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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선희의 ‘삼국지로 본 사람 경영’ 장자방(張子房)의 후예들-방통 

방통(龐統) 못생긴 외모 때문에 저평가됐던 우량주 

양선희 중앙일보 논설위원 / 『여류(余流) 삼국지』 저자
소설 『삼국지』에서 가장 안타까운 장면을 꼽으라면, 방통이 낙봉파에서 화살을 맞고 전사하는 장면을 드는 사람이 많지 않을까. 내 경우엔 그렇다. 10대 때나 50이 넘은 지금이나 똑같다.

▎방통은 사마휘가 ‘남주(南州) 선비들 중 제일기재는 방통’이라고 꼽을 정도로 중원에서도 그 이름이 떠들썩한 선비였다. / 중국 바이두 백과
떠돌이 영웅 유비의 성공시대는 제갈량을 얻으면서 시작되고, 유비가 패업으로 가는 기반인 촉(蜀)을 얻게 된 것은 방통의 공이 으뜸이다. 소설에서도 방통의 이름은 제갈량과 함께 처음부터 거명된다. 유비가 길을 잃고 수경선생 사마휘의 장원에 갔을 때, 사마휘는 유비에게 천하기재 두 사람을 천거하며 이렇게 말한다.

“복룡과 봉추 둘 중 하나만 얻어도 가히 천하를 바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복룡은 제갈량이었고, 봉추는 방통이었다. 명사(名士)들의 본거지 영천에서도 마당발이었던 사마휘 선생이 방통이 스무 살 때에 한 나절을 이야기한 뒤 ‘남주(南州) 선비들 중 제일기재는 방통’이라고 꼽으며, 동네방네 소문을 낸 덕에 이미 중원에서도 그 이름이 떠들썩한 유명한 선비였다.

그런데 유비는 제갈량을 세 번이나 초려로 찾아가 울며불며 매달려서 모셔오고, 방통은 제 발로 찾아왔는데도 썩 탐탁찮게 대접한다. 그리고 사방 백 리밖에 안 되는 뇌양현 현령으로 발령을 낸다.

실제로 방통은 뇌양현령에서 면직됐다가 노숙 등의 천거로 유비가 제대로 면접을 본 뒤에야 그 재주가 ‘백리지재’가 아닌 비상한 면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비서실장 격인 치중종사로 삼은 뒤 나중엔 제갈량과 함께 군사로 삼는다.

그 전에도 방통은 주유가 죽은 후 노숙의 천거로 손권을 만난다. 하지만 손권도 이 유명한 기재에게 자리를 주지 않는다. 이 천하기재가 이렇게 박대를 받은 이유는 외모 때문이었다.

진수의 『삼국지』에서도 첫 마디가 ‘어릴 때 소박하고 노둔해서 그를 높이 평가하는 사람이 없었다’로 시작한다. 한 마디로 작고 못 생겼다는 얘기다. 실제로 그의 외모는 괴상하게 생긴 것으로 묘사된다. 제갈량은 키가 180cm가 넘고, 당당하고 호감가게 생겨서 외모부터 먹고 들어가는데, 방통은 일단 겉이 호감을 주지 못하니 내면까지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아 군주로부터는 저평가를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한 번 제대로 일을 시작하자 놀라운 성취를 보여준다.

“평화시의 도리와 난세의 도리는 다르다”


▎진수는 『촉서』에서 방통을 평하며, 조조의 모사 중 순욱과 같은 사람이라고 했다. 선비의 풍모가 강했다는 말이다. 사진은 중국 드라마에 등장하는 방통. / 중국 바이두 백과
방통은 제갈량과 같은 군주를 모셨고, 둘은 친구였고, 애당초 두 사람은 우열을 가리기 힘든 재사들로 꼽혔기 때문에 늘 제갈량과 비교된다. 그런데 두 사람은 스타일이 완전히 달랐다. 제갈량은 언제나 주군의 뜻을 받들어 그 뜻에서 어긋나지 않게 도모하여 성취하는 ‘과잉보호형’이라고 한다면, 방통은 방향을 정하고 그 방향으로 밀어붙이는 ‘목표지향형’이었다.

예를 들어 제갈량은 유비에게 형주를 취하라고 권하지만 유비가 “그것은 도리에 어긋난다”며 거부하니 밀어붙이지 않는다. 그는 유비가 그렇게 목을 매는 명분까지 챙기는 데 세심하다. 나중에 유비의 결정적인 실책, 관우 사후 동오로 진격하는 문제도 조자룡에다 진복까지 나서서 결사적으로 말리는 동안에도 제갈량은 총력으로 말리지 않는다. 다만 다른 신하들에 등이 떼밀려 조정신료들을 이끌고 가서 그들을 대변해 아뢰는 정도다. 그는 언제나 유비의 결정을 우선적으로 존중했다. 그러나 유비의 심기에 대단히 민감해서 주군이 맘속으로는 하고 싶으나 차마 겉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경우는 기민하게 알아차리고 자신이 대신 저질러 주군의 이익을 챙겨줄 뿐이었다. 그는 주군이 선택의 기로에서 갈등을 하면 기다렸다. 그래서 손해를 보는 일도 있었고, 시기를 놓치기도 했다. 한 마디로 유비의 입장에선 ‘입안의 혀’와 같은 존재였고, 실제로 제갈량은 주군인 유비를 깊이 존경하고 흠모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이 때문에 유비가 촉 땅으로 들어갈 때 방통을 군사로 삼아 데려간 것은 최고의 선택이었다. 방통은 자기 스타일을 고수하면서 주군을 성공시키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먼저 방통은 목표를 정해놓고 주군까지도 밀어붙여 선택하도록 만드는 힘이 있었다. 서촉을 정벌하는 일을 놓고 유비는 인의(仁義)와 실리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럴 때마다 방통은 답안지를 마련해놓고 유비를 강하게 밀어붙인다.

조조가 서량을 정벌한 뒤 다시 한중을 정벌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중원 서쪽의 위기감이 높아지고, 한중은 촉 땅을 빼앗아 조조와 맞서려 하면서 정국이 변화한다. 이때 촉의 유장은 스스로를 방어할 능력이 부족했다. 이에 유비에게 구원을 요청한다. 그러나 유비와 모사들은 그 기회에 촉을 자신들이 빼앗겠다는 일념에 불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착한 유비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주군은 고민에 빠진다.

유비는 자신의 오늘날의 명성이 조조가 급하고 포악하게 굴면 자신은 느긋하고 어질게 행동해 얻은 것인데 자신이 종친인 유장의 기업을 빼앗을 경우 닥쳐올 비난을 두려워한다. 이에 방통은 말한다.

“이런 난세에 한 가지 도리만 좇고, 일상의 이치만 따진다면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합니다. 평화시에 따라야 할 도리와 난세의 도리는 다른 것이며, 난세에는 뒤로는 무력으로 취하고 앞으로는 권위로 다스려 평정하는 것이 도리입니다.”

이 말에 현덕은 확 깨닫는다. 방통은 서촉으로 들어가서도 처음 유장을 대면하는 자리에서 유장을 쳐서 없애려고 한다. 유비가 말렸지만 방통은 도모하는 바를 멈추지 않는다. 물론 나중에 유비가 나서서 막긴 했지만, 그는 이렇게 목표가 정해지면 우직하게 밀어붙였다.

실전에서의 계책과 실행력에선 제갈량을 앞서


▎서촉공방전은 3년을 끌었던 전쟁이었고, 방통은 그 전투 과정에서 눈먼 화살에 맞아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가맹관에서 이젠 서촉을 공략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되는 순간 그는 유비에게 세 가지 계책을 들이밀며 선택하라고 한다.

“상책은 정예병을 가려 뽑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지름 길로 달려가서 성도를 급습하는 것이며, 중책은 먼저 부수관을 점령하고 곧장 성도로 향하는 것이며, 하책은 백제(白帝)로 물러났다가 형주로 곧장 귀환해 서서히 일을 도모하는 것입니다.”

유비는 여기에서 중책을 선택하고, 방통은 신속하게 군사를 움직여 그대로 실행에 옮긴다. 그리고 부수관을 지키던 양회와 고패를 계책으로 불러내 참수한다. 이 두 장수를 참수하는 문제에 대해 유비는 머뭇거린다. 그러나 방통은 그런 주군의 머뭇거림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집행해버린다.

이렇게 방통은 실전에서의 계책과 실행력에선 과감하고 신속해 제갈량을 앞서는 면모를 보인다.

소설 『삼국지』에선 방통이 제갈량을 질투해 제갈량의 우려를 무시하고 고집을 부리며 낙성으로 진군하다 죽는 것으로 묘사된다. 제갈량과 방통 사이의 질투가 있었을까? 아마 있었을 것이다.

공사(公事)에선 원래 친구도 형제도 없는 법이다. 유비에게 익주(서촉)를 바치기 위해 모의했던 장송의 역모를 고변한 것은 그의 친형이다. 제갈량도 친형인 제갈근이 손권의 사자로 와서 자기 식구들이 다 죽게 됐다고 하소연해도 유비와 연극을 벌이며, 청을 들어주지 않는다.

하물며 친구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뜻이 맞으면 힘을 합치고, 경쟁상대가 되면 원수가 되는 거야 조직에서 쉽게 일어나는 일이다. 아무리 친한 친구도 같은 조직에서 공명을 다툴 때는 우정이 아니라 실리를 따지기 때문이다. 실리 앞에선 친구가 순식간에 적도 되고, 적도 순식간에 친구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주군으로부터 막상막하의 사랑을 받는 두 친구 사이에 심한 경쟁심과 질투는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일이며, 없었다면 그건 신선의 세계에서나 벌어질 일이다.

물론 그런 질투심이 길을 잘못 들면 파멸을 가져올 수도 있다. 동오 적벽대전의 영웅 주유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경쟁심과 질투를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조직에서의 성패를 가름하기도 한다.

그러나 방통의 죽음이 소설에서처럼 질투심에 눈이 멀어 벌어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소설에서는 부수관을 점령한 후 낙성을 얻는 데까지 꽤 후다닥 지나가 버리지만, 실제로는 1년이 넘게 걸렸던 전투였다. 또 서촉 공방전은 3년을 끌었던 전쟁이었고, 방통은 그 전투 과정에서 눈먼 화살에 맞아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설에서는 방통이 죽은 후 제갈량이 장비와 조자룡을 데리고 익주로 오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은 방통이 낙성을 깨는 전투를 벌이는 동안 제갈량은 이미 서촉의 다른 지방들을 함락하고 있었다는 설도 있다.

장자방의 지모를 가졌으나 신하의 처세에선 부족


▎방통은 신하로서 정점에서 죽었기에 능력 있고 충성스러웠던 신하로 유비의 곁에 남아 있을 수 있었다. 사진은 방통의 묘. / 중국 바이두 백과
방통은 장자방의 지모를 가졌으나 신하의 처세에선 제갈량보다 경쟁력이 떨어지는 면모를 보인다. 한 예로 방통은 주군의 잘못된 처신에 대해 직선적으로 지적한다. 유비가 양회와 고패를 죽이고, 부수관에 무혈입성한 뒤 잔치를 열며 흥에 겨워 말한다.

“군사, 오늘 이 자리야말로 흥에 겹지 않소?”

이때 방통이 말한다.

“남의 나라를 치고 나서 이토록 즐거워하시니 어진 사람이 취할 도리가 아닌 듯합니다.”

이 말에 유비가 화를 내며 나가라고 소리치고, 이내 반성하고 사과한다. 반성과 사과, 낮은 자세를 보일 줄 아는 것은 유비 리더십의 큰 덕목이었다. 그러자 그는 두 번의 사과를 받고 나서야 말한다.

“군신(君臣)이 함께 잘못했습니다.”

방통은 자아가 너무 강해 주군과 이런 부딪침까지 만들어낸 것이다.

이럴 때 제갈량 같았으면, 어떻게 했을까?

아마도 앞으로는 유비의 말을 들어주며, 유비가 취한 것을 핑계 삼아 다른 곳으로 데려가 남들이 못 보게 했을 것 같다. 사실 유비의 행동은 그동안 유비가 앞세운 이미지, ‘인의의 군자’가 해야 할 바가 아니었다. 밖으로 알려지면 분명 의심하는 무리들이 생길 만한 행동이었다. 그러므로 마음속이 진정 즐거웠다 해도 밖으로 드러내고 알려지면 안 되는 거였다.

제갈량도 이런 이치는 깨달았을 게 분명하다. 그러나 그는 주군의 잘못은 드러내지 않고 감출 줄 아는 사람이었다. 분명히 혼자서 주군도 다른 병사들도 눈치 채지 못하도록 감추는 방도를 찾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 방통은 대놓고 지적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실제로 방통은 사람들의 인물 평을 즐기고, 칭찬을 많이 해서 스스로 격동되도록 격려하는 스타일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좋은 선생의 자질을 타고 난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은 아랫사람에게는 좋지만 윗사람과는 불화할 가능성이 많다.

그에겐 사람의 행실과 됨됨이가 보이고, 잘못된 점은 고쳐주려는 강한 욕구가 있어서 윗사람이라고 그냥 넘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태도는 윗사람을 불편하게 만든다. 더욱이 옳은 지적일 때는 더욱 불편하고, 화가 나게 만든다.

윗사람은 늘 자신이 도덕적으로도 우월하다고 믿고 싶어 하고, 그렇게 주변을 믿도록 강요할 수 있는 권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하가 주군에게 진실과 옳은 말을 할 때는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 각오를 해야 한다. 옳은 말을 하고 핍박당한 뒤 이에 저주하며 분노하는 것은 이런 세상 이치를 알지 못한 바보 같은 짓이다.

나중에 유비가 황제로 즉위한 지 3개월 만에 동오를 정벌하겠다며 나서자 제갈량은 유비를 떠나보낸 후 한탄하며 이렇게 말한다.

“법효직(법정)이 살아 있었다면 이리 되지는 않았을 터인데…”

법정은 유비가 서촉에서 얻었던 또 한 명의 모사였다. 그는 익주를 얻는 데 내부 동조자로써 큰 공을 세웠고, 나중에 유비가 한중을 얻는 데 장군으로 나가 혁혁한 전과를 올리며 가장 큰 기여를 한 인물이다.

제갈량은 이 순간 자신의 친구이자 유비에게 서천이라는 날개를 달아주었던 절대 모사 방통이 아니라 법정을 떠올린다. 법정은 기기묘묘한 재주로 유비가 한중을 얻는 데 대활약을 했던 재능이 뛰어난 모사였다. 하는 짓을 보면 격이 좀 낮았지만 오히려 유비가 매우 사랑했던 모사로 알려져 있다.

제갈량은 유비가 고집을 피울 때 말리는 스타일이 아니고, 방통은 강직해서 자칫 들이받을 수 있는 스타일이어서 말릴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럴 때는 법정처럼 주군을 기분 좋게 꼬이고, 가려운 데를 긁어주는 방법을 활용할 줄 아는 스타일이 먹힌다. ‘꿩 잡는 게 매’라고 목표를 달성하는 게 중요한 것이다. 주군과 대립각을 세우며, 강직하게 밀어붙이는 것은 대체로 열등한 전략이다.

선비의 풍모, 조조의 모사 중 순욱과 같은 사람

진수는 ‘촉서’에서 방통을 평하며, 고아하고 준수했으며 조조의 모사 중 순욱과 같은 사람이라고 했다. 유가적 선비의 풍모가 강했다는 말이다. 유비는 다른 군주들과 달리 자기 부하들을 깊이 믿는 남다른 경쟁력이 있었고, 수하들에게 워낙 관대했기에 방통이 오래 살았다 해도, 순욱과 같은 최후를 맞이하지 않았을 거다.

사실 제갈량이 건국과 수성까지 함께 하는 재상으로 죽는 날까지 살 수 있었던 것도 이렇게 자기 사람을 아끼고 믿는 유비의 남다른 리더십 덕분이었다. 그러나 방통은 조직 내 경쟁에서 분명 군주의 심기까지 관리할 줄 아는 제갈량에게는 밀렸을 것이다.

능력이 뛰어난 신하는 자신의 자아와 자존심을 강하게 지키며 살 수는 있다. 어느 순간까지는 말이다. 주군이 성장과 발전을 위해 그의 능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아를 지키려면 항상 내려올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특히 주군이 욱일승천하여 강해진다면, 잽싸게 자리를 내놓고 주군의 눈에서 먼 곳으로 도망치는 게 영리하다. 그러면 목숨은 부지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자아와 자리를 동시에 지키는 방법은 흔치 않다. 더구나 자아란 자신에게만 있는 게 아니라 주군에게도 있다. 주군은 지식과 지혜와 재능이 신하에 못 미치더라도 그 모든 것을 능가하고 제압할 수 있는 권력이 있다. 권력자는 자신의 자아를 양보해가며 자기 부하가 옳다고 우기는 일에 맞추지 않는다. 물론 그것이 자신에게 엄청난 이익을 가져다주고 자신이 흔쾌히 생각할 때는 받아들이지만 말이다. 그리고 조직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권력자의 자아이지 부하의 자아가 아니다. 권력자는 부하가 스스로 자기 자아를 실현하기 위해 조직이나 주군에게 대드는 꼴을 보지 않는다.

어쩌면 방통의 죽음은 당연한 귀결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큰 공을 세우고, 누려볼 기회도 없이 일찍 죽자 유비는 심하게 애통해하며, 그의 아버지·형·동생에다 어린 아들까지 모조리 불러다 벼슬을 주고 보살핀다. 또 방통과 별로 사이가 좋지 않던 사람이 크게 슬퍼하지 않으며 삐딱하게 말하자 유비는 진노해 그를 내쫓아버리기도 한다. 그야말로 방통은 신하로서 정점에서 죽은 것이다. 죽은 타이밍이 절묘해 그는 내내 능력 있고 충성스러웠던 신하로 유비의 곁에 남아 있을 수 있었다. 그가 계속 살아있었다면, 훨씬 구차한 모습을 많이 보게 됐을 것이다. 자아와 원칙이 강한 신하는 주군과 축성(築城)은 함께 하며 고생은 나눌 수 있으나 수성(守成)을 하며 복록을 함께 누리기는 어렵다.

[박스기사] 방통(龐統, 178~213)

자: 사원(士元)

별호: 봉추(鳳雛-봉황의 새끼) 선생

소속: 후한말, 유비

출신: 양양군(襄陽郡)에서 출생해 사마휘로부터 ‘남주(南州)의 제일 기재’라는 평을 듣고 일찍이 유명한 선비의 반열에 올라선다.

출사: 남군(南郡) 공조(군사들의 공로를 기록하는 자리)로 시작해 주유가 남군 태수 당시 잠시 함께 일한 것으로 기록됨. 유비에게 발탁돼 치중종사를 거쳐 군사중랑장이 된다.

사망: 유비의 서촉공방전 당시 낙성 점령 전투에서 화살에 맞아 전사. 당시 나이 36세.

양선희 - 중앙일보 논설위원으로 매주 칼럼 ‘양선희의 시시각각’을 연재하는 중이다. 2011년 문예지를 통해 등단한 이래 소설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작품집으로 『여류(余流)삼국지』(메디치 미디어), 『카페 만우절』(나남), 『5월의 파리를 사랑해』(문예중앙) 등이 있다.

201702호 (2017.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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