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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스완 플랜B _ 대재앙 막을 비책 찾아라 

대지진 1차 피해 방어는 어려워 … 화재, 전기공급 차단 등 2차 피해는 막을 수도
日 '원전 폭발은 피할 수 있었다' … 위기 단번에 극복한 모건스탠리 비법 배워야 

3·11 동일본 대지진. 참사의 후폭풍이 계속 몰아친다. 수많은 사상자를 낸 데 이어 세계경제를 혼란에 빠뜨렸다. 원자력발전소도 큰일이다. 대재앙의 습격은 여간해선 버티기 어렵다. 규모 9.0의 강진에 10m 높이의 쓰나미가 함께 몰아쳤는데 누가 버틸 수 있겠는가. 하지만 대재앙의 2차 피해는 막을 수 있다. 아니, 막아야 한다. 지진으로 전기가 끊기는 걸 예방했다면 원전 폭발 사고는 없었다. 대재앙 ‘블랙스완’에 맞설 수 있는 비책(秘策)을 미리 세워둬야 할 때다.

▎동일본 대지진으로 초토화된 미야기현 나토리에서 한 시민이 구조되고 있다.

1995년 1월 17일. 일본 간사이(關西) 지방 효고(兵庫)현의 고베시와 한신 지역에 규모 7.2의 강진이 발생했다. 일본 지진 관측 사상(당시) 최대 규모였다. 6300여 명이 목숨을 잃었고, 부상자 2만6804명이 속출했다. 경제적 피해 규모는 14조 엔(약 200조원)에 달했다. 일본 사람들은 한신 대지진을 ‘참사’로 기억한다. 뼈아픈 기억은 대비책을 낳았다. 그중 하나가 1996년 1월 신설된 ‘택시 운전기사 방재 리포터’ 제도. 지진 등 재난이 발생하면 택시 운전기사가 라디오 방송사에 실시간 보고하는 시스템이었다. 현재 300여 명이 등록돼 있고, 리포터 차량은 100대에 육박한다.

日 동북부 폐허 만든 강진

“지역민의 삶을 지켜줄 방파제가 될 것이다. 놀랄 만한 세계기록이다.” 일본 이와테(岩手)현 가마이시의 가오루 이시카와 시장은 2009년 3월 벅찬 감동을 드러냈다. 세계에서 가장 깊은 ‘해저 방파제’가 완성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가마이시는 1978년부터 바닷속 63m 지점에 해저 방파제를 건설했다. 31년 만의 준공. 길이는 2㎞, 높이는 30m였다. 지역 주민은 ‘태평양에서 거대한 쓰나미가 몰려와도 이 방파제가 막아줄 것’으로 믿었을지 모른다. 그들의 믿음은 통했을까. 택시 운전기사 방재 리포터 제도는 재앙을 막았을까. 결론부터 말하자. 아쉽게도 “아니다.”

3월 11일 오후 2시46분. 미야기(宮城)현 센다이 동쪽 130㎞, 후쿠시마(福島)현 동북쪽 178㎞ 떨어진 심해에서 규모 9.0의 지진이 발생했다. 한신 대지진의 180배 강도. 최고 10m까지 치솟은 쓰나미가 시속 400~800㎞의 속도로 일본 동북지역을 덮쳤다. 마을은 삽시간에 사라졌고, 집·창고·자동차·컨테이너는 장난감처럼 휩쓸려 내려갔다. 방재 리포터를 맡은 택시 운전기사는 위험을 알릴 겨를조차 없었다. 세계에서 가장 깊은 방파제도 속수무책이었는지, 이와테현 리쿠젠타카타시의 시가지는 통째로 물에 잠겼다.

‘규모 7.0의 강진에도 끄떡없다’던 일본 원자력발전소도 대지진의 희생양으로 전락했다. 후쿠시마 제1원전의 원자로 6기 중 4기가 폭발했다. 고효율 에너지를 연일 뿜어내던 원전은 방사성 물질을 토해내는 애물단지가 됐다.

동일본 대지진의 경제적 피해는 막대할 것으로 추정된다. 골드먼삭스는 피해 규모를 16조 엔(약 230조원)으로 내다봤다. 한신 대지진 피해액의 1.6배다. 일본 증시는 크게 흔들린다. 동일본 대지진 이후 일본 닛케이지수는 3월 11일 1만254.43에서 3월 16일 9093.72로 1000포인트 넘게 내려갔다. 2001년 9·11테러 당시 미 다우지수 낙폭에 버금간다. 2001년 9월 10일 9606이었던 다우지수는 9월 21일 8235.81로 1370포인트 떨어졌다.


심각한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동일본 대지진이 대재앙의 끝인지, 아니면 더 무서운 무언가가 남았는지 알 수 없다. 일본 열도가 충격과 공포에 휩싸인 까닭이다. 이름하여 ‘블랙스완’ 여파다. 블랙스완은 경험으로 확인할 수 없는 예외적 사건을 의미한다. 9·11테러, 태안 기름 유출 사건(2007), 글로벌 금융위기(2008), 천안함 침몰 사건(2010)이 대표적이다.

블랙스완은 갈수록 늘어날 게 뻔하다. 무엇보다 기후변화가 심상치 않다. 독일 뮌헨리보험사의 재해분석 보고서(2010)를 보면 지난해 950건의 자연재해가 발생했다. 1980년 이후 가장 많은 수다. 테러 등 대형 사건도 많이 증가했다. 세계 재난 발생 건수(소방방재청)는 1980년대 190건에서 2000년대 464건으로 144% 늘었다.

자연재해·테러 등 블랙스완의 습격을 방어할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다. 10m 높이의 쓰나미가 순식간에 몰려오고, 대형 항공기가 100층 높이의 빌딩으로 돌진한다면 무슨 수로 막겠는가. 위기관리 컨설턴트인 씨알인스 하정필 대표는 “기후를 지배하고 테러를 완벽하게 틀어막는 건 신(神)의 영역”이라고 말했다.

블랙스완 100% 방어 못해

블랙스완에 대비할 필요도, 소용도 없다는 건 아니다. 1차 타격은 피하기 어렵지만 2차 피해는 줄일 수 있다. 지진의 사례를 보자. 지진의 1차 피해는 낙하물 등 지면 변동으로 발생한다. 화재, 통신·전력 마비 등은 2차 피해다. 일본 원전 폭발 사고도 사실 2차 피해다. 지진으로 전기공급이 끊어진 게 결정타였다. 소방방재청 산하단체 한국BCP협회 김동헌 사무국장은 “지진의 2차 피해는 인간의 힘으로 능히 막을 수 있다”며 “가령 건물에 면진(진동을 없애는 것)·재진(진동을 약하게 하는 것)설비를 구축하면 지진의 2차 피해를 크게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딜로이트안진회계법인 유종기(기업리스크자문) 매니저도 “블랙스완의 2차 피해는 구체적 대비책을 세워 반드시 막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블랙스완의 2차 피해 대비책, 이른바 ‘플랜B’를 세우자는 소리다.

맞는 말이다. 블랙스완 대비책이 없으면 피해는 눈덩이처럼 불어날 공산이 크다. 동일본 대지진이 쓰나미를 거쳐 원전 폭발로 이어진 것처럼 말이다. 그 불똥이 애먼 곳으로 튀어 ‘나비효과’가 나타날 수도 있다. 삼정KPMG의 조사에 따르면 비상대책 없이 재난을 당한 기업의 75%는 얼마 지나지 않아 파산했다.

잘 짜인 플랜B로 블랙스완의 2차 피해를 줄인 기업도 있다. 미 투자은행 모건스탠리다. 시계추를 2001년으로 돌리자. 그해 9월 11일 오전 8시48분 세계무역센터가 무너졌다. 항공기 자살 테러 때문이었다. 일부 언론의 초점은 모건스탠리에 쏠렸다. 이곳 50층에 모건스탠리 직원 3500명이 상주하고 있었다. 셀 수 없이 많은 재무부 채권·유가증권 등 금융자산도 있었다. 대부분 “모건스탠리는 끝났다”고 했다. 그런데 웬걸, 테러 다음날인 9월 12일 모건스탠리의 각 지점은 정상 운영됐다. 업무 개시 30분 후 모건스탠리 필립 퍼셀 회장 겸 CEO(당시)는 기자회견을 열고 이렇게 말했다. “모건스탠리는 정상적으로 운영된다.”

세상은 “어떻게 그렇게 빨리”라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지만 비밀은 간단했다. 철저한 플랜B의 극적인 효과였다. 모건스탠리는 1993년 세계무역센터에서 발생한 폭탄테러 사건 이후 비상상황에 대비한 플랜B를 꼼꼼하게 만들었다. 비상대피 등 훈련을 수시로 실시했고, 긴급상황지휘본부와 주요 지원부서를 다른 곳으로 옮겼다. ‘핫 사이트’라는 실시간 신규 파일 백업 시스템은 플랜B의 백미였다. 그 결과 모건스탠리는 9·11 테러로 본사를 잃었지만 본업은 계속할 수 있었다.


국내에도 좋은 예가 있다. 지난해 4월 아이슬란드 화산 대폭발 때의 일이다. 승객 300여 명을 태운 대한항공 KE907편은 영국 런던 히스로 공항으로 향하고 있었다. 비행 중 돌발사태가 발생했다. 아이슬란드 화산이 폭발하면서 히스로 공항이 폐쇄된 것이었다.

블랙스완이었다. KE907편은 고육지책으로 독일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착륙했다. 진짜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승객을 런던에 보낼 방법이 쉽지 않았다. 극단적인 경우 선박을 이용해 도버해협을 건너야 했다.

대한항공 프랑크푸르트 공항 직원들은 당황하지 않았다. 비상 매뉴얼대로 일을 처리했다. 발 빠르게 교통수단을 확보하고, 숙소를 마련했다. 도버해협을 건널 선박의 티켓도 재빨리 구했다. 대한항공의 ‘승객 런던 운송 작전’은 무려 15시간 만에 끝났다. 그러나 볼멘소리를 늘어놓는 승객은 없었다. 화산 폭발로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한 승객, 이를테면 2차 피해자도 없었다. 꼼꼼하게 만들어진 비상 시 매뉴얼과 반복훈련의 알찬 효과다.

두 사례에서 보듯 블랙스완의 2차 피해는 철저한 대비책만 있으면 막을 수 있다. 허울만 그럴싸한 대비책은 무용지물이다. 명확하고 구체적인 행동지침을 담고 있어야 한다.

대비책을 만들 때 가장 중요한 건 CEO 등 리더의 역할이다. 리더는 건전한 분별력을 가져야 한다. 냉철한 통찰력으로 감춰진 위기와 주변의 조언을 해독해야 한다. 미 다트머스 경영대학원 시드니 핑켈스타인 교수는 자신의 저서 『실패한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에서 “중요한 장애물을 과소평가하는 CEO는 실패한다”고 꼬집었다. 리더라면 누구의 말이든, 그게 무엇이든 귀담아듣고 눈여겨봐야 한다는 얘기다.

1972년부터 일본 원전 폭발 위험 경고

주변의 경고와 조언을 허투루 들었다가 블랙스완의 역습을 당한 예는 적지 않다. 놀랍게도 일본 원전 폭발 사고가 그렇다. 이번에 터진 후쿠시마 제1원전은 미 GE가 1960년대 개발한 모델이다. 건설비용이 저렴한 덕분에 세계 곳곳에 팔려 나갔다. 하지만 1972년부터 ‘위험하다’는 경고가 잇따랐다. 미 원자력위원회 안전담당자는 “GE가 만든 원자로는 압력제어장치에 문제가 많기 때문에 건설을 중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1980년대 중반 미 원자력규제위원회 관계자도 “핵 연료봉이 과열돼 원자로가 녹으면 터질 확률이 90%에 달한다”며 경고했다.

하지만 GE가 개발한 원자로를 도입한 국가 관료들은 “폭발 확률은 10%에 불과하다”고 모른 척했다. 그중엔 일본 관료도 있었다. 익명을 원한 한국수력원자력 관계자는 “일본이 GE형 원자로의 경제성에 집착한 나머지 위험성을 간과한 측면이 없지 않다”고 말했다. 일본의 리더가 그때 원자력 전문가의 충고를 수용해 모델을 바꿨다면? 지금 같은 블랙스완 2차 피해는 없었을 거다.

리더에게 필요한 덕목은 또 있다. 신속한 결단력이다. 하정필 대표는 “블랙스완의 2차 피해를 줄이기 위해선 리더 스스로 ‘3시간-24시간 법칙’을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블랙스완이 발생한 후 3시간 안에 상황 파악을 끝내고, 24시간 내에 사실을 공개해야 한다는 뜻이다(※하 대표는 “숫자 3과 24는 신문의 판을 찍는 시간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언론보다 먼저 대응하라는 뜻이다).

하 대표는 “3시간-24시간 법칙을 가장 잘 활용한 경영자는 모건스탠리 퍼셀 회장”이라며 얘기를 계속했다. “모건스탠리에 9·11테러라는 블랙스완의 2차 피해가 무엇이었겠는가. 모건스탠리가 흔들려 고객 신뢰를 잃는 것이다. 퍼셀 회장은 이를 절묘하게 이용했다. 사건 발생 24시간 만에 기자회견을 열어 건재함을 과시했다. 고객이 맡긴 자산이 안전하다는 걸 빠르게 알림으로써 고객 충성도를 확보했다. 블랙스완의 2차 피해 우려는 오히려 새로운 기회가 됐다.”

간 나오토 일본 총리는 퍼셀 회장과 반대 사례다. 원전이 처음 폭발했을 때 간 총리는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바닷물 투입 결정을 무려 30시간 미뤘다. 플랜B의 실행을 미루는 사이 동일본 대지진의 2차 피해는 눈덩이처럼 커졌다. 때늦은 자위대의 헬기 바닷물 투하 작전도 별 효과를 보지 못한 채 실시와 중단을 반복했다. 뉴욕타임스는 “일본 정부의 미숙한 대응이 위기를 키우고 있다”고 지적했다. 간 총리는 지금 ‘아키 간(あきカン)’으로 불린다. 빈 깡통이라는 뜻으로, 간 총리의 성을 풍자한 말이다. 어정쩡한 대응으로 블랙스완의 2차 피해를 키웠다는 비난이 섞여 있다.

블랙스완은 늘 순식간에 찾아온다. 악몽보다 더 살벌했던 9·11 테러도, 3·11 동일본 대지진도 그랬다. 한국이 블랙스완의 안전지대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대재앙이 언제 어디로 밀려올지는 누구도 모른다. 신의 영역이다. 블랙스완의 2차 피해를 막는 대비책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다. 이를 소홀히 한다면? 대재앙의 1, 2차 피해를 온통 뒤집어쓸지 모른다. 동일본 대지진과 일본 간 나오토 총리가 주는 교훈이다.

■ 세계 각국의 블랙스완 대비 능력

미·영·일 플랜B 모색 중 … 한국은 잠잠


동일본 대지진이라는 블랙스완에 맞선 일본 정부의 대응은 미흡했다. 간 나오토 총리의 역량이 도마에 올랐고, 블랙스완 대비책도 부족했다는 분석이 많다. 하지만 일본 기업은 다르다. 블랙스완에 대비한 BCP(비즈니스 연속기획)체제를 갖춘 곳이 많다. BCP는 재난이 발생해도 비즈니스 연속성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론이다. 2001년 9·11 테러 이후 급부상한 개념으로, 모건스탠리의 핫 시스템이 대표적이다.

세계 각국은 지금 BCP체제를 갖추기 위해 열성을 쏟고 있다. 미국은 FFIEC(연방금융기관검사협의회)와 SIFMA(증권산업금융시장협회)를 중심으로 BCP 표준화 도입 논의가 한창이다. 영국의 금융업체 중 BCP체제를 도입한 곳은 전체의 90%에 육박한다.

하지만 한국은 유독 조용하다. 국내 기업 가운데 BCP체제를 갖춘 곳은 손에 꼽을 정도다. 딜로이트안진회계법인 유종기 매니저는 “국내 기업은 위기 상황에서 아직도 임기응변식 처방에 의존한다”며 “자연재해·테러 등 블랙스완에 대비할 수 있는 구체적 전략을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이윤찬 기자 chan4877@joongang.co.kr

1080호 (2011.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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