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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의 역사를 만든 부자들(1) 마이어 로트실트 

‘로스차일드 국제금융 제국’의 건설자 

채인택 중앙일보 논설위원
자신의 노력으로 부를 일군 억만장자들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 혁신적인 아이디어와 집념의 노력으로 재산을 모은 부자들은 수많은 사람에게 영감을 준다. 모은 재산을 보람 있게 쓰면서 부의 사회적 가치를 새롭게 부각시킨 인물도 적지 않다. 이들은 인류의 삶을 바꾸기도 하고, 세상을 변화시키기도 하며, 나라나 사회에 큰 영향을 주기도 한다. 역사상 수많은 부자가 명멸했다. 그들의 발자취를 살펴보면서 부자와 부의 의미를 되새겨본다.

▎BAIDU 제공
마이어 암셸 로트실트(1744~1812)는 ‘로스차일드 금융 왕조’의 창업주다. 이 가문은 영어로 로스차일드, 독일어로 로트실트, 프랑스어로 로실드로 불린다. 지금 수백 개의 작은 조각으로 분산돼 큰 부자는 없지만 다 모으면 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집안으로 꼽힌다. 마이어는 가업인 금융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창업주다. ‘국제금융의 설립자’로도 불린다. 18~19세기 당시 지역 영주의 자금을 불리거나 대출을 해주던 ‘동네 장사’ 수준의 금융업을 온갖 혁신적인 아이디어로 가득한 ‘글로벌 창의사업’으로 바꿔놓았기 때문이다. 이 덕분에 2005년 포브스가 선정한 ‘모든 시기에 걸쳐 가장 영향력이 큰 20명’에 이름을 올렸다.

마이어는 1744년 신성로마제국의 제국자유도시였던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태생이다. 현재 유럽중앙은행(ECB)이 자리 잡은 유럽 금융의 중심지다. 유대인 게토인 유덴가세(유대인 골목이라는 뜻)의 작은 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암셸은 잡화 교역과 환전 사업을 벌였다. 그 시절 유럽에서 유대인에게 허용된 몇 안 되는 사업이었다. 인근 지역인 헤센-카셀의 군주에게 동전(요즘의 외환에 해당)을 공급하면서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마이어는 친척의 도움으로 1757년부터 68년까지 하노버의 유대인 금융업체 ‘시몬 볼프 오펜하이머’에서 수습직원으로 일했다. 이 위대한 인물이 금융인의 뜻을 키운 계기는 요즘으로 치면 인턴 생활이었던 셈이다. 그곳에서 국제환전과 금융을 꼼꼼하게 익힌 뒤 고향에 돌아왔다. 이듬해인 1768년부터 그는 독일의 작은 국가인 헤센-카셀의 군주 아들인 빌헬름(1743~1821, 나중에 빌헬름 9세로 즉위)의 자금 관리를 맡았다.

청년 유대인, 경제 모르는 군주의 자금을 관리하다


▎영국과 동맹국이 엘바섬을 탈출한 나폴레옹을 격파한 워털루 전투를 그린 그림. / BAIDU 제공
마이어가 금융산업을 벌이게 된 연유를 알려면 당시 시대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당시 독일은 수십 개의 크고 작은 나라로 이뤄진 모자이크 국가였다. 헤세-카셀도 그 중 하나였다. 영토와 권력을 쥔 영주들은 경제를 몰라 주먹구구식으로 재정을 운영하기 일쑤였다. 합리적인 재정운용은커녕 눈앞의 수익을 위해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잡아먹는 식의 비상식적인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 증거의 하나가 라인강을 따라 늘어선 멋들어진 성들이다. 독일의 축성술·건축술을 자랑하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자유로운 통상을 가로막았던 흔적이다.

라인 강변에 영지를 둔 수많은 영주들은 지나가는 선박으로부터 통행세를 받기 위해 거액을 투자해 강변에 거대한 성을 건설했다. 성의 망루는 지나가는 배를 감시할 목적으로 높게 세웠고, 성내 숙소에는 통행세를 받는 간부와 군인들이 살았다. 이들은 강에 긴 쇠줄을 걸어놓고 선박 통행을 막고 돈을 받아낸 다음에야 보내줬다. 상인들이 배에 상품을 싣고 라인강을 따라가려면 끝없이 세금을 내야했다. 이러니 교류통상 등 경제활동이 제대로 이뤄지기 어렵다. 나라가 통일되지 못하고 비합리적인 세속귀족이나 종교귀족이 비전 없이 운영하는 작은 나라들로 나뉜 탓이다.

작은 나라를 운영하는 데도 비용이 상당히 들게 마련이다. 전쟁이라도 벌어지면 주로 용병인 군인들의 급여·식량·무기·장비·군복 등에 들어가는 비용을 대느라 허리가 휠 정도였다. 중세 때는 영주들이 부유한 타지역으로부터 돈을 빌렸다 갚지 못하면 마을 주민 전체를 통째로 넘기는 일이 잦았다. 독일 농부들은 부지런하고 생산성이 높아서 주변 나라에서 이들을 ‘마을떼기’로 데려가기를 좋아했다. 이렇게 이주한 독일인들은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콘스탄틴 게오르규의 소설 『25시』에 나오는 루마니아 서북부 트란실바니아 거주 독일어 사용자는 이렇게 마을 단위로 헝가리(트란실바니아는 제1차대전 종전 이전까지 헝가리 영토였다)로 옮겨진 농민의 후예다. 러시아 볼가강변에서 소수민족으로 사는 독일계도 마찬가지다.

농민을 넘기는 것은 영주 자신의 향후 수입원을 송두리째 포기한다는 점에서 제 살 깎아먹기 수준의 비합리적인 결정이다. 다른 대책을 찾을 수밖에 없다. 독일 영주들은 유대인 환전상에서 대출을 얻는 대안을 찾았다. 게다가 근대적인 화폐와 조세 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영주는 농민들로부터 현물로 세금을 받았다. 필요한 상품을 다른 곳에서 사려면 이를 국제화폐 격인 동전으로 바꿔야 했다. 이 때문에 이들은 국제통상·환전업·금융업에 종사하는 유대인을 필요로 했다. 마이어가 헤세-카셀의 후계자인 빌헬름 9세의 돈 관리를 맡아준 것은 이 때문이다. 궁정 재정인이라는 이름으로 군주의 재산 관리와 세금 징수 등을 맡았다.

헤센-카셀은 다른 곳에 없는 특이한 사업이 있었다. 바로 파병 사업이다. 군대를 다른 나라에 파병해주고 돈을 받는 것이다. 특히 영국과 많은 거래가 있었다. 여기에는 헤센-카셀의 군주였던 빌헬름 8세(1682~1760)의 인연이 작용한다. 그는 팽창하던 프로이센 왕국이 영국과 손잡고 오스트리아-프랑스-작센-스웨덴-러시아의 동맹에 맞서 싸운 7년전쟁(1756~1763) 때 프로이센과 영국 편을 들어 참전했다. 그러면서 영국의 하노버 왕가와 두터운 관계를 쌓았다. 그의 아들인 프리드리히 2세(1720~2785)는 영국 국왕 조지 2세의 딸인 메리와 결혼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미국독립전쟁(1775~1783)이 터지자 처조카인 영국 국왕 조지 3세에게 대규모 병력을 빌려줘 대륙에서 독립군 진압작전에 투입하게 했다.

당시 미국에 파병됐던 3만 독일 병력의 40%가 넘는 1만3000명이 헤센-카셀 출신이었다. 나머지는 이웃인 헤센-하나우, 안스바흐-바이로이트, 브룬스비크-볼펜뷔텔, 발데크 등 작은 나라에서 보내졌다. 독일 병력은 영국이 북미에 파견한 전체 병력의 4분의 1을 차지했다. 미국 역사에서 이들은 ‘헤세(헤센의 영어식 발음)인’으로 기록된다. 헤센-카셀 병력이 그만큼 압도적이었고 역할도 컸다는 이야기다. 헤센-카젤은 이 파병으로 영국으로부터 엄청난 금액을 받아 재정을 채웠다.

파병을 기업화한 헤센-카셀의 국제 자금 맡아

17~18세기 작은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돈을 받고 병력을 빌려주는 것은 흔한 일이었으나 헤센-카셀은 유별났다. 18세기 전체에 걸쳐 인구의 7% 정도를 병력으로 유지하면서 국가가 나서 파병 사업을 벌여 주요 수입원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군인들은 일반 용병과 달리 개인적으로 참전하지 않고 부대 전체가 한꺼번에 파병됐다. 무기·장비·지휘관·편제·제복·깃발을 고스란히 유지했다.

마이어가 자금 관리를 맡았던 빌헬름이 바로 미국에 파병한 프리드리히 2세의 아들이다. 그는 1785년 빌헬름 9세로 군주 자리에 오를 당시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의 재산을 물려받았다. 아버지가 국제 용병 사업으로 확보한 엄청난 재정수입과 영토 덕분이었다. 그는 자신의 재산을 관리할 사람으로 마이어를 임명했다. 엄청난 재산을 관리하는 과정에서 마이어는 상당한 커미션을 받을 수 있었다. 이는 마이어가 로스차일드 왕조로 불리는 금융망을 유럽 전역에 걸쳐 설치하는 종자돈이 됐다.

1789년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나 나라 전역이 마비되면서 마이어는 오히려 사업을 확대할 기회를 얻었다. 영국이 헤센 용병에게 지급하는 거액의 급여와 비용을 관리하게 되면서 국제적인 금융·환전 사업을 키울 수 있었다. 유럽 전역에서 전쟁이 이어지자 그는 전쟁자금을 빌려주는 국제금융 사업까지 벌이면서 자신의 위치를 더욱 확고하게 굳히고 재산도 더욱 불렸다.

1801년 헤센-카셀의 공식 궁정재정관리인이 된 마이어는 이처럼 빌헬름 9세의 재정 관련 정보와 자금이 큰 몫을 했다. 나폴레옹 전쟁으로 유럽 전역에 혼란이 예상되자 마이어는 사업을 국제화하기 시작했다. 그는 1798년 삼남 나탄(1777~1836, 영어로 네이선)에게 자신의 자금 2만 파운드(현재 가격으로 약 40억원)를 종자돈으로 쥐여주면서 영국 런던으로 보냈다. 산업혁명으로 값싸게 대량 생산되고 있던 영국산 직물을 수입할 의도였다.

하지만, 의외의 기회가 찾아왔다. 나폴레옹의 침략을 걱정한 빌헬름 9세가 마이어에게 자신의 자금을 해외에 은닉하도록 부탁한 것이다. 마이어는 이 자금을 런던으로 옮겨 나탄에게 관리를 맡겼다. 나탄은 1804년 영국 국적을 얻고 현재 영국의 월스트리트 격인 런던 시티 지역에 은행을 개업했다. 로스차일드 금융업의 시작이다. 이 가문의 첫 외국 지점이다. 유럽 대륙은 전쟁으로 어수선해지면서 경제활동이 얼어붙었지만 마이어는 아들을 런던에 보냄으로써 오히려 금융사업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나탄은 이 돈을 영국군이 나폴레옹을 견제하기 위해 포르투갈과 스페인으로 파병된 웰링턴 군대의 운영 자금으로 융통해줬다. 금융망과 정보망을 활용해 유럽 전역으로 이동하는 웰링턴 군대에 자금을 대는 것은 물론 영국의 동맹국들에도 전비를 전달했다. 영국과 동맹국이 엘바섬을 탈출한 나폴레옹을 워털루에서 격파한 1815년 한 해 동안 나탄을 통해 로스차일드 가문이 영국과 동맹국들에 융통해준 전쟁자금이 980만 파운드(현재 가치로 약 11조원에 해당)에 이른다고 한다. 요즘 가격으로 종자돈 40억원으로 시작한 사업이 11조 규모로 커진 것이다. 로스차일드의 자금 동원력과 배팅 감각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수치다. 일종의 고위험·고수익의 전쟁 벤처 투자였지만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뿐만 아니라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으로 유럽 대륙에 영국산 공산품이 들어오지 못해 물자 부족이 심화하자 수입 사업을 펼쳐 재산을 불렸다.

나폴레옹 전쟁과 관련해 재미난 ‘경제 전설’이 있다. 마이어가 정보망을 활용해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의 패배를 남보다 먼저 확인하고도 폭등이 예상되는 영국 채권을 오히려 팔아치웠다고 한다. 영국이 패배한 것처럼 보이게 해 가격을 폭락시킨 뒤 이를 헐값에 사들여 폭리를 취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소문의 진실 여부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마이어는 세습군주나 거액의 자금을 굴리던 시절, 자신의 실력으로 군주 못지 않는 재산을 모으고 이를 바탕으로 경제부문에 영향력을 확보한 인물이다. 그는 자신이 모시던 군주보다 더 많은 재산을 모았다. 1803년 그가 모시던 빌헬름 9세는 풍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격이 높은 선제후에 올랐다. 국왕보다 한 단계 낮은 자리다. 하지만, 1806년 프랑스에 반기를 든 프로이센을 지원했다가 나폴레옹 군대의 침략을 받게 됐다. 군주 자리는 빼앗겼으며 영토는 나폴레옹의 동생인 제롬 보나파르트가 다스리는 베스트팔렌 왕국에 병합됐다. 빌헬름 9세는 장인인 덴마크 국왕의 영지였던 홀슈타인으로 망명했다가 나폴레옹이 패퇴한 1813년 간신히 귀향해 군주 자리를 회복했다. 그동안 그의 재산은 로스차일드 가문이 보관했다. 같은 기간 나탄의 런던 금융사업이 고성장하면서 로스차일드 가문의 재산은 후원자였던 빌헬름 9세보다 많아졌다.

마이어는 1811년 막내 야코프(1792~1868)를 프랑스 파리로 보내 본격적인 범유럽 금융 네트워크 구축에 들어갔다. 그는 이 금융 네트워크를 이용해 고급 정보를 수집, 유통함으로써 국제적인 금융사업의 골격을 만들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인 1820년 차남 살로몬(1774~1855)은 합스부르크가 지배하는 오스트리아의 수도인 빈에서 금융사업을 시작했다. 1821년 오스트리아군이 이탈리아 나폴리를 점령하자 사남 카를(1788~1855)이 그곳에 가서 나폴리 지점을 세웠다. 장남 암셸(1771~1859)은 프랑크푸르트 본가를 지키며 금융업을 계속했다.

경제의 핵심은 글로벌화·정보화·기업가정신과 협력

마이어가 일군 로스차일드 금융가문은 19세기 후반 유럽이 산업화하는 과정에서 철도·광산·에너지·부동산·농업·와인산업 등 다방면에 자금을 투자해 경제 발전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 받는다. 마이어는 남보다 앞선 정보망과 금융망 구성을 바탕으로 재산을 축적했다. 유대계로 신성로마제국 자유시인 프랑크푸르트에서 금융업이라는 당시로는 혁신적인 산업을 키웠다.

우편망을 바탕으로 전유럽에 걸친 정보망을 구축하고 이를 이용해 정보를 입힌 새롭고 강력한 금융산업을 개척했다. 그는 다섯 아들을 프랑크푸르트·런던·파리·빈·나폴리(빈과 나폴리는 사후)에 분산 배치해 글로벌 네트워크 금융경영을 시작했다. 전 유럽에 걸친 로스차일드 가문의 네트워크는 시너지를 냈다. 그러면서 기회는 확대하고, 위험은 분산하는 현대적 경영기법을 도입한 셈이다. 아울러 로스차일드의 이런 글로벌 시스템은 기업이 특정 국가에 종속되지 않고 국제주의에 입각해 비즈니스를 펼칠 수 있는 기업인의 세계를 만드는 데 앞장섰다. 로스차일드 금융가문을 창시한 마이어 로트실트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경제를 받치는 기중인 글로벌화와 정보화, 그리고 동물적인 기업가 정신의 선구자인 셈이다.

마이어는 후손들에게 ‘협력(Concordia)’이라는 말을 유산으로 남겼다. 유럽 각국에 지점을 설치한 다섯 아들이 ‘다섯 화살’로 불리는 이유다. 하나의 화살은 쉽게 부러지지만 여러 개를 겹친 화살은 결코 쉽게 부러지지도 휘어지지도 않는다. ‘경제의 기본은 화합’이라는 그의 유지가 울림을 준다. 자손들에게 쓸 돈이 아닌 종자돈과 기회만 물려줘 스스로 재산을 일구게 한 것도 교훈을 준다.


채인택 - 채인택 중앙일보 피플위크앤 에디터와 국제부장을 거쳐 논설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역사와 과학기술, 혁신적인 인물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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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호 (2016.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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