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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찬의 G(글로벌)와 I(나)사이 HR(11) 

되풀이되는 정치리스크… 노동개혁을 위한 첫발부터 떼자 

김기찬 논설위원·고용노동선임기자 wolsu@joongang.co.kr
참 질기도록 오래 이어진다. 정치리스크가 경제와 기업 경영을 옥죄는 관행 말이다. 한 방에 훅 가는 글로벌 경쟁시대에 국내 정치 문제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 없다. 경영전략이 나올 리 만무하다. 그래서 그동안 들렀던 외국의 사례를 다시 들춰보게 됐다. 불확실성이 제거될 수 있는 길이라도 찾을 수 있을까 해서다.

▎스페인도 우리나라처럼 정치리스크로 노동개혁 작업이 역주행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사진은 2012년 스페인 근로자들이 노동 개혁조치에 항의하면서 시위를 벌이는 장면.
2012년 2월, 스페인은 전면적인 노동개혁을 단행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노동시장의 유연성 확보다. 근로자의 근무시간, 직무와 같은 근로조건을 쉽게 조정할 수 있게 했다. 그러면서 경영상 해고 규정을 명확하게 바꿨다. 3분기(9개월) 연속으로 매출이 감소하면 해고가 가능하도록 했다. 임금제도는 무조건 물가상승률을 반영토록 한 걸 폐지했다. 하나같이 인사관리측면에서 보면 획기적인 내용이다. 이런 조치 덕분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며 유럽의 PIGS(포르투갈,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라는 비아냥을 듣던 스페인은 경제를 다시 일으키는 데 성공했다. 2014년 2분기부터 지난해 1분기까지 창출된 일자리는 유로존에서 독일에 이어 두 번째다. 해고 규정이 명확해지면서 2014년 대비 2015년 정리해고자는 1년 만에 70.4%나 줄었다. 일하는 시간을 줄이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고용조정을 탄력적으로 하면서 노사가 협상한 결과다. 예전의 전투적 노사관계는 수그러들었다.

기업경영을 위협하는 정치리스크


▎유럽에서는 정권이 바뀐다고 개혁 행보를 멈추거나 늦추는 경우는 거의 없다. 독일에선 2002년 하르츠위원회가 ‘노동시장의 현대화를 위한 개혁안’을 제시한 뒤 4단계에 걸쳐 개혁작업이 지속되고 있다. 사진은 독일 BMW 공장의 근로자.
그런데 요즘 스페인 정부나 경영계는 2단계 노동개혁에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다. 노동계는 관망 중이다. 노동개혁은 보통 첫 단추를 꿴 뒤 서너 차례 후속 개혁조치가 뒤따라야 고용시장이 안정된다. 한데 스페인에선 후속 작업은 고사하고 개혁 작업이 역주행하지 않을까 걱정한다. 코트라(KOTRA) 김기중 마드리드 무역관장은 “정치불안이 향후 스페인 경제의 가장 큰 고민거리”라고 말했다. 스페인은 지난해 10월29일에야 마리아노 라호이(Mariano Rajoy) 총리가 하원에서 신임투표에 성공하며 300일간의 무정부상태를 끝냈다. 하지만 과반 정당이 없는 4당 체제로 라호이 2기가 출범했다. 최약체 정부다. 김 관장은 “새로 연정에 참여하는 좌파정당은 노동개혁을 원점으로 돌릴 것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국민당과 협상과정에서 어떤 결과가 나타나느냐에 따라 노동개혁이 후퇴할 수 있다”고 말했다.

기업을 경영하는 데 이보다 더 큰 위협이 없다. 이른바 정치리스크다. 자칫하면 스페인은 다시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 스페인 경영자총협회(CEOE) 아나 에레스 플라사(Ana Herraez Plaza) 노사대책본부장은 “노동개혁 이후 경제가 아주 좋아졌는데, 정치상황이 불투명해 향후 더 좋아질지 오히려 나빠질지 장담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사실 스페인이 2000년대 들어 경제위기를 겪었던 이유도 정치불안 때문이었다. 이걸 노동개혁으로 반전시켰다.

경영계가 먼저 노동계와 대화 나서야

영국 경제분석기관인 옥스퍼드이코노믹스는 1월 13일 “세계 각국이 포퓰리즘 정부에 대비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정치리스크에 대처할 준비를 하라는 얘기다. 딱 한국이 처한 상황이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이 헌법재판소에서 확정되고, 대선이 조기에 치러지면 다음 정부는 역대 최약체 정부가 될 수 있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를 꾸리지도 못하고 곧바로 직무가 시작된다. 직무 수행 전에 정책을 조율하거나 수정, 보완하는 작업이 생략된다는 얘기다. 이런 상태에서 제대로 된 정책이 나올 리 없다. 선거 과정에서 공표한 각종 공약을 정책으로 포장해 여과없이 쏟아낼 수 있다. 벌써 각 대권주자들은 기존 정책의 수정과 폐기를 요구하고 있는 판이다. 민심에 따라 정치와 정책 행보가 갈지자를 그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야말로 암담한 현실이 닥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스페인과 달리 유럽의 대부분 국가는 정권이 바뀐다고 개혁 행보를 멈추거나 늦추는 경우는 거의 없다. 독일에선 2002년 하르츠위원회가 ‘노동시장의 현대화를 위한 개혁안’을 제시한 뒤 지금까지 4단계에 걸쳐 개혁작업이 지속되고 있다. 스웨덴은 2014년 선거에서 금속노조 위원장 출신인 스테판 뢰프벤(사민당)이 총리에 당선됐다. 실업급여 축소와 같은 노동개혁을 단행한 프레드릭 레인펠트 총리(보수당)를 눌렀다. 그러나 레인펠트 총리가 진두지휘했던 개혁작업은 중단되지 않았다.

강력한 노조가 버틴 프랑스에선 이례적일 정도로 노동개혁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심지어 지난해 12월1일부터는 경영상해고 요건까지 완화했다. 이른바 ‘엘 콤리 법(Loi El Khomri)’으로 불리는 노동법 개정안 제67조가 시행에 들어간 것이다. 10인 이하 사업장은 1분기 동안, 50인 미만 사업장은 2분기 연속, 300인 이상 사업장은 4분기 연속 주문량이나 매출이 크게 떨어지면 경영상 해고를 할 수 있도록 했다. 정리해고 요건을 명확히 한 셈이다. 이전까지는 한국처럼 ‘현실적이고 중대한 이유가 있을 경우’라는 식으로 모호하게 규정돼 있었다. 만약 이 규정을 기업이 자의적으로 해석했다고 법원에서 판단하면 회사는 근로자에 대해 손해배상책임을 져야 했다. 법적 판단의 예측가능성이 떨어져 회사가 도산의 위기에 몰리지 않으면 해고가 어려웠다. 경영위기에 따른 사전 자구 노력을 하는데 한계가 있었다는 뜻이다.

일본도 2000년대 중반부터 파견규제를 없애고, 파견 근로자 고용기간을 5년으로 연장하는가 하면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격차해소를 위한 제도화에 나서는 등 지금까지 개혁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세계 각국이 이렇게 움직이는 동안 한국은 노동개혁의 첫발조차 떼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 정치리스크까지 겹쳐 정치변화에 경제가 휘둘릴 판이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도 없다. 결국 경영계는 경영계대로 힘을 모아야 한다. 정치에 대응하기 위해선 연구결과를 내놓고, 필요하다면 노동계의 요구를 꼼꼼하게 따져 적절한 수준에서 수용하는 전향적인 자세도 필요하다. 지금까지 한국 경영계는 노동계의 얘기에 적극적인 반대 입장만 견지했다. 그러다 정부가 나서면 마지못해 끌려갔다. 전세계 노동개혁은 경영계가 노동계를 먼저 설득하고, 끈질기게 대화하는 데서 출발했다. 어쩌면 그래서 선진국의 경영계가 정치권의 외풍에 흔들리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 김기찬 논설위원·고용노동선임기자 wolsu@joongang.co.kr

201702호 (2017.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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