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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운의 기후와 문화 그리고 작품을 찾아서(25)] 고구려 장수왕 ‘남하 정책’의 속사정 

4세기 만주 추워지자 한강으로 눈 돌렸다 

고구려에 한강 빼앗긴 백제, 남쪽 지방 ‘마한’ 복속
흉노족(훈족)에 밀려난 게르만족, 로마로 쳐들어가


▎고구려 장수왕은 남하해 백제 위례성(서울)을 함락하는 등 한강 유역을 점령했다. 장수왕은 기후 변화로 만주 지역의 농업 생산량이 낮아지자 군량을 확보하기 위해 남하 정책을 펼쳤을 가능성이 있다. / 사진: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홈페이지 캡처
어렸을 때 궁금한 것 중 하나는 ‘TV 사극에는 왜 장수왕이 등장하지 않는가’였다. 고구려의 전성기는 광개토대왕부터 장수왕 시대라고 배우는데, 이상하게도 광개토대왕만 강조될 뿐 장수왕에 대해서는 드라마나 영화로 다뤄진 것을 단 한 번도 볼 수가 없었다. 영토도 가장 넓었고 무려 78년이라는 긴 세월을 다스렸는데도 말이다.

왜 그럴까 생각해보니 장수왕이 다소 좀스러워 보였기 때문은 아닐까 싶었다. 장수왕 시대는 고구려 역사상 가장 넓은 영역을 확보했지만, 진출 방향이 북쪽이 아니라 남쪽이었다. 그러고 보니 궁금증은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장수왕은 왜 남하 정책을 폈을까? 아버지 광개토대왕은 넓은 대륙으로 진출했는데, 아들 장수왕은 왜 굳이 좁은 한반도로 내려온 것일까. 물론 비옥한 한강 유역을 확보하기 위해서라고 배우기는 했다. 그래도 잘 이해가 되지는 않았다. 한강 유역이 비옥한 것은 알겠는데, 넓은 만주에는 한강 유역만큼 비옥한 땅이 전혀 없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고조선, 부여, 고구려는 어떻게 그곳에서 나라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일까. 이에 대한 의문이 풀린 것은 기후에 대한 이해를 한 뒤부터다.

4세기부터 게르만족 대이동


▎5세기 고구려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충주 고구려비. 장수왕이 남한강 유역의 여러 성을 공략해 개척한 후 세운 기념비로 추정된다. / 사진:나무위키 캡처
4세기부터 유럽에서는 게르만족의 대대적인 이동이 시작됐다. 예전엔 훈족이 동쪽에서 침입하자 이에 쫓긴 게르만족이 남하를 결정했다고 알려졌다. 훈족의 정체에 대해선 한무제에 의해서 서역에서 밀려난 흉노족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한나라의 7대 왕인 무제는 정복사업을 즐겼던 황제였다. 그는 동쪽으로는 고조선, 남쪽으로는 남월(지금의 베트남)을 공격해 정복했다. 그런 그가 일생일대의 가장 큰 사업으로 구상한 것이 흉노족 축출이었다. 한나라 건국 이래 흉노족은 가장 큰 벽이었다. 단순히 국경 근처를 약탈하는 오랑캐 수준이 아니라 한나라가 매 번 공물을 보낼 정도로 강력한 이웃이었다. 앞서 한나라를 건국한 유방은 흉노족을 토벌하려다 오히려 포위돼 굴욕적인 협상을 통해 풀려나기도 했다. 앞선 황제들의 소극적 대외활동 덕분에 재정이 충분했던 무제는 흉노를 무찌르는 데 아낌없이 돈을 퍼부었다. 이 당시 무리한 정복사업으로 인해 이후 한나라의 경제 상황이 크게 악화하긴 했지만, 흉노를 결국 축출하는 데는 성공했다. 그리고 이때 중국과 유럽을 잇는 고대 무역로 ‘실크로드’가 개통됐다. 그리고 많은 학자들이 이때 한나라에 의해 튕겨진 흉노가 결국 서쪽으로 이동했고 그렇게 해서 게르만족의 이동을 촉발시켰다고 보는 것이다. 여기에는 한 가지 함정이 있다. 시기적 불일치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한무제가 곽거병이나 위청 같은 장수들을 보내 실크로드에서 흉노족을 축출한 것은 기원전 1세기쯤이다. 게르만족의 이동은 4세기부터다. 그렇기 때문에 훈족의 발흥과는 약 400년 이상의 간극이 있다. 당시 아무리 교통 수단이 미비했다고는 하지만 서역에서 유럽까지 이동하는 데 걸린 시간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길지 않은가.

그런데 여기에 ‘기후’라는 양념을 넣으면 그 이질감이 많이 완화된다. 4세기부터 유라시아 대륙은 한랭화로 접어들었다는 점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한무제에 의해 중국에서 멀리 떨어진 중앙아시아 일대에 흩어져 살던 흉노족은 그럭저럭 자리를 잡고 살았다. 하지만 4세기 한랭화라는 기후 악화를 버티기 어려워 서남쪽의 유럽으로 이동했다는 가설을 세워보는 것이다.

한랭화로 유목업 직격탄 맞아


▎스코틀랜드 출신의 화가 앵거스 맥브라이드(Angus McBride)의 훈족 묘사 일러스트. 4세기 한랭화로 중앙아시아에서 유목업이 힘들어지자 서남쪽의 유럽으로 이동했을 가능성이 있다. / 사진:나무위키 캡처
기후가 한랭해지면 흔히 농업이 가장 먼저 타격을 입는다고 생각한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날씨에 의존하는 것은 농업뿐이 아니다. 유목업이야말로 기후 변화에 큰 영향을 받는다. 오히려 더 취약하다. 온난한 기후대는 식물이 풍부하기 때문에 한랭화가 되더라도 어느 정도 버틸 수 있다. 하지만 초목이 겨우 자라던 지역에 한랭화가 시작되면 생존을 위협하는 타격을 입는다. 유목 민족들이 살아갔던 중앙아시아 일대는 스텝(Steppe)이라 불리는 초원지대다. 온대나 아열대보다는 수목이 현저하게 적어 양과 말을 먹일 풀 정도가 펼쳐진 곳이다. 기온이 내려가면 이런 풀마저 사라지게 된다. 결국 흉노족(훈족)이 이동하자 게르만족이 더 남쪽인 로마로 밀려들어갔고, 로마는 이들을 통제하는 데 실패해 결국 제국이 무너졌다. 즉, 기후변화로 인해 ‘흉노족→게르만족→로마’라는 연쇄 도미노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이런 상황은 동아시아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혜제 원강 7년(297) 여름 6월, 진주(秦州)·옹주(雍州)에 서리가 내려 농작물이 죽었다.”

“혜제 광희 원년(306) 8월 갑신일, 장안과 낙양에 눈이 내렸다.”

“목제 영화 2년(346) 8월 기방(冀方)에 많은 눈이 내려 사람과 말이 대부분 얼어 죽었다”

진(晉)나라의 역사를 담은 [진서(晉書)]에 기록된 이상기후와 관련된 기록들이다. [삼국지]의 주요 인물 중 한 명인 사마의의 손자 사마염이 세운 진나라는 280년 위·촉·오 삼국으로 나뉜 중국을 통일했지만, 얼마 가지 못했다. 30여 년이 지난 316년 만리장성 너머에서 남하하는 유목 민족들에 밀려난 것이다. 수도 장안이 함락됐고, 이후 중원은 흉노·강·저·선비·갈 등의 유목 민족이 차지하게 됐다. 마치 로마제국이 훈족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진 것과 같았다. 이때 유목 민족들은 그저 그런 약탈이 아니라 생존의 위협을 느껴 밀려들어온 것이기 때문에 그 절박함이 이전과는 달랐을 것이다.

그리고 유목 민족들에게 중원을 내준 진나라 왕족들은 양쯔강(揚子江) 이남으로 내려가 이곳 호족들의 도움을 받아 건강에 수도를 세우고 동진(東晉)을 건국했다(앞서 무너진 진나라는 서진(西晉)이라고 부름). 그래서 이 시기를 5호 16국 시대라고 하는데, 5호는 화북 지역을 지배했던 5개의 유목 민족(오랑캐), 16국은 이때 세워진 각종 왕조를 가리킨다. 한족이 유목 민족에게 중원을 내준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물론 나중에는 여진족이나 몽골족에게 내줬지만, 당시로서는 큰 충격이었다. 그렇다면 당시 중국을 닥친 기후변화는 어땠을까.

진나라(서진+동진)는 중국 역사상 추위로 가장 고생했던 왕조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여름에 눈이 오고 서리가 내린 해가 6차례이고 겨울에 폭설과 함께 이상 한파가 닥친 해도 26차례였다.

동진은 사계절이 따뜻한 양쯔강 유역에 자리 잡았는데도 한랭화의 피해를 비켜가지는 못했다. 진성제 함강 2년(336)부터 동진이 멸망한 420년까지 약 100년 동안 기록된 한재가 30여 차례다. 중국의 역대 기후를 분석한 대만의 기상·역사학자 류자오민(劉昭民)은 이 시기 연평균 기온이 현재보다 섭씨 1도 정도 낮을 것으로 추정했다. 북위(北魏, 386~534) 말엽에 나온 농업 안내서 [제민요술(齊民要術)]을 보면 황하 유역에서 쌀농사를 거의 짓지 않는다고 나올 정도다. 기온이 내려가 벼를 재배하기 어려워진 것이다. 이런 상황이니 농업이 주요 산업이 었던 한족으로서는 꼭 유목 민족이 아니더라도 양쯔강 일대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을 것 같기도 하다.

고구려 장수왕이 드넓은 만주를 놔두고 남쪽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마찬가지다. 당시는 지금보다도 기온이 낮았다는 현실을 간과하면 장수왕이 만주를 놔두고 한강으로 내려온 것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더구나 광개토대왕 때 팽창 정책으로 국경이 넓어지면서 이를 유지하는 병력도 늘어났을 것이고, 식량 문제가 적지 않은 부담이 됐을 것이다. 타국에서 곡물을 수입하는 것을 고려할 수도 있었겠지만, 이 시기에는 국가 간에 잉여 식량을 서로 무역으로 주고받을 만큼 경제가 발달한 시기는 아니었다. 결국 장수왕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정복 활동을 활발히 벌이는 국가라면 비축 식량 기지의 역할을 해줄 땅이 반드시 필요하다. 군량이 해결되지 않고서는 전쟁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후금(청)도 명나라와 병자호란 이후 조선에 가장 원했던 것이 식량이었다. 명나라와의 일전을 앞두고 조선을 식량 기지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갈수록 농업 생산량이 낮아지는 만주를 보면서 장수왕은 그 어느 때보다 남쪽으로의 진출이 필요하다고 인식했을 것이다. 이 시기에는 만주로 확장하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그리고 이런 장수왕의 결정에 직격탄을 맞은 것은 백제였다. 백제는 잘 알려진 것처럼 한강에서 건국했고 이후 서울·경기 지역이 나라의 중심이었다. 흔히 백제라고 하면 공주(웅진)와 부여(사비)를 생각하지만, 백제의 건국(BC 18) 이래 서울(위례성)은 무려 493년 동안 수도였다. 공주와 부여가 백제의 수도였던 것은 200년가량이다. 백제는 한강의 압도적인 농업생산 덕분에 성장할 수 있었던 나라였다. 그러니 한강 유역을 빼앗긴 백제가 얼마나 큰 충격에 빠졌을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장수왕의 남하에 백제 직격탄 맞아


▎고구려 고분벽화 통구12호분의 참수도. 고구려의 무사가 적장을 참수하는 장면을 모사(模寫)하고 있다. / 사진:국립중앙도서관
결국 한강을 빼앗긴 백제도 남쪽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 이때 백제의 영역으로 확실하게 편입된 곳이 전남 지역이다. 이전까지만 해도 전남은 마한이라는 독립적 정치체제였고, 느슨하게 백제의 패권을 인정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사정이 급해진 백제는 이때 전남을 완전히 복속시켰다. 그리고 전남이 복속되자 일본과의 뱃길이 자유로워지면서 백제와 일본의 교류도 더욱 활발해졌다. 광주를 비롯해 전남 일대에서 발견되는 일본식 고분은 이때 일본과 백제를 오가던 일본인들의 무덤일 가능성이 크다. 혹자는 전남의 지역 세력가들이 일본의 무덤 스타일을 끌어다 만든 것이라고도 하는데, 다소 억지스러운 논리다. 무덤은 가장 보수적인 건축양식이다. 단순히 어떤 나라의 문화가 유행한다고 무덤이 바뀌는 일은 극히 드물다. 예를 들어 지금 K-팝 같은 한류가 동남아시아나 일본에서 유행한다고 해서 한국 같은 무덤을 만들지는 않듯이 말이다.

※ 유성운 - 중앙일보 기자.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기후환경학과 석사 과정을 밟고 있다. 저서로 [걸그룹 경제학], [리스타트 한국사도감], [사림, 조선의 586]이 있으며 [당신이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면], [세계사 속 중국사도감] 등을 번역했다.

202408호 (2024.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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