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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혜련의 지구촌 인문기행(14)] 기독교의 성지, 튀르키예 에베소를 가다 

사도 바울이 씨앗 퍼뜨린 복음의 땅 

폐허가 된 2000년 전 고대도시에 남은 번영의 흔적, 신약성경 절반 쓴 사도 바울의 포교지
160년 전 발견 이후 지금도 발굴 중… 켈수스 도서관·원형극장·성 요한 대성당의 흔적 남아


▎시간의 세례를 받은 튀르키예 에베소 건축물의 부서진 기둥들이 주변 폐허와 어우러져 쓸쓸한 멋을 자아낸다. / 사진:고혜련
튀르키예 에베소는 신약성경의 반을 만든 사도 바울의 선교지로 초기 기독교를 정착시킨 공간이다. 고대 그리스·로마의 숨결이 배어있는 에베소 유적지는 아스라한 시간의 성지(聖地)이기도 하다.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튀르키예 지중해 한쪽 황량한 벌판에 폐허로 남겨진 돌무더기들을 접하면 졸지에 가던 방향을 황급히 돌려 세월을 역방향으로 초고속 질주하는 착각에 빠져든다.

동시에 육신이라는 옷을 걸친 지구촌 인간들이 21세기 초반의 어느 한 시점을 지금 막, 통과 중이라는 사실을 새삼 자각한다. 기원전 9세기 그리스인이 만든 도시로 한창 번창하다가 기원후 10세기에 몰락, 버려졌던 에베소. 그로부터 거의 1000년이 지난 19세기 중반(1863년) 발굴이 시작된 기독교 주요 성지 중 한 곳이다.

2000년 전 ‘지중해 3大 도시’ 영광은 사라져

역시 아득한 고대 건축물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이집트 룩소르나 로마·아테네 등을 여행했을 때와는 달리 까마득한 세월이, 만져지는 물체인 양 느껴진다. 잘 닦여지고 보존된 유물들이 마치 근·현대 건축물들인 듯 비현실적으로 온전하게 우뚝 서 있던 그곳들과 에베소는 달랐다.

풍요와 다산(多産)을 상징하는 아르테미스(Artemis) 여신의 신전, 그에 참배하기 위해 군중들이 몰려들어 한때 최고의 번영기를 누렸던 지중해 연안 상업도시. 이제는 황무지가 된 드넓은 숲속 빈터에 회색빛 돌덩이 기둥·지붕들이 여기저기 나뒹굴어 시간의 무덤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산산이 부서진 잔재들이 죽은 시간의 시신들인 양 드넓은 폐허를 적막하게 내리누르고 있었다. 그 사이사이 무더기로 피어나 속절없이 들녘 바람에 휘둘리는 진홍색 양귀비들이 처연함을 더했다. 그런 에베소에서 화려했던 옛 시절의 번영과 영광의 흔적은 찾기 어렵다.

더구나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 바다의 침전물들이 켜켜이 쌓여 바다와 유적지 사이에 육지를 만들어 고대의 에베소는 해안선에서 깊숙이 밀려 들어와 있었다. 2000여 년 전 20만여 명이나 거주했다는 에베소 유적지. 지금은 튀르키예가 된 소아시아 서부 해안에 위치한 에베소는 당시 교통과 상업의 최대 중심지였다.

예수의 사도, 바울이 이곳에서 전도 여행을 했음이 신약성경의 사도행전 첫 문장에 언급돼 있다. 이후 아시아 복음화의 전진기지 역할을 했다. 또한 철학과 문화·예술의 도시로서 세계 7대 불가사의 유물로 손꼽히는 아데미 신전과 대형 야외극장이 있었다. 지구촌 곳곳에서 군중들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소아시아 대륙 서쪽 돌출부인 카이스테르강 하구에 위치했던 에베소는 점차 지난날의 화려한 모습을 잃어간다.

당시 이 도시의 과도한 번창으로 무분별한 삼림벌채 및 훼손이 자행됐고, 지나친 육류 소비가 불러온 거대한 가축 방목이 문제가 됐다. 산림 훼손이 심각해지자 헐벗은 산이 무너져 내렸고 흙들은 에베소를 수렁으로 만들었다. 폭우 때는 진흙이 그대로 바다로 쏟아져 결국 항구 부근 마을을 메워버리게 됐다. 에베소 옛 항구의 흔적은 나중에 한참 떨어진 내륙에서 발견됐다. 기독교 선교에 나선 바울 시대의 항구와 해로·육로가 발달됐던 이곳이 갈대 무성한 습지로 변하고 만 것이다.

에게해 연안의 중심 도시 에베소는, 소아시아 최대 도시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시리아의 안티오크와 함께 지중해 연안 3대 도시로 손꼽혔다. 에베소 주변에는 200여 개 이상의 지역공동체들이 있어 에베소와 거래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당연히 기독교인들에게는 복음화를 위한 전진기지로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원주민들이 숭배하던 우상들의 본거지였던 만큼 광적인 그들의 거센 저항과 항쟁의 두꺼운 장벽을 뚫고 복음을 전파하기에는 많은 도전과 어려움이 따랐다.

신약성경 속 에베소는 전도의 최대·최고의 ‘복음(福音) 자리’이며 신약성경 전체 27권 중 절반에 가까운 13권이 만들어지는 데 중심 역할을 했다. 그 중심에 예수 체포에 앞장섰던 끈질긴 핍박자에서 최고의 숭배자로 변신한 사도 바울(기원후 5~67년·생몰 연도 이견 분분·히브리 본명은 사울)의 열정적인 헌신이 자리한 곳이다. 그가 중앙아시아 전 지역을 4차례에 걸쳐 순회하면서 예배와 강론을 하고, 멀리 떨어진 교인들에게 로마 감옥에서 눈물의 서신을 보낸 내용이 집대성된 것이 신약성서의 주된 내용을 이룬다.

신약 에베소서에는 그가 3년 정도 머문 에베소에서 교회를 세우고 목회하면서 전한 하나님의 말씀이 담겨있다. 그는 에베소의 강연장, 두란노 서원(Hall of Tyrannus) 등을 빌려 복음을 전해 이 서원의 이름이 세계 곳곳에서 기독교 관련 장소와 서점 등에 쓰이게 된다. 또 로마서·고린도 전서와 후서·디모데 전서와 후서·빌립보서·빌레몬서·골로새서·갈라디아서 등의 내용이 전부 바울에 의해 채워진 것이다.

사도 바울은 구약의 선민과 신약의 그리스도인들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축복을 누릴 수 있다고 선포함으로써 초대교회를 괴롭히던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장벽을 무너뜨렸다. “사랑을 받는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에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며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에베소서 5장 초입에 나와 있는 바울의 가르침이다.

바리새인 유대교 신자였던 바울의 ‘회심’


▎당시 유럽 전역에서 이름났던 3대 도서관 중의 하나였던 켈수스 도서관. 도리아식 기둥에 3개의 여신상이 돋보이는 모습이 위풍을 드러내고 있다. / 사진:고혜련
유대인 출신의 바울은 애초 예수의 제자가 아니었다. ‘예수의 열두 제자’와는 무관한 사람이었다. 예수를 직접 본 적이 없다고 기록돼 있다. 바울은 원래 유대교를 신봉한 광적인 신자였다. 엄격한 랍비 교육을 받으며 로마에 거주하던 바리새인으로 그리스도교인들을 박해하는 데 앞장서 왔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의 음성을 접한 후 회심, 이방인을 위한 선교에 전 생애를 바친 사람이다. ‘거룩한 자, 분리된 자’란 의미의 바리새인은 사두개파, 에세네파와 함께 유대교 3대 종파 중의 하나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율법주의·극단적 분리주의·권위주의 등 특권의식에 빠져 예수의 책망을 받았다는 기록이 마태·누가복음 등에 나온다. 오늘날 한국 교인들 사이에서 바리새인을 ‘겉과 속이 다른 사람’, ‘유난히 권위적인 사람’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하고 있는 이유다.

에베소 두 번째 선교 여행 때는 성령 강림 후 방언과 예언을 했다고 전해진다. 사도 바울은 서기 47년, 제1차 여행을 시작한 후 3차까지 11년간(기원후 47~58년)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전도 활동을 했다. 61~63년 로마에서 가택연금을 당하고 로마제국 감옥에도 수감됐다가 ‘로마 대화재’의 주범으로 기독교인들을 몰고 간 네로 황제에 의해 다시 투옥돼 67년쯤 순교한다. 감옥 안에서조차 아시아 여러 교회에 전도 서신을 보내 초기 기독교 정착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에베소의 역사는 기원전 9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에베소를 점유했던 아테네의 한 왕자가 멧돼지와 물고기를 만나는 장소에 도시를 건설하라는 신탁을 받고 식민지의 주민들과 세운 것이 효시다. 기원전 555년경 에베소를 정복한 아나톨리아 고대지방 리디아 지배층들은 에베소 도시 전체를 풍요와 다산(多産)을 가져다준다는 여신에게 헌납했다. 그 다음인 기원전 290년쯤, 그리스와 페르시아·인도에 이르는 마케도니아 대제국을 건설, 새로운 헬레니즘 문화를 이룩한 알렉산드로스 왕조가 현재의 위치에 세 번째 에베소 도시를 건설한다. 그 잔재가 오늘날의 에베소 유적지를 형성하고 있다. 그다음 150년간은 에베소가 로마의 통치 아래에 들어간다. 로마 치하에서 에베소는 주요 요새지가 됐으며 주변 7대 교회와 함께 초기 기독교 시대에 매우 주도적 역할을 감당했다.

뼈대만으로도 드러나는 켈수스 도서관의 위용


▎에베소 원형경기장, 지금은 폐허가 돼 잡초가 자라고 있지만, 기원전 한때 2만5000명을 수용한 대형 무대였다. / 사진:고혜련
에베소 유적지는 1863년 영국의 건축가 존 터틀 우드가 발견한 이후 아직까지 발굴을 지속 중이다. 현재는 80% 정도 발굴이 진척됐는데 여기저기 드높이 솟아 작업 중인 크레인이 폐허 분위기 속 건축 현장을 연상시킨다. 작열하는 한여름의 태양이 여과 없이 쏟아져 내려 회색 돌무더기와 황량한 벌판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에베소로 들어가는 출입문은 남쪽과 북쪽 문 두 개다. 이 안에 관광객을 빨아들이는 곳이 고대 3대 도서관 중의 하나인 켈수스(Celsus) 도서관이다. 당시 2만여 명을 수용해 갖가지 공연을 벌였다는 야외 음악당 겸 극장, 민중 삶의 터전이었던 마을 집터와 시장터, 환락가도 있다.

이곳 유적지 중 뼈대만으로도 아름답고 우아하게 옛 흔적을 품고 있는 곳은 켈수스 도서관이다. 상당히 훼손돼 비록 도서관 앞면의 골조와 조각들만 남아있지만 남겨진 부분의 조형미는 뛰어나다. 주변의 자연 풍광과 어울려 완전체를 능가하는 쓸쓸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1만2000여 권의 양피지와 파피루스로 된 두루마리 장서가 보관돼 있었다고 한다. 당시 최고로 불렸던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도서관과 함께 ‘3대 도서관’ 중 하나로 손꼽혔다. 책을 잘 보존하기 위해 습기 방지용 이중벽도 설치했다니 지혜롭다.

도서관 바로 건너편에 홍등가


▎튀르키예 셀추크에 있는 요한 교회 세례 터. / 사진:김요셉
이 도서관은 이곳을 관장했던 로마 총독 지배 시절인 서기 117~135년에 걸쳐 지어진 건물이다. 하지만 그 후 이 지역을 강타한 외부 전투 세력과 지진 등으로 파괴·매몰됐던 것을 일부 고고학자들이 도서관 건물의 정면인 파사드 형체를 복원해 현재의 모습으로 남겨놓았다.

1층은 이오니아식, 2층은 코린트 양식으로 지어졌던 도서관 건물 정면에는 3개의 출입구가 있는데 그 벽면에 조각된 4개의 여성상이 눈길을 끈다. 정면을 바라보는 위치에서 왼쪽부터 각각 지혜를 상징하는 소피아(Sophia)상, 지식을 상징하는 에피스테메(Episteme)상 등이 보인다. 진품은 최초 발굴자라 주장하는 오스트리아의 빈 박물관에 있고, 일부는 이스탄불 박물관에 소장돼 있으니 복제품인 셈이다.

흥미로운 점은 공부하는 장소인 도서관 바로 건너편이 그 당시 성매매 업소가 흥했던 홍등가였다는 것이다. 근처 반질하게 닳아있는 길바닥 돌판에 새겨있는 문양은 남성의 발자국과 동전, 유흥업소 방향 안내 표지판 등을 담은 광고판으로 당시 상황을 유추하게 한다. 남성들이 많이 드나들던 도서관 근처가 영업장소로 아주 제격이었던 모양이다. 일부 자료에 의하면 그즈음 고린도·에베소 등 신전이 있었던 곳에는 수백 명의 여성 사제들과 신전 창녀들이 공공연히 성매매를 하면서 풍성한 출산을 욕망하는 풍습이 자리 잡았었다고 전해진다.

에베소 유적지 중심 산기슭에 자리 잡은 것은 당시 2만여 명 이상의 관객을 수용했다는 원형극장이다. 산 아래 수십 단의 계단을 반원형으로 굽이굽이 돌려 마련한 객석은 아직도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맨 위 계단 잡풀이 무성한 돌계단에 앉아있으면 에베소 유적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눈 아래 저 밑에서 이어지는 쿠레테스 신작로, 풀숲에는 그동안 사방에서 발굴한 도리아식 커다란 원형 기둥, 무너진 돌담 등 수백, 수천 점들이 갖가지 모양으로 부서진 채 방치돼 있어 비장미를 선사한다.

에베소 고대 유적지 언덕 계곡 안 대로변을 중심으로 둘러보면 당시 주민들을 위한 화장실, 욕탕도 있다. 화장실은 벤치같이 길쭉한 돌의자를 만든 후 가운데 둥근 구멍들을 내놓고 그 밑으로는 물이 흐르게 해 요즘의 수세식 변기와 비슷한 모양새다. 1~2세기에 건축됐다는 대규모 욕탕은 현대의 그것처럼 냉탕과 온탕·열탕·사우나탕을 고루 갖추고 있다.

3개의 기둥이 늘어서 있는 곳은 법률 제정과 행정 집회장소로 이용됐던 곳으로 ‘국가 아고라’라고 한다. 아고라 북쪽의 키가 큰 3개의 기둥이 나란히 서 있는 곳은 바실리카라 부른다. 원래 로마 시대 법정으로 사용됐던 직사각형의 회당을 가리키는 말이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4세기 이후 교회나 성당을 뜻하게 됐다.

탐방로 옆 대리석에 새겨진 그리스 문자,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라는 의미를 담은 ‘익투스’는 당시 기독교인들이 로마제국의 박해를 피해 다닐 때 서로를 알아보기 위해 은밀하게 사용했던 암호로 알려져 있다. ‘물고기’라는 뜻도 내포하고 있는데 다섯 개의 떡과 두 마리의 물고기로 5000명을 먹였다는 예수의 오병이어(五餠二魚) 기적을 암시하는 듯한 표현이다.

이들 에베소 유적지에서 북동쪽으로 2㎞ 떨어진 셀추크(Seljuk)에는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사도 요한(Joannes, 6~100년)이 당시 기독교인 핍박을 피해 산속 깊은 이곳에 성모 마리아를 모시고 와서 은닉하며 살았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돌로 지은 집과 이곳에서 영면한 마리아를 위한 제단, 기념 동상 등이 있어 특히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최대 성지 중 한 곳으로 손꼽힌다.

셀추크 시내에 자리한 성 요한 대성당은 요한 사도가 묻혀있는 무덤 위에 세워진 성당으로 그 규모가 상당했음을 보여준다. 전형적인 비잔틴 시대의 건축물 모양새다.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요한은 후세에 그리스도교 성인으로 추대됐고 요한복음, 요한 1~3서, 요한 계시록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예수가 애제자 베드로만큼 사랑해 많은 일들을 맡겼다. 에베소 유적지 반대편에는 바울의 제자이며 동역자로 2차 전도 여행에 동행했던 누가의 무덤도 자리하고 있다. 의사이기도 했던 누가는 사도행전·누가복음의 저자다.

성 요한 대성당 근처 들판에 기둥 하나만 우뚝 서 있는 곳이 바로 신전 터다. 이 신전은 원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 여신에게 바쳐진 것이었다. 가슴에 유방이 24개나 달린 여신상의 머리에는 바벨론을 상징하는 성이 있고, 대리석 등으로 만들어진 몸에는 사자·호랑이 등 다양한 동물들이 부조돼 있는 것이 특징이다. 처음과 두 번째 신전은 홍수와 화재, 전쟁 등으로 파괴됐고 세 번째는 알렉산더 대왕의 지시로 재건축돼 1000년을 버텼다.

터만 남은 ‘고대 7대 불가사의’ 신전

그러나 게르만족의 대이동 시 고트족에 의해 파괴됐다. 당시 수집한 신전 대리석들은 이스탄불로 옮겨져 성 소피아 성당 건축 시 건물을 지탱하는 주된 기둥들로 활용됐다. ‘고대 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불린 이 신전은 이미 지어졌던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의 두 배 크기였다고 한다. 18m 높이의 신전 기둥이 무려 127개나 됐다. 현재는 첫 번째 신전을 본 따 만든 축소된 모형이 이스탄불 미니아튀르크에 전시돼 있다.

신전이 있던 원래 자리에는 현재 쓸쓸한 신전 터와 돌기둥 하나, 부서진 파편들이 세월의 무상함을 드러내고 있다. 신전과 여신, 그 추종자들이 득세했던 아득한 그 옛날, 사력을 다해 로마의 감옥에서 에베소서 등을 집필하고 기독교 복음을 전달했던 사도 바울. 그는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은 창조 전부터 준비된 하나님의 계획”이라며 “모든 그리스도인은 사회적 계층을 초월한 사랑을 원동력으로 삼고 살아가야 할 의무가 있다“는 깨달음을 신약성경 여러 편을 통해 현세까지 거듭 전하고 있다.

※ 고혜련 - 칼럼니스트. 자연과 함께하기, 온 세상 여행하기가 요즘 주요 관심사다. 중앙일보 등 국내외 주요 일간지에서 기자·문화부장·런던특파원을 지냈다. [어머니, 당신은 내 운명], [힘내! 이제 다시 시작이야] 등 7권의 저서가 있다. 이화여대를 거쳐 미국 뉴저지주립대, 영국 런던대 대학원에서 국제정치·저널리즘을 전공했다. 현재 출판사(주)제이커뮤니케이션 대표로 일한다.

202408호 (2024.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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