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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호의 생각 여행(25) 

 

세고비아 수도교에 깃든 유비무환의 교훈

▎물을 공급하기 위해 2000년 전 로마시대 때 축조된 수도교(水道橋). 스페인 세고비아에 완벽한 형태로 보존되어 있다.
스페인 세고비아에선 멀리서도 한눈에 띄는 거대한 아치형 축조물이 눈에 들어온다. 파란 하늘 아래 화강암으로 쌓아 올린 구조물은 엄청나게 큰 아치형 창문틀처럼 보이기도 하고, 높은 곳에 구멍을 뚫어 두 개 층으로 만든 병풍처럼 보이기도 한다. 2000년 전 로마시대 때 물을 공급하기 위해 축조한 수도교(水道橋)다. 지금도 완벽한 형태로 보존되어 있다.

지금 봐도 거대한 규모에 놀라게 되는 이 수도교는 로마 트라야누스 황제(재위 98∼117년) 때 건설되어 무려 1906년까지 고지대에 물을 공급하는 역할을 맡았다. 2000년을 내다본 안목과 혜안이 대단하다. 생명의 근원인 물을 이송하는 펌프산업에 30년 넘게 몸담아온 터라 고대의 수도교를 보는 감동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시내에서 17km 정도 떨어진 산에서 흐르는 맑은 물을 끌어오기 위한 건축물은 모두 128개의 2층 아치로 이루어져 있으며 총길이 813m, 최고 높이는 약 30m에 달한다. 과다라마산맥에서 가져온 화강암만 사용해 축조했고, 시멘트류나 칠을 입히는 등의 접합 방식은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아치 윗부분에는 성인 조각상이 모셔져 있다. 로마시대에 지어진 이 수도교는 유럽에서 가장 보존이 잘된 고대 건축물로 손꼽힌다. 지금은 물이 흐르지 않지만 최신식 수도 시스템이 설치되어 있어 인위적으로 물을 흘려보낼 수는 있다. 수도교 가까이에 늑대의 젖을 먹고 있는 두 아이의 조각상이 보인다. 로마를 건국한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가 늑대 젖을 먹고 자랐다는 건국 신화를 상징하는 모습이다. 쌍둥이 중 로물루스가 로마의 시조가 되었고, 그의 이름에서 따와 스스로 세운 나라 이름을 로마라 하였다고 한다.

조각상 아래에는 ‘로마에서 세고비아로 가는 수로 MCML XXIV(ROMA A SEGOVIA EN EL BIMILENRIO DE SU ACUEDUCTO MCML XXIV)’라고 쓰여 있다. 스페인 세고비아에서 로마까지 수로를 건설했다는 뜻인가? 2000년 전에 이런 수도교를 건설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인력이 동원되어 땀 흘려 일했을까?

팬데믹이 일깨워준 탈글로벌화


▎성인 조각상이 모셔져 있는 수도교 아치 윗부분. 화강암만을 사용해 축조했고, 시멘트류 등의 접합 방식은 일절 사용되지 않았다.
우리 또래는 어린 시절 동네마다 우물을 파서 도르래로 물을 길어 올리거나, 우물에 피스톤 펌프를 설치해 물을 퍼올렸던 기억을 갖고 있다. 펌프에 마중물을 한 바가지 넣고 손잡이를 아래위로 움직이면 토출구로 물이 쏟아져 나오던 모습은 어린 시절의 추억이 되었다. 그 후 시간이 흘러서 전기로 구동되는 자동 펌프를 사용하면서 노동력을 들이지 않고도 스위치 하나로 물이 흐르게 되었다. 요즘은 디지털 시스템이 추가되어 펌프가 어디에 설치되어 있든지 원격으로 제어할 수 있는 시대다. 기술과 과학의 발전으로 로마시대에 수도교를 축조할 때의 엄청난 노동력과 비싼 비용을 모두 절감할 수 있게 되었고, 이처럼 편리한 시스템 덕분에 인류의 삶의 질은 획기적으로 향상되었다.

인류는 물 없이 생존할 수 없다. 산업 또한 마찬가지다. 물을 공급하기 위해 애쓰는 건 고대나 현대나 근본적으로는 별 차이가 없다. 시대 변화를 생각하며 고대의 수도교를 여러 각도에서 관찰해봤다. 세고비아 옛 시가지는 수도교와 더불어 성채 알카사르, 대성당 등 역사적인 건축물들이 잘 보존되어 있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2022년 새해를 맞이하며 시대 흐름이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큰 트렌드를 보기 위해 지난 10년 동안 출간된 포브스 등의 잡지 표지를 스크랩하여 쭉 나열해보았다.

관심을 끄는 큰 흐름은 첫째,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인류의 생존에 관한 내용이다. 둘째는 환경(Environmental), 사회(Social), 지배구조(Governance)에 관련된 ESG 경영, 셋째는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 과제, 넷째는 신기술 개발과 우주 개척, 그리고 해당 시기마다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인물들에 관한 기사였다.


▎로마 수도교와 함께 숨 쉬는 세고비아의 옛 시가지.
지난 2년간 아무도 예상치 못한 가운데 코로나19 팬데믹이 갑자기 전 세계적으로 퍼지면서 인류가 직면한 가장 큰 재앙이 되었다. 중요 통계를 살펴보면 2021년 12월 5일 기준 전 세계 코로나19 확진자가 2억6500만 명이고 사망자는 525만 명이라고 한다. 현대 과학과 의학이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루었지만 코로나 바이러스가 몰고온 재앙에 엄청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예기치 못한 전염병의 창궐은 개인의 삶과 기업 경영, 나아가 국가 경영에 이르기까지 평소 아무 일 없을 때 미래를 예측하고 닥쳐올 큰 어려움에 대비하는 위기경영(Risk Management)이 너무도 중요하다는 깨달음을 준다. 즉, 우리는 현재 간과할 수도 있는 잠재적인 위기에 대비해야 한다.

최근 발생한 요소수 사태와 세계적인 원자재 및 부품 공급망의 문제, 기후변화로 발생하는 세계 곳곳의 재앙 등에 어떻게 해야 잘 대응할 수 있을까? 특히 세계무역기구(WTO)가 무역장벽을 줄이거나 없애기 위한 목적으로 1995년 출범한 이후, 글로벌 교역과 공급망이 활성화되어왔던 지난 30년 가까운 시간에 반하여, 이번 코로나 사태로 인한 글로벌 공급망 붕괴와 이로 인한 탈글로벌화에는 어떻게 대비해야 할까?

세계 각국이 보호무역 정책을 강화하고 있다. 자국 이기주의에 근거한 탈글로벌화가 진행된다면 우리나라처럼 천연자원이 부족한 나라에서는 여러 가지 예상치 못한 문제가 지속적으로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가 든다. 필자 세대는 6·25 전쟁 중에 태어나서 최빈국에서 소년 시절을 보냈고, 청년 시절에는 중진국으로 가는 과정을 거치면서 한강의 기적으로 도약 발전하는 과정에도 참여했다. 그리고 오늘날 선진국에 진입할 때까지의 모든 과정을 직접 체험해왔다. 새해를 맞이하며 우리 세대가 실제 겪은 경험을 토대로 미래에 예고 없이 다가올 수 있는 기업과 국가적인 차원의 치명적인 위기를 생각해보았다. 잠재적 위기에 대응해 미리 준비하면 할수록 걱정할 것 없는 유비무환(有備無患)은 대단히 소중한 미래 전략이 될 것이다. 2000년 전 로마가 생명의 근원인 물을 원활히 공급함으로써 2000년 후까지 대비한 것은 우리에게 좋은 교훈이 될 것이다.

유비무환 정신으로 준비해야 할 새해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의 조각상. 로마를 건국한 로물루스 형제가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랐다는 건국 신화를 상징한다.
가장 먼저 어린 시절 겪었던 보릿고개와 배고픔의 경험을 떠올려본다. 보릿고개는 지난해 가을에 수확한 양식이 바닥나고, 올해 농사지은 보리가 미처 여물지 않은 5~6월, 식량 사정이 매우 어려운 시기를 말한다. 봄에서 초여름까지 남은 식량으로 버티기가 매우 어려웠다. 이른바 춘궁기(春窮期)다. 우리 세대에게는 익숙한 말이지만 이제는 과거의 추억이 되었다. 다이어트가 중요한 젊은 세대는 보릿고개나 춘궁기라는 단어를 아예 들어보지 못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근래에 와서는 경제성장과 함께 국민소득이 늘어나고 생활환경도 나아짐에 따라 보릿고개라는 말이 실감 나지 않게 됐다. 그러나 1960년대까지만 해도 연례행사처럼 찾아오는 보릿고개 때문에 큰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필자가 군 생활을 할 때는 토요일을 ‘분식의날’이라고 하여 라면으로 점심 식사를 대신했다. 지금은 우리나라가 선진국에 진입했고, 먹고사는 문제도 옛날이야기처럼 들린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자급률 90%를 넘는 쌀을 제외하면 식량자급률, 사료용 수요까지 감안한 국내 곡물자급률이 대단히 낮은 나라다. 해외 의존도가 너무 높아 기후변화에 의한 홍수나 가뭄이 곡물 수출국에 큰 영향을 미치거나 정치·경제적인 이유로 글로벌 곡물 유통에 문제가 생긴다면 큰 어려움에 봉착할 수 있다. 식량 안보에 대한 준비가 항상 필요한 이유다. 식량은 곧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경험은 20대 후반 처음 직장 생활을 시작했을 때다. 1978년 당시 우리나라는 세계적인 석유 대란(Oil Crisis)에 직면했다. 마침 다니던 직장이 가마에서 도자기와 타일류를 구워서 생산하는 요업 전문업체였는데, 기름으로 1년 내내 24시간 불을 때는 업종이었다. 100m가 넘는 여러 대형 킬른과 가마를 운영하는 제조업체에 급작스런 기름값 상승은 치명적이었다. 당시 덴마크는 우리나라와 같이 석유 자원이 없어서 거의 대부분 해외에 의존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후 약 30년 동안 노력한 끝에 현재 덴마크의 에너지 자급률은 거의 100%에 달한다.

같은 시대와 위기를 겪었지만 우리나라는 아직도 1978년의 석유 파동 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게 에너지를 해외에 의존하고 있다. 만일 지금 고속도로를 가득 메운 자동차나 수많은 공장에 연료가 원활하게 공급되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석유 한 방울 나지 않으면서 에너지 수입의존도가 97%에 달하는 세계 상위권의 에너지 다소비 산업국가인 우리나라에서 에너지 공급이 단절되면 국가 경제와 국민의 삶이 마비될 수 있다. 에너지 자급과 에너지 안보 리스크에 대비해 더 완벽한 준비를 해야만 할 때다.


▎건축에 200년이 걸린 웅장한 모습의 세고비아 대성당(Catedral de Segovia).
세 번째는 단전과 단수에 관한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는 정전 시간이 짧기로 세계에서 1~2위를 다툰다. 그러니 무슨 걱정을 그리 하느냐고 반문하는 이도 많을 것 같다. 그러나 우리나라도 1960년대까지 전기가 부족해 제한 송전을 했고, 1990년대 초반까지는 장기간 정전 사태가 종종 일어나곤 했다. 요즘도 체감하지 못할 뿐이지 전국에서 길고 짧은 정전 사태는 계속 일어난다. 다만 정전이 되었다가도 순간 복구되거나, 길어봐야 1~2분 정도 지속되기에 잘 느끼지 못할 뿐이다. 여러 개발도상국에서는 시간 단위, 심지어 일 단위까지 정전 사태가 길어지는 사례가 많다. 일본이나 미국 같은 선진국에서도 태풍과 허리케인의 피해로 장시간 단전되었다는 뉴스를 종종 접하면서 우리도 평소에 더욱더 잘 대비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천재지변 등으로 모든 전력 공급이 중단되는 최악의 상황인 블랙아웃이 일어나고, 이를 시간대별 시나리오로 대입해보면 상상을 초월하는 피해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특히 초고층 아파트가 많은 우리나라의 경우 단전·단수 상황이 발생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엘리베이터가 멈춰서고 펌프 시스템이 작동하지 못해 물이 안 나올 때 발생할 피해를 생각하면 두렵기조차 하다. 초고층 건물 건설로 조성된 서울과 여러 대도시는 메가시티로서의 효율성이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이제는 지방에 저층 건물 위주로 도시를 건설하는 것도 천재지변이나 안보적 측면에서 장기적으로 검토해봐야 한다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된다.

희망찬 새해를 맞이하면서 불필요한 걱정이 너무 많은 것 아니냐는 핀잔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우리의 생존에 관한 근본적인 환경을 점검하고 대책을 강구하는 유비무환 정신이 우리의 미래를 더욱 튼튼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세고비아의 수도교가 2000년을 내다보았듯이.

※ 이강호 회장은… PMG, 프런티어 코리아 회장. 덴마크에서 창립한 세계 최대 펌프제조기업 그런포스의 한국법인 CEO 등 37년간 글로벌 기업의 CEO로 활동해왔다. 2014년 PI 인성경영 및 HR 컨설팅 회사인 PMG를 창립했다. 연세대학교와 동국대학교 겸임교수를 역임했고, 다수 기업체, 2세 경영자 및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경영과 리더십 코칭을 하고 있다. 은탑산업훈장과 덴마크왕실훈장을 수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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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호 (2021.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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