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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헌 에르메스 코리아 대표이사 

시대를 초월한 가치 

정소나 기자
급속한 성장에 연연하기보다는 매 순간 고고하게 장인정신을 되뇌는 브랜드가 있다. 최고의 재료에 최고의 솜씨를 더한 최고의 제품으로 소비자들을 매료하며 ‘명품 중의 명품’으로 자리 잡은 에르메스가 그 주인공이다. 장인정신과 창의력에 여유와 위트를 곁들인 에르메스 DNA로 무장하고 한국 지사를 이끌고 있는 한승헌 에르메스 코리아 대표를 만났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명품 브랜드 에르메스는 1837년 창업주 티에리 에르메스의 공방에서 시작해 6대째 내려오는 가족 경영 기업이다. 굴지의 글로벌기업으로 성장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전통적인 장인정신과 최고의 소재로 만든 혁신적인 제품에 희소성이라는 가치를 더해 소비자들을 열광시키고 있다.

명품 시장을 피라미드로 표현하면 에르메스는 단연 맨 꼭대기에 자리한다. 에르메스의 대표 제품인 켈리백과 버킨백은 ‘돈이 있어도 살 수 없는 가방’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고위 정재계 인물이나 셀럽, 드라마 속 연예인들이 착용하기만 하면 기사화될 정도로 파급력 또한 어마어마하다. 고급스런 제품을 얘기할 때면 공공연하게 ‘○○○계의 에르메스’로 비유될 정도로 범접할 수 없는 최고의 명품 브랜드를 상징하는 대명사가 됐다.

에르메스는 대량생산과 분업으로 대중화된 명품 시장에서 장인 한 사람이 모든 공정을 도맡는 고집스런 생산 방침을 고수하면서도 매년 꾸준히 7~8%대 성장세를 이어갔다. 코로나로 인한 불경기 속에서도 지난해 약 116억 유로(약 16조2000억원) 매출을 기록하며 전년 대비 23% 성장을 이뤄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명품 브랜드 아시아 시장에서는 중국과 일본이 강세였지만, 현재는 엔터테인먼트 콘텐트가 대세로 떠오르며 한국이 아시아의 중심으로 각광받고 있다. 명품 브랜드들이 앞다퉈 한국을 주요 시장으로 분류하고, 최근 1~2년간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에르메스는 다른 브랜드보다 일찌감치 한국 시장의 잠재력을 예견하고 프랑스 본사와 미국, 일본 긴자에 이어 2006년 한국에 메종 에르메스 도산 파크를 오픈하는 과감한 행보를 보였다.

2012년 에르메스 코리아의 수장으로 부임한 한승헌 대표는 에르메스의 선견지명을 성과로 증명하고 있다. P&G와 코카콜라, NHN을 거쳐 LG전자에서 마케팅 전문가로 활약했던 한 대표는 에르메스 코리아에 합류한 후 10년이 넘도록 꾸준한 매출 성장을 견인하며 에르메스의 한국 사업 강화에 힘을 보태고 있다. 지난 3월 8일 메종 에르메스 도산 파크에서 한 대표를 만나 에르메스 코리아의 경영전략을 들었다. 에르메스에 몸담는 동안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가치를 추구하는 브랜드의 철학에 깊이 공감하게 됐다는 그는 커뮤니케이션 능력과 리더십에 여유와 위트를 겸비한 소통형 리더였다.


▎심플한 디자인 속에서도 은근한 위트를 즐기는 에르메스만의 방식으로 선보인 2023 S/S 컬렉션.
부임 이후 10년 넘게 한국 지사를 이끌며 꾸준히 성장 중이다. 대표적인 성과가 있다면.

먼저 10년 동안 꽤 높은 수준의 성장을 지속할 수 있었다는 데 의미를 둔다. 에르메스에는 가죽제품, 여성복, 남성복을 비롯해 총16개 제품군이 있는데, 거의 모든 제품군이 동반 성장했다. 사실 전 세계적으로 봐도 이렇게 모든 제품군이 골고루 성장하는 경우는 드물다. 제품 하나하나가 제 역할을 해내며 함께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것이 굉장히 자랑스럽다. 그동안 에르메스를 찾는 사람이 엄청나게 늘어 양적으로 크게 성장했지만 브랜드의 가치는 희석되지 않고 10년 전 이미지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의미있는 결과다. 매장이 10개에서 11개로 겨우 하나밖에 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높은 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고무적이다.

마케팅 전문가로 이미 유명했지만, 명품 브랜드는 처음이었다. 어려운 점도 있었을 것 같은데.

보통 새 대표가 부임하면 사업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턴어라운드’를 하기 위한 목적이 많다. 그런데 에르메스는 꾸준히 성장 중인 건강한 기업이었기에 단숨에 새로운 변화를 추진하면 오히려 ‘왜 그렇게 바꿔야 하지?’라는 의문이 들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조직원들에게 변화에 대한 필요성들을 점진적으로 심어주는 것이 제일 어려웠다. 작은 부분부터 아주 조금씩 바꿔나가며 느리지만 계속해서 다음 스텝으로 나아가며 구성원들이 변화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과정에 많은 인내심이 필요했다.

에르메스가 전 세계 패션 시장에 끼치는 영향력은 대단하다. 그 원동력이 무엇일까


오늘 함께 점심 식사를 한 일행 중 한 분이 ‘세상에는 에르메스 백과 에르메스가 아닌 백 두 가지가 있다’고 말씀하더라.(웃음) 어느 정도 타당한 말인 것 같다. 에르메스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언제나 최고의 품질이다. 최근 급속하게 성장한 브랜드들을 보면 수요가 늘면 공산품적인 접근 방식으로 대응해 공급을 많이 늘리곤 한다. 이렇게 하면 단기적으로 이윤은 급증하겠지만 그 과정에서 퀄리티에 대한 타협이 있을 수밖에 없다. 양적 성장이 아닌 질적 성장을 추구하며 최고의 품질을 구현하기 위해 그 어떤 것과도 타협하지 않는 고집이 에르메스가 마켓에서 정점을 유지해온 비결이다.

지난해 10월 현대백화점 판교점에 국내 최대 규모의 백화점 매장을 오픈하고, 신세계백화점 본점 매장도 확장 리뉴얼에 들어가는 등 한국 사업을 강화하고 있다. 에르메스가 한국 시장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궁금하다.

에르메스는 한국 비즈니스의 양적인 성장보다는 질적인 성장에 중점을 둔다. 한국 시장은 ‘one of the best market’으로 부를 정도로 브랜드 밸류가 높은 시장 중 하나다. 한국 소비자의 수준 높은 미적 감각은 다른 시장에도 영향력을 끼치는, 일종의 모델 시장이 됐다. 앞서 언급했듯이 한국 시장에서는 브랜드의 모든 카테고리가 골고루 성장 중이며, 특히 남성 제품의 성장은 전 세계적인 관심을 받을 정도다. 에르메스가 생각하는 미래의 방향으로 한국이 조금씩 먼저 가고 있는 경향이다. 예전 아시아에서 일본이 차지하던 위상을 이제는 한국이 물려받은 셈이다. 한국은 리드 마켓의 이미지에 적합한, 그야말로 가장 세련되고 파급력이 큰 시장이자 독보적인 우량 시장이라고 생각한다.

버킨백, 켈리백 등은 대기 없이 살 수 없는 제품으로 유명하다. 마케팅 전략이라는 말도 있을 정도다. ‘왜 제품을 많이 만들지 않나?’라는 궁금증을 갖는 분도 많다.

우리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제품을 생산한다. 즉, 장인 한 명이 원재료나 부품들을 가지고 하나의 백으로 만드는 과정이다. 실제로 작업 효율성만 따지면 많이 느린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장인을 ‘아티젠’이라고 부르는데, 아티스트와 기능공의 역할이 모두 포함되기 때문이다. 분업을 통해 부분만 봐서는 절대 작품을 만들 수 없고, 생산방식을 타협하는 순간 에르메스만의 유니크한 장점은 사라진다. 물론 본사에서 생산설비와 아티젠을 많이 늘리고 있지만 여전히 생산 능력보다 수요가 훨씬 많다. 일부러 만들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만들지 못하는 거다.

한국의 전체 명품 시장 규모는 세계 7위이고, 1인당 소비는 미국과 중국을 제치고 세계 최고라고 한다. 한국 시장에서 명품 열풍이 부는 이유가 뭘까.

코로나 팬데믹 기간에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 명품 시장이 급성장했다. 2030 세대가 해외여행 대신 명품에 눈을 돌린 영향이 큰 것 같다. 작년 에르메스의 연간 성장률이 23%였다. 럭셔리 역사상 20% 넘게 성장한 해가 드물 만큼 폭발적인 성장이었다. 다시 하늘길이 열렸지만 브랜드의 전통과 스토리, 최고의 품질에 매료된 고객들이 다시 매장을 찾는 긍정적인 발걸음이 이어지리라 기대한다.

지난 1월 5~10% 가격인상을 단행했다. 매출 성장이 지속될수록 가격인상이 잦다는 부정적인 편견도 있는데.

올해는 사실 라면도 떡볶이도 다 올랐다.(웃음) 에르메스는 원가에 연동되는 가격정책을 쓴다. 보통 1월에 한 번 가격인상을 단행하는데 실제로 지난 10년 동안 가격을 올리지 않은 해도 있었다. FTA로 유럽 관세가 없어질 때는 가격을 8% 인하하기도 했다. 최고의 품질을 추구하는 데는 어떤 비용도 아끼지 않지만, 단지 물건이 잘 팔린다는 이유로 가격을 올리는 경우는 절대 없다. 인위적으로 원가를 초월하는 가격인상으로 브랜드를 포지셔닝하는 일은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에르메스 재단을 통한 미술 작가 후원 활동을 비롯해 예술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

한국 현대미술계의 젊은 작가들을 발굴해서 그들이 에르메스를 통해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정말 뿌듯한 일이다. 이제는 미술 관련 상이 많아졌지만 올해로 20회를 맞은 에르메스 재단 미술상이 처음 생겼을 당시만 해도 현대미술계에서는 선구적인 상이었다.

코로나 시국에 잠시 중단 했지만 오랫동안 부산영화제를 서포트했고, 최근에는 장인들을 발굴해 덕수궁, 경복궁 등 궁궐이나 고궁을 복원하는 사업에도 동참하고 있다. 지난 2021년부터는 신영균예술문화재단의 사업을 물려받아 단편영화를 만드는 젊은 영화감독들을 지원하는 ‘필름 게이트’라는 프로그램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필름 게이트의 초기 수상자인 봉준호 감독처럼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는 젊은 작가가 많이 배출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함께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손으로 하는 크래프트맨십과 연관된 일을 하는 젊은 ‘장인’들을 육성해 크게 성장시키는 데 가치를 두고 관련 프로젝트를 계속해서 찾고 있다.

명품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기본적으로 인생은 고해이며 어려운 일도 많다. 희로애락이 공존하는 것이 인생이지만 분명 가장 빛나는 순간도 존재한다. 결혼이 될 수도 있고, 오래 기다렸던 승진이 될 수도 있고, 60번째 생일이 될 수도 있다. 각자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을 더 빛나게 해주는 것이 명품의 역할이 아닐까. 일회용품처럼 명품을 소비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올림픽에서 메달을 목에 걸 듯 에르메스가 삶의 가장 특별한 순간에 ‘인생의 메달’ 역할을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에르메스에서 배운 것이 있다면.

에르메스의 5대손이자 CEO를 지낸 장 루이 뒤마는 “EVERYTHING CHANGES BUT NOTHING CHANGES(모든 것은 변하지만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아름다운 제품을 만들겠다는 에르메스의 철학을 담은 말이다. 인간관계나 사회생활에서도 통용되는, 꾸준하고 변하지 않는 가치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다. 에르메스 제품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저 클래식한 브랜드로만 남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도 본질적인 가치는 지켜나가되 정체되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하게 된다.

에르메스의 올해 목표나 계획은.

지난 3년 동안 코로나로 인해서 고객과 브랜드가 밀접하게 관계를 맺는 데 많은 장애가 생겼다. 그래서 무엇보다 고객들과 친밀한 관계를 회복하는 데 우선순위를 두고 있다. 또 고객들이 매장을 방문해 아무런 제약 없이 원하는 물건들을 보고 즐길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또 다른 목표다. 예전처럼 지나가다 예쁜 물건을 보면 매장에 들어가 구경도 하고 직접 착용해보며 즐거움을 느끼는 원초적 경험을 다시 돌려주고 싶다.

- 정소나 기자 jung.sona@joongang.co.kr 사진 임익순 객원기자

202304호 (2023.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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