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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연구 - “새마을운동의 정치색을 경계한다” 

글로벌 새마을운동 개척자 최외출의 옹고집 

박성현 월간중앙 취재팀장
박근혜 정부 이후까지 내다보는 새마을학의 진로 모색 중…주변에서는 정치권 차출되는 일은 없을 것으로 관측

▎2013년 9월 17일 영남대에서 열린 한가위 한마당 축제에서 최외출 영남대 부총장(가운데 와이셔츠 입은 사람)이 박정희정책새마을대학원생들과 기념촬영을 했다.



김종인·이상돈·이준석 등 박근혜 정부 출범의 공신들이 최근 들어 대통령과 정부·여당에 실망감을 피력한다. 일부는 조목조목 실정을 꼽아가며 비판의 수위를 높이기도 한다. 반면, 최외출 영남대 부총장은 시간이 갈수록 말을 아낀다.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와도 같은 새마을운동이 상종가를 치는 현실에서도 한 발 비켜나 있다. 공신들이 하나둘 떨어져나가는 요즘 그는 어디서 무얼 하는 걸까?

“탈당? 나는 원래 당원이 아니었어. 지난해 박근혜 대선 경선 후보 선거운동을 해야 하기에 입당한 것뿐이지. 이제 내가 탈당한다고 해도 누가 신경이나 쓰겠어?”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 캠프에서 국민행복추진위원장을 지낸 김종인 전 보건사회부 장관은 2013년 11월 말 서울 부암동에 있는 대한발전전략연구원에서 기자와 만나 새누리당과의 형식적인 연결고리마저 단절하겠다는 뜻이 담긴 탈당 의사를 밝혔다. 그는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에 어떤 애착이나 아쉬움도 남겨두지 않은 듯한 표정이었다.

김 전 장관이 말했듯이 그는 원래 새누리당 사람이 아니었다. 2012년 7월 박근혜 대통령이 새누리당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서자 입당했다. 당시 당헌·당규가 당원이 아닌 자의 경선후보 선거운동을 금했기에 그가 박 후보를 도우려면 부득불 당원 자격을 가져야 했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과 가깝다는 외부 인사 여럿이 김 전 장관과 같은 이유로 입당서를 제출했다.

박근혜 후보에게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던 김 전 장관마저 입당하던 그 시절 ‘박근혜가 신뢰하는 남자’라는 별칭이 따르던 영남대 부총장으로 있는 최외출 교수는 끝까지 ‘당 밖의 남자’를 고수했다. 당시 그는 박 후보를 돕고자 대학에 안식년 휴가를 신청했다. 강의, 학생 지도, 모든 보직을 내려놓으면서까지 박 대통령 만들기에 올인했지만 당적만은 고사했다. 그는 후보 선거운동원이 아니라 선거운동을 준비하는 사람이라는 논리로 버텼다.

왜 그랬을까? 그는 2013년 3월 <데일리안>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새마을운동의 실천과 연구는 비정치적이어야 하고, 새마을을 학문화하고 세계화하는 일을 보다 객관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다.” 박 대통령을 돕긴 하지만 새마을운동의 미래를 위해 당적을 갖지 않았다는 말로 들린다. 그에게 박 대통령 만들기와 새마을운동 활성화 둘 다 중요했다. 두 가지를 병행하는 묘안을 짜낸 게 당직을 갖지 않는 대신 안식년을 써가며 선거운동을 돕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해 최 교수가 오랜 세월 새마을운동 연구를 하면서 터득한 교훈이 하나 있었다. 이 연구가 비정치적이어야 한다는 것. 최 교수와 함께 일하는 채영택 영남대 박정희리더십연구원 연구실장은 “최 교수가 정립하려는 새마을학이 학문으로 살아남자면 가치중립적이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최 교수 본인도 박근혜 정부 들어 정치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초대 대통령 비서실장 하마평에서 1순위 후보로 거론됐지만 영남대와 새마을이라는 울타리를 결코 벗어나지 않았다. 그가 대통령 직속 지역발전위원회 위원장에 내정됐으며, ‘제2의 새마을운동’을 이끌게 된다는 보도도 사실무근이었다. 요즘은 그가 오랜 세월 연구에 매진해온 새마을운동이 새롭게 각광받는 시점이다.


▎박근혜 대통령과 전국 새마을지도자들이 10월 20일 전남 순천 팔마체육관에서 열린 ‘2013 전국 새마을지도자대회’에서 나침판 조형물을 돌리는 비전 선포식을 갖고 있다.
2013년 10월 20일 박 대통령은 전남 순천에서 열린 ‘2013 전국새마을지도자대회’에서 “새마을운동은 나눔·봉사·배려의 실천덕목을 더해 국민통합을 이끄는 공동체 운동이 돼야 한다”며 제2의 새마을운동 추진을 제안했다. 밖에서 보자면 ‘새마을운동 전도사’, ‘새마을운동 개척자’라고 불리는 최 교수는 ‘물 만난 고기’와 같은 입장이어야 한다.

새마을학의 가치 중립은 생존 요건

‘새마을학’의 원조라 할 그가 웬일인지 제2의 새마을운동의 범주에서 거론되거나 관여한다는 낌새는 전혀 없다. 제2의 새마을운동을 추진하는 정부에서 자문 요청을 해보지만 최 교수가 마뜩해 하지 않는다는 소문도 나돈다. 그가 박근혜 정부가 표방하는 제2의 새마을운동과 거리를 둔다는 관측이 나오는 배경이다. 이와 관련해 <월간중앙>은 최 교수에게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지금 시점에서의 언론 인터뷰는 적절치 않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잠시 만나 차나 한잔하자는 제의도 완곡하게 거절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그가 어떤 생각을 하든 해가 바뀌어 여권 진용 개편 논의가 시작되면 그는 또다시 요직 하마평에 오를지도 모른다. 당장은 고사하지만 박근혜 정부 임기 내 한 번은 ‘구원투수’로 등판할 거라고 보는 관측이 많다.

하지만 최 교수의 언행과 주변의 전언을 종합해보면 그가 정치와 절연했을 가능성에 무게가 더 실린다. 2013년 3월 <데일리안>과의 인터뷰에서 “정치에는 뜻이 없었다. 어려울 때 아무런 조건 없이 공부할 수 있도록 장학연구비를 지원해준 분(박근혜 대통령)에 대해 조금이라도 도리를 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이제 박 대통령이 집권에 성공했으므로 그에게 남는 건 새마을운동이다.


그럼 그에게 새마을운동은 무엇인가? 2012년 4월 23일 <영남일보>의 인터뷰가 잘 설명해준다. 최 교수는 “새마을운동은 한 번도 내 곁을 떠나지 않은 나의 다른 실체”라고 했다. 1955년생으로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그가 1977년 뒤늦게라도 영남대에 입학할 수 있었던 것은 경상북도 ‘새마을장학생(4년 전액 장학금)’으로 선발되면서부터다. 늦깎이 대학생이 된 그는 새마을운동을 가르치는 지역사회개발학과에 들어갔다. 지금도 학자로 연구하는 새마을운동은 그의 분신과도 같다.

30여 년의 세월 속에서 그는 학문이 설 자리가 어딘가를 뼈저리게 느낀 듯하다. 앞서 말한 인터뷰에서 그는 지난 40년간 새마을운동의 역사에는 영광과 아픔이 함께 점철돼 있다고 돌이켰다. 열광적인 국민적 호응이 있기도 했지만 국민의 관심에서 멀어진 시절도 있었고, 학계에서도 새마을운동에 관한 연구는 약속이나 한 듯 자취를 감춘 적도 있다는 게 그의 기억이다.

그래서인지 2013년 3월 <데일리안>과의 인터뷰에서 고 박정희 전 대통령 집권 당시의 예를 들며 “새마을운동의 실천과 연구는 비정치적이어야 하고 새마을을 학문화하고 세계화하는 일을 보다 객관적으로 추진해야 한다”며 “향후 새마을학의 정착과 발전, 지구촌 빈곤문제 개선을 위한 새마을운동 활용방안을 찾아보는 게 우선할 일”이라고 강조했다.


▎2010년의 서울 중구 장충동 장충단길. 1960~70년대 경제개발의 상징인 새마을기가 줄지어 펄럭이고 있다.



최외출 주변에 나도는 정체불명의 소문들

지금은 가히 새마을운동 전성시대다. 중앙정부는 물론이고, 경상북도를 비롯한 지자체, 새마을운동중앙회, 한국국제협력단(KOICA) 같은 개발원조기구, 심지어 민간기업들도 기업의 사회 공헌 활동(CSR)에 새마을운동을 끌어들인다. 최 교수의 한마디한마디는 전방위적인 파급효과를 미친다. 하지만 최 교수는 국내 새마을운동 흐름과는 일정한 선을 긋는다.

최 교수의 한 측근은 “최 교수가 국내 새마을운동에 관여하면 정책을 조정한다느니, 정책을 이끌어간다느니 하는 오해를 사기 쉽다”고 그 이유를 밝혔다. 심지어 현 정부 새마을운동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는다는 얘기도 나온다.

안전행정부 등 새마을운동 유관 부서에서 최 교수에게 자문을 요청하거나 추진위원을 맡아달라고 요청이 왔지만 모두 고사했다는 후문이다. 심지어 안행부나 새마을운동중앙회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발언도 삼가한다고 알려졌다. 칭찬이건 비판이건 일하는 사람에게는 부담으로 돌아가고, 공연한 참견을 하게 된다는 이유에서다. 인터뷰를 극구 사양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는 오랜 세월 정부와 다른 길을 걸어왔다. 독자적으로 새마을운동, 새마을학을 개척해왔다. 제2의 새마을운동과 같이 안전행정부와 새마을운동중앙회가 주축이 되는 국내 활동과는 의식적으로 거리를 뒀다. 박 대통령이 언급한 제2의 새마을운동도 큰 틀에서는 최 교수의 새마을운동과 겹치겠지만 엄밀히 말하면 완전히 같다고도 하기 어렵다는 게 최 교수측의 해석이다.

그가 여권의 실세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그가 실세로 많은 이에게 인식되는 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는 지금도 세인의 입방아에 오른다. 항간에는 ‘누가 최 교수와 술을 진하게 한잔 했다더라’, ‘최 교수와 누구를 만났더라’ 등의 뜬소문이 빈번히 나돈다.

최 교수는 기본적으로 입에 술잔을 잘 대지 않는 스타일인데도 반사이익을 보려는 이들이 친분관계를 엉터리로 지어낸다는 것이다. 심지어 지금은 김천에 통합됐지만 1995년 도농통합 전까지 군으로 남아있던 금릉이 고향인 그가 다음 총선에서 김천에 출마한다는 얘기가 파다하게 퍼진 적도 있다. 사정당국에서 그 내용을 윗선에 보고했다는 말도 나왔으니 최 교수의 일거수일투족이 관심의 대상이 된다는 말은 빈말이 아니다.

새마을운동의 양대 축 학문화·세계화

박 대통령과의 친분, 새마을운동에 미치는 영향력 때문에 이런저런 청탁이 주변에 맴돌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그는 “이 정부에서만 새마을운동 하고 말 작정이냐”며 주변 사람들을 다독인다고 한다. 젊은 연구자를 모집하거나 면접할 때면 “나하고 평생 이 길로 갈 수 있겠느냐”고 학문하는 자세를 다짐받기도 한다.

정리하자면 새마을운동은 비정치적이어야 하고, 가치중립을 지향해야 하며, 이를 뛰어넘어 박근혜 정부 이후까지 생명력을 가지는 학문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게 최 교수의 입장이라고 채영택 실장은 전했다.

최 교수가 글로벌 새마을운동에 올인하는 이유다. 게다가 2013년은 6·25 종전 60주년이 되는 해다. 당시 한국은 세계 67개국으로부터 물자와 인력 지원을 받았고, 휴전 후에도 전쟁복구와 경제개발 과정에서 많은 원조를 받은 나라다. 1957년 한국은 국가 예상의 23% 정도를 해외 원조로 충당할 정도로 궁핍했다.

지금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개발원조위원회(DAC) 회원국으로 발돋움했다. 24개 DAC 회원국 중 원조를 받다가 원조를 주는 나라는 우리뿐이다. 이제는 원조 공여국으로 국제사회로부터 받은 혜택을 돌려주고 성장경험을 저개발국에 전수하는 데도 새마을운동 전파가 안성맞춤이라는 게 최 교수의 지론이다. 새마을운동은 세계적으로 유용한 빈곤 탈출 모델이라는 것이다.

돈을 퍼부어 캠페인성으로 하는 사회운동은 돈줄이 끊어지는 순간이 문 닫는 날이다. 최 교수도 새마을운동도 정권의 운명과 무관하게 자생력을 키워야 한다는 입장이다. 사업적 측면이 아닌 학문화·이론화·교육·연수·컨설팅 관점에서 새마을운동의 본질을 전수하는 데 주력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자면 새마을운동을 가치 있는 브랜드로 이끌어줄 인재를 양성하고, 정교한 학문으로도 다듬어야 한다.

또 1970년대의 새마을운동을 21세기 지구촌 실정에 맞도록 다시 설계도 해야 한다. 예컨대 1970년대 새마을운동은 절대 빈곤 탈출이 목표였고 이를 이루는 데 요구되는 정신적 가치인 근면·자조·협동을 전면에 내세웠다. 요즘 세상은 상대적 빈곤과 불평등 해소, 잘사는 공동체사회가 더 중시된다.

그는 새마을운동의 미래를 ‘학문화’와 ‘세계화’에서 찾는다. 최 교수는 2007년 한국에서 처음으로 새마을운동을 ‘새마을학’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새마을운동은 세계 속에 대한민국의 이미지를 개선하고, 인류의 편익을 증진하는 유력한 수단이라는 믿음에서다. 원래 새마을운동은 ‘잘 살아보세’라는 슬로건과 함께 사회운동으로 시작했다. 이를 하나의 고유한 학문의 영역으로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고 그는 본 것이다.

최 교수는 이에 앞서 1970년대 이후 국내 새마을운동 관련 연구경향을 분석했다. 그 결과 새마을운동은 잘살기 운동, 지역사회 의식개혁 운동, 지도자의 역할 등 연구대상이 다양하므로 학문으로서 성립조건을 상당부분 충족한다는 것으로 집약됐다. 최근에는 ‘새마을운동 기록물’이 2013년 유네스코의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새마을운동이 민·관 협력의 성공적 사례로 개발도상국 빈곤 퇴치의 성공모델이라는 점에 주목한 것이다. 새마을 운동은 한국은 물론 지구촌 빈곤탈출의 모델이자 국제 개발협력의 한 방편이기도 하다. 새마을운동을 대한민국 명품 ‘새마을학’으로 발전시키자는 게 그의 야망이다.


▎2011년 11월 경북 구미 호텔금호산에서 열린 ‘2011 박정희 리더십 국제학술세미나’에서 개회사를 하는 최외출 영남대 박정희리더십연구원장.



해외 유학을 포기하고 다시 새마을운동으로

한국 고유의 문화와 제도가 세계 무대에 진출해 ‘글로벌 스탠더드’로 자리 잡는 걸 ‘코벌라이제이션’(Ko-balization)’이라고 한다. 최 교수는 지역발전 이론과 실천 모델을 두루 갖춘 ‘새마을학’이야말로 코벌라이제이션의 제1 후보라고 봤다. 이미 지역개발 기법은 새마을운동을 성공시켜 본 한국이 원천기술을 습득했다.

상당수 국민도 새마을운동이 국가·지역사회 발전의 원동력이었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다. 학계에서도 새마을운동의 추진 원리와 방식, 성공요인 등을 연구하는 이들이 늘어난다. 정부에서도 새로운 시대적 환경에 맞는 제2의 새마을운동을 추진하는 등 여건이 우호적이다.

남은 과제는 개발도상국들이 국가 발전계획에 응용할 수 있는 새마을학의 이론과 실무를 개발하는 일이다. 새마을학이 빈곤 퇴치에 도움을 주자면 국가별 맞춤형 학문으로 세분화될 필요가 있다고 최 교수는 말해왔다. 그가 말하는 새마을운동은 세계를 겨냥한다. 예전에 우리를 도왔던 나라에 도움을 되갚는 프로젝트다.

새마을운동의 역사는 올해로 43년이 된다. 한국을 가난으로부터 구제해준 1970년대 새마을운동은 우리에게는 과거형이지만 후발개도국에는 현재이자 미래의 롤모델이다. 새마을운동은 한국이 외국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유용한 원조 수단이면서 명품 브랜드라는 것이다. 최 교수는 1970년대 한국 개발 연대의 새마을운동과 지구촌 빈곤퇴치에 앞장서는 글로벌 시대의 새마을운동은 구별돼야 한다고 말한다.

한국이 원조를 받던 시대의 ‘잘 살아보세’라는 새마을운동이 ‘새마을정신 1.0’이라면 원조를 하는 입장에서 펼치는, 더불어 잘사는 글로벌 새마을운동은 ‘새마을정신 2.0’이라고 부른다. ‘새마을정신 1.0’이 근면·자조·협동이라면 ‘새마을정신 2.0’은 1.0에다 시대상황에 맞게끔 나눔·봉사·창조의 새 가치를 더한 것이다.

새마을운동의 세계화 차원에서 보완했다. ‘새마을정신 2.0’의 실천은 국내적으로는 한국의 선진화를 공고히 하고, 국제적으로는 빈곤 구제와 퇴치에 앞장서 국가적 이미지를 개선한다.

그 일환으로 2008년 한국새마을학회가 출범하고, 같은 해 13개국 대표가 국제학술대회를 열어 새마을운동을 이론적으로 정립하기 위한 ‘글로벌새마을포럼’을 결성했다. 당시만 해도 새마을운동은 38주년을 맞이했으며 100여 개 국가에서 4만5천 명이 연수를 다녀갈 정도로 세계화된 상태였다. 새마을운동을 차세대 수출상품으로 육성하기 위한 다양한 연수 프로그램의 개발과 표준화, 인재 양성이 시급했다. 최 교수가 ‘글로벌새마을포럼’ 회장을 맡게 된 배경이기도 하다.

영남대 박정희정책새마을대학원은 새마을운동 ‘글로벌화’의 첨병이다. 2005년부터 유엔은 빈곤퇴치 운동인 새천년개발목표(MDGs)를 달성하기 위한 모델로 새마을운동을 전파하고 있다. 아프리카경제위원회(ECA)도 2008년 낙후된 농촌과 지역경제 현대화를 위한 개발 프로그램의 기본모델로 새마을운동을 채택했다. 1960~70년대 대한민국의 인재들이 미 풀브라이트재단 등의 도움을 받아 해외 유학을 갔듯이 지금은 개도국 엘리트들이 새마을운동을 배우고자 이 대학원에 둥지를 튼다.

좀 식상한 표현이지만 ‘새마을정신 2.0’은 물고기를 주는 게 아니라 물고기 잡는 법을 알려주는 교육운동이기도 하다. 그게 대한민국이 국제사회에 기여하는 책무라고 본다. 박정희정책새마을대학원에서 외국의 지식인들을 받아들여 새마을운동이 가지는 긍정적인 정신의 본질을 교육하는 것이다.

최 교수는 새마을운동에서 우리사회가 직면한 공동체 해체 위기의 해법을 모색하는 듯하다. 우리는 언젠가부터 물질적으로 풍족하지만 정신적으로 가난한 삶을 산다. 이 결핍된 부분을 남을 배려하는 공동체적 삶을 추구하는 새마을운동에서 채울 수 있다는 것이다.

최 교수는 1980년대 초, 대학원 학비를 당시 야인으로 물러나 있던 박근혜 대통령에게서 지원받았다. 당초 그는 영남대 지역사회개발학과를 졸업하고, 지역사회 개발 선진국과 키부츠, 콜호스 같은 집단농장을 연구하고자 유학을 준비했다. 하지만 집안사정으로 인해 유학을 접게 되면서 박 대통령에게 신세를 지게 된다. 공동체적 삶에 대한 그의 관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체질상 몰려다니는 스타일은 아닌 듯하다. 남들이 안 가는 길을 주로 걸었다. 새마을운동이 거의 사문화되던 시절인 2000년대 초 김대중 정부 시절 새마을장학회를 발족시켰다. 그때 주변에서는 지금이 어느 땐데 그 시절의 ‘새마을 타령’이냐며 눈을 흘기기도 했다.

그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노무현 정부에서는 한국새마을학회를 창립했다. 이때 ‘새마을학’에 대한 구상의 일단을 내비치자 진짜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이명박 정부 시절엔 서울대에서 새마을운동국제학술대회를 열었고 글로벌새마을포럼을 발족한 이가 바로 최 교수다. 이런 과정을 거쳐 행정대학원에다 글로벌새마을전공을 개설하기에 이르렀다.

정권은 유한하지만 학문은 무한하다?

그러면서도 그는 학교라는 사회와의 경계선을 넘어서려 하지않았다. 사회에서 진행되는 새마을운동 사업과는 담을 쌓다시피 했다. 교육 원조 개념을 정립하거나 새마을운동을 현지화하고 이론화하는 새마을학에 매진했다는 것도 특이하다. 필리핀 엔드런대학에 개설된 새마을학과가 그 예다.

최 교수의 주장과 논리를 활용한 영남대는 새마을학 수출 1호인 이 대학에 커리큘럼과 교수를 제공해서 학문적인 연구와 교육을 뒷받침한다. “새마을운동의 학문화, 이론화, 교육 컨설팅 등 새마을운동 본질과 진수를 해외에 전수하는 게 우리의 역할”이라고 채영택 박정희리더십연구원 연구실장은 말했다.

“1970년 4월 22일 박정희 대통령의 제창으로 새마을운동이 시작된 이래 43년 동안 명맥을 유지해온 것도 그 속에 독자적인 가치와 생명력이 있기 때문이다. 관련 연구자들은 남들이 거들떠보지도 않을 때 제 돈을 들여가며 새마을운동을 연구했다. 지금은 세계가 빈곤 탈출을 위한 희망의 아이콘으로 새마을운동을 인식한다.”

새마을운동을 배우려는 외국인 중에는 중구난방으로 터져 나오는 새마을운동 버전에 어리둥절할 때도 있다. 해외에 얼치기 새마을정신, 엉터리 새마을운동이 수출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막상 한국에 와서 새마을운동을 공부하는 유학생 중에는 새마을운동도 제각각이라며 혀를 내두르기도 한다.

최 교수의 새마을운동, 새마을정신은 앞으로도 가치중립적인 활동을 추구한다고 한다. 새마을운동을 정치적으로 해석하거나 과거와 같은 국민동원의 수단으로 귀속시키려는 시선은 단호히 배격한다. 물론 새마을운동 추진 과정에서 부작용도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새마을운동의 긍정적 요인을 입에 올리는 것 자체를 퇴행적으로 보는 자세는 동의하기 어렵다는 게 최 교수의 시각인 듯하다.

그의 삶은 이렇게 새마을운동을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린다. 그렇지만 최 교수는 박근혜라는 정치인이 등장하는 정치적 사건에서만 목격됐다. 1998년 대구 달성 보궐선거, 2007년과 2012년 대통령 선거 국면이 그랬다. 그 사건에는 최 교수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행동하는 많은 인물이 거명된다. 그 많은 인물과 최 교수는 근본적으로 걸어온 길과 갈 길이 다를지도 모른다. 그 점을 최 교수는 때론 목소리로, 때론 행동으로 보여줬다. 그럼에도 세상은 여전히 최 교수를 그런 정치권 인사들의 범주에 넣어 보려고 한다.

최 교수의 한 측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최 교수는 평생을 학자로 살아왔다. 앞으로도 21세기 지식기반사회에 걸맞게 새마을정신을 현대적으로 확대하고 학문화하는 데 매진할 것이다.”

여권에서는 언제 최 교수에게 SOS를 타진할지 모른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갈수록 정권의 ‘바람막이’로 등판하라는 압력도 증가하게 마련이다. 박근혜 정부를 기껏 만들어놓고 혼자 독야청청할 거냐는 식의 힐난도 예상된다. 하지만 최 교수는 쉽게 흔들리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앞서의 측근 인사는 “그래도 자기 자리를 지키는 사람도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논리로 맞설 것”이라고 했다. 이래서 정권은 유한하지만 학문은 무한하다고 하다는 걸까?

201401호 (2013.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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