


▎[치인의 사랑]은 에로그로 문학의 거장 다니자키 준이치로가 남긴 걸작으로 통한다. 사진은 15세 소녀가 28세 성인 남성을 정복한 스토리를 애니메이션으로 엮은 만화책 표지. / 사진:아마존재팬
21세기에 볼 수 있는 일본문화의 상당 부분은 다이쇼 시대에 문을 연 대중문화에서 출발한다. 낭만적으로 묘사되는 일제 하 조선 풍류의 대부분도 다이쇼 시대 유산이다. 당연하지만, 일본이 자랑하는 선진 성문화도 그중 하나다. 여러 각도에서 다이쇼 시대 성문화를 살펴볼 수 있지만, 당대 모두가 관심을 가졌던 최첨단 성문화는 ‘에로그로(エログロ)’라는 키워드 하나로 모을 수 있다. 에로그로는 에로틱(Erotic)과 그로테스크(Grotesque)를 합친 일본식 조어다. ‘뭔가 성적인 흥분을 자아내기는 하지만, 기괴하고도 무서운 측면도 가진’이란 것이 에로그로의 원래 의미다. 드라큘라와 카사노바가 동시에 등장하는 영화라고 보면 된다. 인간의 본능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양날의 칼이 바로 에로그로다.

당시 에로그로 작품을 통해 최고 베스트셀러 작가에 오른 인물이 다니자키 준이치로(谷崎 潤一郎)다. 한국에서 일본 문학이라고 하면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 다자이 오사무(太宰治),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 등 순수 문학 작가에 한정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인 머릿속의 일본 문학은 다테마에(建前), 즉 겉으로 보여주는 표면적 세계에 치중한다. 실제 일본인이 좋아하고 즐기는 혼네(本音), 즉 내면의 세계를 대표하는 것은 다니자키와 같은 에로그로 문학가들이다. 정신세계를 표면으로 내세우면서 실제는 육체의 향연을 즐기는 것이 일본 혼네문화다. 간과하기 쉬운데, 일본 최고(最古)는 물론 세계 최고 소설로도 통하는 11세기 겐지 모노가타리(源氏物語)의 주제가 바로 ‘색(色)’ 하나로 압축될 수 있다. 헤이안(平安)시대의 카사노바, 히카루겐지(光源氏) 개인의 호색 스토리가 일본 문학의 출발점이자 기둥이다. 따라서 일본인에게 ‘문학=색과 성’이다. 주자학 나라에서 말하는 ‘문학=사랑 민족우리’라는 식의 접근법과 크게 다르다.

'치인의 사랑'은 에로그로 소설의 백미

[치인의 사랑(痴人の愛)]은 에로그로 문학의 거장 다니자키가 남긴 최상의 걸작으로 통한다. 1924년 신문에 연재된 작품으로, 일본 성문화를 이해할 중요한 모델이기도 하다. 얘기는 간단하다. 28세의 평범한 회사원 가와이 조지(河合譲治)는 우연히 카페에서 일하는 15세 소녀 나오미(ナオミ)를 만난다. 서구적 얼굴과 몸매의 나오미를 보고는 한눈에 반한다. 숫기 없는 가와이는 나오미를 장래 부인으로 만들 계획을 잡고, 동거생활에 들어간다. 영어 공부와 댄스 교습 등 현모양처 교육을 매일 시킨다. 교양을 갖춘 나오미와 결혼할 생각으로, 월급 전부를 교육에 투자한다. 그러나 나오미는 댄스 교습소에 다니는 동안 다른 남자와 만나고 육체적 관계까지 맺는다. 가와이가 질책을 하지만, 거꾸로 나오미는 반성이 아닌 가출을 택한다. 가와이가 보장하는 안락한 집과 행복보다는 모든 남성과 함께하는 자유로운 시간을 우선시한다. 가와이는 처음에는 배신감에 치를 떤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나오미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는 현실에 직면한다. 결국 남자를 만나든, 옷이나 음식 값을 요구하든, 댄스교습소에서 외국인과 춤을 추든 말든 가와이는 절대 간섭할 수 없다는 약속을 나오미에게 공언한다. 소설은 가와이 자신은 치인, 즉 나오미의 매력에 빠진 미친 인간이라는 고백과 함께 종결된다. 소설에서 하이라이트 장면은 나오미가 가와이 등을 타면서 노는 말타기 놀이다. 원래 나오미를 즐겁게 해줄 목적의 놀이였지만, 언제부턴가 가와이를 육체적, 정신적으로 압도하는 게임으로 변한다. 땀을 뻘뻘 흘리고 무릎에서 피가 나도 나오미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가와이를 동물로 대하면서 마치 고문하면서 즐기는 식의 그로테스크한 장면이 소설 곳곳에 등장한다.

21세기 기준으로 보면 [치인의 사랑]은 미소녀 길들이기 범죄 소설로 느껴진다. 그러나 소설의 결과는 13세나 어린 나오미가 가와이를 정복한 스토리다. 정확히 100년 전에 나온 소설이지만, 육체·섹스·미소녀·정복욕·사디즘(Sadism)이 뒤섞인 일본 성문화 백화점이 다니자키 작품 속에 넘실댄다. 한국에서 여성 중심 스토리라고 하면 논개, 춘향전, 황진이, 신사임당, 유관순 같은 인물이 떠오른다. 대략 효녀, 열녀, 어머니, 민족국가의 이름으로 탄생된 인물들이다. 에로틱하고도 관능적인 여성미, 오페라 카르멘과 같은 ‘나만의 길’로 나아가는 여성이 단 한 명이라도 있을지 의문이다. 가와이가 눈물을 흘리며 돌아오라고 해도 나오미는 매너도 좋은 외국 남성이 그립다면서 가출한다. 나오미가 옳고 그름을 따지자는 것이 아니다. 일본의 문학적 상상력이나 성문화 지수가 한국보다 몇 단계 위에 있다는 것을 100년 전 소설 [치인의 사랑]을 통해 재확인할 수 있다.

다니자키 무덤, 교토와 도쿄 두 곳에 있어

지난 4월 도쿄 다니자키 무덤에 들른 적이 있다. 필자는 가와바타의 [설국(雪国)]뿐만 아니라 다니자키가 남긴 수많은 에로그로 소설도 즐긴다.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도 짙다. 성(聖)과 선(善)을 이해할 최고의 방법 중 하나가 속(俗)과 욕(欲)이다. 빛은 모두가 쉽게 따라가지만, 어둠은 주저하게 된다. 뭔가 망설이는 심리를 자극해 어둠 속으로 깊이 빨아들이는 것이 다니자키 스타일의 에로그로 세계다. 다니자키 무덤은 교토와 도쿄 두 군데에 나뉘어 있다. 교토는 세 번째 부인과 함께했고, 도쿄는 다니자키 가족 공동무덤이다. 도쿄가 분골(分骨) 무덤인 셈이다. 일본 무덤은 유골이나 머리카락을 곳곳에 뿌리면서 기억의 공간을 넓혀갈 수 있다. 한국처럼 풍수지리를 믿으면서 시신 전체를 땅에 묻는 무덤이 아니다. 필자가 들른 곳은 도쿄 스가모(巣鴨) 주변 지겐지(慈眼寺) 안의 무덤이다. 자전거를 타고 찾아갔다. 작은 절이지만, 다니자키는 물론 [라쇼몬(羅生門)] 작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 龍之介) 무덤도 함께 안치돼 있다. 절 왼쪽 집단묘지 공간을 따라 들어가자 아쿠타가와 안내판이 보인다. 흥미롭게도 다니자키 안내판은 없다. 35세 때 자살로 생을 마감한 아쿠타가와가 60여 년 작가 경력의 다니자키보다 한 수 위에 선 듯하다. 가족 이름과 함께 다니자키 이름을 새긴 작은 비석을 발견했다.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체험한 뒤의 결론이지만, 아무리 유명한 작가라도 무덤을 보면 왜소하다. 정치인, 군인, 경제인의 무덤은 죽어서도 크고 화려하다. 펜의 힘이 총과 칼 나아가 돈보다도 강하다고 하지만, 무덤 장식이나 크기로 보면 펜은 총·칼·돈보다 한참 약하다. 다니자키는 가와바타와 함께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1886년생인 다니자키는 1965년 저세상에 갈 때까지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에로그로 소설에 매달렸다. 결혼도 세 번이나 하고, 원래 처와 이혼한 뒤 처의 여동생과 동거를 한 인물이기도 하다. 다양한 여성편력 덕분일지 모르겠지만, 다니자키는 일본 최초의 페미니스트 남성작가라는 별명도 갖고 있다. 남성이 아닌, 남성의 육체와 정신을 지배하는 여성이야말로 세상의 주인공이란 글을 곳곳에 남겼다. 에로그로 소설은 여성 내면의 파워를 증명해 내기 위한 최적의 도구였을지 모르겠다. 에로그로 문화를 가까이할 경우 인구 감소를 한층 더 부추기는 반동(反動)으로 낙인찍힐지 모른다. 과연 자식도 낳고 에로그로도 함께 즐기는 세상은 불가능할까?

※ 유민호 - 미국 워싱턴에 있는 에너지·IT 컨설팅 회사 ‘퍼시픽21’의 디렉터. ‘딕 모리스 선거컨설턴트’ 아시아 담당.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방송(SBS) 기자로 일하다가 1994년 일본 마쓰시타정경숙 15기로 입숙해 5년 과정을 마치는 동안 125개 나라를 순회했다. 조지워싱턴대학 E-Politics 프로젝트 디렉터, 일본경제산업성 연구소(RIETI) 연구원을 지냈다. [백악관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국 소프트파워] [미슐랭을 탐하다]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202408호 (2024.07.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