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박현수 무아 대표 

명동 빌딩 숲속의 ‘음악대장 

나권일 기자 na.kwonil@joongang.co.kr
명동은 늘 상전벽해다. 일본인 관광객이 휩쓸더니 한동안 중국 사람들의 세상이었다가 다시 동남아시아인들로 바뀌었다. 그 풍진 세월동안 통기타 하나로 명동을 지키고 있는 중년의 한 가객이 있다.

▎무아 박현수 대표. 그는 오늘도 돈으로 살 수 없는 노래 한 곡을 들어줄 이를 찾는다. / 사진 : 나권일
박현수(54) 씨는 서울 명동성당 맞은편 명동의 끝자락 건물 2층에 자리 잡은 라이브 카페 ‘무아’의 사장이자 대표가수다. 무아가 있는 곳은 남산 1호 터널로 이어지는 고개 초입이다. 50대 이상의 장년들은 그곳을 중앙시네마에서 가톨릭회관을 거쳐 창고극장에 이르는 ‘진고개’ 언덕으로 기억한다. 명동 청년문화가 꽃피웠던 통기타 카페 거리다. 고색창연한 명동성당도 시류에 적응하느라 새 옷을 갈아입고, 이름도 낯선 빌딩들이 파죽지세로 점령해 들어온 와중에서도 박 씨는 지난 23년간 빌딩 숲속의 알박기 마냥 이곳에서 묵묵히 버티고 서 있다.

낮에 조용하던 ‘무아’는 밤이 되면 깨어나 명동의 또 다른 명소가 된다. 무아에 들어서면 타임머신이라도 타고 온 듯하다. 70~80년대를 풍미했던 전통적인 통기타 라이브카페 모습을 아직 갖추고 있다. 5평도 채 안 되는 벽과 천정에는 낡은 LP판, 그가 만난 지인들과 무아를 찾은 이들이 함께 찍은 사진들로 가득 차 있다.

휘파람으로 노래하는 명동 지킴이


▎영화인 이장호 씨(오른쪽)와 함께한 무아 박현수 대표. / 사진 : 박현수
무아에서 박 대표는 제왕이다. 그가 눈길을 한번 준 뒤 굵고 거침없는 목소리로 점찍었다 하면 무대로 불려 나오지 않을 ‘간 큰’ 고객은 없다. ‘18번’이 없다면 어릴 적 배웠던 동요라도 불러야 한다. 다행히 집에서 기타 반주에 노래 좀 한다는 축이라면 무명가수라도 칙사 대접을 받는다. 무아에서는 누구나 노래할 수 있다. 하지만 취객은 노래하지 못한다. 박 대표에 따르면 무아는 술집이 아니라 노래하는 카페이기 때문이다.

어수룩해 보이는 표정과 말투, 검은 선글라스. 고수는 티가 나지 않는다.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있다. 그는 재야의 고수다. 노래와 반주, 휘파람까지 다재다능하다. 허스키하면서도 예의 그 굵은 목소리에 손님들의 국적도, 연령도, 성별도 무장해제 된다. 휘파람이 특히 일품이다. 잔잔하게 뜯는 기타연주를 배경으로 그가 휘파람으로 부르는 ‘설악가’에 가슴이 ‘뒤집어졌다’는 산악인들이 한 둘이 아니다.

그가 눈을 감고 ‘무아지경’에 빠져 휘파람을 부르면 하루 종일 화장품과 고기를 팔다 지쳐 짐을 꾸리던 명동의 노점들도, 늘어선 가로수들도 귀를 기울인다. 하루 종일 고단한 시간을 보냈던 비즈니스맨들도, 종일 주판알을 튕기다 잠시 마음을 비우려 무아를 찾은 CEO도 세월을 잊는다. 분위기가 고조되면 흥에 겨운 손님 몇은 어깨동무를 하고 노래를 부른다. 비즈니스에 지친 팀장님도, 보험 유치에 힘들었던 실장님도, 옆 건물 세무서 공무원도, 옆 건물 명동성당의 신부님도 그저 무아(無我)가 된다. 내가 없으니, 내가 그대가 된다. 그대는 옆에 앉아 공감하는 또 다른 그대로 확장된다. 그 휘파람 속에 시간도, 인생도 흘러간다.

무아 박 대표를 알게 된 지는 그리 오래 되진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음악적으로 재능이 많았다고 했다. 학생 신분을 숨기고 대학교 때 통기타 카페에서 노래를 했다. 유전적 요인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성악을 전공한 그의 누나는 뉴욕음대 교수였다. 하지만 젊은 시절은 천방지축이었다. 고려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방송사 다큐 PD가 됐다가 자유롭게 살고 싶어 5년 만에 그만뒀다. 광고 기획사를 차렸다가 망한 적도 있다. 건대에서 라이브 카페를 했다가 화재가 나 접기도 했다. 몇 차례 사업 실패로 주위 사람들의 신세도 많이 졌다. 밤에는 가수 겸 사장으로 일하면서 낮에는 광고와 이벤트 일을 해 빚을 갚아나갔다.

이벤트 업은 재미가 있었다. 한 때는 무용가 이애주 씨의 매니저도 맡아 보람도 맛봤다. 노래 부르는 게 직업이니 부상을 피할 수 없을 터. 성대 수술도 받았다. 지금의 굵은 목소리는 그 영향이다. 박 대표는 지금도 자신을 불러주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 노래하고 휘파람을 부른다. 산사음악회에 앰프와 방송장비를 들고 가 실비라도 시주 받으면 겸연쩍어하는 그런 사람이다. 아무래도 큰 돈 벌기는 어려운 팔자련가.

돈 벌기보다 베풀고 나누는 삶

“돈 벌기로 마음먹었으면 제가 이거 안 차렸죠.” 명동 거리를 떠나고 싶지 않은 마음이 굴뚝같다. 10여 년 전에 유혹이 있었다. “몇 억원을 줄 테니 팔라”고 했지만 거절했다. 솔직히 후회도 된다. 대형 빌딩숲에 파묻힌 지금은 비싼 월세 때문에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이다. 그래도 무아를 아껴주는 고객들과 지인들 때문에 버티고 있다고 했다. 영화인 이장호 씨, 문성근 씨, 가객 장사익 씨가 그를 아끼는 지인들이다. “통기타 문화의 상징이었던 곳에서 노래할 수 있다는 게 너무 행복합니다.” 무아 박현수 대표. 그는 명동 빌딩 숲 속의 ‘음악대장’이라고 할만하다.

창업전문가인 정보철 ㈜이니야 대표에 따르면, 창업은 내 고집만 부려서는 성공할 수가 없다. 공자가 말한 것 중에 4무(無)가 있다. 공자에게는 4가지가 없었다는 것이다. 무의(無意), 무필(無必), 무고(無固), 무아(無我)가 그것이다. 제멋대로 생각하지 않고, 기어이 자기주장을 관철시키지 않고, 고집부리지 않고,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다는 것이다. 공자의 4무는 창업하는 사람들이 눈여겨볼만한 창업의 마음가짐이다. 돈 벌기보다 베풀고 나누는 삶을 좋아했던 박현수 대표가 명동에서 23년을 버텨올 수 있었던 이유도 그것일 것이다.

무아 박현수 대표. 그는 오늘도 돈으로 살 수 없는 노래 한 곡을 들어줄 이를 찾는다. 명동 빌딩 숲 사이에 섬이 있다. 그곳에선 잠시나마 나를 잊는다. 무아가 된다. 그 섬에 가고 싶다.

- 나권일 기자 na.kwonil@joongang.co.kr

201707호 (2017.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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