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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 산책 - 산맥처럼 멀고, 안뜰처럼 가까운 내 생명의 탯줄 

시인 조용미의 경북 고령 

사진 김현동 월간중앙 기자
시인에겐 할머니와 함께 꽝꽝 얼은 낙동강을 건너 대구에서 고령 시골집으로 걸어갔던 아득한 기억이 있다. 고령은 다섯 살 때 떠나온 고향 아닌 고향이지만, 그 물리적 거리감을 압도하는 것이 고향의 불가사의한 힘이다. 거부할 수 없는 근친성은 대지와 인간을 하나로 묶는 비밀스러운 인연일 터인데, 그 인연을 사랑하는 시인에게 고향 고령은 온전하고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난다.

▎가야고분군 앞에 선 시인. 대가야왕릉 전시관을 나와 주산 기슭을 따라 오르면 규모가 크고 작은 200여 기의 고분이 능선을 따라 줄지어 있다.



고령향교 앞에 나는 우두커니 서 있다. 고령읍 연조리의 한적하고 야트막한 산언덕 위, 향교에 오르면 읍내가 한눈에 다 내려다보인다. 향교 입구에서 계단을 따라 천천히 걸어올라오는 것도, 조금 더 뒤쪽으로 돌아가서 향교로 오르는 길도 다 운치가 있다. 향교의 문은 늘 닫혀 있다. 어느 지역에서나 대개 그렇다. 언젠가 한번은 저 안으로 들어가 향교 기록물 등을 보아야 하리라. 향교를 마주보고 서면 왼편 뒤로 멀리 산마루에 고분들이 줄지어 있는 것이 보인다.

향교의 넓은 언덕에 서 있는 큰 느티나무와 은행나무와 소나무가 당당하고 아름답다. 향교 안에는 여러 그루의 향나무와 배롱나무 목련, 화살나무 등이 있다. 나는 고령읍과 거리가 있는 다산에서 태어났지만 고향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은 바로 향교가 있는 이 언덕이다.

손차양을 하고 먼 산마루의 고분들을 바라보다가 담너머로 명륜당과 대성전을 기웃거리고 있자니 지나가던 아주머니가 “이 길로 가면 주산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있고 고분으로 가는 길도 나온다”고 일러주고 가신다. 내가 초행길의 객지사람으로 보인 모양이다. 향교 옆집의 개가 새끼를 낳았는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강아지 두어 마리가 고물거리며 마당 밖으로 기어 나와 얼굴을 내민다.

나는 고령에서 태어나 다섯 살 때 대구로 나가서 자랐고, 중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로 와서 줄곧 살았다. 하지만 고향 고령에 대한 애착은 누구 못지않다. 집성촌이 있던 다산면 송곡의 선산에 부친의 묘소가 있고 숙부는 지금도 내가 태어난 곳, 아시터라 불리는 나정동에 살고 계신다.

대구에 나가서도 늘 할머니가 계신 시골집을 수시로 왕래해서 내게 고령과 대구는 할머니가 계신 곳과 우리 가족이 떨어져 사는 곳쯤으로 생각될 뿐, 늘 정서적으로는 커다란 한 공간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내 고향인 다산면과 대구는 낙동강을 경계로 행정구역이 나누어져 있을 뿐 사문진교가 세워지고 난 뒤부터는 거의 구분이 되지 않을 만큼 ‘대구화’ 되었다고 하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고령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말일 뿐이다.

걸어도 걸어도 보이지 않던 고향 옛집

대구에서 할머니가 계신 시골집에 가려면 버스를 타야 했다. 월배를 지나 화원유원지까지 가는 길이 지루하면서도 아름다웠던 건 사과밭 때문이었던 것 같다. 지금은 다 사라지고 아파트촌이 되어버려 흔적도 없지만 버스 차창으로 사과나무 가지가 부딪히기도 할 만큼 과수원이 많았다.

화원의 사문진나루에서 배를 타고 건너서 걸어야 했던 강변의 긴 모래밭은 잊을 수 없다. 신발 속으로 자꾸 모래가 들어와, 저만치 앞서가시는 할머니에게 업어달라고 하거나 천천히 가자고 투정을 부리며 뒤를 따라가곤 했다.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멀리 바라보면 강변의 포플러나무들은 바람에 솨아아아 소리를 내며 눈부시게 반짝였다.

시골집은 거기서부터 30리를 더 걸어 들어가야 했다. 할머니와 둘이서 걸어가는 시골길이 어땠는지 지금은 세세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할아버지, 할머니도 돌아가시고, 낙동강변의 나루터에서 그 기나긴 길을 걸어서 고향집으로 들어간 것은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 때, 서울에서 친구 귀용을 데리고 내려가 내가 태어난 고향집을 보여준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 다음부터는 대구에서 버스를 타고 종점인 벌지까지 가서 걸어가거나, 1993년 사문진교가 놓인 후로는 자동차를 타고 다리 위를 휙 지나쳐 시골집 마당까지 바로 들어가게 되었다. 사문진교가 세워지면서부터 고향을 찾는 나의 정서가 조금은 달라지게 되었던 것 같다.

할머니와 걷던 30리 길, 어린 걸음에 걸어도 걸어도 시골집은 나타나지 않았다. 다산중학교를 지나 한참을 걷다 보면 시골집이 거의 가까워질 무렵, 노곡으로 가는 갈림길이 있는 야트막한 언덕에 큰 소나무들로 둘러싸인 으스스한 무덤이 몇 기 있었다. 항상 찬바람이 불었으며 그늘져 있어서 어쩌다 시간을 잘못 맞추어 밤에 그 곳을 지나기라도 할 때면 머리가 쭈뼛쭈뼛 섰다고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거기를 지나 성풍세(成豊世) 효자비가 있는 곳이 나타나면 고향집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고 안심했다.

나와 동생이 탯줄을 잘랐다는 이십 년도 넘게 내버려진 폐가에/ 아침 안개를 걷고 올라가 보면/ 잡풀과 도꼬마리 옷에 쩍쩍 들러붙어/ 마당 어귀에서부터 발목이 잡힌다/ 안으로 들어서려는 그 어떤 힘도 완강하게 거부하는/ 폐허의 城, 깨진 옹기 뒹구는 장독대를 바라보며 폐허와 내가/ 반대편에서 자라고 있었음을 알겠다/ 메주를 메달아 놓아 늘 쾨쾨한 냄새가 가시지 않던 사랑방 문짝까지 닿으려면/ 허리까지 오는 잡풀들만 걷어내면 되는 것일까/ 길을 낼 한 치의 빈틈도 내주지 않는 잡풀과 나 사이의 경계가/ 산맥처럼 멀다 폐허를 더듬으려면/ 내 몸 구석구석을 만져보면 된다/ 동생이 구운 참새 다리를 물고 서 있다 작은아버지가 타작을 한다/ 할머니가 애호박을 삶는다 고모는 보이지 않는다/ 장독대 옆에 참나리가 핀다 뒤란에 까마중이 까맣게 익는다/ 내가 그걸 탁탁 터뜨린다 옛집이 잠시 붐빈다

죽어 한가로운 앞마당의 감나무,/ 아시터 옛집과 내가 헤어지고 나면 서로 어디까지 치닫을지 모른다/ 옛집은 낙타의 걸음걸이로 세월을 향한다 ― 졸시 ‘옛집’ 전문



▎낙동강은 시인의 어린 시절 모습과는 많이 달라져 있다. 4대강사업으로 보가 만들어지면서 아름답게 반짝이던 모래톱은 대부분 사라졌다.
어느 해인가 낙동강이 얼었던 적이 있었다. 초등학교 다닐 때 방학이면 늘 고령으로 가서 지내다 오곤 했는데, 그 겨울은 강이 아주 꽝꽝 얼어서 배가 못 다니게 되었다. 대구에 나왔다 돌아가시는 할머니와 함께 언 강 위를 걸어서 시골집으로 들어갔던 아득한 기억이 있다. 얼마나 추웠으면 낙동강이 얼었을까. 그러나 강이 완전히 얼지도 않는 요즘, 강에 살얼음이라도 끼었다는 말을 들으면 추위의 체감온도가 한층 낮아져 살을 에는 듯하고 마음에 사무치니 어찌된 일인지 모르겠다.

죽어가는 낙동강을 어찌할 것인가

낙동강변의 모래를 걸어가서 배를 탄다 하여 사문진(沙門津)이라 했다고도 하고, 많은 신도가 절에 불공을 드리기 위해 거쳐간 나루라 하여 사문진(寺門津)이라 했다고도 하는 아름다웠던 나루터는 이제 삭막한 풍경이다. 고령에는 개경포(開經浦)와 사문진 외에 15개의 나루가 존재했는데, 그중 4개가 다산면에 위치하고 있었다. 사문진 나루터는 대구 달성군 화원면과 연결되는 곳이어서 사람의 왕래가 특히 많았다.

거기다 이곳은 옛날부터 ‘향부자’ 등 약재의 주산지로 알려져 있어 두 척의 도선이 사람과 물건들을 양쪽으로 실어 나르기에 바빴다. 하지만 1993년 사문진교가 개통되면서 뱃길이 끊어져 나루터와 거룻배, 자동차 엔진을 얹었던 동력선은 역사 속에 묻히고 말았다. 사문진교가 놓이고 나서 한 해가 지난 뒤, 아버지를 모신 영구차를 타고 서울에서 송곡의 장지로 들어가던 날 우리 가족은 처음으로 사문진교를 건너보았다.

그 후로 낙동강은 많이 훼손되었다. 4대강 사업의 일환으로 낙동강에는 두 곳에 보가 만들어졌다. 고령 강정보는 전국 16개의 보 중에서 가장 길고 규모가 크다는데 보 위의 교각 우륵교는 교각 위에서 아래까지 가야금의 12줄 현을 이어 형상화한 모양새다. 보 위로 자전거길도 조성되어 있지만 옛날과 현재의 모습을 비교해 보니, 보가 만들어지기 전의 모습과는 너무 크게 변했다. 아름답게 반짝이던 모래톱들은 다 사라져버리고 없어졌다. 흑두루미들은 아직도 잊지 않고 이 강변을 찾아오는 것일까?

어릴 때의 기억 속에 있는 강변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고 현재의 모습이 내가 배를 타고 지나다녔던 바로 그 강인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것이 달라졌다. 역사와 일상이 함께 여울져 흐르던 삶의 강줄기는, 엄마와 누나와 함께 살고 싶은 반짝이는 금모래빛 강변은, 습지와 모래톱과 미루나무와 버드나무 군락이 있던 강변은, 이제 낙동강의 아니, 4대강의 그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렵게 된 것이 아닐까. 고령 강정보와 그 아래 달성보를 가보았다. 비가 내려 수문을 열어 방류하고 있는 보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물은 성난 듯 우르릉거리며 콸콸콸 거품을 일으키며 쏟아져내리고 있었다.

4대강 사업은 생태계 파괴뿐만 아니라 녹조현상이 일어나 수질까지 나빠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겉으로 보아서는 알 수 없지만 낙동강의 곳곳은 심각한 녹조현상으로 병들어가고 있다. 자연이 준 자정능력이 사라진 강과 거대한 수조와 다름없는 하천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자연스러운 현상인 것이다. 흐르지 않는 강은 가까운 미래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 물의 죽음에, 생명의 죽음에, 우리 모두는 어떻게 책임을 져야 할 것인가. 이 강을 어떻게 되돌려놓아야 할 것인가.

개진면 개포는 강물이 서쪽으로 흐르다가 남으로 꺾여 흐르는 곳으로, 낙동강변의 유서 깊은 교통의 요지인데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이 이곳을 통하여 운반되었다. 이곳은 기암절벽이 연이어져 있어 예로부터 시인 묵객의 놀이터로 혹은 곡물과 어염의 집산지로 알려졌다.

본시 개산포로 불렸으나 강화도의 팔만대장경을 해인사로 안치할 때 이 포구에서 내려 운반하였다 하여 산(山)자 대신 경(經)자를 넣어 개경포(開經浦)라 불렀다. 그 후 일제강점기에 한국인의 호학애국의 혼을 말살한다는 의도에서 ‘경(經)’ 자를 빼고 그냥 개포라 부르게 되었다.


▎4대강사업이 만들어낸 강정고령보는 길이 953.5m로 전국 16개의 보 중에서 가장 길다. 고대 후기 대가야 역사와 현재 대구의 첨단과학·패션을 주제로 고정보와 친수시설을 상징화했다.



대가야만의 독특한 순장 방식

개산포 낙동강변은 1580년대의 낙강칠현의 뱃놀이터로도 알려져 있다. 낙강칠현(洛江七賢)은 조선중기 중종-광해군 시대에 낙동강 유역에서 세거한 유현인 이기춘(李起春)·이승(李承)·이홍우(李弘宇)·정구(鄭逑)·김면(金沔)·박성(朴惺)·이홍량(李弘量) 이렇게 일곱 분을 일컫는다.

1589년(선조 22년) 5월 초여름, 이들 학자는 낙동강 맑은 물 위에 배를 띄우고 술잔을 기울이며 시를 지어 읊었다는데, 가끔 그 풍경을 마음속으로 그려보자니 보지도 못한 풍경이 그리워진다. 시회(詩會)는 내가 가끔 꿈꾸는, 옛 시절로 돌아가 엿보고 싶은 선비문화의 풍류다.

고령의 나루터로는 개진면의 개포와 부석진, 우곡면의 객기, 성산면의 도진, 다산면의 사문진 등이 있었는데, 개포는 큰 포구로서 곡식과 소금을 실어 나르는 많은 배와 사람들로 붐볐다. 가을이면 세납으로 받아들이는 곡식이 수만 섬에 이르렀고 화적떼가 때때로 몰려오기 때문에 창고 주위를 순라까지 돌았다고 한다.

뿐만이 아니라 포구로 많은 소금이 들어와서 고령은 물론이고 합천·성주·거창·금릉 일대의 내륙지방의 소금도 대부분 개포에서 운반되었으며, 이들 내륙지방에서 생산된 곡물은 모두가 개포에서 집산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개경포 기념공원이 들어서 있다.

개포에서는 해마다 대장경축전 행사의 하나로 이운(移運) 행렬이 재현된다. 이운행사는 불화나 불구 등을 다른 장소로 옮기는 불교의식으로 강화도 선원사에 보관 중이던 대장경판을 합천 해인사로 옮겼던 대역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대장경 이운행사는 조선 태조가 강화 선원사에서 옮겨온 대장경을 보러 용산강에 행차했다는 태조실록의 기록 등을 근거로 고증을 밟아 복원한 역사 재현 프로그램이다.

강화도를 떠난 대장경은 서해 바닷길을 이용해 남해를 돌아 해인사와 가장 가까운 포구인 고령의 낙동강 개경포까지 배를 이용하여 옮겨졌으며, 여기부터 다시 사람들이 직접 이고 지거나 소달구지에 싣고 육로를 이용해 가야산 해인사까지 긴 행렬을 이루었을 것이다.

고령에 대해 말하자면 많은 부분을 대가야에 할애해야 한다. 고령은 대가야의 도읍지로서 가야시대의 많은 유물과 유적이 남아 있다. 고령읍에는 대가야 국성지와 역대 왕이 식수로 사용한 왕정이 남아 있고 주산성·운라산성·만대산성·의봉산성 등 가야시대의 산성과 망산성·풍곡산성·노고산성지·의병성지 등 임진왜란 당시의 성과 성지도 남아 있다. 분묘로는 지산동 고분군과 벽화를 가진 석실분인 고아동 벽화고분, 본관리 고분군, 중화리 고분군, 후암리 고분군, 월산리 고분군, 박곡리 고분군, 용리 고분군 등이 있다.

대가야의 생활과 풍습은 지산동 44호 고분의 순장 형태를 통해 짐작할 수 있는데 이 고분은 주석실을 포함하여 부장품을 넣었던 석실에서도 무덤의 주인 이외의 인골이 발견되었다. 그 외 다른 다수의 석곽에서도 순장자가 발견되었는데 40여 명의 순장자는 대개 자기의 묘곽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대가야만의 독특한 순장 방식으로 이들은 모두 다른 성격의 부장품을 소유하고 있다.

순장자들은 시녀나 시종이 많지만 다른 신분을 가진 사람도 있는데, 무덤의 주인을 시종하거나 호위하던 상당한 신분을 소유한 무사와 농기구를 가진 이도 있다. 수장인들은 여자아이에서부터 20대의 젊은 남녀, 30대의 여성, 40대 이상의 남자 등인데 아이를 안고 있는 어른도 있다. 주인은 생전에 누렸던 권력만큼이나 죽어서도 봉분을 높이 쌓아올려 거대한 집을 지은 것이다.


▎고령군 알터마을에 있는 양전동 암각화. 청동기 시대의 유물로 가면상·동심원·십자형 등 추상적인 형태의 그림이 비교적 선명하게 남아 있다.
순장제도 통해 본 삶과 죽음의 세계관

그들은 망자의 살아생전의 모습을 그대로 지하세계에 축소하려 했을 것이고, 당시의 다양한 삶의 모습이 순장이라는 형태로 그대로 무덤 속에 재현되었을 것이다. 죽은 한 사람을 위해 수많은 산 자를 함께 묻을 수 있었던 것은 피장자의 경제적인 통제력 혹은 절대적인 권력을 보여준다. 순장자들은 현세에서의 생활이 사후에도 계속된다고 믿었으므로 저 세상에서도 자신이 모시던 사람을 받들겠다는 생각으로 죽음을 당하거나 혹은 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계세사상(繼世思想)만으로 이해하기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다른 세계가 있을 것이라 믿고 싶다. 순장이 비록 권력자에 대한 예속성이 강했던 고대사회의 풍습이긴 하지만 스스로 죽음을 택한 사람들의 내면세계를 짐작해보면,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풍습이라고 간단하게 해석할 수만은 없다. 그들은 죽은 후에도 또 다른 삶을 이어갔던 것일까. 그들의 죽음은 우리가 아는 죽음과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달랐을까.

대가야왕릉 전시관은 44호 고분을 고스란히 재현해 놓았다. 순장자들의 매장된 모습과 ‘껴묻거리(부장품)’의 종류 등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으며 발굴 당시의 돌방구조를 그대로 볼 수 있게 만들어 놓아 마치 고분 속에 들어가 있는 묘한 체험을 할 수 있다.

처음 볼 때도 그랬지만, 순장자들의 모습에서 30대 남녀 두 사람이 머리를 서로 반대방향으로 두고 몸을 겹친 상태로 묻힌 것으로 보이는 13호 순장 덧널(시체를 직접 넣는 ‘널’을 보호하는 나무로 만든 곽)을 본 잔상은 왕릉전시관을 떠나면서도 한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왜 서로 반대방향으로 묻힌 것일까? 그들의 죽음이, 죽음의 형태가, 그들이 함께 나누고 간직했을 알지 못할 이야기들이 오랫동안 자꾸 내 마음을 간섭했다.

왕릉전시관을 나와 주산(311m) 기슭을 따라 오르면 사방에 널려진 고분군을 만난다. 주산성의 남쪽으로 뻗은 능선 위에는 대가야 왕들의 무덤과, 규모가 크고 작은 200여 기의 고분들이 능선을 따라 줄지어 늘어서 있다. 신라와 달리 대가야의 고분들은 마을과 평야가 내려다보이는 산을 따라 있다.

읍내의 어느 곳에서 보면 산꼭대기의 고분들은 마치 하늘과 닿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무덤은 대체로 아래쪽에 있는 것들이 먼저 만들어졌고 차츰 능선을 따라 높은 쪽으로 올라가면서 만들었는데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규모가 크다. 읍내로 가면 우륵 기념탑과 우륵 박물관이 있다.

대가야는 시조 이진아시왕부터 제16대 도설지왕까지 520년간 존속했다. 대가야는 낙동강의 물길을 따라 국내뿐 아니라 일본, 중국과 활발한 교류를 맺었으며 철과 농업 생산력을 바탕으로 성장하여 6세기 초에는 고령은 물론 경남 서남부 대다수 지역과 전주·남원·하동·구례·진안·장수지역까지 세력권을 넓혔다.

가야금을 제작하는 등 찬란한 고대문화를 꽃피운 높은 문화수준을 갖춘 국가였다. 554년 우호협력 관계를 깨고 한강을 독차지해버린 신라를 백제와 연합하여 공격하지만 대패하고 쇠락의 길로 접어들다가 마침내 562년 신라의 기습적인 공격을 받고 멸망한다.

고령에는 양전동 암각화를 비롯해 23개소의 암각화가 분포한다. 암각화는 선사시대를 대표하는 유적으로 옛사람들이 그의 생각이나 바람을 바위 등에 새긴 귀중한 자료로 바위에 그림으로 새긴 문자 기록이라 할 수 있다. 고령의 암각화는 단일 지역으로는 밀집도가 가장 높고 숫자도 많다. 대표적인 것은 양전동 암각화, 안화리 암각화, 봉평리 암각화, 지산동 고분군의 지산동 30호분 개석에 새겨진 암각화 등이다.

알터마을에 있는 청동기시대 유적인 양전동 암각화는 가면상·동심원·십자형 등 추상적인 형태의 그림이 비교적 선명한 편이다. 보호각이 씌워진 암각화 앞에서 그림의 형태를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보고 있는데 마을입구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할머니 두 분이 오전 11시에 와야 그림이 가장 잘 보인다고 하신다. 안림천변의 산기슭에 있는 안화리 암각화는 마침 비가 온 탓도 있겠지만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훼손되어 그림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다산면 나정에서 벌지를 지나 송곡재로 내려가는 길 왼편 언덕에 후송재가 있다. 개항기의 학자 봉강(鳳岡) 조상의 문하생들이 선생의 유업을 기리기 위해 1900년에 건립한 재실이다.



서원과 정자, 재실 남아 있는 고령의 선비문화

쌍림면 합가리에는 선산 김씨들이 모여 사는 개실마을이 있다. 무오사화 때 화를 면한 김종직의 후손이 이곳에 정착하면서부터 종가가 대를 이어오고 있다.

마을에는 김종직 선생을 기리기 위해 지은 도연재와 점필재 종택이 있다. 김종직은 조선초기의 성리학자로 자는 효관·계온, 호는 점필재이다. 영남 사림학파의 종조로 훈구파와 대응하여 영남 사림파들이 정계에 진출할 수 있도록 발판을 마련해준 인물이다.

김종직의 학통은 후에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이언적(李彦迪) 등으로 이어졌다. 개실마을은 대부분 전통한옥이라 조선 양반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마을 안길의 기와를 얹은 흙돌담을 끼고 걷다가 비스듬히 열린 문틈으로 보니 집마다 마당을 아담하게 꾸며놓았다. 지붕의 합각면에도 꽃이 올라가 있다. 다시 돌아나와 호젓한 마을길을 따라 걸으니 모졸재가 나오고 그 뒤쪽으로는 화개산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있다.

다산면 나정에서 벌지를 지나 송곡재 내려가는 길 왼편 언덕에 후송재(後松齋)가 있다. 개항기의 학자 봉강(鳳岡) 조상(曺塽)의 문화생들이 선생의 유업을 기리기 위해 1900년도에 건립한 재실이다. 후송재의 삐걱거리는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 텅 빈 집의 고요함은 온전히 나만의 것이었다. 천천히 낮은 돌계단을 올라가 거북모양의 초석과 디딤돌에 새겨져 있는 추상문양을 신기하게 바라보고 쓰다듬으며 얼마나 많은 생각에 잠기었던가.

산소에 오갈 때마다 잠시 멈추고 올라가보면 후송재는 해가 갈수록 허물어져가고 있었다. 돌아와서 알아보아도 별다른 자료가 없고 지방문화재로도 지정이 되어 있지 않아 안타까웠는데 최근에 매림서원·모현정과 함께 향토문화재로 지정되었다고 해서 그나마 한시름 놓게 되었다.

조상(曺塽)의 본관은 창녕, 자는 문보(文甫) 호는 봉강(鳳岡)으로 임재(臨齋) 서찬규(徐贊奎)와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고령군 다산면 송곡에서 삼일계(三一契)를 만들었으며 강학에 힘썼고 저술로는 <심성이기설(心性理氣設)>과 <대학석의(大學釋義)>가 있다. 후송재 옆에는 종조부이신 학산(學山) 선생 추모비가 있다.


▎고령에는 지금도 많은 서원과 정자, 재실이 남아 있다. 벽송정은 고령읍에서 쌍림면을 거쳐 해인사 방면으로 가다 보면 우측 산쪽에 자리 잡은 정자다.
고령은 지금도 많은 서원과 정자, 재실이 남아 있다. 도암서원·매림서원·반암서원·노강서원·봉양서원·낙산서원이 있고 벽송정·만남재 등이 있다. 쌍림면 고곡리에는 선조 때 의병장이며 학자였던 송암(松菴) 김면(金沔)의 신도비, 도암서당, 도암사당, 묘소가 있는 김면장군 유적지가 있다.

송암 김면 장군은 성리학의 대가 남명(南冥) 조식(曺植)을 스승으로 퇴계(退溪) 이황(李滉)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28세 때 재실을 짓고 남명에게 이름을 지어달라고 부탁을 하자 남명은 송암(松庵)이란 현판을 자필로 써 주어 이를 자신의 호로 삼았다. 송암 김면은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령과 거창에서 의병을 모아 의병도대장(義兵都大將)으로 활약하다 순국했다.

고령토의 산지, 가야 도자기 전통 이어져

고령은 가야산의 맑은 물과 낙동강변의 비옥한 토질로 재배한 쌍림 딸기, 개진 감자, 성산 메론, 우곡 수박, 다산 참외와 향부자 등의 특산물이 알려져 있다. 고령은 딸기가 맛있기로 유명하지만 나는 달콤한 향이 나는 고향의 참외 맛에 단단히 중독되었다. 해마다 봄이면 비닐하우스에서 재배한 샛노란 햇참외가 생각나 작은아버지의 참외농사가 어찌 되었나 궁금해진다.

고령에는 장석이 풍화되어 만들어진 질 좋은 고령토가 나와 옛날부터 도자기와 옹기를 많이 만들었다. 성산 사부동과 기산동 도요지에는 도자기나 기와를 만들어 굽던 가마터가 아직까지 남아 있으며 가야토기의 전통이 이어져오고 있다. 대가야박물관 야외에 기이한 모양의 탑이 있어 그 앞에 멈추었는데, 이들 도요지에서 발견된 백자와 분청사기그릇, 도침, 갑발의 파편들을 모아 정성스레 쌓아 만든 도자탑이었다.

고령의 대표적인 토속주로 알려진 ‘본관동스무주(本館洞二十日酒)’는 성산 이씨 문중에서 명절이나 제례 때 조상에게 바치는 술로, 각종 대소사나 귀한 손님이 찾아왔을 때 내어 놓는 가양주(家釀酒)다. 스무주의 방문을 보면 전형적인 소곡주 빚는 법과 같은데, 먼저 밑술 빚는 법을 보면 쌀을 가루 내어 설기를 쪄서 뜨거운 기운이 빠지고 따뜻할 때 끓여 식힌 물과 누룩을 한데 혼합하여 발효시킨다.

‘스무주(二十日酒)’란 명칭은 술을 담근 지 20일만 지나면 먹을 수 있다는 데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만들기가 까다로워 지금은 제주(祭酒)용이나 혼사 등의 집안 행사와 주문에 의해서만 생산하고 있다. 고령에는 그 밖에도 우곡면 도진리 박씨 가문과 쌍림면 개실 김씨 가문 등 몇몇 종가에서 오래전부터 가양주를 전승해 오고 있다.

고령 5일장은 4일과 9일에 열린다. 5일장 구경을 위해 날짜를 맞추어 고령으로 내려갔다. 대구 서부정류장에서 고령으로 가는 버스의 승객 네댓 사람은 모두 고령 5일장에 가는 분이었다. 대구를 벗어날 때쯤 앞자리에 앉은 아주머니와 건너편 자리의 중년 남자분이 기사와 함께 고령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에 귀를 기울였다. 고령장은 예로부터 명성이 자자하여 지금도 대구뿐만 아니라 합천·성주·현풍에서도 물건을 사기 위해 찾아온다는 것이다. 남자분은 무엇보다 ‘고령소구레’가 고령국밥과 함께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고령장의 별미음식이라고 강조했다.

10시가 되기도 전에 도착했더니 장은 아직 한산하여 조금 둘러보다가 아침식사를 하러 식당에 들어갔다. 추어탕을 주문했더니 이제 막 미꾸라지를 넣었기 때문에 아직 추어탕은 안 된다고 하여 점심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갔다. 3대째 가업을 이어오고 있다는 ‘고령대장간’에는 이준희 씨가 불 앞에서 벌건 낫을 두드리며 망치질을 하고 있고, 아버지 이상철 씨가 낫이며 농기구를 손질하고 있었다.

대장간을 지나니 ‘창녕 이방 자연산 통발 미꾸라지’라고 적혀 있는 고무대야 안에 미꾸라지들이 거품을 내며 가득 담겨 있고, 그 옆엔 논우렁과 재첩이 놓여 있다. 고령장의 미꾸라지를 보니 어머니가 만들어주시던 추어탕이 생각나 괜히 그 앞을 여러 차례 기웃거렸다. 이젠 온 가족이 둘러앉아 먹던 그 진미의 추어탕 맛도 생각나지 않는다. 고향에서 나는 얼마나 멀어진 것인가.

201401호 (2013.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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