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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선희의 ‘삼국지로 본 사람 경영’(2) 사마의(司馬懿) 

적에게 나를 이길 기회를 주지 않는다 나는 다만 버틸 뿐이다 

양선희 중앙일보 논설위원/『여류(余流) 삼국지』저자
사마의는 오래 기다리고 버틸 줄 아는 사람만이 성공한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다.

▎사마의는 죽을 때까지 참고 기다리면서, 결코 야망을 내려놓지 않는 법을 알았던 절대 고수였다. / 중국 바이두 백과
사마의가 제갈량의 군대를 맞아 한 것이라고는 싸우지 않고 버틴 것뿐이다. 촉(蜀) 땅은 워낙 길이 험해 군량을 조달하는 데 어려웠고, 이 때문에 제갈량의 부대는 언제나 군량 문제에 부딪쳐 철군하기 일쑤였다. 그러니 촉과 싸우는 방법으로는 촉이 장안으로 들어가는 요충지를 막고, 촉의 군량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러나 이 긴 대치를 견디지 못하고 설레발을 치며 한 판 싸우러 나갔던 위(魏)의 장수들은 모두 제갈량에게 박살이 난다. 그러니 사마의의 기다릴 줄 아는 인내심, 제갈량이 죽을 때까지 버틴 그 질긴 ‘버팀의 미학’이 어찌 남다른 경쟁력이 아니라 하겠는가. 실로 만세에 걸쳐 칭송받을 만한 덕목이다.

적조차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활용

사마의는 적조차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활용하는 데 탁월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다. 사마의에게 있어서 제갈량은 그의 재기를 도왔던 ‘수호천사’같은 사람이다. 그는 동료들의 모해를 받아 황제 조예로부터 관직을 몰수당하고 고향으로 내쳐진다. 긴 기다림의 시간을 보낸 뒤 제갈량이 쳐들어와 분탕질을 치는데, 출정하는 장군들마다 속속 깨지니 수습할 길이 없는 조정에서 결국 그를 다시 불러냈기에 재기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마속이 가정싸움에서 패하여 철군하던 1차 기산 진출 당시, 제갈량이 서성에서 거문고로 사마의를 물리친 이야기는 제갈량 기지의 승리였다기보다 사마의가 일부러 놔준 혐의를 짙게 한다.

이 에피소드는 제갈량이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서성으로 가서 양초를 운반하던 중 사마의가 15만 대군을 거느리고 밀려들자 성문을 활짝 열고 성루에 올라가 편안하게 거문고를 연주했는데, 이 모습을 보고 사마의가 군사를 물렸다는 얘기다.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에는 사마의가 ‘제갈량은 워낙 조심성이 많아 평생 제 몸을 위험하게 하는 일을 하지 않으므로 저렇게 하는 것은 분명 계략이 있기 때문’이라고 오해해 군사를 물린 것으로 기술돼 있다.

그러나 사마의는 당시 제갈량 덕분에 막 해금된 상태였다. 여전히 도끼눈을 부릅뜨고 그를 감시하는 조정 대신들이 뒤에 있음을 아는 그다. 그런데 첫 전투에서 제갈량을 잡는 엄청난 공을 세운다고?

그가 공명심 넘치는 철부지였거나 위나라의 주인이었다면 결코 물러나지 않고 일전을 벌였을 것이다. 그리고 제갈량을 죽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노회한 정치인이었다. 지나치게 큰 공을 일거에 세워 조정 신료들의 질투와 눈총을 받는 어리석은 짓을 무엇 때문에 하겠는가? 제갈량이 죽는다면, 적대적인 조정에서 그가 다음에 무슨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나처럼 눈치 없는 사람도 그 처지였다면, 절대로 하지 않을 일이다.

제갈량이 건재해야 그를 모해하는 다른 신하들도 함부로 그를 내치자고 하지 못할 것이라는 계산이 뻔히 나온다. 그를 위해 이 순간 제갈량은 무사히 살아서 다음에 다시 쳐들어올 기약까지 해주어야 한다.

이런 이유로 나는 『余流 삼국지』를 편작하면서 이 대목에서 사마의가 얼른 군사를 돌린 이유는 제갈량의 군사가 없음을 알고, 이를 자신의 군사들이 눈치 챌까 두려웠기 때문이라고 확신했다. 실제로 아들 사마소가 “제갈량이 군사가 없으니 허풍을 떠는 것”이라고 아무리 간해도 오히려 아들에게 화를 내며 꾸짖는 장면이 나온다. 제갈량을 잡아야 한다는 철없는 아들까지 혼쭐을 냄으로써 다른 휘하 장수들의 동요를 막으려 한 것이다.

또 제갈량이 이런 허풍을 떤 이유도 사마의의 당시 처지를 간파했기 때문이라는 데 돈을 걸 수도 있다. 두 고수의 무언의 셈법은 이렇게 일치하여 제갈량은 태산처럼 안전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한 방을 노리고, 포기하지 않는 그 질김


▎사마의는 후한(後漢)말과 삼국시대를 통틀어 가장 강력한 후흑(厚黑)의 대가였다. 사진은 중국 드라마 신삼국에 등장하는 사마의.
또 하나 ‘사마의 기다림의 미학’의 결정판은 조예가 죽은 후 어린 황제인 조방의 후견을 맡고서 함께 후견인이 되었던 조상(曹爽)에게 밀리자 병을 핑계 삼아 두문불출하며 10년 동안이나 칼을 갈았던 세월이다. 그가 물러난 나이는 웬만한 사람들도 은퇴하는 60대였다.

그리고 사마의는 조상이 황제 조방의 후견인을 하면서도 자신에 대한 경계심을 내려놓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때 조상은 측근인 이승을 형주 자사로 제수하고, 떠나는 길에 사마의에게 들러 하직인사를 하고 동정을 알려달라고 말한다.

사마의는 이승이 도착하자 진짜 병이 난 것처럼 연극을 한다. 그런데 어찌나 리얼하게 연극을 하는지 이승은 깜빡 속아서 조상에게 “사마의는 거의 죽게 되었더라”고 고한다. 그러자 조상은 무척이나 기뻐하며 안심하게 된다. 욕심 많고 허술하기 짝이 없는 조상은 적의 숨통이 끊어지기 전에는 마음을 내려놓아서는 안 된다는 불문율을 지키지 못하고, 황제를 모시고 성 밖으로 사냥을 나간다. 너무 일찍 샴페인을 터뜨린 것이다.

사마의는 10년 만에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고, 황제가 없는 틈을 타서 쿠데타를 벌여 조상 일족을 제거하고 막강한 2인자의 자리에 오른다. 그가 70살 때의 이야기다. 이 엄청난 세월동안 온화한 얼굴로 기다리고 버티며 한 방을 노리고, 다 늙어서도 권력을 포기하지 않는 그 질김이 결국 진 왕조를 열게 한 것이다.

그리고 나이 70에 황제를 능가하는 2인자 자리를 확보하고 나서야 온화한 얼굴 뒤에 숨겨진 본성을 드러낸다. 그는 병권만 내놓으면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꼬여 병권을 빼앗았던 조상 일족을 모조리 죽이고, 조조의 또 다른 일족인 하후씨에 의심을 돌림으로써 결국 조조의 맹장이자 사촌동생이었던 하후연의 아들인 하후패가 촉의 강유에게 투항하는 계기를 만들기도 한다.

그는 수십 년을 기다려 권력을 쥐었으나 결국 2년 만에 병들어 죽는다. 다만 그의 아들들이 왕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정권을 농단하는 주역으로 나서게 된다. 그는 죽을 때까지 참고 기다리면서, 결코 야망을 내려놓지 않는 법을 알았던 절대 고수였다.

주인의 것을 빼앗아 자기 것으로 만들 자격

신하들 중에 주인의 것을 통째로 빼앗기로 마음먹을 만큼 통이 큰 사람이 많지는 않다. 또 아무리 반역의 기질을 타고 났다고 하더라도 주인이 강할 때는 함부로 나서지 않는다. 그러나 주인이 약해지면 신하들의 숨겨졌던 ‘개성’들이 드러난다.

대개 그릇이 작고 소심한 사람들은 도망치거나 주인과 함께 몰락하고, 능력 있는 기회주의자들은 자질구레한 이익을 챙겨 얼른 떠나고, 능력 있고 자아가 강한 사람들은 주인과 더불어 끝까지 회생을 도모하거나 함께 망하기도 한다. 그리고 주인의 것을 빼앗는 사람은 겉으로는 인의예지를 외치나 속을 알 수 없는 친절한 신하들 중에서 나오는 일이 많다.

요즘 조직에서 ‘신하’로 사는 사람들이 절대 경계해야 할 것이 있다. TV 드라마다. 드라마에선 ‘나는 악인이오’하고 야심을 밖으로 드러내면서 눈을 희번덕거리며 온갖 건방을 다 떠는 사람들이 주인을 쫓아내고 권력을 차지하는 일이 많다. 그리고 주인을 지키며 투쟁하는 사람은 평소에도 인화의 덕을 베풀었던 착한 사람이다. 한 번 착하면 끝까지 착하고, 한 번 나쁘면 끝까지 나쁘다는 설정으로 일관한다.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다. 드라마에 속아서 세상의 질서를 거꾸로 생각해선 안 된다.

나이 70살까지, 그만큼의 세월을 포커페이스로 적에게 절대로 약점을 노출시키지 않고, 적에게 자신을 이길 기회를 주지 않으면서 기다릴 수 있다면 주인의 것을 빼앗아 자기 것으로 만들 자격이 있다.

[박스기사] 천하기재 제갈량도 이기지 못한 - 후흑(厚黑)의 대가

『후흑학』의 창시자 이종오 선생은 “제갈량은 천하의 기재로 3대에 걸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인물이었지만 사마의를 만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고 말했다.

제갈량은 ‘왕을 보좌할 재목’이었던 반면, 사마의는 후한(後漢) 말과 삼국시대를 통틀어 가장 강력한 후흑(厚黑)의 대가였기 때문에 누구의 적수도 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후흑이란 낯 두껍고 속이 시커먼 사람을 이르는 말로 천하를 얻은 인물들은 모두 후흑의 극치를 보였다는 것이다. 낯의 두께는 너무 두꺼워 그 정도를 측량할 길이 없어 표정을 들키지 않고, 속의 어두움은 한 치 앞을 가늠할 수 없어 마음을 들키지 않는 상태가 최고 경지다. 그리하여 실로 뻔뻔하고 음흉한 정도는 측정할 수 없으나 얼굴은 맑고 말은 밝은 것이 또한 이들의 특징이다. 이 같은 후흑의 경쟁력이 남다른 사람이 나라를 일으키고 최후의 승자가 된다는 것이 후흑학의 이론이다.

이종오 선생은 유비는 낯 두꺼운 경쟁력(厚)으론 후한 말의 최고경지였고, 조조는 속 시꺼먼 경쟁력(黑)으로는 역시 후한 말의 최고여서 두 사람은 각각 한 분야의 최고수였다고 지적한다. 또 손권은 후흑(厚黑)을 모두 갖췄으나 낯 두꺼운 것은 유비보다 아래고, 속 시꺼먼 것은 조조보다 아래여서 후한 말은 이들 삼자가 나누어 가질 수밖에 없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후흑의 궁극’에 이른 사마의가 그 뒤에 나타나니 어찌 그에게서 삼국이 통일되지 않겠는가.

양선희 - 중앙일보 논설위원으로 매주 칼럼 ‘양선희의 시시각각’을 연재하는 중이다. 2011년 문예지를 통해 등단한 이래 소설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작품집으로 『여류(余流)삼국지』(메디치 미디어), 『카페 만우절』(나남),『5월의 파리를 사랑해』(문예중앙) 등이 있다.

201610호 (2016.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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