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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수 다음카카오 이사회 의장 - 자신만의 게임에서 승리하라 

 

RYAN MAC 포브스 기자
5년 전, 전 세계에 모바일 메시징 열풍을 일으켰던 한국 최고의 벤처사업가 김범수는 현재 막강한 경쟁자에 둘러싸여 위협을 받고 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중앙포토
영하의 날씨로 추운 1월의 어느 날, 요즘은 게임하는 사람만 드나든다는 서울의 지하 PC방을 찾았다. 환하게 밝힌 형광등 아래로 청소년 5명이 고성능 컴퓨터 앞에 옹기종기 모여 게임에 몰입하고 있었다. 머리 위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K팝 노래는 리그 오브 레전드(League of Legends)에서 닌자와 싸우거나 FIFA에서 골을 넣는 소리에 묻혀 거의 들리지 않았다. 아이들은 전자레인지로 데운 핫도그를 한 입 베어 물거나 한국에서 스마트폰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쓴다는 카카오톡으로 친구들과 대화할 때 빼고는 게임을 멈추지 않았다.

한국에서 가장 성공한 인터넷 벤처사업가


▎김범수 다음카카오 이사회 의장은 2015년 3월 발행된 포브스 아시아 ‘세계의 억만장자’ 특별호 표지를 장식했다.
창문 하나 없이 토끼굴 같은 PC방에서 게임과 스마트폰 채팅에 몰입한 아이들은 청록색 명품 바지를 입고 악어가죽 신발을 신은 PC방 한 쪽 구석의 남자를 의식하지 않고 있었다. 염소수염을 기른 남자는 아이들보다 스무살은 족히 넘어 보였다. 한국 최고 부자 중 1명인 그는 지금 스타크래프트 게임에서 외계인 군대의 공격을 막느라 여념이 없었다. 보아하니 처참하게 지는 중이었다.

“인터뷰 하느라 그래요”라고 ‘브라이언(Brian)’ 김범수(48)가 농담을 했다. 컴퓨터 스크린에서 그의 왕국이 불타 무너지고 있었다.

영 틀린 말은 아니다. 지난 10년간 다른 제국을 건설하느라 바빴기 때문에 스타크래프트 실력이 퇴보할 수밖에 없었다. 카카오톡은 모바일앱에 열광하는 한국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앱이다. 카카오톡의 무료 메시징 서비스는 문자를 완전히 대체해 버렸고, 한국에서 사람들이 의사소통하는 방식을 변혁시켰다. 한국 5000만 인구 중 4분의 3이 김범수의 작품을 이용한다. 해외 사용자 수는 1080만 명이다.

차분하고 조용한 그는 한국 역사상 가장 성공한 인터넷 벤처사업가로 꼽힌다. 삼성이나 현대처럼 특정 가문이 경영권을 가진 재벌이 모든 권력과 부를 독점하는 한국 문화에서는 좀처럼 이루기 어려운 업적이다. 그는 IT 선도 기업 1개도 아니고 2개를 맨손으로 일궈냈다. 처음 시작한 벤처회사는 한게임이다. 인터넷 카페 사업으로 시작했다가 온라인 게임 개발업체로 성장시켰다. 이후에는 검색 포털과의 합병을 통해 한국의 구글이라 할 수 있는 네이버로 새롭게 탄생했다.

다음에 설립한 주식회사 카카오(Kakao Corp.)는 메시징앱이 채팅 그 이상을 제공할 수 있다는 엄청난 깨달음을 전 세계에 알려줬다. 메시징앱은 게임이나 쿠폰, 스티커 등의 각종 가상재화를 판매해 짭짤한 수입을 올리는 플랫폼이 될 수 있었다. 지난해 10월에 카카오는 한국 제 2의 온라인 검색엔진 다음(Daum)과 합병하며 시가총액 74억 달러의 다음카카오(DaumKakao)로 변모했다. 포브스 추산에 따르면, 2014년 카카오의 매출은 3억1900만 달러, 수익은 1억2000만 달러였다. 김범수가 보유한 지분 39%의 가치는 29억 달러에 달한다.

“브라이언 김은 모바일 메시징앱의 진정한 대부”라고 초기 카카오에 투자했던 굿워터 캐피탈(Goodwater Capital)의 에릭 김은 말했다. 그는 카카오 이사회 위원을 역임하기도 했다. “브라이언은 메시징 서비스를 게임이나 온라인 쇼핑, 미디어, 결제 등의 다양한 플랫폼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았다.”

위대한 아이디어일수록 인터넷처럼 빠른 속도로 도용되기 마련이다. 미친 듯이 복제되기 시작한 카카오톡은 현재 같은 아이디어를 도입해 신속하게 움직인 대기업에 포위됐다. 일례로 카카오톡의 최대 해외투자자 텐센트(Tencent)가 시작한 위챗(WeChat)은 월간 활동 사용자(MAU) 4억6800명을 기록하며 중국 시장을 독점했다. 김범수의 이전 회사 네이버가 개발한 라인(Line)은 일본에서 1억7000만 명의 사용자를 확보하며 시장을 장악했다. 그리고 이들을 모두 넘어서는 왓츠앱(WhatsApp)이 있다. 2014년 3월 페이스북이 220억 달러에 인수한 왓츠앱은 아직 게임이나 이모티콘을(혹은 어떤 상품을) 판매하지 않는데도 서구시장을 장악했다. 왓츠앱의 사용자 수는 무려 7억 명에 달한다. 이런 상황에서 카카오톡의 글로벌 사용자 수는 지난 해 5% 가까이 감소했다는 자료가 발표됐다. 김범수는 자신이 개척한 글로벌 산업에서 주도권을 뺏기고 말았다. 걱정을 해야 할 것 같은데도 그는 조급한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시장조사기관 랭키닷컴 자료에 따르면 카카오톡은 한국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앱이다. 닐슨(Nielsen)은 한국인이 카카오톡을 하루 평균 33분 사용한다고 집계했다. “다른 어떤 국가에서도 보지 못한 보급률”이라고 김범수가 말했다. 카카오톡 플랫폼을 사용자와 더욱 밀착시키기 위해 모바일 간편결제 서비스 ‘카카오페이’, 택시를 예약하는 ‘카카오택시’ 등의 새로운 서비스를 추가해 사용자가 계속 카카오톡과 연결되도록 노력하는 중이다.

달동네 원룸에 살던 아이 자수성가하다


▎국민 게임 ‘애니팡’은 2012년 7월 첫 출시 이후 74일 만에 이용자가 2000만 명을 돌파했다. 애니팡의 대성공으로 카카오톡은 게임 유통 플랫폼으로 자리잡았다.
카카오는 그동안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은 동남아시아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노력했다. 동남아시아에서 저렴한 스마트폰이 빠르게 보급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시장 기회를 포착한 건 카카오뿐이 아니다. 지금까지 카카오는 이용자 눈길을 사로잡기 위해 옥외광고와 TV광고에 1500만 달러의 돈을 지출했다. 그러나 텐센트나 네이버처럼 자금이 두둑한 기업과 대비해 즉각적인 효과는 거의 없는 편이다.

“지금 시점에서 채팅앱은 엄청난 리스크 게임”이라고 메신저앱 킥(Kik)의 CEO 테드 리빙스톤(Ted Livingston)은 말했다. 북미 청소년 사이에서 인기가 높은 킥의 다운로드 횟수는 2억 회가 넘는다. “모든 기업들이 숟가락을 들고 서로의 영역으로 들어가려고 한다. 앞으로는 다른 업체의 사용자를 뺏어오는 기업이 성장을 주도할 것이다.”

기업의 부가 부모에서 자식으로 상속되는 경우가 많은 경직된 한국 사회에서 김범수처럼 1세대 기업인이 자수성가하는 스토리는 결코 흔하지 않다. 펜 공장 노동자였던 아버지, 초등교육밖에 받지 못하고 호텔 메이드로 일했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5명 중 장남이었던 김범수는 부모님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시는 동안 서울 달동네의 방 1개짜리 아파트에서 할머니, 형제자매들과 함께 생활했다.

그러나 그는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 있었고 목표의식과 의지가 매우 강했다. 힘을 주는 글귀를 적으며 자신을 채찍질한 그는 가족 중 처음으로 대학에 진학했고 1986년 서울대학교에 합격했다. 대학교에서 그는 친구 컴퓨터 서버를 통해 초기 BBS(bulletin board system)에 접속하는 놀라운 경험을 했다. “인터넷과 연결된 세상을 처음 알게 됐다”고 그는 말했다.

졸업 후 삼성 IT 서비스 사업에서 5년간 열심히 일하던 그는 첫 닷컴 버블이 일어나자 사업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가족과 친구에게서 긁어모은 18만4000달러로 온라인게임 및 PC방 사업을 시작했다. 한게임을 세워 온라인 포커 게임과 고스톱을 개발한 그는 자신의 PC방을 찾은 손님을 대상으로 게임의 반응을 살폈다. 3개월이 지나자 한게임의 사용자 수는 100만 명으로 늘었다. 파트너가 필요했던 그는 삼성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 이해진을 찾았다. 네이버 의장이 검색 사이트 네이버를 막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이들은 싸이가 노래에서 열심히 외쳤던 강남의 한 바에서 ‘핵폭탄주(맥주에 위스키를 넣어 반드시 원샷)’ 5잔을 함께 마신 끝에 합병을 성사시켰고, NHN 주식회사(현 네이버)가 탄생했다.

김범수와 이해진은 6년간 최고경영자 업무를 나눠서 수행했다. 한국 정부가 야후, 구글 등의 미국 검색 엔진을 견제하는 동안 네이버는 한국의 유력 검색 서비스로 자리 잡았다. 서비스는 검색에서 게임, 이메일 등으로 확대됐다. 덕분에 네이버는 한국에서 방문 횟수가 가장 많은 웹사이트로 성장할 수 있었다. 2005년 7월 김범수는 실리콘밸리로 거점을 옮겼다. 미국 게임시장에서 점유율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노력을 했지만 별다른 성과는 없었고 2년 후 그는 NHN을 완전히 떠났다. 한편으로 그는 한국 벤처 사업가 지원을 위해 자비를 투자해서 캘리포니아 마운틴뷰에 아이위랩(IWILAB)을 세웠지만, 투자 성과는 계속 좋지 않았다. 2007년 여름이 되자 그는 10년간 일만 했으니 가족과 함께 팔로알토에서 안식기를 가지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 때 아이폰이 등장했다. 2007년 출시된 아이폰은 즉각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는 가족을 위해 아이폰 4대를 구매했다. “(아이폰이 가진) 무한한 잠재력을 직접 보고 느낄 수 있었다”고 그는 말했다. 가족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간 그는 아이위랩 직원들을 한국으로 데려와 정직원으로 고용했다. 이들은 미국에서 가져간(아이폰이 한국에서 정식 판매되기 시작한 건 2009년 11월이다) 아이폰과 아이팟 터치를 연구하며 앱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처음 개발한 앱은 트위터와 유사한 SNS, 그룹 메시징 서비스, 2명이 무료로 채팅을 할 수 있는 카카오 등 3개였다.

당시만 하더라도 한국의 휴대전화 이용자들은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문자 송수신료를 지불했다. 2009년 6월 이동통신회사 문자 전용 SMS 서버를 사용하지 않고 데이터 커넥션을 통한 무료 문자 메시지를 선보인 왓츠앱은 한국에서도 빠르게 사용자를 늘리고 있었다. 왓츠앱에 영감을 받은 김범수는 2010년 3월 카카오톡을 출시했다. 출시 즉시 앱스토어 다운로드 순위 1위로 올라간 카카오톡은 엄청난 반응을 일으켰다. 9월에는 이용자 수가 100만 명을 기록했다. “이통사가 SMS를 무료로 제공했다면 그렇게 큰 성공을 누리지 못했을 것”이라고 김범수는 말했다.

카카오톡, 한국 최고의 메시징 서비스로 성장

4주 뒤 200만 명으로 늘어난 사용자 수는 12월 500만 명을 기록했다. 무료 서비스와 그룹채팅을 제공한 카카오톡은 연간 사용료 99센트를 책정한 왓츠앱을 누르고 한국 최고의 메시징 서비스로 성장했다. 2011년 4월 사용자 수가 1000만 명에 육박하면서 친구들이 다 쓰니까 나도 쓸 수밖에 없는 ‘네트워크 효과’가 나타났다. 덩치가 너무 커져서 네이버톡(Naver Talk), 갤럭시 스마트폰에 기본으로 설치된 삼성 메시징앱 등 국내 경쟁 서비스도 카카오톡에 대항할 수 없게 됐다.

이제는 수요에 발맞추는 게 주요 과제였다. 데이터 처리를 위해 매주 서버를 추가해야 했는데 중국에서 서버가 도착하려면 3주가 걸렸다. 트래픽 폭증으로 시스템이 다운되는 걸 막으려면 프로필 사진 업로드처럼 중요도가 떨어지는 서비스를 잠시 중단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엄청난 스트레스 속에서도 김범수는 특유의 여유를 잃지 않았다. “지난 11년간 브라이언이 정신 없이 바빠 보였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김범수가 NHN을 통솔하던 시절 직원으로 일하다가 그에게서 투자를 받아 벤처사업을 시작한 조이 리(Joy Lee)는 말했다.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음에도 다수의 한국 투자자는 카카오톡 투자를 거절했다. 결국 김범수는 자신의 돈을 투자할 수밖에 없었고, 그의 카카오톡 보유지분은 80%로 늘어났다.

2011년 3월 카카오가 첫 주요 해외시장 일본에서 발판을 마련하고 있을 때다. 태평양 연안에서 45마일 떨어진 곳에서 진도 9.0의 지진이 발생했다. 지진과 쓰나미로 1만6000명에 달하는 사람이 목숨을 잃고, 전기와 수도가 끊기면서 수백만 명의 이재민이 생겼다. 전화가 되지 않고 트래픽 폭증으로 SMS 네트워크도 다운되자 많은 사람들이 카카오톡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와이파이와 3G 네트워크가 상대적으로 영향을 받지 않은 덕분에 카카오톡 서비스는 전과 다름없이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김범수의 오랜 지인이자 NHN 공동설립자였던 이해진 네이버 의장은 지진이 강타했을 때 도쿄에 있었다. 서울 경영진과 오후 화상회의를 하고 있던 그는 지진으로 건물이 흔들리자 책상 밑으로 피했다. 엄청난 비극을 알지 못했던 그와 동료는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이해진이 인터뷰를 거절했기 때문에 직접 들은 말은 아니지만 지진 후 그는 일본에서 채팅 서비스를 시작하자고 결심했다고 한다. 서울에는 그를 도와줄 동료가 많았다. “당시에는 다들 카카오톡과 비슷한 서비스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김상헌 네이버 CEO가 말했다. 두 달도 안 되어 네이버는 새로운 메시징앱 라인(Line)을 테스트했고, 6월에 바로 서비스를 시작했다.

라인은 카카오톡의 성공요인이었던 채팅 및 그룹 메시징 기능 다수를 비슷하게 가지고 있었다. 카카오톡의 노란색·갈색 말풍선을 흰색과 초록색으로 바꾸는 등 로고까지 비슷했다. 그러나 카카오톡에는 없는 게 라인에는 있었다. 바로 한국 최대 인터넷기업이 퍼붓는 엄청난 마케팅 예산이었다. 네이버는 다운로드 횟수를 늘리기 위해 TV 및 옥외광고에 수백만 엔을 쏟아 부었다. 효과는 놀라웠다. 2012년 9월 라인의 다운로드 횟수는 6000만 회를 돌파했다. 라인의 성공으로 네이버 주가가 뛰면서 이해진은 억만장자가 됐다.

‘디아블로 3’를 즐기는 열혈 게이머의 새 구상

“6개월~1년의 시간이 더 주어졌다면 임계점에 도달했을 것”이라고 김범수는 아쉬운 듯 말했다. “직원이 20명밖에 없었는데 삼성, 라인 등의 대기업과 경쟁해야 했다. 다른 시장으로 직원 2명을 보내면 사업에 큰 지장이 생길 수도 있었다.” 이석우 다음카카오 공동 CEO의 분석은 조금 다르다. 라인의 모기업은 일본에서 10년간 사업을 하며 일본 문화와 사람에 대해 경험을 쌓았지만, 카카오는 그러지 못 했다. “한국에서는 사람들이 무료 서비스를 중요시했기 때문에 무료 문자에 초점을 뒀다. 그러나 이제와 생각해보니 일본에서는 무료 문자가 그리 먹히지 않았던 것 같다. 스마트폰 이메일을 이미 (무료 메신저처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라인은 ‘무료 통화’로 마케팅을 했다. 당시 우리는 통화 서비스를 론칭하지 않은 상태였다.”

실수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최악의 실수는 중국이었다. 카카오는 의도치 않게 세계 최대 인터넷 시장 중국에서 훨씬 강력한 경쟁자를 키워주고 말았다. 2012년 4월까지 자본금 2400만 달러를 외부에서 차입한 카카오는 다시 한 번 자금 모집에 나섰다. 김범수와 당시 CEO였던 딘 송(Dean Song)은 중국 최대 데스크탑 메신저 서비스 QQ 메신저를 운영하는 텐센트와 만남을 가졌다. 카카오는 이전 해 모바일 메신저앱 위챗을 시작한 중국 거대 기업으로부터 사업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카카오에 6500만 달러를 투자한 텐센트는 김범수의 뒤를 이어 카카오의 제 2대 주주가 됐다.

6월 김범수는 선전에 있는 텐센트 본사로 가서 창업주이자 CEO인 억만장자 포니 마(Pony Ma)와 회의를 가졌다. 둘은 함께 채팅 서비스의 미래를 논하고 화이트보드에 아이디어를 적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나 그는 포니 마가 모바일 메시징의 잠재력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했다고 말했다.

“당시 위챗은 규모가 아주 작았고 트래픽이 많지 않았다. 그러나 경쟁업체는 너무 많았다”고 그는 말했다. “마는 메시징이 온전한 사업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점에 회의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카카오톡이 성공 가능성을 몸소 보여주며 상황이 반전됐다. 2012년 7월 소셜게임 애니팡이 성공하면서 카카오의 매출액이 무섭게 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텐센트는 카카오의 모든 전략을 모방하기 시작했다. 중국의 시장 규모가 크다는 점 하나만으로 텐센트는 카카오의 모델로 카카오보다 10배나 많은 실사용자를 확보했다. “한국에서 개발한 게임을 중국으로 가져가는 대신 모방으로 같은 게임을 개발해 자신들이 직접 판매했다”고 김범수는 말했다. “친밀했던 관계가 어색해졌다.”

카카오가 중국에서 직접 게임을 판매하겠다고 발표하면서 다음카카오와 텐센트의 갈등은 계속됐다. “3개 업체는 각자 자국 시장을 장악했다”고 킥의 테드 리빙스톤은 말했다. “카카오가 불리해진 건 한국 시장이 가장 규모가 작기 때문이다.”

언젠가 김범수는 중국과 일본에서 위챗, 라인과 정면 승부를 해야 할 것이다. “지난 2년간 우리는 (동남아시아에서) 아주 경쟁적으로 마케팅을 했다”고 수염을 쓰다듬으며 그가 말했다. “그러나 시장 선점효과가 워낙 막강해서 극복이 어렵다는 걸 깨달았다. 이제는 ‘새로운 전략을 누가 먼저 찾아내느냐’가 관건이다.”

여가 시간이 있으면 아내, 자녀와 함께 ‘디아블로 3’를 즐기는 열혈 게이머 김범수에게 카카오가 그렇게 될 것 같냐고 물었다.

“어려운 게임이죠.” 그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 RYAN MAC 포브스 기자

201504호 (2015.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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