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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분석 - 100년 전 DNA의 부활? 46·47·48 숫자의 비밀 

일본인들의 ‘집단주의’ 원형질 연구 

유민호 월간중앙 객원기자, ‘퍼시픽21’ 디렉터
소녀 아이돌 그룹 AKB48 멤버 48인, 후쿠시마 원전 결사대 46인에 비친 막부시대 주군을 위해 할복한 추신쿠라 사무라이 47인, 백호대 49인의 섬뜩한 초상

▎지난 7월 서울에서 열린 2013 동아시안컵 축구대회 한국-일본전에서 응원전을 펼치는 일본 응원단. 일본의 집단주의는 열정적인 응원에서도 감지된다.



최근 일본의 학교에 나타난 흥미로운 변화에 대해 알아보자. 첫째 고등학교 야구팀이다. 빡빡 미는 머리모양을 한 고등학교가 79%에 달한다고 한다. <아사히(朝日) 신문>이 일본 내 4032개 고등학교 야구팀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다. 2003년의 46%, 2008년 69%로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다. 보우즈(坊主)로 표현되는 빡빡이 스타일은 어느 정도 머리카락이 자란 스포츠형이 아니다. 아예 대머리처럼 완전히 밀어버리는 식이다.

자동 컷트기를 이용해 모두가 주기적으로 함께 깎는다. 머리 손질하는 시간을 줄이고, 운동하기에도 편하며, 위생적으로도 청결하다는 것이 장점으로 손꼽힌다. 물론 이길 수 있고, 이겨야만 한다는 정신력을 상징한다는 점이 머리를 미는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태평양전쟁 기간 중 빡빡머리는 초중고 학생과 군인들에게 강제 시행된 규정이다. 일본의 승리를 확신한다는 의미로, 사회인들도 빡빡머리로 무장했다.

빡빡머리는 1960년대부터 좌성향의 일교조(日敎組)가 초중고를 장악하면서 점차 사라진다. 과거 제국군인들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는 점에서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진 까닭이다. 부분적이긴 하지만, 경기로 승패를 가르는 운동선수는 빡빡머리를 유지한다. 그렇지만, 두발자유를 누리는 대부분의 학생처럼 머리를 기르는 선수도 늘어났다. 1998년 고교야구팀의 빡빡머리 비율은 31%로 최저점에 달한다. 전후(戰後) 리버럴을 상징하는, 단카이(団塊)세대의 파워가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다.

단카이의 교육이념은 일교조를 통해 열도를 장악했다. 한국에도 잘 알려진, 이른바 ‘유도리(ゆどり)교육’이다. 한국 전교조가 거의 대부분 모방한 참교육과 비슷한 것이다. 학생에게 모든 것을 자율적으로 맡기면서, 국가나 민족과 같은 이념에서 벗어나는 것이 유도리교육의 핵심이다. 평화·반핵·반미도 가르친다. 창의력 배양이란 취지아래 공부도 학생들이 알아서 하도록 지도한다. 3.14로 표현되던 원주율을 3으로 가르친 것이 단카이다.

빡빡머리와 2인3각 달리기 이상열풍

빡빡머리가 늘어난다는 것은 승리에 대한 자신감과 확신 때문만이 아니다. 용모 통일은 선수 개개인의 개성이나 모습을 하나로 처리한다는 의미다. 너와 나의 구별 없이 모두 ‘쇼꾼(諸君)’ 속의 개인으로 전락한다. ‘All for One’이란 슬로건 아래 ‘One for All’이 강요된다. 개인적인 이유는 있을 수 없다.

북한처럼, 명령하면 이행한다는 식이다. 물론 고등학교 운동선수들이 제국군인들처럼 상명하복·일사분란(一絲不亂)으로 나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개인을 무시하고 집단을 우선시하는 조직 내의 긴장감은 빡빡머리를 통해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빡빡머리의 증가는 이미 일본에 정착된 우향우 정서를 반영하는, 개인을 넘어선 집단중심의 가치관을 상징하는 것이다.

특이한 학교 내 현상 가운데 둘째는 올가을 일본 초등학교 운동회에 급증한 것으로 보도된, 2인3각(二人三脚) 달리기다. 두 명이 한 조(組)로 함께 달리는 경기다. 그냥 달리는 것이 아니라, 다리를 묶어 서로 균형을 잡으면서 나가는 식이다. 보통 50m 정도의 단거리이지만, 릴레이식으로 이어져 1㎞ 경주에 나서는 경우도 많다. 2인3각은 두 명만이 아니라, 세 명 나아가 수십 명도 함께 참가할 수 있다.

3인4각, 9인10각이라 부를 수 있다. 보다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달리는, 99인100각 같은 기네스북 도전이벤트도 자주 볼 수 있다. 뛰다가 균형을 잃으면서 넘어지기도 하지만, 모두가 함께 결승점에 들어와야만 한다. 전 세계 어디에서도 보기 어려운 일본 특유의 달리기 스타일이다. 학교 앞 문방구에는 아예 2인3각 달리기용 연결줄이 고정상품으로 나와있다.

같은 배를 탄 동지로서의 2인3각 달리기는, 앞선 자가 느린 자를 통제할 수 있는 적자생존의 훈련장이기도 하다. 화기애애한 윈-윈게임으로서만이 아니다. 집단 속에서 승자와 패자를 확실히 가르는, 냉정하고 살벌한 시스템이다. 앞서서 먼저 달리려는 사람이 있는 반면, 다리가 느려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속도에 못 맞추면서 넘어질 경우, 앞선 자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게 된다.

한 번, 두 번, 세 번 계속될 경우 앞선 자의 인내심도 한계에 달한다. 더욱이 운동회는 가족과 친구가 지켜보는 모두의 축제다. 2인3각 달리기는 두 사람의 경기만이 아닌, 학급 전체의 이름을 건 릴레이식으로도 이뤄진다. 자기가 쓰러지면서 속도가 느려지고, 나아가 학급팀이 패하게 될 경우 책임론이 생기게 된다. 당초 의도한 화(和)가 아닌 화(禍)가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일본 학교에서 일상화된 이지메(イジメ), 즉 왕따가 정당화된다.

단카이 세대는 운동회의 2인3각 달리기를 학교 내 이지메의 출발점이라 비난한다. 자유롭게 혼자서 뛰지 않고, 왜 두 사람 세 사람 아니 수십 명을 하나로 묶어 달리게 만드느냐는 것이다. 스스로가 판단하는 결과가 아닌, 집단 속에서 패자를 가려내 공격하는 것이 2인3각 경주라는 것이다. 빡빡머리가 최저점에 달했던 1990년대는 2인3각 달리기의 쇠퇴기이기도 하다.

줄을 풀고, 혼자서 뛰는 경주가 장려됐다. 그러나 올가을 운동회에서 2인3각 달리기를 시행한 학교의 수가 엄청 늘었다고 한다. 3·11 동일본 대지진 이후 일본인에게 밀어닥친 국가적 슬로건은 ‘키즈나(絆)’이다. 모두를 하나로 묶는 ‘마음의 줄’이란 의미다. 2인3각 달리기에 사용되는 연결줄도 키즈나이다. 2인3각 달리기는 2년 전의 3·11 이후 한순간에 전국 학교에 퍼져나간다.

최근 일본의 상황에 비쳐볼 때, 빡빡머리 붐과 2인3각 달리기의 부활은 특별한 의미로 와닿는다. 그냥 흘러가는 1회성 연출이 아니다. 우향우로 방향을 잡은 일본인의 심리를 반영하는 좋은 예이다. 국가 일본을 정점으로 한, 국민으로서의 일본인의 심리를 반영한 현상이다. 집단으로서의 일본인, 누구 하나 예외 없이 똑같은 논리와 입장으로 무장한 일본인의 모습이다. 태평양전쟁 당시의 일본인은 아니겠지만, 70여 년 전 일본인의 DNA가 다시 부활한 느낌이다.


▎태평양전쟁 당시 미군 함정을 향해 불나비처럼 돌진하는 가미카제 특공대(왼쪽).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지 68주년을 맞은 올 8월 6일 요코하마항에서 일본 해상자위대 사상 최대 규모의 호위함인 ‘이즈모’의 진수식이 열렸다.



일본인의 행동강령이 된 ‘추신쿠라(忠臣蔵)’

역사적으로 볼 때, 집단은 일본인의 가치와 미덕의 출발점에 해당되는 곳이다. 전국시대와 도쿠가와(徳川)막부로 이어지는 에도시대, 나아가 메이지시대와 태평양전쟁, 이후 고도성장기의 일본주식회사…. 그 출발점은 개인이나 가족이 아니다. 혼자 1등을 해도, 가족이 함께 행복하게 산다고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무라(村)’로 표현되는 자신의 고향, 전우와 생사를 함께 할 자신이 속한 부대, 함께 운명을 같이한 1억 결사대의 일본, 호황이든 불황이든 모두가 함께 나누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회사… 왕따조차 개인이나 소수의 불량배가 아닌, 집단으로 이뤄지는 곳이 일본이다.

집단으로서의 일본은 한순간에 창조된 것이 아니다. 오랜 세월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구축된 가치관이다. 급하게 먹으면 체한다. 하루아침에 급조된 것이라면 사라지는 것도 금방이다. 오랜 시간 다져온 세계관이기 때문에 항시 일본인의 DNA 속에 내재돼 있다. 상황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뿐 근본은 똑같다.

일본학(Japanology)의 출발점에 해당되는 추신쿠라(忠臣蔵)는 집단으로서의 일본인의 실체를 설명해주는 가장 좋은 예다. 이미 300여 년 전에 탄생된, 실화를 바탕으로 한 가부키(歌舞伎)이다. 개인·가족이 아닌 집단 속에서 살아가는 일본인의 사생관(死生觀)을 집약한 것이기도 하다.

“아아, 너무도 행복하다. 할 일은 전부 끝냈다. 비록 몸은 사라지지만, 개의할 바는 못 된다. 달을 가리던 어두운 구름도 사라지고, 밝은 빛이 세상에 넘치지 않는가?(あら楽し. 思いは晴るる身は捨つる. 浮世の月にかかる雲なし.)” 일본인이라면 대부분이 알고 있는 유명한 시(詩)다. 사무라이 정신을 말하는 일본인이라면 가장 따르고 존경하는 인물, 오이시 구라노스케(大石内蔵助)가 남긴 글이다.

추신쿠라 속의 주인공이다. 곧 시작되겠지만, 연말이 되면 일본 전체가 추신쿠라 열풍에 휩싸인다. 연말특집용 가부키만이 아니라, 텔레비전 드라마와 영화, 인형극과 동화 카툰 등으로 만들어져 남녀노소 모두에게 선보인다. 관점을 조금씩 다르게 해서 연출되지만, 중심스토리는 항상 똑같다. 매년 반복해서 전해지는 명실상부한 국민 가부키, 국민 드라마다.

추신쿠라는 에도(江戸)시대인 1701년4월 21일 발생한 실제 사건에서 출발한다. 당시의 최고권력자 도쿠카와 막부(德川幕府)는 주기적으로 연회를 베풀었다. 각 지역의 최고 실권자를 도쿄에 초대해 벌이는 대형 연회다. 반란 여부를 탐지하고 막기 위한 정치적 이벤트라고 보면 된다. 현재의 일본 중부에 위치한 아코우한(赤穂藩)을 대표하는 인물로 아사노 나카노리(浅野長矩)도 연회에 초대된다. 당시 34세이다. 처음으로 연회에 참석하는 과정에서 의전담당자인 키라 요시히사(吉良義央)의 지도를 받는다.

아사노는 수백 명의 지방 실권자 중 한 명에 불과하다. 산전수전 다 겪은 의전담당관 키라는 마치 어린아이 다루듯 아사노를 대한다. 사무라이이기도 한 아사노의 자존심을 자극한다. 인내심이 터지면서 아사노는 품고 있던 칼로 키라를 찌른다. 가벼운 상처를 입은 상태에서 수습되지만 다음날 곧바로 할복형에 처해진다. 성안에서 칼을 휘두른다는 것은 막부를 모욕하는 행위로 받아들여졌다.

아사노는 키라를 죽이지 못한 것이 한이 된다는 유언과 함께 세상을 뜬다. 아사노의 할복은 곧바로 고향에 전달된다. 아사노의 오른팔에 해당되는 오이시는 사건의 내막을 자세히 알아본다. 할복의 이유가 키라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원인 제공자인 키라는 살려두고, 자신의 주군만 일방적으로 당했다는 데에 분노한다. 해결책을 모색하던 중, 자신들의 손으로 직접 키라를 없애자는데 동의한다. 도쿠가와 막부를 상대로 한 반란은 꿈도 꾸지 못하던 시절이다.

막부에 대항하는 하극상(下剋上)이 아니라, 개인적 원한에 의한 복수극 형식으로 행동에 나서기로 결의한다. 그러나 모두 당장 복수에 나설 것이라 믿었지만 오이시는 한참 동안 뜸을 들인다. 부하들의 요구에 관계없이 거의 매일 술과 여인으로 시간을 보낸다. 숨진 주군의 부인조차 오이시의 방탕한 행동에 분노한다. 당장 복수극에 나서지 않은 것은 키라가 보낸 정보원들을 속이기 위한 것이었다. 호기(好期)를 노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딴짓을 한 것이다.


▎일본인들은 사무라이가 등장하는 가부키 공연에 열광한다. 수퍼 가부키 공연인 ‘신삼국지Ⅲ-완결편’ 중 진짜 물이 쏟아지는 폭포에서 칼싸움을 벌이는 장면.
일본인의 멘토가 된 오이시의 리더십

주군이 사라진 지 21개월 만인 1703년 1월 30일 새벽. 오이시는 마침내 키라의 목을 베러 떠난다. 눈 내리던 새벽, 철옹성처럼 무장한 성안에 들어가 키라의 목을 벤다. 거사에 참가한 사무라이는 모두 47명이다.

키라의 목을 들고 모두 주군의 무덤 앞에 모인다. 그동안의 상황을 보고하고, 모두 그 자리에서 할복한다. 오이시가 한 사람씩 이름을 호명하면, 사무라이들은 웃음과 함께 무덤을 보면서 목숨을 끊었다.

막부에 대한 반항이 아니라, 주군의 명예를 회복하는 과정에서 키라를 없앴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할복이다. 원수를 처단하기는 하지만, 살인을 한 죄인으로서 스스로 책임지고 세상을 뜬다는 의미다.

앞선 문장은 오이시가 할복하기 직전에 남긴 시다. 마지막 유언(辞世の句)인 셈이다. ‘할 일을 전부 끝냈다’라는 것은 주군의 원수를 처단했다는 의미다. ‘비록 몸은 사라지지만’은 할복으로 삶을 마감한다는 뜻이다. ‘밝은 빛이 세상에 넘친다’는 말은 자신들의 대의명분과 충직성이 세상에 널리 알려질 것이란 믿음이다.

전설이 아닌 실화 추신쿠라가 일본인을 감동시키는 이유는 여러 가지 있다. 먼저 47명에 달하는 사무라이다. 대수롭지 않게 볼지 모르지만, 목숨을 내놓은 사람이 47명이란 것은 결코 적은 수가 아니다. 47명이 거의 2년 가까이 비밀을 지키면서 거사를 준비했다는 것도 믿어지지 않는다. 더구나 오이시는 부하들에게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은 채, 매일 주색잡기로 시간을 보냈다. 진짜 결행할지 여부도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기다린 것이다. 47명 모두가 배신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함께 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무런 사전약속도 없었지만, 원수를 처단한 뒤 47명 모두가 할복에 나섰다는 것도 대단하다. 일본인들은 47명 모두를 의사(義士)라 부른다. 배경이 된 곳인, 아코우한(현재 아코우시-赤穂市)에는 47명의 의사를 모신 사찰과 기념물이 즐비하다. 지도자인 오이시만 특별하게 대하지 않는다. 47명 모두의 사생관(死生觀)과 업적을 자세히 그리고 있다.

같은 뜻을 가지며 생사고락을 함께 한 친구이자 동지(同志)로서 공평하게 대우받는다. 매년 전국에서 모이는 수백만 명의 일본인은 관광이 아니라, 순례객으로 찾아온다. 이들은 47명의 묘를 전부 돌아다니면서 명복을 빌고, 존경의 뜻도 전한다. 덕분에 일본에서 47의사를 배출한 곳에서 왔다고 하면, 충(忠)·신(信)·의(義)의 화신처럼 받아들여진다. 47명의 의사와 관련된 혈족은 특별한 존재로 대우받는다.

추신쿠라의 하이라이트는 칼부림을 하면서 원수를 처단하거나, 충혈된 눈으로 복수를 다짐하는 장면이 아니다. 만약 피로 범벅이 된 복수극에 주목했다면, 일본에 넘치는 사무라이 영화 중 하나에 불과했을 것이다. 무(武)의 얘기인 동시에, 문(文)의 논리가 추신쿠라 안에 드리워져 있다.

오이시의 주도면밀한 계획과 준비 그리고 대의명분을 쌓아가는 전략전술이 돋보인다. 피의 복수극이 아니라, 준비하고 또 준비하면서 결의와 명분을 다지는 모습이 중심 테마다. 한순간에 불사르고 사라지는 영웅담이 아니다. 사무라이로서만이 아니라, 돌다리를 재삼재사 두드리면서 건너는 전형적인 일본 CEO 같은 이미지가 오이시다. 실제로 오이시는 일본기업의 최고 경영자가 자주 인용하는 경영 멘토 중 한 명이다. 경영자로서의 사무라이, 사무라이로서 경영자다.

오이시의 리더십이 돋보이는 부분은 거사 하루 전에 보여준 단호한 결의이다. 목숨을 오이시에게 넘긴 부하 중 일부가 폭설로 인해 약속장소에 나타나지 않는다. 술에 취해 약속시간을 못 지킨 사무라이도 있다. 배신자가 생긴 게 아니냐는 불안감이 퍼져나간다. 오이시는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여기에 모여 결행을 준비하는 것보다, 피치 못할 이유로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더 아플 것이다. 나는 그들을 믿는다.” 상황이 변한다고 동요하는 것이 아니라, 한 번 신뢰하면 끝까지 간다는 의미다.

일본에서 ‘내부자 고발’이 드문 이유

주군의 무덤 앞에서 경과보고를 한 뒤 한 명씩 차례로 할복하는 장면이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에도시대 사무라이의 전통에 따르면, 따르던 주군이 숨지면 함께 할복으로 세상을 마감한다. 오이시 부하 중 일부는 주군의 할복소식을 듣는 순간, 함께 세상을 뜨자고 말한다. 오이시는 울분을 참지 못하는 부하들에게 각자의 목숨을 맡겨 달라고 말한다.

지금 당장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의 거사(擧事)를 위해 행동을 같이하자는 의미다. 명령에 무조건 따르겠다는 의미로 오이시와 피를 나눈다. 죽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목숨을 지킨 채 대의명분을 관철하는 것이 죽음보다 더한 가치라 믿는다. 죽음은 그 이후의 문제다.

한국인이 보면 추신쿠라는 광신도의 집단자살극쯤으로 와 닿는다. 도대체 개개인의 생각이 없다. 주군과 오이시로 연결된 수직관계에 모든 것을 건다. 47명 사무라이가 과연 주군을 존경하는지 여부도 불투명하다.

자존심 때문에 감히 궁중에서 칼을 휘두른 주군의 어리석음에 대한 비판도 없다. 상관에 대한 불만보다 원수에 대한 분노와 살기만이 추신쿠라 전체를 지배한다. 오이시가 한번 믿은 부하를 끝까지 믿듯이, 사무라이가 한 번 주군으로 받아들이면 무슨 일이 있어도 충성을 다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현대 일본에서도 볼 수 있는 똑같은 가치관이다.

일본의 경우 대형 스캔들이 터지면 곧바로 자살사건이 이어진다. 주로 운전사나 비서가 주역이다. 스캔들의 주인공이 타고 다니던 자가용의 운전사, 하루 종일 함께 움직이는 비서가 사건의 전모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검찰이 증인으로 소환하면 보통 불려가기 전 자살을 한다. 사실대로 불기보다, 모든 비밀을 저승까지 숨기고 가겠다는 의미다. 잘 알려져 있듯이, 원전비리를 둘러싼 한국 검찰의 수사는 원전 내부직원의 고발에 따른 것이다.

일본은 내부자 고발(Whistle blower)이 극히 드문 나라다. 내부의 잘못이 있어도 일절 밖으로 발설을 하지 않는다. 해도 별 의미도 없다. 안에서 해결할 문제를 왜 밖으로 들고 나오느냐는 의미다. 3·11 동일본 대지진에서 보듯 대형사건의 이면에는 관행적으로 이어진 ‘사악한 비밀’이 존재한다. 후쿠시마 원전의 위기대응 능력에 문제가 있다는 평가가 있었지만, 전부 그대로 넘어갔다.

태평양전쟁이 벌어지기 직전, 일본과 미국의 국력 차는 80배에 달했다고 한다. 미국에서 공부한 해군참모들은 그 같은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수뇌부에 전달하지 않았고, 육군에도 알리지 않았다. 물론 알렸다고 해도 듣지도 않았을 것이다. 서양이나 한국에서 말하는 내부자 고발은 소수의 잘못된 비리나 독단에 대한 외부유출이다. 일본의 경우 조직 전체의 문제를 밖에 고발하는 것이다. 집단 전체를 상대로 싸우는 고발인 셈이다. 혁명가가 아닌 이상, 그 같은 행동에 목숨을 걸 사람은 없다.

NHK는 올해 1월부터 무려 52회에 걸친 장편 대하(大河) 드라마를 방영하고 있다. 내년초까지 계속될 드라마의 타이틀은 ‘야에노 사쿠라(八重の桜)’이다. 1932년 86세로 세상을 뜬 실존인물 니이지마 야에(新島八重)를 주인공으로 한 시대극이다. 남장을 한 여성 사무라이로 쿄토(京都)의 기독교계 대학, 도우시샤(同志社)를 창설한 니이지마 죠우(新島襄)의 부인이다. 국민적 아이돌 아야세 하루까(綾瀬はるか)가 주인공 니이지마로 나온다.

NHK 대하드라마는 3·11 동일본 대지진으로 고생하고 후쿠시마(福島)현을 고려한 프로그램이다. 여장 사무라이 니이지마의 출신지가 후쿠시마이기 때문이다. 스토리는 니이지마의 인생을 더듬으면서 19세기 중엽부터 시작된 일본 근대화 과정을 더듬어 나간다. 드라마에서의 하이라이트 부분에 해당되는 부분은 백호대(白虎隊)이다.


▎2011년 12월 방호복을 입은 일본 자위대 대원들이 후쿠시마 제1원전 인근의 배수구에서 방사성 물질 제거 작업을 벌이고 있다.



10대를 자살로 몰아간 ‘백호대 사건’

추신쿠라가 300여 년전의 얘기라면, 백호대(白虎隊)는 150여 년전 근대화 초기 일본인의 집단의식을 알 수 있는 좋은 예다. 후쿠시마현 서부에 자리 잡은 아이즈한(会津藩)에서 탄생된 결사대가 백호대다.

당시 일본 전국은 도쿠가와 막부를 지지하는 세력과, 메이지 천황을 중심으로 한 신정부군과의 전쟁에 휩싸인다. 아이즈한은 막부에 동조하는 지역이다. 이미 쌓아 올린 의리를 중시하는 과정에서, 천황의 신정부에 반대하는 반군(反軍)으로 전락한다. ‘이기면 관군(官軍), 지면 반군’이란 말이 등장한 시기다.

아이즈한은 신무기로 무장한 정부군 앞에 상대가 될 수 없었다. 1868년 8월 22일 대규모의 정부군이 아이즈한으로 몰려온다. 방어대가 조직된다. 사무라이의 자식으로, 16세부터 17세까지의 남자 343명이 차출된다. 백호대란 이름으로 출진(出陣)한다. 전쟁터에 나가기 위해 일부러 나이를 올려서 간 청소년도 많았다고 한다.

이들은 사실 정부군의 상대가 될 수가 없었다. 지급받은 총기류의 성능이 구식인데다가, 총 쏘는 훈련 한번 받지 못하고 투입된 대원이 대부분이었다. 싸우러 가는 것이 아니라, 죽으러 가는 것이란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NHK 대하드라마의 주인공 니이지마 야에는 당시 백호대의 총포훈련에 나선 남장 사무라이다.

백호대는 정부군의 눈을 피하기 위해 하루 종일 산길행군에 들어간다. 강행군을 하는 과정에서 몸이 피곤해지자, 상관이 총과 화약 외의 음식과 짐을 사찰에 보관하도록 명령한다. 화를 불러일으킨 잘못된 판단이었다. 이후 산을 넘고 정부군과 대적하지만, 한순간에 패한다. 패잔병으로 뿔뿔이 흩어진다. 20명은 이이모리산(飯盛山)으로 도망간다. 이들은 음식도 없는 상태에서 밤을 지내면서 탈진상태가 된다.

어린 마음에 성으로 돌아갈 것을 결의한다. 그러나 멀리서 본 성은 이미 불타고 있었다. 성 밖에서 난 화재인데, 성이 함락된 것으로 오해한다. 20명의 백호대는 주군과 부모를 전부 잃었다고 판단한다. 토론 끝에 포로로 잡히느니, 할복자살로 생을 마감하기로 결의한다. 20명 중 전원이 할복하지만, 1명만이 극적으로 살아남는다.

백호대 스토리는 정부군의 무용담에 가려지기에 충분한, 패잔병 얘기에 불과하다. 살아남은 1명이 1920년대 말 전모를 밝히면서 세상에 알려진다. 1930년대 만주와 중국으로 전선을 확대한 일본군은 백호대 스토리를 일본 사무라이의 표상으로 신격화한다.

적에게 잡히느니, 백호대처럼 명예로운 할복으로 끝내라는 얘기이다. 가미카제(神風) 공격에 나선 비행사의 대부분은 10대 비행훈련생들이다. 1주일 정도 이륙과 가속에 관한 훈련을 받은 뒤 곧바로 실전에 투입됐다. 같은 세대인 백호대를 찬미하는 시와 노래를 부르면서 죽음의 행진에 나섰다.

백호대가 태평양전쟁에 앞서 창조된 일본군의 프로파간다라는 점에서 실효성에 의문을 가질지 모르겠다. 반대이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추모행렬은 끊이지 않는다. 일본인의 DNA 속에 들어 있는 집단의식을 확인시켜주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10대를 전쟁터에 내몬 부모에 대한 원망이나, 정부군과의 무모한 전쟁을 벌인 지도부에 대한 불만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개죽음이라 불려도 될 만한 대참사이지만 일본인에겐 존경의 대상이 된다.

현재 백호대의 무덤은 아이즈와카마츠(会津若松)시에 소장돼 있다. 할복한 19명과, 당시 정부군의 총에 쓰러진 백호대 30명 등 모두 49명이다. 입상 조각과 함께 추신쿠라의 의사처럼 받들어지고 있다. 순례객이 1년 내내 붐비는 것은 물론이다. NHK 백호대 드라마의 첫 방송은 우향우로 방향을 잡은 아베 신조(安倍晋三) 내각 출범 10일 뒤에 이뤄졌다. 우연이라 보기 힘든, 필연처럼 느껴진다.

집단에서 가치를 찾고, 집단에서 행복과 번영을 찾는 것은 일본인의 어제와 오늘, 내일로 이어질 것이다. 10대 아이돌이 무려 48명이나 한꺼번에 등장해 노래와 춤을 선사한다. 일본의 국민적 아이돌 그룹 AKB48이다. 2005년, 전자상가가 밀집된 도쿄 아키하바라(秋葉原)에서 탄생된 이래, 무려 8년간 부동의 인기를 유지하고 있는 아이돌 그룹이다. 말 그대로 48명이 멤버다.


▎48명을 멤버로 한 아이돌 그룹 결성 열풍의 기폭제가 된 일본 걸그룹 AKB48 멤버들.
주기적으로 멤버를 바꾸면서 새로운 피를 받아들인다. 멤버끼리의 인기순위 결정선거가 텔레비전을 통해 생중계될 정도다. 인기가 없으면 AKB48리스트에서 사라진다. 능력에 관계없이, 조직 내 모든 멤버가 똑같이 대우받는 것에 반대한다는 메시지다. 일본 전통의 경영스타일인, 연공서열(年功序列) 시스템을 타파하자는 것이 AKB48 운영체제 속에 드리워져 있다.

48명의 10대 집단 아이돌의 상징

한국에는 AKB48만 유명하지만, 현재 일본에는 48명을 멤버로 한 아이돌 그룹이 수십 개 존재한다. 나고야(名古屋)의 SKE48을 비롯해 지역별 기능별로 세포번식하듯 퍼져있다. 서로 연계하면서 같은 멤버가 다른 곳에 가서 활동하는 경우도 있다. 4

8명 그룹에 소속된 10대 20대 여성 아이돌의 수는 전부 1000명선에 육박할 것으로 추정된다. 나이로 볼 때 10대, 20대들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망아지와 같은 존재다.

개별적으로 통제하기 힘들고, 멤버들끼리의 협력과 조화도 걱정거리다. 한국에서 보듯, 좀 커지면 그룹을 박차고 나가거나 소속사와 갈등을 빚기도 쉽다. 일본은 그 같은 어려움을 비웃듯이 48명 체제를 순탄하게 운영한다. 48명 모두 착하고 부지런한 아이돌이기 때문이 아니다.

추신쿠라와 백호대 같은 얘기를 어릴 때부터 듣고, 존경하는 분위기 속에서 자라왔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문제가 있다 해도, 집단 속에 들어가는 순간 일 잘하는 조직원으로 변신한다. 온갖 전위패션 스타일로 무장한 대학생도 입사하는 순간, 검은 양복과 정장차림의 회사원으로 변신한다.

지난 7월 9일, 후쿠시마 원전의 현장소장 요시마 마사오(吉田昌男)가 식도암과 뇌출혈로 사망했다. 원전처리를 하는 과정에서 방사능 피폭을 받은 것이다. 3·11 동일본 대지진 직후 요시다는 원전수습에 나설 결사대를 조직한다. 요시다는 제1선에 나선다. 46명이 자의(自意)로 결사대를 자청한다. 요시다가 고통스럽게 죽어간 것을 감안하면 46명도 이미 숨졌거나 암으로 죽어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러나 본인이나 가족·친구는 물론, 신문방송도 46명의 신병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추신쿠라 47인, 백호대 49인, 요시다 46명의 공통점 중 하나는 자신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상부에 대한 자세다. 누가 잘했고, 누구의 탓이란 말도 없다. 죽음으로 몰아간 상황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그대로 시행한다.

한국과 일본은 비슷하면서도 너무도 다르다. 일본인이 그러하듯, 한국인 역시 자신의 가치관과 사고방식으로 일본을 쳐다본다. 주의할 부분은 집단으로 채워진 일본의 가공할 만한 파워다. 집단에 기초한 일사분란한 일본의 파워는 현재 한반도로 밀려오고 있다. 한국은 과거사문제로 방어선을 치고 있다. 역사는 결코 무시될 수 없는 현재와 미래의 나침반이다.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지금의 동북아 상황을 보면, 앉아서 일본의 사죄와 항복을 받아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직접 나서야 한다. 한반도에 전쟁이 터지면, 일본군은 미군과 함께 서울과 평양에 작전을 할 수 있게 됐다. 이른바 집단적 자위권이다. 서울의 허락 없이 일본군이 한발자국도 못 들어온다고 하지만, 비상시에 한국이 과연 그 같은 요구를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추신쿠라에서부터 백호대와 후쿠시마 결사대, 빡빡머리로 무장한 고교야구팀과 초등학교의 2인3각 달리기에 이르기까지, 집단으로서의 DNA는 일본열도 전체에 면면히 흐르고 있다. 전위패션으로 갈피를 못 잡을 것 같은 청년도 상황만 되면 언제든지 백호대로 변신할 수 있다. 한국은 일본을 너무 모르고, 일본은 한국을 너무도 잘 안다. 내일보다 어제에 집착하는 주자학적 세계관만으로는 안 된다. 문제도 답도 미래에 있을 뿐이다. 시간이 없다.

201311호 (201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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