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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분석 - “조깅이 건강에 좋지만 방금 수술한 사람에겐 좋지 않다. 한국이 그렇다” 

‘미·중 균형외교’ 펴는 박근혜 대통령의 대미관(對美觀) 

천영식 문화일보 정치부 기자
박근혜 정부 강대국 외교는 노무현 정부의 그것과 닮았다? ‘한미동맹’ 대선 공약서 누락, 한·일관계가 가장 큰 걸림돌로 작용

▎박근혜 대통령이 5월 7일 워싱턴 백악관에서 열린 한미정상회담에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포함해 지금까지 20번 정도의 방미행사 준비에 참여해왔는데, 박근혜 대통령의 방미 때만큼 미국의 성의 있는 환대 분위기는 처음이었다. 스테이트 비짓(국빈방문)도 아닌데 블레어하우스를 제공하고, 우리나라에 연이어 두 차례 의회연설 기회를 준 것도 흔한 일이 아니다. 한미동맹에 린치핀(linchpin, 핵심축)이라는 개념을 포함시킨 것도 처음이며 큰 성과였다.”

문승현 외교부 북미국장은 지난 5월 박 대통령의 미국 방문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문 국장은 이명박 정부에서 주미한국대사관 공사참사관을 지내며 백악관 및 국무부에 연결되는 한·미 간 핵심 연결고리였다. 문 국장에 따르면 한미동맹은 역대 어느 때보다 잘 다져지고 있으며, 박 대통령과 미국과의 신뢰기조도 확인됐다는 것이다.

정부 당국의 이 같은 설명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정부 들어 한·미관계가 예전만 못하다는 지적은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특별히 문제는 드러나고 있지 않지만, 잠재적 균열 가능성이 심화되고 있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논리의 배경에는 박 대통령이 미국보다 중국에 경도된 듯한 외교노선을 지향하고 있으며, 이 틈을 비집고 일본이 미국과 밀착하면서 한·미 관계가 더욱 초라해지고 있다는 분석을 깔고 있다.

당장 한·미관계가 노무현 정부 때처럼 삐거덕거릴 일은 없지만, 조만간 예상치 못한 불협화음이 전개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한미원자력협정 등 한·미 간에는 풀어야 할 숙제가 많은 만큼, 관계에 균열이 생긴다면 한국 입장에서 좋을 건 없다. 박근혜 정부의 한·미관계에는 정말 이상전선이 조성되고 있는 걸까?

빈약했던 한미동맹 공약

박 대통령의 대미관을 이해하기 위해선 대선 당시의 공약을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박 대통령이 대선 때 발표한 20대 분야 201개 공약은 주로 경제민주화와 복지를 중심으로 이뤄져 있다. 당시 대선의 주요 화두가 복지확대였던 만큼 박 대통령은 이 같은 흐름을 주도했다.

박 대통령 공약의 70∼80%는 이와 관련한 공약이다. 지역 공약까지 합칠 경우 90% 이상이 관련 공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 대통령은 공약의 핵심 키워드로 ‘국민행복’을 제시했기 때문에 복지 및 경제민주화 공약에 집중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박 대통령의 통일외교 공약은 201개 공약 가운데 7개에 불과했다. 외교문제가 대선 때 주요 쟁점은 아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비중이 높지 않았다.

7개의 통일외교 공약은 4개의 남북통일 공약과 3개의 ‘신뢰외교’ 공약으로 나뉘어져 있다. 남북통일 공약의 첫째는 ‘대한민국 주권과 안보 확실하게 지키기’, 둘째로 ‘북핵문제는 억지를 바탕으로 협상의 다각화를 통해 해결’, 셋째는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통한 남북관계 정상화’, 넷째는 ‘작은 통일에서 시작하여 큰 통일을 지향’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안보 및 북핵문제 해결, 남북관계 진전, 통일 지향 등으로 압축될 수 있다. 그리고 신뢰외교에는 ‘동아시아 평화와 유라시아 협력촉진’, ‘경제 외교 업그레이드 및 신성장 동력 발굴’, ‘매력한국 건설을 위한 국민외교시대 개막’ 등을 포함하고 있다.

박 대통령의 통일외교 공약 중 가장 주목받은 건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통한 남북관계 정상화였다. 여타 공약은 액세서리 정도로 취급 받았다. 박 대통령의 머릿속에는 남북관계 해결이 주요한 통일 외교 화두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2002년 미래연합대표 시절 북한을 갑자기 방문,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파격적인 회담을 했던 과거를 떠올리게 한다. 박 대통령에겐 남북관계를 진전시키고자 하는 의지와 욕심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외교분야의 3개 공약은 새로운 외교 틀을 만들겠다는 비전으로 요약된다. 유라시아 협력이라는 화두를 제시했고, 경제외교를 주요한 외교 축으로 내세웠다. 또 ‘국민외교’라는 개념도 동원했다. 이는 민간외교를 강화한 개념이다. 이 모든 게 기존의 협소한 외교틀을 벗어나 외교를 21세기에 맞게 다양화·민주화하겠다는 개념으로 이해된다.

한미동맹은 박 대통령 공약에 별도 항목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북핵문제 해결 항목에 ‘한·미·중 3자 전략대화 가동’이라는 액션플랜이 들어가 있는 정도다. 미국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또 다른 공약은 ‘동아시아 평화와 유라시아 협력촉진’인데, 이를 달성하기 위해 ‘미국 및 중국과 조화로운 협력적 관계 유지’라는 표현을 썼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박 대통령의 공약집에 등장하는 미국이 항상 중국과 동렬의 위치로 서술되고 있다는 점이다. ‘한·미·중 3자 전략대화’나 ‘미국 및 중국과의 조화로운 협력관계’ 등의 표현이 이를 잘 보여준다. 이 때문에 대선 당시에도 박 대통령의 외교공약이 미국을 상대적으로 홀대하고 있다는 지적이 일었다.

미국과 중국은 엄연히 다른 위치에 있는 국가다. 미국은 우리의 우방이자 정치·경제적 동맹국가이고, 중국은 경제적 동반자이며 협력을 확대해야 하는 대상이다. 한미동맹에 관한 우선적 표현이 선행된 다음, 한·미·중이 거론되는 게 순서라는 지적이었다.

물론 대선 당시의 시대 분위기가 이 같은 공약 조성에 한몫을 했다. 이명박 정부 시절 과도하게 비칠 만큼 친미 일변도의 한미동맹이 강조됐기 때문에 한·미관계에 더 액셀러레이터를 밟기엔 부담스러웠다. 오히려 속도조절론이 일고 있었다. 외교정책에서 이명박 정부와 차별성을 꾀해야 하는데다, 시대 분위기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이후 대등한 관계설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았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이 친미적 성향을 외교의 전면에 내세우기엔 한계가 있었다는 것이다.

외교공약을 주도했던 인물들의 성향도 대체로 중립성이 강하다. 외교공약 마련의 총책임자인 윤병세 외교부장관은 미국통이긴 하지만, 노무현 정부 때 청와대 수석을 지냈던 인물이다. 또 물밑에서 외교분야 자문을 해온 심윤조 의원도 노무현 정부 때 북미국장과 차관보를 지낸 인물이다.

대선 당시 통일 분야의 공약 마련에 핵심적 역할을 해온 류길재 통일부 장관도 진보적 색채가 강한 경남대 교수로, 보수라기보다는 중립적 성향의 인물로 분류된다. 앞서 거론한 문승현 외교부 북미국장도 이명박 정부에서 주미 한국대사관에 근무했지만, 노무현 정부의 청와대 멤버다.


▎박근혜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10월 7일 인도네시아 발리 아요디아호텔에서 열린 한·중 양자회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박근혜 정부 외교라인의 ‘균형외교론’

대선 당시 공약 입안자들은 한결같이 친미 일변도의 외교정책으로 21세기를 지향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판단하고, 중국과의 교류확대를 통해 균형적인 외교를 지향하는 쪽이었다. 미국의 중요성을 이해하지만, 앞으로 미래를 생각한다면 중국과의 관계증진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일종의 ‘균형외교론자’들이다.

한 관계자는 “중국과 관계를 확대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며 “한국 외교가 상대적으로 중국에 투자하지 않았던 만큼, 이를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중국과 관계증진에 상당한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미국으로서는 섭섭할 수 있지만 한국외교의 나아갈 길이라고 표현하는 외교관도 있다.

더구나 미국과의 관계 심화는 정치적으로 부담스러운 측면이 있다. 2008년 쇠고기 파동에서 드러났듯 국민정서에 녹아있는 반미감정으로 인해 친미정책을 노골적으로 공약하는데 무리가 있었다는 지적이다. 특히 이명박 정부 시절에는 노무현 정부와 껄끄러웠던 한·미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해 미국과 관계개선에 집중한 반면, 이제는 한·미관계가 어느 정도 안정화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분석도 박근혜 정부의 외교행보에 영향을 준 것으로 분석된다.

박근혜 정부의 외교정책에는 시대적 분위기 외에도 박 대통령 개인의 성향도 상당히 투영된 것으로 분석된다. 물론 박 대통령은 외교적으로 특별한 이념성향을 드러낸 적은 없다. 보수적이기 때문에 당연히 한미동맹을 중시하고 있다는 추정이 있을 뿐이다. 박 대통령은 2007년 발간한 자서전에서도 특별히 외교적 이념성향을 드러내지 않았다. 박 대통령은 다만 ‘나의 첫째 외교원칙’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외국을 방문할 때 꼭 지키려는 원칙이 있다. 바로 한국을 도와주신 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일”이라고 했다.

이 때문에 박 대통령은 외국 방문 시 한국전 참전기념비에 헌화하고 참전용사와 대화를 갖는 행사를 중시한다. 지난 5월 미국 방문 때도 그랬다. 박 대통령은 미국에 대해 ‘고마운 나라’라는 인식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6·25전쟁에 참전해 한국의 공산화를 막고, 전후 복구에도 지원해주면서 한국에 은혜를 베푼 나라로 미국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박 대통령의 사고 중심은 항상 한국이다. 우리나라 입장에서 고마운 일이지만, 미국 입장에 맞추겠다는 뜻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 고맙다는 것은 과거 시제일 뿐 현재와 미래는 또 다른 관계설정이 필요한 것이다. 외교정책에서의 차가운 이성은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박근혜 대통령은 과거 퍼스트레이디 시절 박정희 정부와 미국의 관계가 상당히 좋지 않을 때였다는 점을 기억하고 있다. 미국은 주한미군을 철수하겠다고 공언했고, 박정희 대통령은 자주국방 확대로 맞섰다.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의 1979년 한국 방문은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였다. 카터는 한국의 인권을 거론하고 주한미군 철수를 실행에 옮길 태세였다.

당시 퍼스트레이디였던 박근혜는 카터와 함께 방한한 영부인 로절린 여사를 만나 하소연했다. 카터가 조깅을 즐긴다는 점에 착안해 “조깅이 건강에 좋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다. 하지만 방금 수술해 몸이 약한 사람에게는 좋지 않다. 한국이 그렇다. 인권도 좋지만 남북 대치상황에서 경제발전에 온 힘을 쏟아야 하는 한국을 이해해달라”는 취지의 설득이었다. 아버지로부터 약소국 외교의 서러움과 현실론을 보고 배운 것이다.


▎1979년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의 방한 당시 퍼스트레이디 자격으로 당시 박정희 대통령, 카터 미국 대통령, 로절린 여사와 기념촬영을 한 박근혜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의 ‘자주 성향’도 주목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의 마음을 사기 위한 친미 외교를 펼쳤지만, 언제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자주적 노선을 견지했다. 미국의 도움은 받지만, 결국 국방이든 통일이든 모두 우리 힘으로 해야 한다는 게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생각이었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1972년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을 만난 뒤 “박정희 대통령은 외세의 간섭을 대단히 싫어한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박정희 정부 말기에 문공부장관을 지낸 김성진은 <박정희를 말하다>라는 책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외세 배격주의자가 아니라 외국의 사고를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항상 ‘우리 식’을 강조했다고 한다.

미국이 원조해준 M1소총도 우리 체격에 비해 너무 크고 무거우니까 우리 몸에 맞는 무기를 생산해서 사용해야 한다는 식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상당부분 자주적 사상을 갖고 있었던 셈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이룬 업적 중 하나인 7·4 남북공동성명에서 통일의 3대원칙을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이라고 명시한 것도 당시로서는 대단한 파격이었다.

김성진의 책에는 한·미관계의 껄끄러운 장면을 상징적으로 소개하는 장면도 나온다. 박정희 대통령이 자주 만난 외국인 중 한 명으로 로버트 톰슨이 있다. 그는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특별보좌관 출신으로 당시 영국 전략문제연구소 고문으로 있었다. 톰슨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이렇게 설득했다고 한다.

“한국의 입장에서 보면 진실로 한국을 도울 수 있는 나라는 미국밖에 없어요. 일본이 돕겠소, 아니면 중국이 돕겠소? 한국이 가야 할 길은 아직도 멉니다. 미국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참고 이겨내야 합니다. 지금 이룩해 놓은 작은 것에 도취하여 앞으로의 큰 것을 놓치는 어리석은 일을 하지 마세요.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더욱 굳게 유지하도록 노력하세요. 영국 사람도 (미국에 대해) 많은 일을 참아왔습니다. 한국 사람이라고 왜 참지 못합니까? 미국과 계속 손잡고 나가야 합니다.”

브루스 클링너 미국 헤리티지재단 선임연구원은 대표적인 미국의 한반도 전문가다. 미 중앙정보국(CIA) 분석관 출신으로 미국 내 한반도에 대한 보수적 시각을 대변한다. 대부분의 한반도 전문가가 중립성향이거나 진보성향인데 비해 클링너는 보수이념을 선명히 내세운다.

미국에서는 여야를 떠나 외교 안보적 측면에서 보수적 시각이 여전히 우세한 만큼 클링너의 분석은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런 클링너가 최근 미·일관계의 복원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한편 한국의 한·일관계 개선노력이 소극적인 데 대해 문제제기를 했다.

그는 얼마 전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추구를 정당화하면서 “역사 문제가 한국의 오해를 유발하긴 하지만 지금 한국이 걱정해야 할 것은 일본의 민족주의보다 중국의 민족주의”라고 주장했다. 그는 집단적 자위권에 대해서도 “미국은 오래전부터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지지해왔다. 그것 없이는 일본이 미국 등 동맹을 제대로 도울 수 없기 때문”이라며 “동아시아에서 진정한 군사적 위협은 중국과 북한”이라고 강조했다.

그의 이러한 인식은 한국의 외교정책에 대한 불만표시로 이해됐다. 한국이 지금 일본과 좋지 않은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주장과 연결되고 있다. 동아시아에서 적국은 중국이지 일본이 아니라는 점도 강하게 환기시켰다. 지금 한국은 일본을 적으로 잘못 생각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이는 불과 1년 전의 워싱턴 분위기와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다. 이명박 정부 시절 워싱턴에서는 오히려 일본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후텐마(普天間)기지 이전 등 민주당 정권은 사사건건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에 발목을 잡고 나섰기 때문이다. 미국의 동아시아 전문가들은 “미국이 일본 때문에 두통에 시달리고 있다”면서 일본을 골치 아픈 존재로 규정했다. 이 틈을 메운 건 한국이었다. 한국은 미국과 밀착을 더욱 강화하면서 오바마 대통령이 주도하는 핵안보정상회의를 유치하는 등 미국의 전방위적 지원을 받았다.

이 같은 흐름이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급변한 것이다. 일본은 미국 주도의 미사일방어체제(MD)를 확실히 지원하고 나섰고 경제적으로도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가입으로 미국과 밀착했다. 하지만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이러한 변화가 나타난 것은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라기보다는 지난해 12월 일본의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의 출범 이후다.

아베 정권은 미국이 주도하는 동아시아 안보 및 경제시스템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미국에 만족감을 안겨주었다. 잃어버린 미일동맹을 복원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도 이 같은 분위기의 산물이다. 미국은 진작부터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지지해왔지만 한국과의 관계 등을 고려해 진전되지 않았을 뿐이다.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군사력의 부담을 줄이고, 평화유지군(PKO) 파병에 일본의 역할을 확대시키기 위해 이를 요구해왔다. 미국과 일본은 상호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동맹의 판을 키워가고 있는 셈이다.


▎1 벨기에를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이 11월 7일 한국전 참전용사기념비에 헌화·묵념하고 있다. 2 박근혜 대통령은 10월 8일 발리 소피텔호텔에서 열린 APEC 남태평양 도서국 정상들과의 대화에서 아베 일본 총리와 나란히 앉았지만 냉랭한 모습을 연출했다.



“박 대통령 나이브해” VS “한·미관계 정상화 과정”

문제는 여기서 한국이 계속 소외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은 미국의 MD 참여에도 소극적인 데다 TPP 가입도 공식적으로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미국 입장에서는 최근 동아시아의 분위기 전체가 우려스러운 상황으로 가고 있다고 보는 듯하다. 한국이 중국과 가까워지고, 한·일관계가 악화되면서 전통적인 한·미·일 3각 안보체제가 흔들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과 일본은 미국 주도의 안보체제에서 동맹이라고 표현되기 힘들 정도로 관계가 악화되고 있다.

한 외교전문가는 “미국이 일본의 민주당 정권 당시 아예 일본을 없는 존재 취급해왔는데 요즘은 격세지감”이라며 “이제는 자칫하다 한국이 미국의 외교정책에서 골칫거리로 인식되는 게 아닌가 싶어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박근혜 정부가 이 같은 국제적 흐름을 외면한 채 너무 나이브하게 접근하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는 일본에 대해서도 너무 원칙론을 내세우면서 관계개선의 실마리를 풀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반면 박근혜 정부 관계자들은 현재의 외교정책이 국익이라는 관점에서 정상적으로 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한국은 어차피 안보적으로 한미동맹을 유지하지만, 경제적으로 중국과 협력을 강화해야 하는 이중적 상황을 맞고 있다. 특히 최근 들어선 정치·외교적으로도 중국과 관계개선이 아주 중요해졌다는 것이다. 특히 북핵 해결과 남북 평화통일을 위해서는 중국의 역할이 필수적이다.

이는 미국도 추구하는 노선이다. 미국은 중국과 전략대화를 강화하면서 미·중 협력을 정치·경제뿐 아니라 군사영역까지 확대하고 있다. 중국의 협력을 얻지 않고서는 미국이 전 세계에서 파워외교를 펼치기 어렵다는 현실 인식 때문이다. 북핵문제에서도 미국은 사실상 중국에게 이니셔티브를 넘겨줬다. 미국은 오바마 행정부 출범 이후 북핵문제 해결을 위해 어떠한 주도적 행동도 해오지 않았다. 우방인 한국의 입장을 존중하는 동시에 중국을 통한 해결책을 우선시해왔기 때문이다.

실제로 외교적 선택의 폭은 넓지 않아

한국이 한반도 평화를 명분으로 중국과 협력을 강화하는 것은 당연한 외교적 수순이고, 미국의 이해에도 상충되지 않는다는 논리다. 여기에 박 대통령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 주석과의 두터운 인간적 관계가 한·중관계를 밀착시킬 수 있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박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 간에 통일에 관한 얘기를 허심탄회하게 나눌 수 있다면, 이는 동아시아 외교에서 아주 중요한 전환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역설적이게도 이 같은 순수한 열정이 그대로 전달되는 건 아니다. 미국이 중국의 역할 확대를 주문하는 것과 한국이 중국과 밀착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한국이 중국과 관계를 밀착시킬수록 미국은 한국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게 된다. 미국은 한국이 중국의 지원 아래 평화통일을 한 뒤 친중 국가로 넘어가는 것을 최악의 시나리오로 상정하고 있다. 이는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에 구멍을 남기게 되기 때문이다. 미국이 최근 일본과 밀착을 강화하는 것도 이러한 최악의 시나리오에 대비한 성격을 담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결국 박근혜 정부의 최대 외교적 과제는 중국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동시에 미국 및 일본과의 관계도 꾸준히 확대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지극히 원론적이면서 어려운 과제이다. 한·미관계에 불협화음이 커지면 박근혜 정부의 앞날도 순탄치 않다. 미국은 한미 원자력협정에서 얼마든지 박근혜 정부를 곤혹스럽게 만들 수 있다. 미국은 우라늄 농축과 사용 후 핵연료 재처리를 요구하는 한국 입장을 현재로선 받아들일 수 없다는 쪽이다. 전시작전권 전환 시기 연기와 함께 한미방위비 분담 협상 등도 박근혜 정부에서 해결해야 할 임무다.

현재로서는 박근혜 정부가 일부러 미국과의 관계를 훼손시키고 있다고 보는 사람은 없다. 또 실제로 훼손된 것도 없다. 그렇지만 친중 외교노선이 예상치 못한 복잡한 상황을 던져 줄 수 있다는 우려는 커지고 있는 셈이다.

이명박 정부에서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을 지낸 천영우 전 수석은 “한·중관계에 거품이 끼이고 중국에 대한 낭만주의가 있는 게 사실”이라며 “이러면 대외관계 균형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경고했다. 천 전 수석은 대일관계에 대해서도 “미국은 북한의 위협과 중국의 부상에 대해 기본적으로 한·미·일 안보협력 강화로 대응하려는데, 한국이 그 의도를 제대로 존중하지 않고 있다고 보게 될 것”이라며 “한·일관계가 너무 장기적으로 안 풀리면, 미국 입장에서 한국이 너무 심하다는 인식이 커져가면서 한·미관계마저 어렵게 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당장은 한·미관계에 큰 문제가 없지만, 지금부터 적절히 관리해나가야 할 시점이라는 얘기다.

21세기 동북아 외교를 한국이 주도하려 해도 카드가 많지 않다. 미국과 중국이라는 워낙 강력한 국가가 동북아에서 충돌하는 형국이어서, 한국이 상황을 주도한다는 말 자체가 비현실적일 수 있다. 괜히 주도하지도 못하면서 상대방과 관계를 불편하게 만드는 민족주의적 거품을 낳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박근혜 정부의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는 미국과 중국의 동의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힘을 받지 못한 채 공허한 메아리로 남아 있다.

이 같은 예기치 않은 오해가 쌓이지 않게 하려면 지속적인 대화가 반드시 필요하다. 동맹 60주년을 맞은 한국과 미국은 보다 심도 깊은 대화를 통해 21세기 동북아 정세에 대한 공감의 폭을 넓혀나가야 한다. 박근혜 정부의 한국 외교는 잘못한 게 없는데도 괜한 시련에 빠질 수 있는 상황이다.

201312호 (2013.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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