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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처 30년 사건과 인물들(1) 

사막에 ‘벤처’라는 나무를 심다 

최영진 기자 cyj73@joongang.co.kr
이번 호부터 ‘벤처 30년 사건과 인물들’이라는 시리즈를 시작한다. 창업 열풍이 불고 있는 시기에 과거를 되돌아보고 현재와 미래를 고민해보기 위해서다. 이 시리즈의 첫 번째 주제는 벤처기업협회의 설립을 이끌었던 벤처 1세대에 대한 이야기다.

▎기술 기반 창업가로 주목받는 벤처 1세대들.
한국 경제의 혁신 주인공은 과거 벤처로 불렀던 스타트업의 몫이라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몸집이 거대한 대기업은 시장의 변화에 발 빠르게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어려움 때문에 삼성전자를 시작으로 현대기아차, 롯데, 한화, 아모레퍼시픽 같은 글로벌 기업들은 스타트업 육성에 많은 공을 들이고 있다. 스타트업에서 혁신을 배우고, 시대의 변화에 대처하기 위한 방법을 배우기 위해서다. 바야흐로 스타트업 전성시대다.

1980년대부터 벤처 역사 시작돼


▎995년 12월 2일 오후 서울 섬유센터에서 21개 기업이 뜻을 합쳐 ‘벤처기업협회’ 창립총회를 열었다.
한때 스타트업 전성시대(당시에는 스타트업 대신 벤처라는 말을 사용했다)가 있었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다. 닷컴 시대 혹은 벤처 시대라고 부를 정도였다. 수많은 젊은이가 창업에 뛰어들었고 수많은 투자자가 젊은 창업가에게 투자했다. 창업만 하면 ‘돈을 벌던’ 시대였다. 그러나 미국을 시작으로 닷컴 버블이 꺼지면서 수많은 창업가가 ‘사기꾼’으로 매도됐고, 창업 열기는 바람 빠진 타이어처럼 활기가 사라졌다.

이런 시대의 아픔이 있었기에 2010년대 초중반부터 활기를 되찾은 스타트업 생태계는 과거보다 견고한지 모른다. 현재 스타트업 관계자들은 제1차 벤처 붐 시대가 왜 실패했는지, 왜 창업가는 추락했는지 등을 과거로부터 배웠기 때문이다. 제1차 벤처 붐은 땅에 발을 디디지 않았던 창업가와 투자자의 시대였다면, 현재의 스타트업 붐은 현실을 직시하고 미래를 탄탄하게 대비하는 이들로 더욱 단단해졌다.

2차 창업 붐이 번지고 있는 시기에 어떤 이들의 희생이 있었는지, 어떤 정책이 유효했는지, 정부는 어떤 노력을 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벤처 혹은 스타트업의 역사를 말할 때 1995년 말 설립된 벤처기업협회를 시작으로 보곤 한다. 이렇게 되면 한 가지를 빼먹게 된다. 벤처기업협회가 태어날 수밖에 없게 한 ‘벤처 1세대’를 간과하는 것이다.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척박한 상황에서도 창업에 도전하고 성공 스토리를 썼던 이들이 있었다.

이들의 역사까지 합하면 이제 벤처 혹은 스타트업의 역사는 30년이 넘는다. 본지가 시리즈 제목을 ‘벤처 30년 사건과 인물들’이라고 단 이유다. 시리즈 첫 번째는 벤처기업협회 설립을 가능하게 했던 벤처 1세대를 들여다본다. 벤처 역사의 산증인이라고 평가받는 이민화 카이스트 교수(메디슨 창업가)는 이들을 ‘사막에 나무를 심은 사람들’이라고 표현했다. 이 교수는 “사막에 나무를 심는다는 것은 실패할 것을 알지만 그래도 하고 싶어서, 해야만 해서 도전했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1995년 출시된 윈도95 운영체제를 사용해 만든 큐닉스컴퓨터의 큐닉스 노트북.
# 1980년대 초·중반 카이스트(KAIST·한국과학기술연구원) 초음파연구팀의 한 연구원이 자신의 지도교수에게 ‘사업계획서’를 내밀었다. 지금까지 연구했던 실험 내용을 가지고 창업하고 싶다고 알린 것이다. 지도교수는 ‘안 된다’며 말렸다. 하지만 제자의 제안도 일리가 있었다. 몇 년 동안 기업의 후원을 받아 연구했는데, 더는 후원을 받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후원이 끊긴 상황에서 연구를 계속하는 게 무리였던 상황, 그렇다고 연구 성과를 무로 돌려놓는 것도 아쉬운 일이었다. 그 제자는 1985년 초음파연구팀에서 연구했던 초음파 진단기를 들고 창업에 도전했다. 돈이 문제였다. 당시 벤처캐피털이라는 곳에 사업계획서를 가지고 찾아갔다. 창업과 기업 운영을 할 수 있는 투자를 받았다. 1999년 창업 4년 만에 매출 2000억원을 돌파했다. 벤처 1세대의 리더로 꼽히는 이민화 카이스트 교수가 메디슨을 창업한 이야기다.

메디슨의 창업과 성공 스토리는 대학 연구실의 젊은 후배들에게 자극을 줬다. ‘기술만 있으면 창업이라는 것을 할 수 있구나’라고 자각하게 한 것이다. 1989년 카이스트에서 전자공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터보테크를 창업했고 현재는 서강대 기술경영전문대학원에서 후학을 가르치는 장흥순 교수도 그중 한 명이었다. 장 교수는 “이민화 교수가 창업을 하고 투자를 받고 성공 스토리를 쓰는 모습은 우리에게 충격이었다”면서 “우리가 창업에 도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준 선배였다”고 말했다.

이민화 교수처럼 후배에게 창업의 길을 알려준 대표적인 인물로는 큐닉스컴퓨터 이범천 전 회장과 비트컴퓨터 조현정 회장을 꼽는다. 이범천 전 회장은 카이스트 1호 입학, 1호 학위 기록을 가지고 있다. 1981년 교수직을 그만두고 컴퓨터 주변 기기를 생산하는 큐닉스컴퓨터를 창업했다. 1년 만에 흑자를 기록했고, 이후 한국마이크로소프트사 설립을 주도하기도 했다. ‘벤처 신화’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비트컴퓨터 조현정 회장은 벤처 1세대 중 지금까지 기업을 운영하는 얼마 안 되는 한 명이다. 인하대학교 전자공학과 출신으로, 2000년 조현정 재단을 설립해 사회공헌 활동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이 외에도 미래산업을 창업했던 정문술 전 회장, 양지원공구를 창업해 지금까지 기업활동을 하고 있는 YG-1 송호근 회장 등 다양한 엘리트가 창업 붐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벤처기업 1호는 어디일까. 벤처기업협회가 펴낸 백서에 따르면 1980년 설립된 삼보컴퓨터(구 삼보전자엔지니어링)다. 미국 유학파 출신의 이용태 대표는 자본금 1000만원으로 삼보엔지니어링을 설립했다. 한국에서 개인용 컴퓨터를 처음으로 상용화한 기업이다. 한국 컴퓨터 산업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창업 환경은 척박했지만, 지식과 기술로 무장한 이들의 창업이 이어져 사람들이 주목했던 때였다. 2000년 이민화 교수가 펴낸 『한국벤처산업 발전사』를 보면 1995년 11월 가칭 벤처기업협의회를 준비할 때 참여한 회원사가 50여 곳이나 된다.

80년대 공학도, 마이크로프로세서 이용해 다양한 시도


예나 지금이나 창업은 계속 이어진다. 벤처 1세대라고 분류되는 이들이 여타 창업가와 다른 점은 무엇일까. 기술 기업이 많았다는 점이다. 이민화 교수는 “벤처 1세대도 제조업 기반이 대부분이었을 것 같다”는 기자의 말에 “잘못 알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당시 벤처기업이라고 부를 수 있는 기업은 대부분 기술을 기반으로 창업했다”면서 “나중에 기술 기반의 기업을 우리는 벤처라고 불렀다”고 설명했다.

벤처라는 단어는 1970년대 후반부터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등장하기 시작했다. 벤처기업협회가 펴낸 『대한민국 벤처 20년사』에 따르면 벤처는 ‘일반적으로 신기술을 기반으로 성장 의욕이 강한 기업가가 컴퓨터·전자·정보통신·화학·생명공학 등의 신규 사업 부문에서 창업해 모험적인 경영을 하는 기업을 일컫는다’고 밝혔다. 80년대 한국에서는 벤처라는 단어 대신 ‘기술집약형 중소기업’ 혹은 ‘모험기업’ ‘신기술기업’ 등의 단어가 쓰였다고 한다. 벤처라는 단어가 일반화된 것은 1995년 벤처기업협회를 설립한 후부터다.

80년대부터 90년대 초중반 창업에 도전한 젊은 창업가들은 기술을 무기로 삼았다. 시대적인 배경이 있다. 80년대 후반 미국의 제조업은 힘을 잃어가고, 그 자리를 일본 제조업이 차지하기 시작했다. 소니, 파나소닉 같은 기업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기술로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장비와 부품을 대부분 수입했던 시기였다. 젊은 창업가들은 자신들이 가진 기술로 부품 국산화를 희망했다.

이 젊은이들에게 기회를 준 것이 인텔과 텍사스인스트루먼트 같은 비메모리 칩 회사가 내놓은 마이크로프로세서(초소형 연산 처리 장치)였다. 공학도들은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이용해 다양한 프로그래밍을 하면서 임베디드 소프트웨어 능력을 쌓아갔다. 서강대 장흥순 교수는 “마이크로프로세서는 뭐든지 해볼 수 있는 물건”이었다고 말했다.

1980년대 심으로 PC가 보급된 것도 테크 창업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각 학교에 전산실과 컴퓨터실이 생기면서 PC에 미친 이들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대학에 컴퓨터 동아리도 생기기 시작했다. ‘한국의 빌 게이츠’라며 주목받았던 이찬진 전 드림위즈 대표는 서울대 컴퓨터 동아리 시절 아래아한글 1.0을 내놓기도 했다. 이를 기반으로 한글과컴퓨터를 창업했다. 당시 한양대 학생들도 바른글이라는 워드 프로그램을 내놓기도 했다.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도 벤처 확산에 도움을 줬다. 벤처기업협회 김영수 전무는 “당시 올림픽 덕분에 경기가 급상승했고, 3저 호황 덕분에 벤처캐피털이 속속 나오기 시작했다”면서 “창업가가 투자를 받을 수 있는 환경이 좋아졌다”고 설명했다.

이 시기에 벤처캐피털이 나왔지만 투자 환경이 창업가에게 유리한 것만은 아니었다. 벤처기업협회 백서에 따르면 요즘 개념의 벤처캐피털의 시초는 1981년 설립된 한국종합기술금융(KTB, 과거 KTDC)이었다. 이후 한국투자개발금융(KDIC), 한국기술금융(KTFC) 등이 설립되기 시작했다. 경영을 해보지 못했던 젊은이들은 투자를 받는 방법이나, 투자를 받을 때 주의해야 할 점 등을 알지 못했다. 흔히 말하는 창업가에게 불리한 독소조항도 많았지만, 이를 미리 거를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김영수 전무는 “벤처 1세대의 가장 큰 어려움은 경영 노하우 없이 기업을 운영했던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래서일까. 벤처 1세대 중에서 지금까지 기업을 운영하는 이는 매우 드물다. 실패 후 재기에 도전한 이도 있고, 학교로 돌아가 후학을 가르치는 이들도 있다. 실패 후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침묵을 지키는 이들도 있다.

경영 일선에서 여전히 뛰고 있는 벤처 1세대도 있다. 2016년 매출액 9100억원을 기록해 벤처 1세대 중 가장 큰 성공 스토리를 쓰고 있는 휴맥스홀딩스 변대규 회장, 양지원공구로 시작해 2016년 2800억원의 매출을 올리는 중견기업 YG-1으로 키워낸 송호근 회장, 유진로보틱스를 창업해 유진로봇으로 키워낸 신경철 대표 등 일부 창업가가 대표적이다. 김영수 전무는 “창업가의 능력이 부족해서 혹은 기술이 부족해서 벤처 1세대가 많이 실패한 게 아니다”면서 “이들에게 기업 경영을 알려줄 이도 드물었고, 당시는 기업 경영 환경도 척박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선배들의 실패가 나중에 창업하는 후배들에게 큰 정보가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민화 교수의 말처럼 벤처 1세대는 ‘사막에 나무를 심은 사람들’이었다.

- 최영진 기자 cyj73@joongang.co.kr

201804호 (2018.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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