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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 산책 | 사학자 신용철의 포천 - 문화 전통 면면한 너른 대지 위의 운명공동체 

 

사진 주기중 월간중앙 기자
자연의 아름다움과 선비문화의 풍류 어우러진 경기 북부의 명당…접경지역 긴장 간직한 채 통일시대 여는 평화봉수대 역할이 역사적 책무

▎수도권의 허파로 불리는 광릉 숲. 산림박물관과 육림호가 있는 500만㎡의 광릉숲은 생태계의 보고로 신용철 교수의 어린 시절의 추억이 배어 있는 장소다.



평생 역사와 문학에 뜻을 뒀던 노학자의 열정은 고향 땅에서 태동했다. 지중해의 하늘을 동경했으나, 끝내 고향 백운계곡의 검푸르게 맑은 물을 잊지 못했다. 독일 대학에서 전통 유학 비판의 학문에 몰두했으나, 포천 딸깍발이 선비들의 지조와 의기에는 고개를 숙였다. 고향에 온통 포박된 삶을 살았음을, 먼 길 에둘러 고향을 다시 찾은 후에야 깨닫게 되었다.

포천시는 경기도 최북단으로 한반도의 중심이며 산하가 수려하고 풍요로워 사람 살기 좋은 고장이다. 역시 “살아서는 포천 가야 양반”이라는 선인들의 칭송이 헛말이 아니었다. 북위 37도 36 에서 38도 11, 동경 127도 05에서 127도 27 사이에 위치하여, 동서 38㎞, 남북이 47㎞인 포천은 해방 후 38선으로 분단되는 비운을 겪어야 했다.

강원도의 철원과 화천, 경기도의 연천군·동두천시·양주시·의정부시·남양주시와 접경하고 있으며 면적 약 830여㎢, 인구 약 16만쯤 된다. 서울에서 원산을 잇는 43번 국도를 따라 의정부에서 축석령을 넘거나, 동으로 청량리에서 금화로 가는 47번 국도의 퇴계원을 거쳐 내촌면의 엄현리 고개를 넘으면 된다.

포천(抱川)이란 한자처럼, 포천천이나 영평천 및 왕숙천 등 거의 모든 하천을 안으면서 만든 아늑한 평원은 포천인의 문화적 독자성과 베푸는 마음을 길러주었다. 의정부에서 포천으로 넘어가는 축석령 접경에는 ‘금강산 가는 길, 통일로 가는 길’이란 환영의 문구와 함께 호국로(護國路)가 이 지역의 전방 분위기를 말해준다.

해방 후, 38선 분단의 현장이고 치열한 전쟁터이기도 했던 포천은 다행히 일찍 수복되어 38선 이북의 땅도 모두 대한민국으로 돌아왔다. 두 개의 군단이 주둔할 정도로 안보상의 요지여서 대한민국의 많은 젊은이가 군 생활을 해온 곳이기도 하다. 이들이 자연스럽게 포천의 홍보대사가 되는 셈이다.

서쪽 남단의 축석령에서 왕방산(737m) 줄기가 북으로 이어지고, 29㎞의 포천천도 북으로 흐르면서 그의 동편에 아늑한 포천의 평야가 펼쳐진다. 동쪽의 남단 내촌면에서는 천마산 줄기에 이어 북으로 주금산(813m)과 서쪽 주엽산(601m) 사이에 좁은 내촌 평야가 전개된다. 주금산에서 다시 북으로 운악산(936m)과 이동면의 광덕산·백운산으로 이어져 백운계곡을 만든다.

이 백운계곡에서 서편으로 흐르는 도평천이 영중면으로 북상하는 포천천과 만나 영평천이 되어 T자처럼 그 주변에 기름진 평야를 만들면서 한탄강으로 합류한다. 지형상 산세가 수려하면서도 험악하지 않고 하천 역시 완만하여 고대로부터 포천천과 영평천 유역의 평야에는 자연재해가 적어 선인들의 자취가 서린 풍요로운 문화의 흔적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포천의 새 명소 아트밸리. 폐기된 채석장을 공원으로 조성한 곳으로 정상에는 암반에서 흘러나온 물이 고여 만들어진 호수가 있다.
옛 선인들의 발자취 곳곳에 남아 있어

‘문화의 세기’인 21세기를 충족할 중요한 요건 중 하나가 바로 박물관이다. 그런데 포천이란 삶의 공간 전체가 천정과 벽 없는 자연의 박물관이라고 나는 생각해본다. 자연의 명소 아닌 곳이 없고, 문화유적아닌 것이 있는가? 그래서 ‘아는 만큼 보인다’는 문화 답사의 제1 명제를 포천에서 실감한다.

가사면 금현리의 북방식 고인돌을 비롯하여 자작동과 일동면 수입리, 창수면 지석묘와 주거지 유적, 영송리의 선사 유적에서 옛 선인들의 발자취를 만난다. 고모리의 산성·반월산성·보가산성지·태봉산성지에서는 고대로 부터 치열했던 이 지역의 싸움터를 확인할 수 있다.

포천의 아름다운 자연과 풍류를 대표하는 것으로 청학동·백로주·금수정·선유담·낙귀정지·창옥병·와룡암·화적연 등 ‘영평 8경’이 이름 높다. 또한 현무암 협곡·샘소·멍우리 주상절리대·교동가마소·비둘기 낭구라이골·아우라지 베개용암 등 현대의 ‘한탄강 8경’ 역시 많은 관광객의 발길을 이끈다.


▎산정호수 주변에 조성된 소나무 숲은 일대에 짙은 피톤치트 향을 퍼뜨린다.
포천 남단의 광릉 국립수목원은 ‘수도권의 폐’로 불리는 산소탱크다. 500만㎢의 울창한 숲과 육림호, 산림박물관 등을 비롯하여 동식물과 곤충 생태계의 보고다. 한편 1960년대의 채석장을 친환경 관광지로 조성한 15만㎡의 ‘아트 밸리’는 산 정상의 호수와 기암절벽이 찾는 이들을 경탄시킨다.

1925년 조성된 산정호수는 주변이 절경임은 물론 보트장, 수영장, 썰매장으로 이용되는 명승지다. 세계 최초로 일반인에게 육군훈련을 참관케 하는 육군 8사단 승진훈련장 체험은 매우 진기하다. 기계화 부대의 기동훈련과 헬기사격 참관은 38선 분단의 현장다운 군사·전쟁문화의 좋은 체험장이다.


▎포천 청성공원에 있는 면암 최익현 선생의 동상. 면암은 위정척사 시기, 외세의 침탈을 거부한 보수적 애국자로 부를 수 있다.

▎한음 이덕형(왼쪽), 용주 조경 선생을 모신 용연서원. 포천은 강직한 선비를 많이 배출한 유교의 성지와 같은 곳이다.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스키장인 내촌면의 베어스타운, 광릉 주엽산과 이어진 서운 동산, 운악산 자연휴양림·평강식물원·허브 아일랜드·깊이 울 유원지·명성산 억새풀밭 등은 심신이 지친 도시인들을 끌어들이는 자연의 축복이다. 신북면·화현면·일동면에서는 온천도 즐길 수 있다. 명성산 억새축제를 비롯하여 백운계곡 동장군 축제·운악산 단풍축제·일동 오뚜기 축제·인삼축제·광릉축제 등도 참여자의 호응이 높은 포천 특유의 페스티벌이다.

포천은 예로부터 학문과 선비의 고향으로 충의의 선현이 많았다. 단종에 대한 충절을 지키다 처형된 사육신 유응부의 충목단, 병자호란 뒤에 활약한 인평대군의 신북면 묘소, 백강 이경여의 내촌면 묘소에서 당시의 역사를 읽는다. 특히 조선왕조 말기 위정척사(衛正斥邪)의 시기 도끼상소로 유명한 항일 애국 학자이며 투사인 면암 최익현(崔益鉉 )의 가채리 생가도 가볼 만한 곳이다. 최익현을 모신 사당 채산사(茝山祠)에는 그의 손자이며 애국지사인 최면식 선생도 함께 모셨다.

화산서원과 옥병서원, 용연서원 등 3곳의 서원은 포천이 유학의 고향임을 말해준다. 포천 출신은 아니지만 퇴임 후 포천의 영평천 변에 머물며 학문과 시문으로 생을 마감한 사암 박순의 옥병서원은 조선 초기 기호학파 학맥의 중요한 근거지다. 임진왜란 극복의 명신 백사 이항복(李恒福·1556∼1618)과 한음 이덕형(李德馨·1561∼1613)의 활동지고, 용주 조경(趙絅)도 포천의 인물이다. “내시는 중의 상투를 잡고, 중은 내시 아래(정랑)를 잡고 싸운다”는 재치 넘치는 비유와 같이 오성은 어려운 세상을 기지와 해학을 통해 슬기롭게 살았던 명현으로, 포천시를 상징하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한편 조선유학의 마지막 학파로 양평의 벽계서원에서 시작된 이항로(李恒老·1792∼1868)의 화서학(華西學)은 김평묵이나 최면암, 유기일 등 포천인 제자들을 통해 크게 선양, 전파되었다. 위정척사와 더불어 외침 배격의 상징인 최면암 선생의 동상은 포천의 청성공원에서 만날 수 있다. 그들 화서학파의 자취는 오늘날 포천 도처의 암각문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다.

포천 유학문화의 전통은 최근 와서문화원과 대진대학교의 설립으로 그 뿌리가 더 튼실해지고 있다. 특히 최종규 와서문화원 초대 원장의 헌신적인 노력이 유교 문화유산 발굴에 큰 힘이 됐다. 특히 이만구 현 원장에 이르러 전국 최우수 문화원으로 표창될 정도로 포천문화의 수준은 높이 현양되었다.


▎충장공 신립 장군의 형인 신급의 효행을 기리는 ‘효자정문’.



수염이 석 자라도 포천밥상이 최고

포천은 먹거리도 다양하다. 고향의 음식은 안방에서 받는 어머님의 밥상과 같아 가족은 물론 밖에서 오는 손님에게도 아주 매력적이다. ‘해솔촌 기찬쌀’은 고시히카리 품종을 이 지역의 기후와 땅에 맞게 연구하여 재배한 것으로 밥을 지으면 차지고 구수한 맛이 일품이다.

한과 맛의 절정을 즐길 수 있는 곳으로 영북면의 한과문화박물관(한가원)이 있고, 또 개성에서 피난 온 사람들의 인삼재배도 널리 보급되어 포천인삼으로 유명해졌다. 한편 사과와 포도 등도 맛이 좋기로 유명하다. 면적의 70%가 산지여서 포천의 잣은 두드러진 특산으로 여겨진다.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진 음식 중엔 이동갈비가 있다. 천연조미료를 사용하여 참나무 숯불에 구운 이동갈비는 값이 싸고 맛이 좋다. 일동면과 이동면의 갈비거리나 백운계곡 입구에는 ‘맛 자랑 멋 자랑’, ‘원조이동갈비’ 등 간판이 즐비하고 갈비를 굽는 기막힌 냄새로 유혹을 뿌리치고 그냥 지나치기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웰빙식품으로 사랑받는 신북면의 오리구이 역시 유명하다. 포천의 명품 음식 중엔 파주골 순두부가 있다. 영중면 관음산 오르는 길목인 성동리의 순두부 마을은 아름다운 뒷산을 배경으로 물고기가 보일 만큼 깨끗한 하천을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다. 국산 콩으로 갈아 만든 고소하고 담백한 순두부는 포천뿐 아니라 멀리 서울에서도 찾아오는 포천의 명물이 되었다.

포천의 막걸리 역시 이동갈비처럼 전국적인 명성을 얻은 지 오래고 요즘엔 외국에도 많은 양이 수출된다. 아름다운 산세에 맑은 약수로 만들어져 그 향과 맛이 독특하다. 일동 백운계곡 입구나 포천의 막걸리 배상면주가, 일동주조, 내촌주조는 포천막걸리의 중요한 생산지다. 배상면주가의 백하·흑미·산사춘, 청담(淸潭) 계곡의 맑은 물로 만드는 80년 역사의 3대가 경영하는 내촌주조의 약주인 ‘노미’가 특히 좋은 평판을 얻고 있다.

포천은 한때 38선의 분단으로 이동면과 영북면, 관인면의 거의 전부, 그리고 영중면의 일부도 북한 치하에 있었다. 6·25 때에는 북한 주력군이 탱크부대와 함께 남하한 곳이며, 전쟁 중 진격과 후퇴를 거듭했던 치열한 전장이기도 했다. 1948년 북한군 방어를 위해 축조한 신북면 기지리의 6·25 전투진지는 면적과 규모도 크고 중화기에 파손된 흔적 등으로 당시 전투의 치열함을 볼 수 있


▎38선휴게소에 있는 표지석 포천은 분단의 아픔이 서린 곳이지만 6·25 당시 38 이북의 땅을 모두 되찾았다.
는 곳이다.


▎내촌면 엄현리 둔터 생가를 찾은 신 교수가 마을 주민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어릴 적 꿈이 자란 엄현리 둔터 마을

영중면 영평교에는 38선휴게소가 있다. 하천 남쪽 현재 2층의 ‘38선 5각정 전망대’가 우뚝하고, 통일을 기원하는 몇 개의 석비와 특히 ‘三八線’ 을 새겨 놓은 자연석이 눈길을 끈다. 분단을 알지 못하는 소가 38선인 하천을 뛰어 넘어가면 아주 난처했다는 당시 주민의 이야기가 지금도 회자된다.

내가 태어난 고향은 내촌면 엄현리(奄峴里) 둔터다. 청량리에서 퇴계원을 거쳐 이동 김화로 가는 내촌면의 47번 국도변에 위치한

다. 마을 이름 ‘둔터(屯基)’는 주둔한다는 한자음의 ‘둔’ 과 한자음의 ‘基’ 를 이두문(吏讀文)처럼 ‘터’로 함께 쓴다.

태어난 집은 1937년에 지어져 나와 동갑으로 이 마을에서는 가장 오래된 집이다. 1967년 이사하기까지 30년 동안 이 집에서 살았으니, 지금 사는 아파트와 거의 비슷한 기간이다. 가족의 사랑과 아픈 사연들이 짙게 얽힌 추억의 고향집이다. 1950년까지 4대가 함께 보낸 13년간의 어린 시절은 행복했다. 집의 후원에는 꽃나무와 과일나무도 있었는데, 지금은 수령 50년이 넘은 옷나무 한 그루가 그 후원을 홀로 지킨다.

1980년대에야 전기가 들어온 고향은 서울에 가까웠으나 시골은 시골이었다. 잡초 우거진 산속이나 논밭 길을 걸으며, 뱀에 놀라고 벌에 쏘이면서 개천에서 개구리와 가재를 잡았다. 산과 들이 놀이터인 나는 유치원 같은 말은 들어보지도 못했다.

마을 한가운데의 언덕 ‘솟대 마을(말)’은 고대 사회의 신성한 소도(蘇塗)처럼, 상여나 가마 등도 지나지 못하는 금기(禁忌)의 관습이 있었다. 산밑에는 신급(申礏·1543∼1592)과 신윤하(申胤夏·1684∼1761)의 효행을 기리는 효자정문(孝子旌門)이 있었다.

신급은 벼슬하지 않았지만, 목숨을 걸고 병조판서 이율곡에 대한 무고를 통박하는 상소를 올릴 정도로 강직한 선비인데, 임진왜란 당시 도순변사로 충주에서 전사한 충장공 신립(申砬) 장군의 작은형이다. 큰형인 신잡은 선조를 의주로 호종(扈從)하고, 아래 동생 신립은 충주에서 왜군과 맞서 싸웠다. 막내 신할(申硈)은 어머님을 모시고 피난 중 경기도 이천에서 어머님을 구하려다 절벽에서 변을 당하였는데, 그분이 나에게는 14대조가 된다.

군대 생활을 빼곤 학교를 떠나지 않았던 내가 배움을 시작한 것은 여섯 살 때 마을의 한문서당에서였다. 15명 정도의 학동이 있었는데 내가 가장 어렸다. <천자문>부터 시작해서 <계몽편>과 <동몽선습>을 마치고 <통감> 첫 권을 시작하다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그 서당 자리에는 오늘날 내촌중학교가 설립되어 마음이 흐뭇하다. 1944년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1945년 해방을 맞았으며, 동시에 멀지 않은 고향 북쪽에 38선이 그어진 사실을 어렴풋이 알았다. 1948년 한국 최초의 국회의원 선거도 보면서 1950년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용산중학교에 입학하였다.

해방이 되던 1945년부터 우리는 한글을 전교생이 함께 배운 세대다. 초등학교 3학년 때 겉장과 뒷장이 없는 240여 쪽 분량의 우리말 책을 읽게 되었다. 어려워도 20장의 삽화도 있고 해서 흥미로웠다. 신라의 박혁거세, 고구려의 동명성왕으로부터 고려의 태조 왕건이나 고려 말의 신돈에 이르기까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에서 뽑아서 번역한 <조선사화집>이었다.

나는 경주와 평양, 부여와 개경 등의 왕도를 그 책을 통해 상상했다. 5학년 때 배운 <우리나라의 발달>이란 사회과 교과서를 처음 읽고 나서야 그것이 우리의 역사인 줄 알았다. 중고등학교에서 역사를 좋아하고 대학에서 전공하는 동기가 된 책이 바로 이 <조선사화집>이다.


▎영평 8경중 하나인 금수정. 현판 글씨는 봉래 양사언의 친필이다.



고향 내촌 5일장에서 산 책이 운명 갈라

어린 시절의 고향에서의 행복은 바로 6·25 전쟁 중 아버님과 사별하면서 비참하게 무너졌다. 서울에서의 중학교 생활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었다. 몇 차례 피란을 가야 했고, 6·25 직후엔 북한 인민군의 치하에서, 1·4 후퇴 당시에는 다시 중공군을 포함한 북한의 점령 하에서도 살았다. 고향에서 인민군과 중공군을, 10개국이 넘는 유엔군을 만나게 되었으니 앉아서 국제화·세계화를 경험한 셈이다.

건물도 없는 고향의 중학교에 입학하여 2차례나 학교를 짓는 노동에 참여했다. 1953년엔 휴전을 반대하는 운동에 참여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중학교를 졸업했다. 전쟁 중이던 중학교 2학년의 여름, 고향 내촌 5일장의 시장 바닥에서 책 한 권을 샀다. <한니발 전>이었다. 겉장에 말 탄 장군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이 책에서 유럽의 고대 지중해 세계를 만나게 되었고, 비슷한 시기에 <플루타르크 영웅전>에도 매료되었다. 내 일생에 가장 열심히 읽은 두 권의 책이며, 서양사와 수사학의 맛을 내게 가르친 책들이다.

치열한 영웅들의 일생, 특히 그들의 논리적인 대결이 나를 흥분시켰고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것이 바로 수사학(修辭學)의 전율적인 매력이었다. 전쟁과 집안의 어려움으로 ‘비탈에 선 나무’처럼 흔들렸던 내게 정신적 버팀목이 되어준 책이다. 이 책을 통해 푸른 지중해와 새파란 하늘 아래 포도밭이나 올리브 나무의 들판을 상상하곤 했다.

중 2때부터 나는 글을 쓰고 싶었다. 극도로 위태로운 미래, 주변의 혼란, 위기의 가정환경 등으로 몹시 괴로울 때였다. 아픈 이를 눌러서 잠시 통증을 잊는 병적 쾌감처럼, 무엇에 열중하며 이야기하고 싶었다. 중학교 시절 국어를 가르친 은사 남궁전 선생은 어느 해 여름방학 때 쓴 내 일기장을 읽고 나서, 이런 말을 써주셨다.

“노들강변 백사장에 이름 모를 발자국도, 때로는 맘 있는 나그네의 마음을 이끄노니, 비바람 겪을수록 더욱 뚜렷해질 이 기록은, 그대 생애에 남긴 땀방울의 흔적이라. 고이 간직하여 인생 예수화의 도시락을 삼으라.”

그 일기장은 없어졌지만, 그 평만은 기억하고 있다. 아직 살아 계신 92세의 남궁전 선생은, “그걸 어떻게 아직도 기억하느냐?”며 웃는다. 그때 되지도 않은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 지금까지 60여 년이 넘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가정형편 때문에 진학하지 못하고 집에서 2년간 농사를 지으니 참으로 힘들었다. 2년 후 군대에 입대하였는데, 철원의 최전방과 포천의 일동과 이동지역에서 교대로 근무하여 군 시절을 통해 고향 공부는 알차게 한 셈이다. 제대 후 사학과에 진학하여 어렵게 생활하는 중에도 미래를 꿈꾸었다.

독일 유학 중 전공은 중국사를 선택했다. 논문 주제는 중국 명나라 시대의 지식인 이탁오. 그는 유교적 권위에 맹종하지 않고 자아중심의 혁신사상을 제창한 인물이다. 금욕주의·신분차별을 강요하는 예교(禮敎)를 부정하며 남녀평등을 주장했으나 반(反)유교적이라는 이유로 박해를 받아 죽었다. 유학에 대한 비판을 논문 주제로 삼은 것은 스스로 생각해도 놀라운 일이었다. 일견 고향과 선조의 삶에 대한 부정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영북면 문암리 태국군 참전비. 오른쪽 태국식 건물에는 태국 국왕이 하사한 불상이 있다.
관습적으로 수용하던 나의 유교관에 일대 반성과 비판이 시작된 것이다. 독일인들이 도시의 건물을 수리할 때 겉모습은 그대로 두고 내부만 수리하듯 나 역시 시대마다 변화하는 유교의 사상을 궁구하며 시의에 맞는 비판적 수용을 모색했다. 이탁오에 대한 공부의 결과는 <공자의 나라 중국을 뒤흔든 자유인 이탁오>(지식산업사·2006)란 책으로 묶여 나왔다.

고향으로 돌아와 나이테를 세다

독일에서 학위를 받고 1981년 귀국하여 경희대학교 교수로 취임한 이래 참으로 바쁘게 배우며 가르쳤다. 학생들에게 비판적인 유학의 수용을 가르치는 한편, 문화와 박물관 분야의 일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경기도 문화재위원과 국사편찬위원 등 역사·문화 분야의 외부 보직에다, 경희대 박물관장을 다년간 맡게 되면서 고향의 역사와 문화에 관한 관심은 더욱 커졌다.

1987년 경기도 문화재 위원으로 무봉리 유응부 선생의 충목단을 문화재로 지정한 것이 내가 고향 포천의 문화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때 나를 고향 포천으로 다시 안내해준 분은 최종규 당시 포천문화원장이었다. 그분은 면암 최익현의 현손(5세 손)으로 포천문화원을 창설하고 다년간 원장으로 포천문화 발굴과 선양에 탁월한 업적을 쌓았다.

그의 배려로 포천의 자연과 문화유적지를 순례하고, 특히 유학과 화서학파의 사적을 열심히 찾아다녔다. <사암 박순> <포천 화서문인들의 애국사상과 활동> <용연서원과 봉래 한음 용주 등 학덕경세의 유학자들> 등 포천의 유학자에 관해 3차례나 논문을 쓰게 된 것도 최종규 원장의 가르침과 영향 덕분이다.

1997년 KBS TV에 방영되는 <신한국기행>에서 ‘신용철의 포천’을 소개하며 포천 곳곳을 누빌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것도 행운이었다. 사학자와 학생들의 포천 문화답사를 여러 차례 인솔하면서 고향과의 정을 더욱 두텁게 했다. 박물관장으로서 포천지역을 조사·답사하여 보고서를 내고 학교에서 전시회를 갖기도 했다.

내가 어디에서 출발하여 어디로 가는가를 생각할 때가 있다. 무의식적으로 역사를 좋아하다 연구하며 가르치며 쓰는 일이 평생의 즐거운 숙제처럼 되었다. 그런데 최근 그 역사가 어린 시절 고향의 삶과 배움에서 비롯되었음을 확인하며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되었다.

어려서 읽은 <조선사화집>에서, 광릉에서, <프루타르크 영웅전>에서 역사에 대한 흥미를 갖게 되었음을 알게 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매우 경직된 유교의 가문은 아니었지만, 4대가 함께 사는 대가족으로 5대까지 제사하는 전통의식 속에서 30년을 살았다. 그것이 유교라는 의식을 특별히 갖지 않았고, 그저 당연한 관습으로 생각했다.

어려서부터 분단의 지역에 살았고, 6·25 전쟁으로 가족이 큰 피해를 입었으며, 군대 주둔으로 전쟁의 아픔을 체험했다. 인민군과 중공군을 비롯하여 미군과 10개국 이상의 유엔군을 만나면서, 그들의 나라를 상상해보았다. 전쟁 때의 강박과 위기의식은 대단하여 아직도 피란하는 꿈을 꾸곤 한다. 분단의 땅에서 전쟁을 체험하고, 통일하는 독일을 목격했으며, 다시 분단의 고향에서 통일의 미래를 산책해본다. 기구한 운명이다.

전쟁 중 사회의 위기를 목격하고 어려운 가정형편을 겪으면서 나는 매우 사색적이고 내면적이며 비관적인 생각을 자주 하게 되었다. 이 괴로움을 해소하는 방법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것이 결국 내 일생의 중요한 업의 일부가 되었으니 그것도 고향이 부과한 하나의 숙제인 듯하다.

그래서 고향에 오면 나는 자주 나를 찾아 확인한다. 그것은 베어놓은 큰 나무의 그루터기에서 나이테를 보며 나를 비교해보는 것과 같다. 그 나이테처럼 천천히 성장하여 오늘의 내가 되었음을 확인한다. 역사와 문학에 관한 나의 관심과 연구는 내 어린 시절부터의 꿈이 이미 고향 땅에서 태동하여 지금에까지 흘러왔음을 깨닫게 된다.

201406호 (2014.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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