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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인터뷰 - “ 4대강사업은 MB정권의 이중플레이 산물” 

최병윤 전 한반도대운하연구회 정책단장 

윤석진 월간중앙 선임기자
4대강사업은 대표적인 MB표 국책사업이다. 이를 둘러싸고 각종 의혹이 불거지면서 뜨거운 논란과 공방전이 이어진다. 전·현 정권의 자존심을 건 전면전 양상을 띤다. 대운하와 4대강사업 사이에 어떤 연결고리가 있는 걸까? 한때 이명박 전 대통령이 추진했던 대운하 사업의 싱크탱크 역할을 했던 ‘한반도대운하연구회’의 최병윤 전 정책단장이 MB정부 초기, 대운하 산업이 4대강사업으로 전환되던 시점에 청와대와 국토해양부 내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소상히 털어놓았다.



마침내 범정부 차원의 4대강사업 의혹조사 기구가 조만간 등장할 전망이다. “4대강 조사평가위원회를 최대한 신속히 구성하겠다”는 정홍원 국무총리의 발언이 8월 13일 나왔다. 이날 정부세종청사에서 화상회의로 진행된 국무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다. 정 총리는 이와 함께 “4대강사업에 대한 국민 의혹이 해소될 수 있는 객관적이고 공정한 조사가 진행되도록 해 달라”는 주문도 했다.

4대강사업은 잘 알려진 대로 이명박 전 대통령이 재임 시절 벌인 대표적 국책사업이다. 당시 MB정부가 발표한 직접 투입예산만 해도 22조2000억원에 달하는 천문학적 액수다. 하지만 4대강사업은 이 전 대통령이 퇴임한 지 6개월이 채 안돼 거의 동네북 신세로 전락했다. 1월 17일에 감사원에서 나온 ‘4대강사업은 총체적 부실’이라는 내용의 감사 결과가 발단이 됐다. 그 후 국민적 의혹이 광범위하게 제기되고 있다.

날이 갈수록 4대강사업의 비리 의혹 등 새로운 사실이 폭로되면서 이를 둘러싼 논란과 공방도 올여름 폭염만큼이나 뜨겁다. 지금으로선 정부조사 결과를 지켜보는 수밖에 없지만 터져나오는 의혹 중 무엇이 진실인지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모양새다. 4대강사업을 두고 ‘위장된 대운하 사업’이라는 핵심 의혹도 그중 한 가지다. 한반도대운하 사업과 4대강사업은 정말 닮았을까, 아니면 전혀 다른가? 또 대운하 사업이 4대강사업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MB정권 심층부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대운하사업과 4대강사업 무엇이 같고, 다른가?

<월간중앙>은 이 궁금증을 풀기 위해 ‘한반도대운하연구회’의 최병윤 전 정책단장을 만났다. 한반도대운하연구회는 MB의 대운하 사업을 구상하고 주도했던 기구다. MB가 서울시장을 물러난 지 석 달 만인 2006년 9월 대통령 출마 목적으로 설립했다. 운하에 관심 있는(환경·생태·수자원·교통·도시·문화·물류 등) 각계각층 전문가 200여 명이 만든 연구 목적의 임의단체였다.

MB의 서울시장 재임 시절, 청계천복원추진본부장을 맡았던 장석효 전 서울시 부시장(현 한국도로공사 사장)이 한반도대운하연구회의 회장이었다. 최 전 단장은 한반도대운하연구회 때부터 MB의 대운하 포기 때까지 줄곧 추진 전략수립과 대국민 홍보를 도맡았던 민간 출신 핵심인사였다.

한반도대운하연구회는 MB가 한나라당 대선후보, 당선인, 대통령으로 계속 신분이 바뀌는 동안 ‘한반도운하 특위’, ‘한반도대운하자문단’, 대통령직인수위 ‘한반도대운하TF’ 등으로 명칭은 변했지만 역할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장 전 회장은 특위 시절에는 박승환 전 의원과 공동위원장을, 자문단에서는 단장을, TF에서는 팀장을 맡았다.

장 전 회장과 최 전 단장은 대운하 사업에 관한 한 일종의 ‘확신범’이었다. 그러나 장 전 회장은 <월간중앙>의 인터뷰 요청에 “지금은 때가 아니다”며 한사코 거절했다. 최 전 단장이 대운하 사업과 4대강사업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나서게 된 배경이다.

최근 “4대강사업은 위장된 대운하 사업이었다”는 문제 제기가 있었습니다. 진실 여부는 따져봐야겠지만 국민들은 대체로 이에 공감하는 분위기입니다. 애초 한반도대운하 사업에 깊숙이 관여했던 전 정책단장으로서 이에 동의하십니까?

“우리가 추진했던 한반도대운하 사업에 대한 인식 부족에서 나오는 얘기로 보입니다. 당시 한반도대운하연구회에서 준비했던 대운하 구상을 국민을 상대로 설명할 기회가 전혀 없었어요. 2007년도에 현 박근혜 대통령이 이명박 전 대통령과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쟁을 벌일 때 대운하 사업에 대해 좀 부정적이어서 우리에게 함구령이 내려질 정도였습니다. 그러니까 당시 대운하 구상의 정확한 내용을 국민이 잘 모를 수밖에 없었죠. 현 정부의 주요 인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최 전 단장은 “그래선지 대운하·4대강사업을 둘러싼 공방이 전·현 정부가 대결하는 식의 정치적으로 흐르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며 “내용을 잘 모르는 현 정부 주요 인사들의 대운하·4대강 관련 발언이 더 신중했으면 한다”는 말로 우려를 표명했다.

당시 대운하 구상의 큰 그림은 어떤 내용이었습니까?

“그 이전의 국토 개발계획은 도로·철도를 주축으로 이뤄졌습니다. 그래서 종합적이고 효율적인 국토개발에 부족한 면이 있었죠. 여기에 큰 틀에서 물길을 추가해 내륙 도시들의 균형개발을 촉진하는 등 국토를 새로 개조해보자는 취지였습니다.

대운하 사업에서 홍수와 가뭄을 예방하는 치수(治水), 발전시설 및 물의 정화 등에 이용하는 이수(利水) 차원에서 접근해 수자원(수량·수질) 관리의 효율화를 꾀하려 했죠. 그리고 정부 부처, 관련 공기업, 지자체 등으로 3원화, 4원화돼 있는 물관리의 일원화, 하천관리 효율화 개념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21세기 새로운 성장동력으로써 물 관련 산업을 선도하자는 뜻도 있었죠. 물관리뿐 아니라 식수·공업용수·오폐수 산업 등 시장개척 여지가 무궁무진합니다. 2007년 처음 대운하를 계획할 때 ‘글로벌 워터 인텔리전스(GWI)’에서 조사한 바로는 전 세계의 물 관련 사업 시장규모가 약 407조원으로 파악됐습니다. 2032년에는 2000조원 이상의 시장이 형성된다는 전망도 있었죠.”

최 전 단장은 또 “물길도 철도·도로처럼 인프라로 보면 인식이 달라진다”면서 “만일 대운하 사업이 당초 구상대로 추진됐다면 도시 기능의 구조개편, 삶의 질 제고, 새 산업의 입지조건 등 박근혜 대통령이 말하는 창조경제의 기본 인프라도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인프라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영향을 미친다”면서 1970년 7월의 경부고속도로 개통을 예로 들었다. 고속도로가 뚫리면서 “물류의 개념도 생겨났고, 우리 경제의 압축성장도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 대운하 구상에서 물류·운송 등이 상대적으로 크게 부각되지 않았습니까?

“물길도 인프라라는 개념을 국민들에게 설명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물류나 운송은 사실 일부분이었습니다. 다만 당시 이명박 후보가 그 분야에 관심을 갖다 보니 국토의 구조개편 같은 중요한 대운하 개념이 묻히고 말았죠. 지금 생각하면 물류·운송분야를 침소봉대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MB 대운하 의지 인수위 시절 ‘흔들’

이 전 대통령이 대운하 구상을 처음 발표한 것은 훨씬 이전이죠?

“1994년 국회의원 시절이었습니다. 당시 대운하 구상의 핵심은 한강과 낙동강을 연결하는 것이었어요. 한강과 낙동강을 터널로 연결해 낙동강의 부족한 수자원을 확보하고, 오염된 낙동강 물을 깨끗하게 정화하자는 취지였죠. 그런데 김영삼 전 대통령 시절 IMF 외환위기 등이 터지면서 더 이상 추진을 못하고 구상에 그치고 말았죠. 지금도 낙동강의 경우 강물의 오염이 심하고, 물도 부족한 형편입니다. 당초 대운하 사업 구상대로 한강과 낙동강을 연결하지 못한 게 저로서는 아쉽습니다.”

이 전 대통령의 대운하 사업에 대한 관심은 언제까지 계속됩니까?

“대통령 예비후보나 후보 때는 굉장히 관심이 많았죠. 2007년 대선(12월 19일)이 끝난 이틀 뒤인 21일 오전 11시 장석효 대표와 제가 당시 당선인 신분의 이 전 대통령에게 대운하 사업에 관해 보고했습니다. 안국포럼 사무실에서였어요. ‘대운하는 하실 거죠?’라고 물었더니 ‘하겠다’ 그러시더군요. 당시 경부운하의 조령 물길을 잇는 방법을 두고 지상(스카이라인)으로 할 것인지, 터널로 할 것인지 논란이 됐던 부분입니다.

당시 지상으로 건설하면 환경파괴, 생태계의 혼란이 더 심하다는 지적이 많았거든요. 그 자리에서 장석효 대표가 ‘그럼 (조령)터널로 해야 한다’고 말씀드렸고, ‘어 그래’라면서 긍정적 답변을 주셨어요. 그렇게 사실상 확정이 됐다고 당시는 생각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당시 대운하 사업에 관한 언론보도 추이와 토론회, 공청회의 방식과 일정 등 주요한 보고도 드렸습니다.”

그때까지는 이 전 대통령이 대운하 사업에 대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는 뜻입니까?

“앞서 말한 안국포럼 사무실에서 보고하던 자리에 몇몇 배석자가 있었습니다. 당선인 비서실장이던 주호영 의원, 나중에 대통령 비서실장에 임명된 임태희 의원, 당시 MB 캠프에서 공약과 정책을 담당했던 한나라당의 ‘일류국가비전위원회’의 제 1공약위원회 위원장이었던 강만수 전 기획재정부 장관 등으로 기억합니다. 그분들도 같이 들었던 얘기입니다.”

이 전 대통령이 대운하에 대한 생각이 어떻게 변했는지도 무척 궁금합니다.

“크게 당선인 신분의 인수위 시절, 2008년 2월 25일 취임 후 3~4월, 5월 이후 세 시기로 나눠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당선된 후 인수위 시절까지는 좀 주춤하는 분위기였어요. 전체적으로 꼭 해야 하나 그런 분위기가 느껴졌습니다. 대운하 회의론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대운하 추진 여론조사 결과‘해야 한다’는 응답이 55~57%정도였는데 좀 약하다고 생각했겠죠. 환경운동연합 등 재야단체에서 문제 제기를 하고 반대운동 또한 날로 강해지던 때였습니다.”

최 전 단장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주무 부처인 국토해양부에서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당선 전까지는 대운하 사업에 대해 반대 입장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이었는데 반대의 명분도 정치적이었을 것으로 판단합니다. 그런 국토부가 이 전 대통령의 당선 후 대운하 사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자 인수위 시절에는 찬성 쪽으로 돌아섰습니다.”

2008년 3~4월에 이 전 대통령의 대운하에 대한 입장과 생각에 어떤 구체적인 변화가 있었다는 겁니까?

“무엇보다 류우익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의 생각부터 변화가 있었어요. 이 전 대통령의 취임 후 류 실장이 또 다른 전문가 그룹을 만들어서 대운하 사업을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4월 중순에서 월말쯤 한강-낙동강 연결 터널은 포기해야 하는 거 아니냐, 4대강을 정비하는 방향으로 가야 하는 거 아니냐고 논의하는 분위기가 감지되더군요.

우리는 당연히 한반도대운하연구회에서 준비한 대로 해나가야 한다는 입장이었죠. 한강과 낙동강을 연결하는 것이 핵심이었기 때문에 이를 중심으로 한반도대운하연구회에서는 이미 준비를 거의 완벽하게 끝내놓은 상태였습니다.”

류우익 비서실장 중심으로 꾸려진 별도의 전문가 그룹이 있었다고 했는데, 그 안에 한반도대운하연구회 멤버는 없었습니까?

“없었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전문가들이었죠. 당시 한반도대운하연구회는 장석효 한반도대운하 TF팀장까지도 청와대에 들어가 있지 못했습니다. 청와대 내에서는 류우익 비서실장을 중심으로 전문가 그룹이 꾸려졌는데, 국토해양부 공무원들도 부문별로 일부 참여한 것으로 압니다. ”

류우익 초대 비서실장이 4대강사업 전환 주도

당시 이 전 대통령 뜻도 류우익 비서실장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씀이시죠?

“이 전 대통령은 취임 전부터 대운하 추진에 굉장한 부담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대운하를 추진할 의지가 계속 있었다면 주무 부처인 국토부장관 인사에도 나타나야 하는데 그때 정종환 장관이 가시지 않았습니까? 아니면 류우익 비서실장을 대운하 사업 전면에 내세울 수 있었는데 그러지도 않았고요. 당시 류우익 비서실장은 대운하 사업에 반대 의사가 강했던 이상득 전 의원과 가깝다는 소문이 났었지요.”

장석효 당시 한반도대운하 TF팀장은 2011년 6월 한국도로공사 사장으로 임명될 때까지 MB정권에서 3년 반 동안 어떤 공직도 맡지 못했다.

2008년 4·9총선 직후에 청와대 내에 추진기획단을 만들기로 결정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때까지 이 전 대통령의 대운하 사업 의지는 분명했던 것 아닌가요?

“정확히 이틀 후인 4월 11일 오후 2시 반부터 5시 반까지 3시간에 걸쳐서 류우익 대통령비서실장과 곽승준 청와대 국정기획수석, 한반도대운하연구회 장석효 대표가 만나 대운하 추진을 어떻게 할 것인지 결론을 내립니다. 청와대 내에 두기로 한 추진기획단이 그것이죠.

23명 정도의 인원으로 관련 업무를 전담하는 기구를 만들고, 국토해양부에서는 7명 정도로 대운하지원팀을 만들어 법령 제정, 행정지원 문제 등을 검토하기로 했어요. 그리고 추후에 대통령 직속으로 국무총리급을 위원장으로 하는 의사결정기구인 대운하추진위원회를 만들기로 했었습니다. 그런데 추진기획단부터 설치를 해야 하는데 그게 계속 미뤄지더군요.”

최 전 단장을 비롯한 대운하추진팀으로서는 4·9총선이 또 하나의 악재로 작용한다. 당시 한나라당 국회의원 중 대운하 사업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이재오 의원이 총선에서 문국현 당시 창조한국당 대표에 밀려 낙선한 것이다. 당시는 MB정권 실세로 알려진 이재오 의원과 장석효 대표는 대운하 사업을 두고 자주 상의했던 시기였다. 그 바람에 한나라당내에서도 대운하 추진동력이 떨어진다.

“한나라당이 과반수 의석은 넘겼지만 이른바 친박근혜 계보 의원이 30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어요. 그들이 반대하면 추진하는 데 어려움이 있어 대운하특별법 제정은 포기하기로 합니다. 대신 민간투자법과 내륙주운법을 개정해 이걸로 대운하를 추진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아가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추진기획단은 왜 안 만들어졌을까요?

“그해 4월 중순 쯤에 한강과 낙동강을 잇는 조령터널 공사를 8개 구간으로 나눠 동시에 시작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이 전 대통령에게 장석효 TF팀장이 이를 보고합니다. 그런데도 추진기획단은 안 꾸려지더군요. 그 뒤 5월부터 대운하 포기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이 전 대통령이 대운하추진기획단 구성을 미루는 이유를 밝힌 적이 있나요?

“그땐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다 류우익 비서실장 중심으로 한 전문가 그룹이 새로 입안한 것이 4대강사업입니다. 대운하 계획에서 가장 핵심으로 생각했던 한강과 낙동강을 연결하는 터널을 제외했죠. 결과적으로 MB정권이 이중플레이를 한 셈이고, 반대 여론에 밀려 대국민 설득을 포기한 것은 비겁한 태도였다고 생각합니다.”

한반도대운하 구상과 함께 4대강사업을 검토했다는 말인가요?

“저는 그렇게 판단합니다.”

대운하 포기설이 구체화된 게 언제입니까?

“당시 한반도대운하를 지지하는 시민단체가 전국적으로 50개 정도 있었어요. 2008년 5월 16일 서울에서 해당 시민단체운영진과 한반도대운하연구회 사이에 간담회가 열렸어요. 장석효 대표가 그 자리에 모인 70여 명 앞에서 ‘대운하를 하지않고, 4대강 정비사업을 하게 될 것’이라는 말을 합니다.”

이 전 대통령의 대운하 포기 발언은 공식적으로 언제 나왔습니까?

“5월 21일 이 전 대통령이 대구시청을 방문한 자리에서 ‘(한강과 낙동강을)… 잇고 하는 것은 국민이 불안해 하니까 뒤로 미루고…’라고 말한 게 처음입니다.”

이어 6월 10일에는 이 전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정치 원로들과 만남을 갖고 “국민이 싫어할 경우 대운하에 대한 결단을 내리겠다”는 요지의 포기 의사를 시사한다. 그리고 6월 19일 이 전 대통령은 특별기자회견을 통해 “대운하는 국민이 반대하면 추진하지 않겠다”고 공표했다.

당시 이 전 대통령이 대운하 사업을 4대강사업으로 전환한 결정적 이유는 뭐라고 보십니까?

“이 전대통령이 당시 대운하 사업을 포기한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확고한 신념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 밖에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죠. 취임하자마자 일어난 촛불시위와 같은 정치적 요인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봅니다. 부자 몸조심한다는 말처럼 당선 뒤 여론 추이를 살피다 생각이 달라진 것으로 우리는 해석했습니다.

임태희 대통령 비서실장 체제가 들어선 뒤 이전 한반도대운하팀은 청와대와 철저히 차단됩니다. 심지어 이 전 대통령이 ‘수고했다’며 대운하팀과 밥 한번 먹자고 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끝내 부르지를 않았어요. 류우익 비서실장 때는 그런대로 청와대와 소통할 기회가 있었는데요.”

그러면 4대강사업으로 바뀐 뒤 최 전 단장도 장석효 대표와 함께 완전히 손을 뗐나요?

“한반도대운하연구회 200여 명의 회원 중 4대강사업에 참여한 사람이 단 한 명 없었습니다. 자문교수조차도요.”

준비했던 대운하 계획과 4대강사업 결과에 무슨 차이가 있다고 보십니까? 결국 유사한 사업이 아닌가요?

“기본적으로 종합적 물관리 개념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가장 큽니다. 대운하 구상은 앞에서 치수와 함께 이수를 언급했는데 물관리를 종합적으로 하기 위한 치밀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4대강사업을 지켜보면서 이 정도로는 종합적 물관리는 불충분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한강의 풍부한 수자원을 낙동강지역으로 보내서 대구·구미·울산·부산 지역 식수부터 공업용수까지 활용하는 구상이었는데 이걸 전혀 못한 것 아닙니까? 그리고 운하도시를 만들 수 없게 됐고, 4대강사업에서는 이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는 점이 또 다른 차이죠.”




“4대강사업에 대운하 일부 자료 활용은 사실”

그런데도 4대강사업이 위장된 대운하 사업이란 말이 나오는 이유가 뭐라 생각합니까?

“국토부에서는 앞서 말한 대로 2007년까지 대운하 사업을 반대했다고 했잖아요. 그 뒤 2008 4~5월쯤 청와대에서 4대강사업 얘기가 나오자 부처 내에서 따로 준비했던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국토부가 준비했던 계획은 1966년부터 추진된 ‘4대강유역종합개발계획’이 조금 진화(업그레이드)된 것으로 당시 전문가들이 평가했어요.

단순한 ‘강 정비’ 사업으로 그 계획의 맹점은 홍수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어요. 더구나 국토부 자료는 결국 4대강사업에 쓰이지 않았던 것으로 압니다. 심명필 인하대(토목학) 교수가 4대강사업 본부장을 맡았는데 치수·이수를 포함한 수자원 관리에 유리한 자료였던 우리(한반도대운하연구회)와 류우익 청와대 비서실장이 중심이었던 전문가 그룹이 준비한 것을 활용한 것입니다.”

말씀대로라면 대운하 계획 중 상당한 자료를 4대강사업 과정에서 활용했다는 뜻 아닙니까?

“올여름 장마처럼 한꺼번에 비가 내릴 때 홍수 조절효과를 보려면 5~6m를 준설해야 합니다. 이 정도를 준설하지 않으면 홍수관리가 안 된다는 게 당시 대운하팀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4대강사업 구간 중 대운하팀에서 계획했던 수심 6m가 넘는 곳은 26%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것도 낙동강에 68%, 한강이 8% 비중이고 나머지는 영산강, 금강에 있습니다. 낙동강은 홍수 피해가 극심한 지역입니다. 대구에서 부산까지 표고차가 12m밖에 되지 않아요. 그런데도 대운하를 염두에 두고 마치 전 구간을 이 정도 깊이로 준설한 것처럼 얘기하는 것은 말 그대로 침소봉대죠. ”

4대강사업에 대운하 계획을 얼마나 활용했다고 생각합니까?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4대강사업으로 방향을 바꾼 뒤에는 한반도대운하연구회 팀은 한 명도 관여를 안 했으니까요.”

대운하 설계도도 일부 제공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대운하 사업은 가설계(기본설계)는 있었지만 실시 설계는 하지 못한 채로 끝났습니다.”

대운하 계획 단계에서 민자사업 컨소시엄에 참여했던 건설사들이 대거 4대강사업에 뛰어든 점도 의심을 받는 또 하나의 요인으로 생각됩니다.

“대운하 컨소시엄이 해체되지 않고 4대강사업에 참여했던 것은 맞습니다. 이 컨소시엄은 2008년 1월초 출범했는데 대운하 용역안을 논의하는 단계에서였어요. 왜냐하면 경부운하사업은 처음에 민자유치 사업으로 검토를 했었으니까요. 이 컨소시엄에 참여했던 건설사들은 적지 않은 돈을 들여 경부 운하 사업을 사전 준비했죠. 4대강사업으로 바뀌었다고 민간기업 입장에서 이 컨소시엄을 왜 자진해 해체를 하겠습니까?”

4대강사업은 위장된 대운하 사업이 아니라는 주장인 거죠?

“일고의 가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현 정부는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 사항인 복지정책 재원 마련에 고심 중이라는 보도도 최근에 나오더군요. 4대강을 대운하로 바꾸려면 노후 교량을 교체하고 교각과 교각 사이를 더 넓히는 등 재설계와 새롭게 시공을 해야 하는 곳이 적지 않습니다. 또 갑문도 새로운 보의 수만큼 만들어야 합니다. 여기에 엄청난 비용이 들어가는데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위장된 대운하 사업이라는 주장은 말이 안 됩니다. 너무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4대강사업 안 한 것보다는 잘했다” 소신

한반도대운하 정책단장은 어떻게 맡게 되었습니까?

“제가 여행을 해본 나라가 160개 국쯤 됩니다. 많은 선진국에는 운하가 다 있더군요. 운하 하면 중국이나 유럽 국가를 떠올리기 십상인데 제일 많은 나라가 미국입니다. 뉴욕 허드슨강과 오대호 중 한 곳인 이리호를 연결하는 이리운하가 대표적입니다. 독일에는 라인강과 엘베강을 연결한 미텔란트 운하가 있는데 동·서독 통일에 크게 이바지했죠.

중국의 징항(京杭)대운하를 비롯해 이탈리아 베니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 등의 운하도시를 현장에 가서 답사하고, 운하를 통해 나라와 도시의 운명이 어떻게 변했나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그런 걸 보고 국가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계기로 삼을 수 있겠다 싶었고, 장석효 대표의 요청도 있어 2007년에 합류했습니다.”

3면이 바다인 이 작은 나라에서 운하의 효용성에 대해 그때도 문제 제기가 많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저는 대운하 사업이 단순히 4대강을 연결하는 게 아니라고 봤습니다. 우리가 상상하기에 따라 우리 국토가 새롭게 변할 수 있는데 대운하 사업이 좋은 계기가 될 것으로 생각했죠. 금강 하구지역의 새만금 같은 경우 다 막아 놓지 않았습니까? 새만금은 앞으로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 베니스나 암스테르담 같은 좋은 인프라를 갖춘 운하도시를 만들 수 있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국토 균형발전 측면에서 낙동강이나 영산강 하구에는 그런 꿈의 도시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통일 후 황폐해졌다는 북한의 강까지도 염두에 두고 종합 수자원 관리 차원에서 한반도대운하라고 명칭을 붙인 겁니다.”

최 전 단장은 “대운하 사업의 핵심 관계자로서 4대강사업 결과를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물음에 “안 한 것보다는 잘했다고 생각한다”는 소신을 내보였다. 장마철이면 ‘상습 침수지역’이 있었던 고향인 경기도 여주·이천에서 “4대강사업 후 한번도 홍수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을 단적인 예로 들었다. 그러면서도 최 전 단장은 MB정권에서 대운하 사업을 포기하고 4대강사업으로 바꾼 것에 대해서는 “굉장히 아쉽다”며 여운을 남겼다.

201309호 (2013.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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