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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영의 CEO를 위한 인문학-역사를 만든 ‘죽은 백인 남자들’(13) 톨스토이 

영적 지도자이자 비폭력의 사도 

김환영 중앙일보 논설위원 kim.whanyung@joongang.co.kr
최고경영자에게도 중년의 위기나 ‘영혼의 위기’가 들이닥칠 수 있다. 그런 때에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소위 ‘100세 시대’의 초입에 들어선 요즘, CEO는 어떤 ‘제2의 인생’을 살아야 할까? 우리는 어쩌면 러시아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의 삶에서 ‘최상의 실천 사례’와 반면교사(反面敎師)를 동시에 발견할 수 있다.

▎톨스토이는 위대한 문호이자 위대한 사회 운동가다. 영적 지도자이자 가난한 사람의 친구였다. / 김환영
톨스토이(1828~1910)는 위대한 문호(文豪)이자 위대한 사회 운동가다. 영국 작가 버지니아 울프(1882~1941)는 톨스토이를 ‘가장 위대한 소설가’라고 평가했다. 그가 다섯 손가락이나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문학가인 것은 확실하다. 인도 독립운동 지도자 마하트마 간디(1869 ~1948)는 그를 일컬어 “이 시대가 배출한 가장 위대한 비폭력의 사도”라고 표현했다.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1869)와『안나 카레니나』(1877)의 저자로 유명하다. 사실주의 문학의 백미 중에서도 백미다.『전쟁과 평화』에는 580명의 인물이 나온다. 그럼에도 통일성과 섬세한 심리 묘사가 탁월하다. 『전쟁과 평화』는 폭력,『안나 카레니나』는 욕정이 핵심 테마라고 볼 수 있다. 폭력과 욕정은 인간을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하지만 폭력과 욕정은 인간을 파멸시킬 수 있다. 폭력이 평화로, 욕정이 사랑으로 바뀌면 파멸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 길을 톨스토이가 제시한다.

비폭력이나 사랑을 표방하는 사상은 지구의 동쪽에서 서쪽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돌고 돈다. 인도 사상과 종교가 톨스토이에게 영향을 줬고, 톨스토이의 비폭력 사상은 다시금 인도 독립운동에 영향을 행사했다. 간디를 통해서다. 간디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변호사로 활약할 때 톨스토이의 책들을 접하고 깊은 인상을 받은 나머지 그와 서신교환을 시작했다. 톨스토이의 비폭력·평화운동은 마틴 루서 킹 2세 목사(1929~1968)의 민권운동에도 영향을 줬다. 비폭력을 실천한 우리나라 촛불시위마저도 톨스토이와 무관하지 않다.

‘산상수훈’에서 해답을 얻다

그리스도교와 인도 종교가 만나는 교차점에 톨스토이가 있다. 어떤 의미에서 그런지 이야기를 풀어가 보자. 어떤 경우에는 한 단락 분량의 말이 방탕이나 방황의 함정에 빠진 사람들을 탈출시킨다. 한때 방탕하게 살았던 그리스도교의 교부(敎父) 성 아우구스티누스(354~430)를 ‘살린’ 것은 바울의 서간문인 로마서 13장 13~14절이었다. 다음과 같다. “진탕 먹고 마시고 취하거나 음행과 방종에 빠지거나 분쟁과 시기를 일삼거나 하지 말고 언제나 대낮으로 생각하고 단정하게 살아갑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온몸을 무장하십시오. 그리고 육체의 정욕을 만족시키려는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십시오.”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1483~1546) 또한 신앙이 흔들렸지만, 로마서 1장 17절을 읽고 중심을 잡아주는 ‘깨달음’을 얻었다. 다음이다. “복음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는 길을 보여주십니다. 인간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성서에도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된 사람은 살 것이다.’ 하지 않았습니까?”

부계·모계 모두 ‘빵빵한’ 러시아 귀족 가문 출신인 톨스토이는 젊었을 때 방탕한 생활을 했다. 여자 꽁무니를 따라다니는 바람둥이였다. 음주에 도박에··· 추락의 끝이 보이지 않던 톨스토이는 ‘산상수훈’, 특히 <마태복음> 5장 38~42절에서 자신을 새롭게 이끌 해답을 얻었다. 이런 내용이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앙갚음하지 마라.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 대고 또 재판에 걸어 속옷을 가지려고 하거든 겉옷까지도 내주어라. 누가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주어라. 달라는 사람에게 주고 꾸려는 사람의 청을 물리치지 마라.”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루터가 바울이 쓴 글을 통해 회심했다면, 톨스토이는 예수가 한 말에서 힌트를 얻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가톨릭 교회의 성립, 루터는 종교 개혁 과정을 통해 개신교회의 성립에 기여했다. 반면, 톨스토이는 전통적인 의미의 제도화된 그리스도교에서 벗어나 ‘톨스토이주의’의 창시자가 됐다.

‘톨스토이주의’는 어떤 내용일까. 톨스토이에게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었다. 삼위일체 교리는 의미가 없었다. 그는 사후세계도 인격신의 개념도 믿지 않았다. 예수는 톨스토이에게 ‘하느님 나라’를 다스릴 일종의 ‘철인왕(哲人王, philosopher king)’이다. 그에게 예수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모럴리스트였다. 톨스토이는 교회와 교회의 도그마에 반대했다. 국가와 결탁한 교회가 사람들을 예수의 가르침으로부터 멀어지게 했기 때문이다. 톨스토이는 신약에 나오는 예수의 기적을 부인했다. 기적은 교회가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 신약에 끼워 넣은 장치라고 주장했다.

귀족이었던 톨스토이는 차르 황실, 정부와 교회에 아는 유력자들이 많았다. 그들은 톨스토이를 최대한 보호했다. 톨스토이의 국제적 명성 때문에 그는 러시아 황실의 ‘뜨거운 감자’였다. 1901년 참다 못한 러시아정교회는 결국 톨스토이를 파문했다. 교회의 위선을 공격한 소설 『부활』(1899)이 직접적인 원인이 됐다. 하지만 파문은 톨스토이를 더 유명하게 만들었다. 18세에 정교회 신앙을 상실했던 톨스토이는 한때 열렬한 정교회 신자가 됐다. 파문으로 그는 정교회와 ‘결별 당했다’.

톨스토이는 19세기에 태동한 ‘예수주의(Jesusism)’에서 중요한 흐름을 형성했다. 예수주의는 ‘바울적 기독교(Pauline Christianity)’를 탈피해 예수의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신학이다. 예수주의와 톨스토이는 제도화된 기독교에 반대한다. 톨스토이는 교회가 가르치는 게 아니라 예수가 가르친 게 무엇인지가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예수주의와 톨스토이주의에는 무정부주의·이성주의 성향도 있다. ‘그리스도교적 무정부주의’의 아버지들 중 한 사람인 톨스토이는 “진정한 의미의 그리스도교는 국가를 종식시킨다”고 주장했다. 무정부주의자로서 톨스토이는 자본주의와 사유재산, 분업에 반대했다. 그는 또한 과학의 가치와 산업혁명의 성과에 대해서도 회의적이었다.

큰 틀에서 보면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 사람으로 미국 제3대 대통령인 토머스 제퍼슨(1743~1826) 또한 예수주의 운동의 초기 가담자 중 한 명이다. 그는 성경에서 ‘믿을 만한’ 내용만 추려내 <제퍼슨 성경>을 집필했다. 이성적이며 합리적인 그리스도교를 표방한 톨스토이 또한 성경에서 믿을 수 없는 내용을 삭제하고 『톨스토이 성경』을 만들었다. 그의 성경은 예수의 죽음으로 끝난다. 부활은 없다. 톨스토이는 아주 넓은 의미에서 크리스천이다. 하지만 그는 예수는 크리스천이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그리스도교적 무정부주의’의 아버지


▎톨스토이는 성경을 열심히 읽었지만 신약에 나오는 예수의 기적을 부인했고, 기적은 교회가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 신약에 끼워 넣은 장치라고 주장했다. / 김환영
톨스토이는 비폭력뿐만 아니라 채식주의를 실천했다. 비폭력과 채식주의는 불교나 자이나교를 비롯한 인도 종교의 트레이드마크다. 러시아 정교회의 영향권에서 자라난 톨스토이에게서 강한 동양 종교적 성향이 발견되는 이유는 뭘까.

이런 가설을 세울 수 있다. 톨스토이는 1844년 입학한 카잔 대학에서 법학과 동양 언어를 전공했다. 정신적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톨스토이는 성경을 열심히 읽었다. 성경구절 중에서도 ‘산상수훈’의 비폭력주의가 눈에 번쩍 띄었을 가능성이 있다. 동양학에 대한 그의 이해 때문이다. 톨스토이는 비폭력주의가 담긴 기원전 1~4세기 경에 쓰인 철학·격언서 『티루쿠랄』을 읽었다. 톨스토이는 또한 공자·노자를 읽었다.

자이나교의 ‘5대 서원은 폭력 쓰지 않기, 진실하기, 훔치지 않기, 갖지 말기, 섹스 안하기다. 불교의 오계(五戒)는 살생하지 말라, 훔치지 말라, 음행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술 마시지 말라다. 톨스토이가 제시한 5계명은 화내지 말기, 음욕 품지 않기, 맹세하지 말기, 악에 저항하지 말기, 정의와 불의를 모두 잘 대하기다. 이중 마지막 두 계명은 이해하기 힘들 수 있겠다.

두 가지 표현, ‘죽음과 대면하고 죽음을 극복한 삶.’, ‘농민이 되고 싶어했던 귀족’이 톨스토이의 삶을 요약한다. 그가 1살일 때 어머니가, 8살 때 아버지가 사망했다. 친척들 손에 컸다. 크림전쟁 참전을 통해 죽음을 목격했다. 유럽을 여행하던 중 파리에서 사람이 처형되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는 특히 1870년대 말부터 죽음의 문제에 집착했다.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었다. “필연적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죽음이 파괴하지 못하는 내 삶의 의미가 있을까.” 톨스토이는 농민들을 관찰한 결과 그들이 죽음을 평온하게 대하는 것을 알게 됐다. 톨스토이는 러시아 농민들의 삶과 신앙에서 죽음을 극복할 실천 방안을 찾았다. 최대한 단순하고 원시적인 삶이 답이었다. 톨스토이는 농민의 옷을 스스로 디자인해 입었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그리스도교의 금욕주의, 동양종교의 금욕주의와 농민들에게 어쩌면 ‘강요된’ 금욕주의가 만났을 때 태어난 게 톨스토이의 작품과 사상이다.

톨스토이의 아내는 소냐다. 소냐와 톨스토이는 16살 차이다. 1862년 톨스토이가 34세, 소냐가 18세였을 때 만났다. 나이차에도 불구하고 첫눈에 반했다. 결혼 전 톨스토이는 좀 황당한 제안을 소냐에게 했다. 그 어떤 것도 숨기는 일 없이 살기 위해 서로 일기를 공개하자는 것이었다. 톨스토이의 일기에는 그가 ‘총각 딱지를 뗀’ 경위, 여성 농노 사이에 사생아를 둔 이야기 비롯해 온갖 은밀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애정에서 증오 관계로 바뀐 톨스토이 부부


▎톨스토이의 아내 소냐와 딸 알렉산드라. 톨스토이는 1862년 34세 때 18세이던 소냐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 김환영
소냐는 음악과 사진에 관심이 많았는데 이에 대해 톨스토이는 시큰둥했다. 성격이 까다로운 남편인데다가 유머감각도 없었지만 어쨌든 부부생활은 행복했다. 궁합이 좋았을 것이다. 둘은 13명의 자식을 낳았다. 시대적인 보건 환경 때문에 그중 5명은 10세 이전에 사망했고 8명이 성인이 됐다. 아내 소냐는 톨스토이의 조언자이자 비서이자 편집자였다.『안나 카레니나』에서 톨스토이는 “모든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고유한 방식으로 불행하다”라고 썼다. 말이 씨가 된 듯 하다.

회심이 완료된 톨스토이는 사냥·고기·술·담배·섹스 등 그가 좋아하던 것들을 포기했다. 다른 역사적인 위인들과 마찬가지로 톨스토이 또한 자신이 표방한 것을 모두 실천하지는 못했다. 스스로 “나는 추잡한, 호색한 늙은이”라고 고백했다. 성격이 고약한 데가 있었다. 바보스러울 때가 있었고 쫀쫀하기도 했다. 셰익스피어(1564~1616)에 대해서는 특히 평가가 박했다. 톨스토이는 거의 모든 주위, 아는 사람들과 싸웠다. 지인들을 희생시켰다. 결과적으로 그의 아내에게도 가혹했다.

특히 톨스토이가 회심한 다음부터 문제가 생겼다. 재산을 사회, 특히 농민들에게 환원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농민들의 자식들을 위해 학교를 세웠고 교과서를 직접 집필했다. 백작 작위마저 포기했다. ‘톨스토이식 예수 중심주의’가 유명해지자 추종자들이 몰려들었다. 예수나 부처, 공자의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톨스토이 추종자들은 톨스토이의 ‘말씀’을 열심히 기록했다. 소냐는 제자들을 질투했다. ‘수제자’라고 할 수 있는 블라디미르 체르트코프(1854~1936)는 톨스토이 부부의 가정사에까지 참견하려고 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가만히 있을 아내가 있을까. 원래는 뜨겁게 사랑하던 둘 사이는 애증관계를 거친 다음 증오로 까지 바뀌었다. 소냐는 톨스토이가 유언장을 새로 쓰지 않았는지 의심했다. 톨스토이의 서재를 뒤지다 들켰다. 부부싸움을 한판 크게 벌인 톨스토이는 48년 부부생활을 뒤로 하고 주치의와 막내 딸 알렉산드라와 함께 가출했다. 나름 마음의 평화와 수행을 위해서였다. 그는 기차 여행을 하다 쓰러졌다. 뉴욕타임스 등 당대의 언론들이 톨스토이의 병세를 집중 보도했다. 온갖 오보가 난무했다. 톨스토이는 1910년 11월20일 숨을 거뒀다.

마르크스나 엥겔스 못지않게 러시아 볼셰비키에 영향을 준 것은 톨스토이였다. 볼셰비키의 진정한 이념적 아버지는 톨스토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레닌(1870~1924)은 톨스토이를 “혁명의 거울”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밀월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볼셰비키는 톨스토이주의자들을 감옥·강제수용소·정신병원으로 보냈다. 100명 이상을 총살했다.

영웅사관에 반대한 톨스토이는 위대한 사건에서 지도자는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우연이나 운명, 상황이라고 결론 내린 것이다. 하지만 그의 생각과는 달리, 영적 지도자이자 가난한 사람의 친구였던 톨스토이야말로 역사의 물줄기에 큰 영향을 미친 영웅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 김환영 중앙일보 논설위원 kim.whanyung@joongang.co.kr

톨스토이의 인생

1828년 러시아 야스나야폴랴나에서 출생
1847년 카잔대 중퇴
1851년 러시아군에 입대.
1854~5년 크림전쟁에 참여.
1857~61년 유럽 여행
1862년 소냐 안드레예브나 베르스와 결혼 1881년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출간 1910년 러시아 아스타포보에서 폐렴으로 별세

톨스토이가 남긴 음미해볼 말말말

● 어떤 사람이 익숙해질 수 없는 삶의 조건은 없다. 특히 그 조건을 주위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것을 봤을 때 말이다.
● 역사적 사건에서 소위 위인은 그 사건에 붙인 이름표에 불과하다. 위인은 사건과 관계 없다.
● 최강의 전사(戰士)는 시간과 인내심이다.
● 행복하게 되고 싶다면, 행복하라.
●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졌다’고 말하는 순간 진 것이다.
● 지극히 작은 변화가 일어날 때 우리는 진짜 인생을 산다.
● 역사가들은 누구도 묻지 않은 질문에 대답하는 귀먹은 사람과 같다.
● 단순함·선함·참됨이 없는 곳에는 위대함도 없다.
● 모든 사람이 세상을 바꿀 생각을 하지만 그 누구도 스스로를 바꿀 생각은 안 한다.
● 인류에 봉사하는 게 유일한 삶의 의미다.
● 인생에서나 예술에서나 단 한 가지, 진실을 말하는 게 필요하다.

김환영 - 중앙일보 심의실장 겸 논설위원. 서울대 외교학과, 스탠퍼드대 중남미학 석사, 정치학 박사. 쓴 책으로 『마음고전』,『세계사의 오리진을 만나다』, 『세상이 주목한 책과 저자』 등이 있다.

201704호 (2017.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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