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남의 TRAVEL & CULTURE] 핀란드- 헬싱키(Helsinki) 

오, 핀란드여, 보아라, 너의 날이 밝아오는 것을! 

글·사진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북유럽의 하늘은 맑다가도 갑자기 광풍이 일고 검은 구름으로 뒤덮여 버리기도 한다. 밤의 장막 같은 먹구름 사이를 뚫고 나온 한 줄기의 햇빛을 받은 하얀 헬싱키 대성당은 검은 하늘과 극적인 대비를 이룬다. 이 광경은 폭풍이 몰아치듯 격정적으로 시작하여 감미롭고 서정적인 선율로 끝맺는 시벨리우스의 [핀란디아]를 떠오르게 한다. 또 어떻게 보면, 고통과 어려움을 슬기롭게 이겨내고 앞서가는 핀란드 사람들의 혼을 연상하게 하는 듯도 하다.

▎헬싱키의 심장 원로원 광장과 헬싱키 대성당. 광장 한가운데에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 사진:정태남
헬싱키 시가지의 구심점을 이루는 신고전주의 양식의 헬싱키 대성당(Helsingin Tuomiokirkko)은 핀란드가 러시아 지배하에 있을 때 세워졌다. 강대국 사이에 끼어 있는 핀란드는 오랫동안 스웨덴에 속해 있다가, 1809년에 스웨덴이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배하는 바람에 러시아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런 연유로 헬싱키 곳곳에서 스웨덴과 러시아의 흔적을 볼 수 있다. 특히 헬싱키 대성당 앞에 펼쳐진 원로원 광장 한가운데에는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의 동상이 아직도 그대로 세워져 있다. 핀란드가 러시아로부터 독립을 선포한 것은 1917년 12월 6일, 그 후 4개월간 내전을 겪고 완전한 주권국가가 된 것은 1918년 5월이었다. 그러니까 핀란드는 100년 역사의 신생국인 셈이다. 한편 ‘핀란드(Finland)’란 국명은 스웨덴어이고 핀란드어로는 수오미(Suomi)다.

100년 역사의 신생국 핀란드


▎1934년에 세워진 세 명의 대장장이 조각상. 핀란드 사람들의 강인한 모습을 보여주는 듯하다. / 사진:정태남
원로원 광장에서 만네르헤임 거리에 들어선다. 만네르헤임은 신생 핀란드의 국부(國父)나 다름없는 인물이다. 헬싱키 시가지의 동맥 같은 이 거리에는 만네르헤임 기마상과 세 명의 대장장이 조각상이 눈길을 끄는데 마치 핀란드 사람들의 기질을 보여주는 듯 강인한 모습이다. 그 앞에 서서 핀란드어 ‘시수(sisu)’의 의미를 생각해본다. 이 말은 ‘투지’, ‘불굴의 의지’와 비슷한 뜻을 지니고 있다. 오늘날의 핀란드를 이룬 원동력은 바로 ‘시수’와 ‘슬기로움’이 아닐까?


▎만네르헤임 거리에 세워진 핀란드의 국부(國父) 만네르헤임 기마상. 길 건너편에 국회의사당이 보인다. / 사진:정태남
핀란드는 인구 550만 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 소수민족의 나라이지만 약소민족의 나라는 절대 아니다. 약소민족이냐 아니냐는 그 민족의 의지와 지혜에 달려 있다. 현재 핀란드는 여러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모범이 되는 나라로 손꼽힌다. 부러울 정도의 사회복지 시스템, 깨끗한 자연환경, 청렴한 공직자들, 앞선 교육환경 등. 또 놀라운 일은 어디를 가나 영어가 모두 통한다는 것이다. 그게 뭐 놀랄 만한 일이냐고 하겠지만, 유럽이라고 모두 영어로 소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핀란드어는 인도유럽어족이 주종을 이루는 다른 서양 언어들과 비교하면 문법체계와 단어도 완전히 다르다. 핀란드 사람들은 이런 ‘희귀한’ 모국어를 가꾸고 지키는 데 매우 민감한 것 같다. 심지어 그 흔한 ‘컴퓨터’란 말도 ‘셈틀’이란 뜻의 순수 핀란드어로 ‘티에토코네(tietokone)’라고 고쳐서 쓸 정도이니 말이다. 즉 영어는 누구나 각자 다 알아서 잘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주는 모국어는 외국어의 오염으로부터 철저히 보호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를 뒤돌아보면, 핀란드는 침략을 받았을 때는 과감히 맞서 싸웠으며, 평화시에는 강대국들을 적절히 이용하면서 실리를 챙겼다. 예로, 스탈린이 1939년 11월에 45만 대군을 동원하여 핀란드를 단숨에 삼키려고 공격하자 핀란드는 다른 나라의 도움 없이 만네르헤임 장군의 지휘하에 오로지 소수의 군대로 소련군을 궤멸시키다시피 하여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러나 핀란드는 장기전으로 고통당하는 대신 동부의 카렐리야 지방 일부를 소련에 넘겨주고 평화협정을 맺었다. 당시 핀란드 정부는 전체 인구의 1/5에 해당하던 40만 명의 카렐리야 주민들을 소련 땅이 될 카렐리야에는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모두 서쪽으로 이주시키고 생활 터전을 마련해주었다. 즉 국가가 국민을 끝까지 보호했던 것이다. 그 후, 핀란드는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자구책으로 어쩔 수 없이 나치 독일과 손잡는 바람에 패전국이 되어 소련이 부과한 엄청난 전쟁피해배상금도 물어야 했다. 그런데 기한 내에 이를 모두 갚았고 오히려 거대한 소련을 시장으로 만들었다. 역사상 이런 예는 아주 드물다. 또 동서 냉전체제하에서는 동서 간 중재자 역할을 하면서 자국의 이익을 챙겼다. 동서 냉전체제가 무너진 후 최대 시장이었던 소련이 와해되자 핀란드는 실업률이 20%에 이를 정도로 심각한 경제적 위기에 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행복을 위한 사회복지정책만큼은 굳게 지켰고, ‘시수’ 정신으로 무장하여 몇 년 뒤에 다시 일어섰다.


▎항구에서 본 헬싱키 전경. 헬싱키 대성당이 구심점을 이룬다. / 사진:정태남


건축가 알바르 알토, 음악가 장 시벨리우스


▎건축가 알바르 알토가 설계한 핀란디아 홀. / 사진:정태남
이처럼 소수민족이지만 강인한 민족의 나라인 핀란드는 강력한 문화적 잠재력을 갖춘 나라라는 사실도 일찌감치 보여주었는데 그 구심점을 이룬 인물은 건축가 알바르 알토(Alvar Aalto, 1898~1976)와 음악가 장 시벨리우스(Jean Sibelius, 1865~1957)였다.


▎헬싱키 중심가에 있는 알바르 알토의 디자인 제품 매장 아르텍(Artek). / 사진:정태남
알바르 알토는 20세기 건축과 디자인에 관한 한 핀란드의 국제적인 위상을 최고로 올려놓은 주인공으로, 핀란드의 건축을 30년 동안 이끌어나가면서 핀란드 문화의 합리적이고 낭만적인 요소를 융합한 건축을 추구했다. 만네르헤임 거리에 있는 그의 대표적인 건축 작품 ‘핀란디아 홀’(1971년 완공)은 지금도 전 세계에서 수많은 건축 관광객을 끌어모은다. 또 그가 디자인한 가구나 생활용품은 그의 건축처럼 핀란드 특유의 자연으로부터 유추된 물결치는 듯한 부드러운 곡선과 인간적인 온화함을 지니고 있는데,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신선하고 현대적인 감각이 물씬 느껴진다.

알바르 알토의 한참 선배뻘인 장 시벨리우스는 핀란드를 상징하는 인물로, 그의 이름은 신생국 핀란드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는 나라에도 잘 알려져 있었다. 그는 후기낭만파 음악의 대가로, 그의 작품 세계는 핀란드의 자연과 민족설화를 담은 대서사시 칼레발라(Kalevala)에 대한 애착으로 가득 차 있다. 구전으로 내려오던 칼레발라가 19세기 중반에 정리되어 출판되자 핀란드 사람들은 민족의 정체성에 눈뜨게 되었는데 시벨리우스는 베를린과 빈에서 유학한 후 자신이 핀란드 사람임을 더욱 뼈저리게 느끼고 칼레발라에 심취했다. 그는 핀란드어 오페라를 쓰지는 않았지만 그의 작품 속에는 민족 서사시에서 보여지는 핀란드어의 음운(音韻)을 음악에 표현하려고 한 흔적이 곳곳에 보이며, 음악적 영감은 오케스트라의 음향으로 그대로 옮겨져 있다. 또 그는 20세기 초 유럽 음악의 어지럽다고 할 정도의 실험적 운동과 거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반음계나 불협화음을 거의 쓰지 않았다. 당시 다른 음악가들이 여러가지 색상으로 칵테일을 만들고 있을 때, 그는 그저 맑고 깨끗한 샘물을 제공하고 있었던 것이다. 군더더기 없이 간결함과 신선함으로 특징지어지는 핀란드의 건축과 디자인과도 일맥상통하는 듯하다.


▎검은 장막을 뚫고 솟아나려는 듯한 헬싱키 대성당. / 사진:정태남


시벨리우스 공원


▎시벨리우스 기념 조형물과 그 옆 바위 위에 세워진 시벨리우스 초상 조각. / 사진:정태남
핀란디아 홀에서 서북쪽으로 약 500m 정도 떨어진 호숫가 숲에는 시벨리우스를 기념하는 공원이 있다. 시벨리우스 기념상은 핀란드 여류 조각가 엘리아 훌티넨이 시벨리우스 사후 10주년을 기념하여 1967년에 제작한 것으로, 엄정한 표현력과 독창성을 엿볼 수 있다. 이 기념상은 철제 조각이지만 마치 자작나무 숲으로 이루어진 북유럽 특유의 대자연의 일부처럼 느껴진다. 특히 파이프오르간을 연상하게 하는 형상은 시벨리우스의 웅장하고 신비한 음향의 세계로 인도해주는 듯하다.

시벨리우스의 음악 중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관현악곡 [핀란디아]이다. 1899년에 처음 쓰여진 이 곡은 독립된 국가를 가져본 적이 없던 핀란드 사람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기 때문에 러시아는 이 곡이 [핀란디아]라는 제목으로 연주되는 것을 철저히 금지했다. 이 곡 후반부의 목가적인 선율 부분은 나중에 시벨리우스 자신이 합창곡으로도 편곡해 전 세계에서 불리고 있는데, 핀란드에서는 국가(國歌)보다 더 사랑받는 비공식 국가다. 바람 소리와 새소리가 들리는 시벨리우스 공원에서 이 곡의 첫 구절을 머리에 떠올려본다.

Oi, Suomi, katso, sinun paivas’ koittaa,
Yon uhka karkoitettu on jo pois.
오, 핀란드여, 보아라, 너의 날이 밝아오는 것을
험난한 밤의 장막은 이제 걷히었도다.



▎오르간을 연상하게 하는 은빛 파이프. 거칠게 처리된 표면은 전나무와 자작나무 숲으로 이루어진 북유럽 특유의 대자연의 일부처럼 느껴진다. / 사진:정태남
밤의 장막이 걷히고 날이 그냥 밝아온 것은 아니었다. 핀란드가 놀라움과 부러움의 대상인 선진국으로 발돋움한 것은 ‘시수’와 ‘슬기로움’뿐 아니라, 국민은 국가를 믿었고, 국가는 국민을 믿은 덕분에 가능하였으리라.

※ 정태남은…이탈리아 공인건축사 정태남은 서울대 졸업 후 이탈리아 정부장학생으로 유학, 로마대학교에서 건축부문 학위를 받았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건축 외에 음악· 미술·언어 등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30년 이상 로마에서 지낸 필자는 이탈리아의 고건축복원전문 건축가들과 협력하면서 역사에 깊이 빠지게 되었고, 유럽의 역사와 문화 전반에 심취하게 되었다. 유럽과 한국을 오가며 대기업·대학·미술관·문화원·방송 등에서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역사, 건축, 미술, 클래식 음악 등에 대해 강연도 하고 있다. 저서로는 『이탈리아 도시기행』, 『건축으로 만나는 1000 년 로마』, 『동유럽 문화도시 기행』,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외 여러 권이 있다.

201806호 (2018.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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