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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학각색(各學各色)’ | 대한민국 페미니즘 어디까지 왔나 - 사회학] 공포·교육·인터넷이 여성을 바꾼다 

 

박정미 충북대 사회학과 교수
여성들만의 사상 최대 규모 시위 이어져…분노의 목소리 행동으로 분출

지난 5월 19일 불법 촬영과 편파 수사를 규탄하는 일명 ‘혜화역 시위’에 여성 2만여 명이 모여 한국 사회를 놀라게 했다. 이후 4차까지 이어진 시위에 7만여 명이 참여해 한국에서 여성들만의 시위로 최대 규모라는 새로운 역사를 써가고 있다. 여성들은 이뿐만 아니라 다양한 형태로 공론의 장에 등장하고 있다. 검찰에서 시작해 중·고교까지 확산된 미투 행렬, 백주대로에서 가슴을 드러낸 불꽃페미액션, 낙태 합법화를 요구하는 검은 옷의 여성들, 독박 육아 끝장을 외치는 ‘정치하는 엄마들’,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성폭력 무죄 판결에 대한 항의…. 무엇이 이들을 분노케 하고, 왜 이들은 지금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나? 이것은 앞으로 사회학이 면밀하게 연구하고 해명해야 할 질문이다. 여기에선 몇 가지 열쇳말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공포. T. H. 마셜은 시민권이 시민적·정치적·사회적 권리로 구성돼 있다고 했다. 그중 시민적 권리는 신체의 자유 등 가장 기본적인 권리다. 마셜은 서구에서 그것이 가장 먼저 제도화됐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이 명제를 한국 여성에게도 적용할 수 있을까? 여성 참정권이 보장되고 복지정책이 정부 현안인 현재, 여성들은 과연 시민적 권리를 제대로 향유하고 있는가? 성폭력과 성희롱이 신체적 자유와 노동의 권리를 위협하고, 형법은 임신 중단을 범죄화하며, 편재하는 불법 카메라가 공중화장실 이용조차 두렵게 만들고 있다. 시민의 안전과 자유를 보장해야 할 국가는 과연 어디에 있었나? 불법 촬영당한 여성의 사회적 죽음, 심지어 자살을 쾌락과 유희로 소비하는 자들이 익명성 뒤에서 은신하는 동안 경찰은 무엇을 했나? 이제 여성들은 더 이상 혼자 울거나 공포에 떠는 대신, 이런 질문을 제기하며 함께 떨쳐 일어서는 방법을 선택했다.

둘째, 교육. “한 여성이 글을 읽을 수 있게 된 순간, 여성 문제가 등장했다.” 19세기 말 오스트리아의 작가 마리 폰 에브너-에셴바흐는 이렇게 말했다. 100여 년이 지난 현재 한국에서 교육은 보편적 권리가 됐고, 여성의 대학 진학률이 남성보다 높다. 그럼에도 학교 문밖을 나선 여성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노동시장의 성차별이다. 여성들은 아무리 ‘스펙’이 뛰어나도 채용에서 차별을 겪고, 유리천장에 가로막혀 승진에서 불이익을 당하며, 출산과 양육으로 퇴사 압력을 받는다. 이제 다수가 된 배운 여성들, 가정에서 차별 없이 자랐고 학교 경쟁에서 대등하거나 우세했던 젊은 세대 여성들은 이런 차별을 더욱 명확하게 인식하고 더 이상 묵과하지 않는다.

셋째, 인터넷. “소송한 이대년들 정신대 보내 똥꼬 찢어지게 강간당하면 우리 남자들이 나라를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을 것이다.” 1999년 군가산점제 위헌 판결이 났을 때, PC통신 자유게시판에서 목격한 수많은 욕설 중 하나다. 그 후로도 PC통신에 살벌하고 끔찍한 배설의 언어가 출몰했고, 그 때마다 많은 여성이 침묵하거나 떠났다.

그러나 그로부터 약 20년이 흐르는 동안 온라인 생태계에서 여성 인류도 진화했다. 일찍부터 인터넷의 문법을 습득하고 단련한 젊은 여성들은 남성의 언어폭력에 무력화되는 대신 그것을 거꾸로 돌려주는 미러링, 곧 대항폭력 전략을 구사하며 살아남았다. 인터넷은 또한 여성들이 기존 단체에 의존하는 대신 자유로운 개인으로서 집합적인 힘을 행사할 수 있도록 돕는 플랫폼이기도 하다. ‘불편한 용기’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려스러운 면도 존재한다. 최근 논란이 되는 극단적 혐오의 언어, 남성 성소수자와 어린이에게까지 혐오를 투사하는 전략은 페미니즘이라고 보기 어렵다. 역사적으로 페미니즘은 언제나 강자의 논리에 대항하는 약자들의 연대였기 때문이다.

※ 박정미 교수는…한국의 국가정책과 사회 변동을 젠더와 섹슈얼리티 관점에서 분석해왔다.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에서 HK연구교수 등을 지냈다.

1451호 (2018.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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