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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남북경협 ‘봄날’ 개척한 끈기의 기업가 

조득진 기자
현대그룹이 개척한 남북경협 20년. 앞서 10년이 희망의 노래였다면 후반 10년은 시련의 시기였다. 그러나 한반도에 화해와 평화의 봄이 왔고, 경협 역시 재개될 전망이다. 7대 대북사업 독점권을 쥔 현정은 회장이 남북경협 자물쇠를 어떻게 풀어나갈지 주목된다.

▎현정은 회장이 현대그룹
“금강산관광 고객이 한 명 있더라도 해나갈 생각입니다.”

2006년 10월 11일.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남북경협 관계자를 초청한 오찬 자리에서 현정은 회장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 북한의 1차 핵실험 도발로 남북관계가 경색되면서 금강산 관광객 수가 현저히 줄어들던 시기였다. 현 회장은 “정주영 명예회장과 정몽헌 회장의 큰 뜻을 계승해 금강산 사업이라는 의미 있는 국가적·민족적 사업을 반드시 성공시킬 것”이라고 다짐했다.

하지만 시련은 길었다. 2008년 금강산관광사업 중단, 2016년 2월 개성공단 가동 중단 등으로 남북경협 사업은 올 스톱 상태다. 2016년 2월 이후로는 북한에 있는 시설 점검도 못 하고 있다. 현대그룹 관계자는 “전반 10년은 희망가를 불렀다면 후반 10년은 희망을 기다리는 시기였다”고 회상했다.

극한으로 치닫던 남북관계가 조금씩 풀리면서 남북경제협력에 대한 기대가 커지고 있다. 지난 ‘4.27 판문점 선언’에서 남북 정상은 “남과 북은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과 공동번영을 이룩하기 위해 10.4선언에서 합의된 사업들을 적극 추진해나가며 1차적으로 동해선 및 경의선 철도와 도로들을 연결하고 현대화해 활용하기 위한 실천적 대책들을 취해나가기로 했다”고 밝혔다. 또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잃어버린 11년 세월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마음을 합치자”고 남북 경제협력을 적극 추진하겠다는 의지도 강하게 드러냈다. 5월 22일 한·미 정상회담에 이어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열리는 북·미 정상회담까지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가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다.


▎2009년 8월 묘향산 초대소에서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면담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앞줄 왼쪽부터 현 회장, 김 위원장, 정지이 현 회장 장녀, 김양건 북한 노동당 비서 겸 통일전선부장(뒷줄 왼쪽), 최규훈 현대아산 계약지원실장. / 사진:현대아산 제공
재계 안팎에선 현대그룹을 주시하고 있다. 금강산관광, 개성공단 재개에 이어 7대 SOC(사회간접자본) 독점사업권을 쥔 현대그룹이 남북경협의 맨 앞에 있기 때문이다. 현대그룹 안팎에선 “재개만 합의하면 3개월이면 다시 금강산관광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경협 올 스톱, 시련과 인고의 10년


남북경협사업은 1998년 11월에 금강호가 첫 출항하면서 막이 올랐다. 이후 10년 동안 한국인 관광객 195만 명이 금강산을 찾았고, 11만 명이 개성을 둘러봤다. 현대아산은 6600만㎡(약 2000만 평)의 개성공단 개발사업권을 확보해 1단계로 330만㎡(약 100만 평) 부지 조성과 공장 건축, 숙박시설 운영 등 다양한 경협 사업을 추진해왔다. 2002~2008년 사이에는 경의선·동해선 철도·도로 연결공사의 북측 구간에 자재와 장비를 공급하는 등 건설 인프라 분야에도 직접 참여했다.

그러나 남북경협의 길은 멀고도 험했다. 특히 2003년 8월 남편인 정몽헌 회장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그해 10월 평범한 주부에서 그룹 총수로 변신한 현 회장에겐 견디기 힘든 시련의 연속이었다. 본격적인 경영에 앞서 시숙의 난(2003년 8월)과 시동생의 난(2006년 4월) 등 두 차례의 경영권 분쟁에 휘말리기도 했다. 대북사업도 순탄치 않았다. 2007년 10월 9일에 터진 북핵사태로 금강산 관광객이 하루 20여 명으로 떨어지는 등 남북경협사업이 존폐 위기에 몰리기도 했고, 급기야 2008년 7월, 관광객이 피살되면서 금강산관광과 개성관광 사업이 중단됐다. 2016년 2월엔 개성공단마저 가동이 전면 중단되면서 마지막 끈마저 위협받았다.

그 사이 남북경협의 주력이었던 현대아산의 규모는 한없이 쪼그라들었다. 2007년 매출 2555억원, 영업이익 197억원에서 이듬해 적자 전환해 2009년 매출 1144억, 영업적자 323억원으로 추락했다. 이후 살림을 줄였지만 2017년 매출액은 1263억원으로 한창때의 반토막 수준이다. 지난 10년간 기대했던 매출액 1조5000억원이 날아간 셈이다. 같은 기간 현대아산 임직원은 1084명에서 현재 157명으로 줄었다.

‘잃어버린 10년’은 뼈를 깎는 구조조정과 인력감축을 불렀다. 주력 사업이던 관광 경협 부문은 전체 조직의 30% 수준으로 줄고, 건설 부문이 70%로 확대됐다. 더는 대북사업을 할 수 없게 된 현대아산은 한-중 훼리의 선상면세점 사업, ODA(공적원조) 위탁 용역사업, 여행·행사용역·MICE·크루즈 사업 등으로 연명했다. 2016년 7월부터는 미국에서 탄산수를 수입해 팔기도 했다. 그룹 또한 힘든 시간이었다. 주력 계열사였던 현대상선은 산업은행 자회사가 됐고, 현대로지스틱스·현대증권 등이 차례로 매각되면서 그룹에서 분리됐다.

위기 때마다 특유의 뚝심으로 극복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4월 27일 판문점 남북정상회담에서 평화와 번영을 기원하는 공동기념식수를 하고 있다.
그러나 현 회장은 북측 접촉, 현장점검, 재개 계획 점검 등 사업 재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평소 “금강산 관광이 끊기고 개성공단마저 중단된 상태가 지속되고 있지만 현대그룹은 한순간도 상호협력과 공존이라는 우리의 역사적 소임을 잊지 않고 있다”며 “남북 화해와 공동번영에 현대그룹의 가교 역할은 변함이 없어야 한다”고 강조해왔다.

현 회장은 특유의 뚝심으로 남북경협사업의 끈을 이어갔다. 10여 차례 방북에서 모두 4차례에 걸쳐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났고 이 중 3차례 면담이 이뤄졌다. 2005년 7월 원산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면담해 개성·백두산관광에 합의하고 그해 8월 개성 시범관광을 실시했다. 2006년에는 5월 내금강 시범관광을 추진했고, 2007년 11월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개성·백두산·비로봉관광 합의서를 체결했다.

이런 노력 덕분에 현 회장은 북측으로부터 ‘남북경협 당사자’로 대우 받았다. 2005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현 회장과 첫 면담에서 “금강산은 정몽헌에 백두산은 현정은에”라고 말해 선대의 유지를 잇고 있는 현 회장을 경협사업자로 인정하며 큰 힘을 실어주었다. 또 2007년 남북 정상회담 때도 김 위원장은 “백두산 들쭉술은 현정은 회장에게 얻어먹어라”라며 경협사업자로서의 현 회장을 추켜세웠다.

2009년 여름 평양에서 일주일간 체류 끝에 김정일 위원장과 면담을 성사시킨 일은 현 회장의 남북경협 의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일화다. 2008년 7월 관광객 피격 사건으로 금강산관광이 전면 중단된 이듬해 8월 현 회장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러 평양에 갔다. 그러나 면담은 쉽게 성사되지 않았다. 2박3일을 계획하고 방북한 현 회장은 5차례나 체류 일정을 연장하면서 면담을 요청했다.

결국 현 회장은 김 위원장과 만나 금강산관광 재개, 남측 인원의 군사분계선 육로통행 및 체류 보장, 개성관광 재개 및 개성공업지구사업 활성화, 백두산관광 시작, 2009년 추석 중 이산가족상봉 등 5개항에 합의하고 돌아왔다. 백두산관광, 이산가족상봉은 남쪽에서도 기대하지 못했던 합의사항이었다. 경협은 물론 민간교류 부문에서도 현 회장의 뚝심 경영이 빛을 발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현대그룹 관계자는 “현대 직원뿐 아니라 현 회장님도 상당히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고비가 있을 때마다 강단과 끈기를 보이는 모습에 직원들도 힘을 내곤 했다”고 말했다.

현정은 회장의 기업가 정신은 20년 전 ‘소떼 방북’으로 남북교류의 물꼬를 튼 정주영 명예회장, 남북경협사업 전담기업인 현대아산을 세운 정몽헌 전 회장으로부터 이어진 것이다. 정 명예회장이 남북경협의 개척기를 열었다면 경협사업의 성장과 발전을 이끈 이는 정몽헌 전 회장이다. 정 전 회장은 1999년 현대아산을 설립하고 2000년 8월 개성공업지구 개발 합의서와 ‘경제협력사업권에 관한 합의서’를 체결하면서 북한 내 대형 SOC 사업권(30년)을 확보했다.

고 정몽헌 전 회장은 지난 3월 서울에서 열린 ‘2018글로벌 비즈니스 평화상’ 시상식에서 특별 제정된 ‘한반도 평화기업인 부문’에 선정되기도 했다. 행사를 위해 서울에 모인 세계 기업인들은 남북 정상회담을 환영하며 ‘올림픽 휴전에서 공동 평화로’라는 제목의 공동선언문을 채택했다. 선언문 초안을 작성한 필립 맥도나 프린스턴대 선임연구원은 “기업가들은 국경을 초월하는 만큼 평화 구축에 윤활유 역할을 할 수 있다. 기업인들도 희망의 씨앗을 뿌리기 위한 책임을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상은 현정은 회장이 대신해 받았다.

이제 주역은 현정은 회장이다. 성숙기와 시련기를 겪은 현 회장은 남북경협사업의 재도약이라는 기회를 맞았다. 올해 신년사에서 “선대회장님의 유지(遺志)인 남북 간 경제협력과 공동번영은 반드시 우리 현대그룹에 의해 꽃피게 될 것”이라고 희망을 노래했다.

현 회장은 5월 8일 ‘남북경협TFT’를 출범시켰다. 현 회장이 위원장을 맡고 현대아산 대표, 그룹 전략기획본부장이 대표위원으로 실무를 지휘한다. 계열사 대표들은 자문 역할을 담당한다. 실무조직으로는 현대아산 남북경협 운영부서, 현대경제연구원 남북경협 연구부서, 전략기획본부 각 팀, 그룹 커뮤니케이션실 등 그룹과 계열사의 경협 전문가들이 역량을 총집결해 남북경협사업의 주요 전략과 로드맵을 짤 계획이다.

현 회장은 TFT 출범에 앞서 “현대그룹은 단순한 이윤 추구를 넘어 한국 경제의 발전을 이끌고 남북 간 소통의 물꼬를 튼 자랑스러운 역사를 갖고 있는 기업”이라고 강조하며 “남북 화해와 통일 초석을 다지는 역사적 사명과 자부심을 가지고 대북사업 재개에 만반의 준비를 다해줄 것”을 당부했다.

재계 안팎에서 가장 주목하는 것은 현대아산이 보유한 7대 SOC 사업권이다. 남북 정상회담 이후 북한의 인프라 조성 사업에 많은 기업이 관심을 보이고 있다. 현대그룹은 2000년 8월 북한과 ‘경제협력사업권에 관한 합의서’를 체결하고 북한 내 대형 SOC 사업권을 확보했다. 전력, 통신, 철도, 통천비행장, 댐, 금강산 수자원, 명승지(백두산, 묘향산, 칠보산) 관광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일명 ‘7대 대북사업 독점권’이다. 당시 합의서에는 현대가 이들 분야에서 30년간 개발, 건설, 설계, 관리, 운영과 이에 따른 무역 등을 할 수 있다고 명시돼 있다. 이 사업 논의를 위해 당시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두 차례 만났다. 현대아산은 당시 사업권 대가로 5억 달러(약 5350억원)를 지불했다.

TFT는 경협이 본격화하면 이들 7대 사업권 가운데 어떤 분야에서 어떤 방식의 비즈니스에 나설지도 결정할 계획이다. 재계에서는 현 회장이 수차례 ‘가교 역할’을 강조한 바 있어 현대아산이 7대 사업에 국내 기업의 투자와 협력을 진행할 것으로 보고 있다.

다시 1998년 ‘소떼 방북’ 이야기. 당시 직원들은 두 차례에 걸쳐 소 1000마리를 준비했으나 정 명예회장은 이에 한 마리를 더 보태라고 지시했다. 1000마리는 끝이 ‘0’이라 끝나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새로 시작하는 의미를 담은 ‘1’로 만들어 대북사업의 시작과 지속이라는 의미를 담아야 한다는 취지였다고 한다. 정주영 명예회장과 정몽헌 전 회장의 남북경협 꿈을 현정은 회장이 어떻게 실현할지 주목된다.

[박스기사]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현정은 회장의 만남 - 선대 유지(遺志) 잇는 경협 동반자


▎2011년 12월 26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시신이 안치된 평양 금수산기념궁전을 찾은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당시 김정은 노동당 부위원장에게 애도를 표하고 있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만난 첫 대한민국 국민이다. 2011년 12월 26일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당시 이희호 여사와 함께 조문단으로 방북해 상주인 김정은 당시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을 만났다. 하지만 별도 면담은 이뤄지지 않았다. 당시[노동신문]은 두 사람의 조문 소식을 1면에 크게 실었고, [조선중앙통신]은 김 부위원장이 조문단에 감사를 표했다고 전했다.

김일성-김정일, 정주영-정몽헌으로 이어지는 남북경협 흐름은 김정은 위원장과 현정은 회장이 잇고 있다. 2014년 김정일 위원장 사망 3주기에 현 회장이 조의를 표한데 대한 감사 형식의 편지에서 김정은 위원장은 “(현정은)선생은 이번 3년상에 지성 어린 추모화환과 조의문을 보내옴으로써 우리 국방위원장 동지와 정주영 전 명예회장, 정몽헌 전 회장과 맺은 깊은 인연을 귀중히 여기고 대를 이어가려는 마음을 뜨겁게 표시하였다”며 “정주영, 정몽헌 선생들이 민족과 통일을 위한 길에 남긴 애국적 소행을 온 겨레는 잊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현정은 회장 선생의 사업에서 언제나 성과가 있기를 바란다. 앞으로 회장 선생이 평양을 방문하면 반갑게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2014년 말 김정은 위원장이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에게 보낸 친서.
재계에선 김정은 위원장과 현정은 회장이 선대 유지(遺志)를 잇는 경협 동반자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 통일부는 현대아산의 북한과 대화에 최대한 자율권을 주고 있다. 이전 정부와 크게 달라진 분위기다.

- 조득진 기자 chodj2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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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호 (2018.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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