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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거장, 스승을 말하다⑥ - “카라얀의 베토벤 해석, 시노폴리의 인문정신에 경탄” 

지휘자·첼리스트 장한나 

글·한기홍 월간중앙 선임기자 / 사진·오상민 기자
첼로 거장 로스트로포비치, 보통사람으로서의 평범한 성장 강조…토스카니니와 푸르트뱅글러가 지휘 공부의 출발, 클라우디오 아바도 해석에 가장 큰 공감

▎2007년부터 지휘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 첼리스트 장한나. 자신의 음악적 이상(理想)에 가장 부합하는 형식이라 생각하는 교향악에 새로운 열정을 쏟아붓고 있다.
6세 때 첼로를 시작한 장한나는 8세 때 첼리스트 자클린 뒤 프레가 연주하는 엘가의 협주곡을 듣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 나이에 엘가의 첼로협주곡에 감동을 느끼는 것이 가능한가”라고 따져물었을 때 그는 “뒤프레의 무서운 집중력, 청중까지 함께 몰두시키는 그 집중력의 힘이 느껴졌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6세부터 첼로를 만지기 시작했지만 꼭 첼리스트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적은 없었다. 항상 최선을 다해 듣고, 재미있게 연습했다. 명연주자의 녹음테이프와 레이저디스크, CD는 집안에 넘쳐났다. 부모님이 당대의 최고 명반들을 사 모아 그에게 들려줬기 때문이다. 므스틸라브 로스트로포비치, 미샤 마이스키, 그리고 파블로 카잘스. 세 명의 첼로 거장 중 로스트로포비치와 마이스키가 훗날 그의 스승이 되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만일 자클린 뒤 프레가 요절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장한나는 그녀를 만나 스승으로 삼았을 것이다. 혼신을 다하는 자클린 뒤 프레 연주에서 뿜어나오는 엄청난 에너지와 열정, 듣는 이를 끌어들이는 강한 흡인력. 소녀 시절 첼로를 연주할 때 무아의 세계에 빠져들었던 장한나의 표정과 연주는 생전 자클린 뒤 프레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그러나 장한나는 “누구를 연상케 한다”는 말을 몹시 싫어한다. “제가 ‘누구’를 연상케 한다면, 사람들은 응당 바로 그 ‘누구’의 연주를 들어야지 왜 제 음악을 들어야 하나요”라고 반문한다. 자클린 뒤 프레는 분명 위대한 연주자였지만 그녀와 똑같이 되어선 안 된다는 것이 장한나의 생각이다.

어린시절부터 그런 기백으로 기라성 같은 대가들을 하나둘 극복하고, 종국에는 장한나 그 자신이 되었다. 그의 스승은 하나같이 “나에게 배우지 말고, 도처에 있는 음악으로부터 배우라”고 말했다. 제자를 품으려 하지 않고 떠나보내려고 노력했던 스승들이다. 세계 최고 지휘자 주세페 시노폴리와 로린 마젤, 첼로 거장 로스트로포비치와 미샤 마이스키가 그들이다.

장한나는 어릴 때부터 스승을 향한 열망이 강했다. 12세 때 미국 줄리아드 음대 예비학교를 다니면서 최고 권위의 로스트로포비치 콩쿨에 도전한 것도 평소 그가 흠모했던 스승 로스트로포비치를 보기 위함이었다. 로스트로포비치는 이 콩쿨에서 우승을 차지한 장한나의 음악이 “상상을 초월하는 거대한 스케일”이라 칭찬했다. 이 콩쿨 우승 과정엔 장한나가 털어놓은 작은 에피소드가 있다.

“권위 있는 국제 콩쿨에는 1차 서류 심사가 있습니다. 제 나이를 12세로 적었는데 나중에 들어보니 주최 측에서 제가 22세 나이를 12세로 잘못 적은 것으로 판단하고 서류심사를 통과시켰다고 했어요. 12세였던 것을 알았다면 결코 통과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지요.”

“이제 음악의 열쇠를 네게 넘겨준다”


▎장한나가 지휘자의 길을 선택한 배경에는 자신이 동경했던 교향악의 세계를 대중에게 돌려주고 싶다는 희망이 작용했다.
비슷한 에피소드는 또 있다. 로스트로포비치는 장한나가 첼로를 들고 무대 위에 올라올 때 “첼로가 ‘홀로’ 걸어 들어오고 있는 것으로 착각했다”고 말했다. 장한나가 얼마나 어린 나이에 이 콩쿨의 우승자가 되었는지를 상기시키는 그의 유머였다. ‘슬라바’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로스트로포비치는 예술적 영향력과 열정의 측면에서 불멸의 거장 파블로 카잘스와 비견된다. 첼로 리사이틀은 물론 오케스트라, 실내악, 성악, 오페라까지 섭렵하며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발산했다. 탁월한 오케스트라 지휘 능력으로 장한나의 데뷔 음반 녹음을 주도하는 등 그의 음악적 성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시상식 후 자택에서 베푼 저녁식사 때 ‘매달 4회 이상은 연주하지 말라’는 조언을 해주셨죠. 보통 학교를 다니고, 보통 친구를 사귀며, 정상적으로 성장해야 한다는 점을 특히 강조했습니다. 신동이나 천재로 알려졌던 사람들이 쳇바퀴와 같은 스케줄에 휘말려 ‘번아웃(burnout:소진)’되는 경우를 많이 보셨겠죠. 이듬해 2월에는 제 연주를 들으러 프랑스 칸까지 오셨습니다. 저녁 식사 때는 냅킨 위에 무대 위 배치도를 그려주셨는데, 그때 첼로와 피아노가 하나의 소리로 객석에 전달돼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그 냅킨을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 뒤로도 장한나는 뉴욕·워싱턴·모스크바·상트페테르부르크 등 스승이 있는 곳으로 날아갔고, 보통 닷새 씩 호텔에 머물며 하루 3시간 정도의 레슨을 받았다. 15세 때였던 아주 추운 겨울,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마지막 레슨이 있었다. 마에스트로는 이날 중대한 선언을 했다.

“마지막 연주가 끝나자 선생님은 ‘이제 음악의 열쇠를 네게 넘겨준다’고 하시며 ‘앞으로 나 자신을 포함하여 그 누구에게도 레슨을 받지 말라’고 하셨어요. 오히려 함께 협연하는 훌륭한 지휘자들, 그리고 무대에 서는 경험을 통해 스스로 음악세계를 열어가라고 하셨습니다.”

장한나, 이 천재의 유년시절, 그 숨가쁜 궤적을 되돌아보자. 6세에 첼로 배우기 시작, 8세에 서울시립교향악단과 하이든 첼로협주곡 협연, 9세에 전국 콩쿨 우승, 12세에 세계 최고 권위 콩쿨 우승, 13세에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데뷔 음반 발매.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는 줄리아드 음대에서 이반 갈라미언이라는 탁월한 스승을 만났지만 장한나는 줄리아드에서는 좋은 스승을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그 시절 진정한 스승으로 미샤 마이스키를 꼽는다. 그 다리는 아버지가 놓았다.

“도미하기 직전이었던 1992년 가을 아버님이 한국에 공연 온 미샤 마이스키에게 제 테이프를 보냈습니다. 마이스키는 한국 공연을 끝내고 대만으로 날아갔는데, 거기서 짬을 내어 제 테이프를 보았던 모양입니다. 바로 연락이 왔어요. ‘내년(1993년) 여름 이탈리아 시에나에서 열리는 마스터클래스에 반드시 참석해라. 원래는 대학원생만 가르치는데 네게는 특별히 참석을 허락하겠다’라고요. 마이스키 선생의 출생지인 러시아의 억양이 강하게 밴 영어 발음을 자신도 모르게 따라했어요. 말투는 물론이고 스승의 걸음걸이며 악기를 다루는 자세까지 흉내 내듯 닮아갔던 모양입니다.”

반면 마이스키는 장한나를 열한 살짜리 아이가 아니라 서른 살이 된 어른처럼 대하며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과 철학을 들려줬다. 첼로 연주기법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연주를 잘하는 사람은 손으로 소리를 내고, 그보다 더 잘하는 사람은 머리로 소리를 내지만, 정말로 잘하는 사람은 가슴으로 소리를 낸다는 그의 말은 지금도 잊지 못하는 명언이다.

“브람스의 작품을 연습할 때, 제게 거듭 물었죠. ‘브람스가 누군지 아느냐, 왜 그는 이 작품을 썼겠느냐’고요. 저는 계속 생각할 수밖에 없었어요. 답은 악보에 있으니까 악보를 더 깊이 생각하고 느껴야 한다는 걸 그때 배웠죠. 평생 음악가로 살면서 매일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질문을 열한 살짜리한테 던지신 거예요.”

1994년 로스트로포비치 콩쿨에 나간다고 하자 스승은 대회 1주일 전 자신의 집으로 그를 불렀다. 그리고 매일같이 스튜디오에서 시간도 정해놓지 않고 그를 가르쳤다. 대가의 따뜻한 마음씀씀이였다. 경연장으로 향하면서 그는 스승에게 ‘너무나도 감사하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 스승은 말했다. “나중에 커서 너같이 재능 있는 아이를 만나면 그대로 해주거라. 나도 내 스승에게서 받은 사랑을 너에게 전해준 것뿐이다.”

장한나를 형성한 가장 중요한 스승 주세페 시노폴리는 1977년 베네치아에서 베르디 <아이다>로 오페라 무대에 데뷔했다. 정신분석학에 정통했던 그는 베르디가 작곡한 음 하나 하나가 가진 심리학적 의미를 분석했다고 한다. 메스를 가하듯 치밀한 분석은 극적인 긴장감을 고조시켰고, 평론가들에겐 독창적인 해석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시노폴리가 세계적인 지휘자로 부상한 것은 1981년. 도이치 오퍼 베를린에서 괴츠 프리드리히가 연출한 베르디 <맥베스>를 통해서였다.


▎1. 1994년 로스트로포비치 국제 첼로콩쿨에서 우승한 직후 만난 로스트로포비치와 장한나. 이 콩쿨의 우승을 계기로 두 사람은 사제의 연을 맺고 깊은 음악적 교감을 나눴다. 2. 1995년 한국을 방문한 주세페 시노폴리 당시 드레스텐 슈타츠카펠레 수석지휘자가 그의 애제자인 장한나와 함께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하버드 대학 진학에는 시노폴리 선생 영향 지대

“시노폴리는 정말로 팔방미인이었죠. 최고의 지휘자였지만 돌아가시던 해에 고고학 박사학위 논문을 마쳤고, 정신과와 신경과 학위도 따놓은 상태였어요. 현대음악 작곡도 했고 르네상스맨과 같은 지식으로 제게 굉장히 깊은 인상을 남긴 분입니다. 음악가를 지탱해주는 지식, 아니 지식이라기보다 끊임없는 호기심의 중요성을 일깨운 분이죠. 음악가에게 음악이 가장 중요하지만, 음악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 그분의 지론이었습니다.”

장한나가 지휘봉을 잡게 된 데에도 시노폴리는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똑부러지게 ‘그렇다’고 하기엔 약간의 유보가 필요하다는 것이 장한나의 생각이다. 그를 지휘의 세계로 이끈 당대의 명지휘자가 너무도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시노폴리는 오히려 장한나의 인문적 소양과 관심을 자극했다. 그가 2001년 ‘느닷없이’ 하버드대에 진학해 철학을 공부하게 된 배경에도 시노폴리의 평소 가르침이 작용했다.

“하버드 진학에는 시노폴리 선생의 영향이 분명 있었습니다. 대학 생활을 다른 보통사람하고 똑같이 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요. 그리고 철학은 혼자 공부하기에는 너무도 힘든 학문이니까요. 하버드에서 좋은 친구를 많이 만났고, 2년을 공부하다 지금은 휴학상태죠. 언젠가는 돌아가서 학업을 마칠 생각입니다.

제 전공은 엄밀하게 말해 철학, 즉 필로소피(philosophy)가 아니라 ‘마인드 브레인 앤 비헤이비어(MBB:Mind Brain&Behavior)’라고 해요. 마음과 뇌와 인간의 행태를 연구하는 학문이에요. 사회학과 수학, 컴퓨터 공학, 철학, 심리학 등 특정 분야에서 MBB 트랙을 선택해 공부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저는 그 특정분야 중 철학을 선택한 거죠.

순수 철학이 아니라 철학·심리학·행동과학 그 세 개를 포괄적으로 공부해야 하는 힘든 과정입니다. 1학년 때는 상당히 자유로웠습니다. 문학 쪽의 코스, 즉 괴테 <파우스트>나 영국 문학 커리큘럼 등을 들었습니다. 항상 철학을 공부하고 싶었는데 그게 음악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사람들은 잘 납득하지 못했어요. 철학과 문학에 대한 관심은 음악에 종속되지 않는 저의 독자적인 관심 영역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장한나는 치열한 독서가다. 어린 시절부터 문학과 철학 분야의 고전을 광범위하게 섭렵했다. 영미문학과 러시아문학, 프랑스와 독일의 숱한 고전을 주로 영역본으로 독파했다. 예컨대 톨스토이의 모든 작품을 완독했고, 방대하고 난해하지만 20세기 최고의 문학작품으로 꼽히는 마르셀 프르스트의 대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즐기듯 읽어냈다. 그는 독서를 음악적 활동의 자양분으로만 여기지 않는 태도를 견지한다. 음악·문학·철학 등 각각의 분야를 거의 동등한 지위로 대하는 태도가 장한나의 특성 중 하나다. 그가 밝힌 독서법 중엔 이런 대목이 있다.

“관심 있는 작가의 대표적인 장편 작품들, 또는 단편, 시, 에세이 등을 모두 섭렵하는 편입니다. 동시에 그 작가의 자서전, 또는 평전을 같이 읽습니다. 작가의 일생과 생각에 친해집니다. 작품이 더 깊고 생생하게 다가오지요. 한 달에서 두 달까지, 한 작가의 삶과 작품에 푹 빠져 지내는 적이 종종 있습니다.”

장한나는 순수성과 독자성에 대한 열렬한 추구정신이 돋보이는 예술가다. 이 정신이야말로 어렸을 때 만난 세 사람의 스승(마이스키, 로스트로포비치, 시노폴리) 모두로부터 흡수한 기질이라고도 할 수 있다.


▎3. 뉴욕필을 오랫동안 이끌었던 레너드 번스타인은 교향악을 포함한 모든 형식의 음악 해석에 출중한 능력을 보여 장한나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긴 지휘자다. 4. 마에스트로 카라얀은 장한나가 가장 위대한 음악가로 여기는 베토벤의 교향곡 해석에도 탁월한 능력을 보인 지휘자로 평가된다.
그가 예술을 통해 추구하는 순수성이란 ‘시작도 음악, 끝도 음악인… 다른 동기가 일체 없는 단일한 열정’을 지칭한다. 순수함이 예술에 대한 태도를 가리킨다면 독자성은 예술을 포괄한 삶의 전반적인 자세와 관련이 있다. 그는 독자적 인간의 위대한 사례로 베토벤을 들었다.

“베토벤의 음악을 연주하면 겸허해질 수밖에 없어요. 베토벤은 듣지 못하면서 소리를 창조한 사람이니까요. 참으로 크나큰 패러독스입니다. 소리를 못 듣는 사람이 소리를 만들었다는 것은…. 그리고 얼마나 황홀한 소리를 만들었나요? 그래서 세상에 극복하지 못할 것은 없다는 것을 베토벤이 보여줬습니다.

음악의 힘이죠. 음악의 힘일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길을 끝까지 추구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힘이죠. 베토벤만이 그걸 할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좋은 선생이 그의 옆에 있었다 할지라도… 청력을 모두 상실했다는 것을 알았다면 다 포기하라고 했겠지요. 그러나 베토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독자적인 인간이었기 때문입니다.”

로스트로포비치, 마이스키, 시노폴리 3인의 스승은 어린 시절의 장한나를 독자적인 예술인으로 대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에게 진정한 스승이란 ‘홀로서기를 도와주는 사람’이다. 제자를 자유롭게 하고, 답을 말하기보다 질문을 던지며, 어떤 선택을 하라고 권유하기보다 그 선택의 의미를 묻는 사람이다. 로스트로비치와 마이스키, 그리고 또 한 명의 거장 파블로 카잘스의 음악적 특성과 성취의 비교를 부탁했지만, 그는 이 어리석은 질문에 대해 매우 곤혹스러워 했다.

해석은 달라도 최고의 명품 연주 남긴 대가들


▎2012년 가장 가까운 스승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와 공연 전 리허설을 하고 있는 장한나. 마이스키가 매년 성남아트센터 주최로 열리는 ‘장한나의 앱솔루트 클래식’ 연주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위해 내한했을 때다.
“저는 그 세분을 절대 비교하지 않죠. 사실 어느 경지에 도달한 예술인들을 비교한다는 것은 쉬운 일도, 적절한 일도 아닌 듯합니다. 다만 세 분의 음악을 관통하는 공통점은 모두 최고의 명품 연주를 들려줬거나 남겼다는 사실이겠죠. 카잘스와 로스트로포비치는 말할 것도 없고, 마이스키 선생님도 놀라운 개성으로 그 분만의 혼을 보여주는 명연을 보여줍니다.

눈을 감고 들어도 아, 이건 미샤 마이스키의 연주라는 것을 대부분의 애호가가 알 수 있죠. 그러니까 마이스키의 음악적 해석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연주 자체에 대해서만큼은 그 누구도 흠을 잡을 수 없습니다. 파블로 카잘스의 바흐 무반주 첼로 조곡을 클래식 애호가들이 참 좋아하는데, 카잘스는 이 곡을 거침 없이 흐르는 강과 같이 연주합니다.

폭포수같은 연주라고도 할 수 있죠. 바흐의 이 조곡은 카잘스가 발견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아무도 연주하지 않던, 단지 연습곡이라고 생각했던 그 악보를 수십 년간 혼자서 연습해서 보석과 같은 명곡으로 재탄생시켰어요. 다음 세대의 무수히 많은 첼리스트가 바흐 무반주곡을 연주하기 시작했지요.”

장한나는 바흐가 만들고 카잘스가 발굴한 이 6개의 무반주 조곡을 많이 연주했지만 아직 녹음하지 않았다. 그 이유를 물었다. “사실 바흐 조곡은 카잘스의 녹음이 하나의 고전으로 남아 있지요. 로스트로포비치 선생님을 비롯한 많은 대가가 이 곡을 녹음해 남겼지만 누구의 연주에 더 끌리는가는 제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의 연주를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참으로 녹음 작업은 신중에 신중을 기하게 됩니다.

제가 녹음한 것은 죽은 다음에도 대대로 남아 있게 되니까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책임감이 느껴져요. 연주자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개성도 바뀌고, 같은 곡의 해석도 바뀝니다. 그래도 연주 자체는 살아 있어야 하고, 명연이어야 합니다. 시간이 지나더라도 바흐의 무반주 조곡을 녹음할 날이 오겠지요. 그 시기를 보고 있습니다. 명반이 될 수 있겠다는 확신이 서면, 욕심이 많은 제가 녹음을 망설이진 않을 거예요.”


▎8월 17일에서 31일 사이 열리는 2013 ‘장한나와 앱솔루트 클래식’ 연주회를 위한 리허설. 오디션을 통해 선발된 오케스트라와 지휘를 맡은 장한나는 슈만·말러·드보르작의 교향곡을 3일에 걸쳐 연주한다.
첼로의 한계 극복하고 교향악으로 비상

장한나는 2007년 제1회 성남 국제청소년 관현악 축제 마지막 날 한국·중국·독일의 연합 오케스트라를 이끌며 지휘자로 데뷔했다. 그가 지휘봉을 쥐었다는 소식이 전 세계 음악계에 화제가 됐다. 부모님을 제외하곤 주변사람 모두 깜짝 놀랐다는 것이 장한나의 기억이다. 그가 갑자기 지휘를 하겠다고 결심한 배경과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대학에 들어갈 때 아버지께서 제게 강조한 말이 있어요. 성인이 되면 제가 받은 것을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할 줄 아는 것은 음악밖에 없는데, 제가 안타깝게 생각했던 것은 주변 친구들 중 클래식을 듣는 아이가 한 명도 없었다는 점이었습니다. 들어보지도 않고 지루하고 따분한 옛날 음악이라고 단정하는 겁니다. 사실 따분한 건 이 시대의 반복되는 일상입니다. 그 일상 속에서 30분에서 길게는 한 시간 안에 이렇게 큰 감동을 주는 예술은 없다는 확신이 제게는 있습니다.

사람들은 여행을 멋진 경험으로 생각하지만, 솔직히 멀리 여행을 가도 우리 자신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여기나 저기나 똑같아요. 여기서 행복하지 않으면 거기서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몸을 움직이지 않고 영혼의 휴가를 다녀올 수 있는 곳이 바로 클래식 음악의 세계입니다. 자, 그렇다면 그 음악을 어떻게 대중에게 돌려줄 것인가. 저는 그런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늘 동경했던 세계가 교향악이었는데, 그 음악을 대중에게 돌려주고 싶다는 욕구를 강하게 느꼈습니다.”

연주자에서 지휘자로 변모한 사례는 무수히 많다. 가장 최근에는 세계적 바이올리니스트 막심 벤게로프가 활을 놓고 지휘봉을 들었다. 2010년의 일이다. 전성기를 누리던 36세 바이올리니스트가 갑자기 진로를 바꾼 이유는 부상 때문이다. 3~4년 간 목디스크와 척추 부상 등에 시달리다 왼손 마비 증세까지 보였다. 음악 열정이 들끓었던 그의 대안은 지휘봉이었다.

벤게로프처럼 부상의 비운을 지휘로 승화한 거장으로는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있다. 원래 피아니스트의 길을 가고 있던 카라얀은 건초염에 발목이 잡혔다. 손의 힘줄을 싸고 있는 막에 염증이 생기는 이 병은 피아니스트에게 치명적이다. 카라얀은 웅장하고 드넓은 오케스트라 선율을 지휘하며 좌절한 피아니스트의 한을 풀었다.

부상과는 상관없이 음악세계를 확장하고 싶은 도전정신과 교향악에 대한 애정 때문에 지휘봉을 선택하기도 한다. 정명훈 서울시립교향악단 예술감독은 교향악의 매력 때문에 지휘의 길에 들어선 케이스다. 그는 1974년 차이콥스키 국제콩쿠르에서 피아노 부문 은메달을 수상했을 정도로 전도유망한 피아니스트였다. 하지만 ‘가장 훌륭한 음악이 교향악’이라고 생각했고 줄리아드 음대에 진학해 지휘 공부를 시작했다.

1976년 뉴욕 청소년 교향악단 지휘자로 데뷔한 정 감독은 “피아노와 바이올린에서도 아름다운 소리가 나오지만 오케스트라는 완벽한 음악 표현이 가능하다”며 “베토벤과 브람스, 말러, 브루크너 등 위대한 작곡가들도 그렇게 생각했고 교향곡에 전력투구했다”는 견해를 피력한 적이 있다.

하지만 지휘자의 길은 쉽지 않다. 악기는 연습한 만큼 실력이 늘지만 지휘자는 오케스트라 앞에 서기 전까지 연습이 어떤 효력을 발휘할지 아무도 모른다. 또 연주자일 때는 청중의 마음을 움직이면 되지만 지휘자는 오케스트라 단원과 청중을 동시에 설득시켜야 한다. 장한나가 이런 난관을 무릅쓰고 지휘를 결심하게 된 또 하나의 배경은 첼로라는 악기가 갖고 있는 근원적 한계 때문이었다.

“첼로라는 4줄의 현악기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초 거장 파블로 카잘스의 출현 이후입니다. 카잘스가 활동하면서 첼로는 비로소 비루투오소(대가)의 악기가 되었던 겁니다. 첼로는 피아노나 바이올린 같은 독주 악기에 비해 곡의 수도 매우 적습니다. 베토벤과 브람스는 오케스트라와 첼로를 위한 협주곡을 쓰지 않았고, 모차르트는 아예 첼로를 위한 곡을 따로 작곡하지 않았습니다.

바로크 시대 비발디 정도가 예외였지만 하이든 같은 경우도 단 두 개만의 첼로협주곡을 남겼을 뿐입니다. 그중 하나는 하이든의 것인지도 불투명합니다. 그래서 항상 연주할 수 있는 곡이 적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항상 같은 곡만 연주하고 있는 거예요. 현미경으로 쌀 한 톨을 유심히 살피는 정신으로 첼로를 들여다보다가 어떻게 하면 음악을 더 깊이 있게 공부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하던 끝에, ‘당연히 교향곡이지!’ 하며 무릎을 치게 되었습니다.”

지휘자가 되기로 결심한 후 그가 첫 번째로 했던 액션은 지휘를 가르쳐줄 선생님을 찾는 일이었다. 줄리아드 음악원 지휘과의 제임스 디프리스트 선생을 떠올리고 그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과거에 같이 연주한 적도 많았고, 무엇보다 그가 뉴욕에 거주한다는 것이 좋았다. 2001년 하버드대 철학과에 진학했을 때와 같이 주변사람들은 놀라움을 표시했다.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인 사람들은 부모님들뿐이었다.

“과거 오케스트라와 협연할 때의 모든 지휘자가 제 스승이 되어줄 것이 분명했습니다. 당대 최고의 지휘자들과 협연하면서 리허설은 어떻게 진행하며, 오케스트라 음색은 어떻게 조율하고 가르치는지, 곡 해석은 어떻게 하는지를 아주 가까이서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특정한 지휘자로부터 영향받은 것을 분리해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지휘자 선생님들이 만들어낸 음악이 제 안에 혼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지휘자의 길은 험난합니다. 굉장한 공부가 필요합니다. 현악기는 잘 알지만 생소했던 관악기와 타악기를 그 유래부터 다시 공부해야 했으니까요. 지휘자 유진 오르먼디가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함께 이른바 ‘오르먼디 사운드’를 만들어낸 것처럼, 장한나 고유의 사운드를 만들어내는 것이 저의 음악적 과제라 할 수 있습니다.”

노력으로 다듬어진 천재 베토벤을 향한 헌사


▎장한나는 인터뷰를 통해 “노력으로 다듬어진 천재 베토벤을 가슴속 가장 위대한 스승으로 삼고 싶다”고 말했다.
그가 스승으로 생각하는 지휘자의 계보가 있다. 그 출발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를 풍미했던 토스카니니와 푸르트뱅글러다. 그리고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과 레너드 번스타인. 그는 간혹 카라얀과 번스타인을 무시하는 음악인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인다.

“카라얀의 베토벤 교향곡 해석을 보세요. 정말 최고라고요!” 카라얀과 번스타인은 ‘20세기의 정석’이므로 절대 무시해선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리고 강렬한 개성의 스토코프스키, 카를로스 클라이버, 그의 부친 에릭 클라이버를 꼽는다.

현존하는 지휘자 중에는 아바도, 무티, 시노폴리, 사이먼 래틀을 최고로 치지만 그중 아바도의 해석을 굉장히 좋아하는 편이다. 이들의 연주와 곡 해석이야말로 시간이 지나도 녹슬지 않고, 점점 더 좋아지는 음악이라는 것이다.

그는 9월 초 카타르 필하모닉의 음악감독 취임이 예정돼 있다. 음악 감독은 1년에 약 100일 가량을 현지에 머물면서 초청할 모든 연주자를 결정하고 프로그램을 확정하는 책임과 권한이 있다. 물론 지휘봉도 잡아야 한다. 카타르 필하모닉은 국왕이 큰 관심을 갖는 악단이며 카타르 문화의 상징으로 육성되고 있는 ‘국책 오케스트라’라고 할 수 있다.

장한나는 작년 약 2주 동안이 악단을 객원지휘 한 적이 있는데, 그때 만났던 단원들이 투표를 통해 그를 새 음악감독으로 선임했다. 장한나는 노르웨이 트론헤임 오케스트라 수석 객원 지휘자로도 임명되었고, 다음 시즌에는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Dresden Staatskapelle)와 쾰른 서독일 방송교향악단(WDR Sinfonieorchester)을 지휘할 예정이다. 나폴리 산카를로 극장 오케스트라 지휘도 예정돼 있다.

그가 국내 무대에서 가장 큰 에너지를 쏟아붓는 공연은 성남아트센터와 매년 기획하는 연주 프로젝트 ‘장한나의 앱솔루트 클래식’이다. 올해 다섯 번째를 맞은 이 공연 기획은 8월 17일에서 31일 사이 성남아트센터 콘서트홀과 오페라하우스에서 열린다. 그는 모두 세 번 지휘봉을 잡는데 17일에는 슈만 교향곡 4번을, 24일에는 말러 교향곡 1번을, 31일에는 드보르자크의 교향곡 9번 ‘신세계로부터’를 들려준다.

장한나의 음악적 키워드는 이를테면 혁명, 도전, 창조와 같은 것들이다. 그 음악정신의 정수는 대부분 베토벤으로부터 온 것이다. 늘 베토벤의 교향악을 음악적 이상으로 꿈꿨고, 이론적으로도 베토벤의 교향악 창조 과정을 깊이 있게 탐구했다. 그가 지휘 인생의 커리어를 2007년 베토벤 교향곡 전곡 지휘로 시작한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니다.

“베토벤은 클래식 음악의 역사를 바꾼 사람입니다. 작곡할 때마다 새로운 형식을 추구했고, 그가 추구한 새로운 형식은 새로운 내용을 담았습니다. 끝없는 시도, 끝없는 변화를 추구했고, 수많은 수정을 통해 자신의 작품에서 불필요한 음을 완전히 제거했습니다. 브람스가 1번 교향곡을 쓰는 데 18년이 걸린 이유도 베토벤의 위대한 교향곡을 의식했기 때문입니다. 노력으로서 다듬어진 천재 베토벤을 항상 가슴 속 가장 위대한 스승으로 삼고, 그가 추구한 창조와 도전의 음악을 실천하고 싶습니다.”

201309호 (2013.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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