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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의 혁신을 일군 아시아의 기업인(20) 

인도네시아 최고 부자 경영인 부디 하르토노 & 밤방 하르토노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로버트 부디 하르토노와 그의 형 마이클 밤방 하르토노는 인도네시아 부자 1, 2위를 차지하고 있다. 잿더미가 된 크레텍 공장을 물려받은 형제는 적극적으로 재건에 나서 금융과 건설, 통신으로 상업 영역을 넓혀 인도네시아 부호로 거듭났다.

올해 아시안 게임이 열렸던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많은 재산을 보유한 경영인은 로버트 부디 하르토노(78)와 그의 형 마이클 밤방 하르토노(79)다. 부디는 재산 174억 달러로 2018년 3월 포브스가 발표한 세계 부호 순위에서 69위를 차지했으며 인도네시아에서 제일가는 부자다. 밤방은 재산 167억 달러로 포브스 부호 순위 세계 75위, 인도네시아 2위를 차지했다. 이 두 사람은 인도네시아 최대 부자 집안을 이루고 있다. 중국계인 두 사람은 중국 표준어로 부디는 황휘종(黄惠忠), 밤방은 황후이샹(黃輝祥)이라는 중국식 이름이 있지만 인도네시아식 이름으로 활동해왔다.

이들 형제의 선친은 푸젠(福建) 지역 사투리인 민남어로 오에이위관(黃維源, 표준어로는 황웨이위안)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업가였다. 몇 세대 전에 인도네시아로 이주한 중국인의 후손이다. 동남아 화교는 중국 남부 푸젠성 샤먼(廈門) 인근 출신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현지 사투리로 아모이로 불리는 샤먼은 수많은 동남아 화교의 출발지다. 하지만 오에이의 조상이 중국 어디 출신인지는 불분명하다. 인도네시아 화교의 뿌리가 대단히 깊기 때문이다.

오에이는 자바섬 중부 자와텡가주에 있는 소도시 라셈에서 태어났다. 라셈은 700년 전통의 차이나타운이 존재하는 유서 깊은 곳이다.

다문화 국가인 인도네시아에 거주하는 종족은 300개가 넘으며 752개 이상의 언어와 사투리가 사용된다. ‘바하사 인도네시아’로 불리는 인도네시아어가 공용어로, 알파벳으로 표기한다. 말레이시아어와 서로 통한다. 중국계 인도네시아인은 2010년 인구센서스 결과 전체의 1.2%인 283만2000명이다. 이들은 공용어인 인도네시아어를 기본적으로 사용하며 가족 간 대화에서는 각자 조상들의 사투리로 소통한다.

오에이는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 전 자바섬 중부의 렘방에서 중국계 주민을 위한 폭죽을 만들어 파는 사업을 창업했다. ‘레오’라는 브랜드를 붙여 제법 인기를 끌었고 사업도 잘됐다. 레오는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에서 유명 폭죽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1945년 2차대전이 종전되면서 상황이 변했다. 종전 이틀 뒤인 그해 8월 17일 인도네시아 독립운동가 수카르노(1901~1970년)와 모하맛 하타(1902~1980)가 네덜란드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면서 전국이 사실상 전쟁터가 됐기 때문이다.

오에이의 폭죽 공장은 독립전쟁 동안에는 화약을 사용한다는 이유로, 독립 이후에는 위험하다는 이유로 각각 당국이 나서서 인도네시아 전역에서 아예 생산과 판매를 금지하면서 문을 닫았다. 오에이가 겪은 첫 시련이다. 폭죽 사업을 폐업한 오에이는 당시 거의 폐업 직전인 작은 담배 제조업체를 인수했다. 엄밀히 말하면 담배에 허브를 섞은 인도네시아 특유의 기호품이다. 인도네시아 담배류의 90%는 크레텍이라는 제품이 차지한다. 담뱃잎과 정향나무 꽃봉오리를 말린 정향(丁香)이라는 허브를 섞은 것이다. 정향은 달콤하면서 매콤한 맛이 일품이다.

정향은 고대부터 인도와 중동의 주요 교역품 중 하나였다. 중세에 등장한 ‘아라비안 나이트’에서 신바드는 인도에서 정향을 수입하는 뱃사람으로 등장한다. 14세기 모로코 출신의 여행가 이븐 바투타(1304~1368)도 정향 무역을 언급했을 정도다. 고대 중국에선 관료들이 군주를 알현할 때 입 냄새를 줄이기 위해 이를 입에 품었다고 한다. 현재는 중국은 물론 인도와 중동, 유럽에서도 요리할 때 향료로 광범위하게 사용한다. 계피나 바닐라, 바질, 팔각 등 향신료나 레드와인과 잘 어울린다. 정향은 인도네시아가 원산지인데 1605년 인도네시아 몰루카 제도를 차지한 네덜란드인들이 이를 독점해 부를 쌓았다. 몰루카 제도에서만 재배하도록 해 공급을 통제하고 가격을 높였다. 이 때문에 몰루카 제도는 ‘향료 제도’로 불렸다.

오에이 자룸, 국내외 담배 수출 기업


▎인도네시아 최대 규모의 민영 은행인 뱅크센트럴아시아(BCA)의 모습. / 사진:위키미디어
크레텍은 정향이 타면서 나는 소리에서 따온 의성어다. 달콤한 향 덕분에 인도네시아에선 담뱃잎으로만 제조한 백색 궐련보다 훨씬 인기가 높다. 백색 궐련보다 세금이 싸기 때문에 더 낮은 가격으로 유통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이 때문에 인도네시아에는 수백 개에 이르는 크레텍 제조업체가 성업 중이다. 대량생산 기술을 갖춘 대기업부터 소규모 수공업 업체까지 다양하다.

1951년 4월 21일 설립된 크레텍 업체 오에이의 자룸(Djarum)은 오늘날 인도네시아 국내 시장은 물론 해외에 담배와 관련 제품을 대량 수출하는 대기업으로 자리 잡았다. 직원이 7만5000명에 이른다. 오늘날 첨단 기술을 바탕으로 최고 수준의 대량생산 기술도 갖췄다. 하지만 시작은 소박했다. 자룸의 최초 공장은 자바섬 중부의 중심지인 쿠두스에 있었다. 쿠두스 지역은 인도네시아 최초의 산업지대 중 하나로 꼽힌다. 쿠두스는 현재 인구가 80만 명이 넘는 규모 있는 도시다. 쿠두스 주민의 대부분은 자바인이지만 시 중심부에는 작은 차이나타운이 있고, 그 이웃에는 아랍 마을도 있다. 과거 국제 교역도시로 부흥했던 흔적이다. 이 도시는 현재 인도네시아 담배 시장의 90%를 차지하는 크레텍의 탄생지로 유명하다. 크레텍은 1880년대 이 도시에 살았던 하지 자마흐리가 발명했다. 이후 이 도시는 크레텍 생산의 중심지가 됐다.

오에이의 업체는 직원 10명이 손으로 담배를 말아 만드는 소규모 수공업 제조사로 시작했다. 창업 초기 제조 작업은 담배 원료를 블렌딩하는 최소한의 장비만 사용하고 나머지는 간단한 수작업으로 했다. 창업주인 오에이도 판매를 위해 외부에 나가는 시간 외에는 작업장에서 직접 담배를 말았다. 높은 품질을 유지하려면 주인부터 나서서 정확하게 제품을 제조해야 한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룸의 소규모 공장은 품질을 인정받는 지역 브랜드로 성장했다.

폭죽 사업을 하면서 브랜드의 중요성을 실감한 오에이는 인수 직후 제품 브랜드 선정에 들어갔다. 이전까지 이 업체는 인도네시아어로 ‘자룸 그라모폰’, 즉 ‘축음기 바늘’이라는 뜻의 우아한 브랜드를 사용하고 있었다. 오에이는 여기에서 그라모폰을 빼고 ‘자룸’만 남겼다. ‘바늘’이라는 간결하고 외우기 쉬운 새로운 브랜드가 탄생했다. 그는 창업 9개월 만에 새로운 브랜드를 등록할 수 있었다. 자룸은 이 회사의 첫 브랜드가 됐다. 예상대로 강한 이미지의 브랜드를 앞세운 자룸 크레텍은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하지만 시련은 그치지 않았다. 1963년 대형 화재가 발생해 공장이 거의 사라졌다. 오에이는 실의 속에 세상을 떠났고 회사 재건이라는 막중한 임무는 두 아들인 부디와 밤방에게 넘어갔다. 형제는 아버지와 달리 인도네시아식 이름과 성을 사용했다. 이들은 작은 화교 사회를 넘어 인도네시아 전역과 동남아를 상대로 비즈니스를 하는 글로벌 기업인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로부터 잿더미가 된 크레텍 공장을 물려받은 형제는 적극적으로 재건에 나섰다. 당시는 손으로 말아서 소량 제조한 수제 크레텍의 시대였다. 형제는 전통 방식에 따라 정확하게 수제 크레텍을 제조하도록 직원들을 엄격하게 교육했다. 선친이 강조했던 ‘품질제일주의’를 앞세웠다. 담배와 정향 선별부터 크레텍을 마는 방식까지 하나하나 꼼꼼히 관리했다. 형제는 영업은 물론 직접 크레텍 제조 과정에 참여했다. 선친이 하던 방식 그대로였다. 그 결과 형제가 운영하는 자룸은 같은 브랜드의 질 좋은 전통 크레텍으로 시장을 점점 더 장악해 나갔다.

그러면서 신기술 도입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1970년 초 누구보다 이른 시기에 크레텍을 마는 기계를 도입해 전자동 방식으로 대량 제조에 들어갔다. 기계 생산은 모험이었지만 성공적으로 시장에 정착했다. 생산량이 비약적으로 늘었으며 생산비도 절감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자룸은 기계 크레텍은 물론 수제 전통 크레텍도 계속 생산했다. 기계 크레텍과 수제 크레텍은 서로 다른 시장을 형성한다고 믿었고 시장은 실제로 그렇게 반응했다. 새로운 것에 열광하는 소비자도 많지만 몸에 익은 습관을 고집하는 소비자가 적지 않음을 감안한 결과이다.

잿더미 크레텍 공장 물려받은 형제, 재건에 나서

형제는 국제화에도 앞장섰다. 형제는 국내 시장이 크다고 안주해선 안 된다는 생각에 1972년 자룸 브랜드의 수제품 크레텍을 수출하기 시작했다. 자룸 브랜드는 현재 인도네시아는 물론 동남아 각국에서 유명 크레텍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심지어 미국에도 수출하고 있다.

미국은 2009년 ‘가족 금연과 타바코 규제법’을 제정해 향이 든 궐련 대부분을 유통 금지했다. 자룸에는 시련이었다. 이들은 우회로를 발견했다. 이전까지 검은색 종이로 제품의 겉을 말았지만 2009년 이후 겉을 통담뱃잎으로 말고 제품 유형을 ‘필터 달린 시가’로 바꿨다. 작은 차이가 규제를 피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미국의 금연법은 궐련 규제에 집중했을 뿐 시가에 대해선 비교적 느슨하다는 점을 노렸다.

자룸은 나중에 베스트셀러로 자리 잡은 ‘자룸 슈퍼’를 1981년에, 또 다른 유명 브랜드인 ‘자룸 스페셜’을 1983년에 각각 시장에 선보였다. 소비자의 다양한 기호를 고려한 기민한 조치였다. 이러한 적극적인 시장 대응은 자룸을 수백 개나 되는 인도네시아 크레텍 업체 중 단연 두각을 나타내게 하는 견인차가 됐다.

이렇게 사업에 자신감을 키우고 착실하게 자본을 축적한 하르토노 형제는 사업 다각화에 들어갔다.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는 이들에겐 기회였다. 그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인도네시아에서는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를 맞아 당시 인도네시아 통화인 루피화 가치가 급락하면서 은행 유동성이 악화했으며 대중은 루피화는 물론 금융 시스템 자체를 불신하게 됐다. 그러자 인도네시아 정부는 1998년 1월 국제통화기금(IMF)과 협약을 맺고 ‘인도네시아 금융 재건청(인도네시아어 약자로 BPPN)’을 설립했다. 금융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공적자금을 사용해 금융기관의 불량 채권을 매수하는 자산관리회사다. 금융 시스템을 정상화하는 것이 목적이다. 풍부한 자산을 보유했던 하르토노 형제는 컨소시엄을 구성해 BPPN으로부터 인도네시아 최대 규모의 민영 은행인 뱅크센트럴아시아(BCA)를 매입했다. BCA는 인도네시아 최대 기업집단인 살림 그룹이 소유하고 있었으나 금융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매각 처분됐다. 하르토노 형제는 현재 이 은행의 지분 51%를 절반씩 나눠 보유하고 있다.

하르토노 형제는 자본력을 바탕으로 인도네시아 정부가 야심 차게 진행 중인 도시 현대화 건설 사업인 ‘그랜드 인도네시아 슈퍼블록 프로젝트’에도 참여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정부가 추진하는 슈퍼블록 사업은 기존 부동산을 호텔·쇼핑몰·사무실 등을 갖춘 거대한 슈퍼블록으로 리노베이션하는 사업이다. 자룸은 자카르타에 있는 ‘호텔 인도네시아’의 리노베이션 사업을 30년 계약의 BOT(Build-Operate-Transfer) 방식으로 수주했다. BOT 방식은 건설을 맡은 시공사가 일정 기간 해당 부동산을 운영해 투자비를 회수하고 이익을 확보한 뒤 발주처에 시기체납하는 민간 투자방식이다. 1962년 자카르타 아시안 게임을 앞두고 초대 대통령 수카르노가 참석한 가운데 문을 연 이 호텔은 동남아에서 처음으로 5스타를 받은 것으로 이름 높다. 오랫동안 수도 자카르타의 랜드마크 노릇을 했으며 국민 사이에서 ‘HI’라는 애칭으로 불려왔다. 1993년에 지역 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다목적 쇼핑몰인 ‘그랜드 인도네시아 쇼핑타운’과 대형 쇼핑몰인 플라자 인도네시아가 근처에 있어 자카르타 부유층이 모이는 지역이다. 자룸과 하르토노 형제는 수도 자카르타 한복판에 있는 랜드마크를 30년간 손아귀에 넣은 셈이다.

하르토노 형제는 스포츠에 관심이 많다. 부디는 1974년 인도네시아 국민이 배드민턴을 즐길 수 있도록 자룸 배드민턴 클럽을 설립했는데 수많은 선수가 아시안 게임을 비롯한 다양한 국제대회에 출전해 인도네시아의 국위를 선양했다.

밤방은 카드로 하는 두뇌 스포츠인 브리지에 빠져 올해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에 직접 국가대표 선수로 출전했다. 결과는 브리지 슈퍼혼성 종목 동메달 획득이었다. 슈퍼혼성 종목은 남자만 있는 짝과 여자만 있는 짝이 팀을 이뤄 겨루는 경기다. 인도네시아는 올해 아시안 게임에서 개최국의 이점을 살려 금메달 31개, 은메달 24개, 동메달 43개를 따 한국에 이어 4위를 기록했다. 역대 최고 성적이다. 브리지에선 모두 동메달 4개를 땄다.

경제적 도약을 노리는 인도네시아에서 하르토노 형제의 성공담은 단연 주목을 받는다. 작은 크레텍 제조업자로 출발했지만 이제는 금융과 건설, 통신에까지 사업 영역을 넓히고 있다. 이들은 인도네시아의 경제적 승천과 운명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 하르토노 형제를 주목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채인택은…중앙일보 피플위크앤 에디터와 국제부장, 논설위원을 거쳐 국제전문기자로 일하고 있다. 역사와 과학기술, 혁신적인 인물에 관심이 많다.

201810호 (2018.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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