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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 이전에 가람 없고 가람 이후에도 가람 없다" 

시조시인이자 국학연구의 큰 스승 가람 李秉岐 (이병기) 

글·문재호 숭실대 강사 ; 사진·권태균 월간중앙 기자
주시경과 만나면서 ‘혁신’을 깨닫다



한성사범학교에 입학한 가람은 나라를 잃은 슬픔으로 내심 방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던 그에게 한줄기 빛이 비췄다. 주시경 선생이 강의하는 ‘조선어강습원’(朝鮮語講習院)의 조선어 문법 시간이 그것이었다. 가람이 어떻게 해서 한성사범학교에 재학 중이던 1912년 강습원에 입학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한학에 몰두해 왔음을 감안해 본다면 그에게는 뭔가 새로운 지식체계가 필요했고, 당시 주류 학풍을 이루고 있던 도쿄(東京)유학파들과는 다른 차원에서 학문적 기초가 필요했을 것이다. 게다가 그는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으므로 무의식적으로 민족주의적 성향을 지닌 학문적 대안을 찾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내적 요구에 조선어강습원은 한모금의 감로수(甘露水)처럼 찾아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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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호 (2024.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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