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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의 ‘로드 클래식’ | 서유기③(마지막 회)―요괴의 길, 깨달음의 길! 

종착지 없는 득도행, 여행이 끝나자 길은 시작된다 

고미숙 고전평론가
‘모든 존재는 서로 돕고 의지한다’는 인연법의 각성…그럼에도 자신을 구원하는 궁극의 존재는 오직 자신뿐

▎국내에서 공연된 <서유기> 인형극의 한 장면. <서유기>가 현대의 예술장르에 끊임없이 영감을 주는 이유는 진리를 깨달아가는 인간의 보편적 행로를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구도자는 진리를 깨닫기 위해 끊임없이 길을 떠나는 자이지만 요괴는 자신의 성취에 도취되어 그 길을 포기한 존재다. 정착민의 욕망에 붙들리는 순간, 누구든 요괴가 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다. 요괴와 인간의 경계는 한끝 차이, 요괴는 바로 ‘내 안’에 있다.

홍해아_ 화운동 요괴. 입에서 불을 토해내고, 코에선 짙은 연기가 뿜어져 나온다. 눈을 깜빡이면 불꽃이 뿜어져 나오고, 다섯 대의 수레 위에선 불빛이 솟아오른다. 이 불빛에 휩싸이면 하늘과 땅이 활활 타오른다. 손오공도 이 불과 연기 속에서 삼혼을 빼앗겨버렸다.

독각시대왕_ 금두산 요괴. 창검술의 무공도 대단하지만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고리를 가지고 있다. 손오공의 여의봉을 비롯하여 하늘신들의 무기―불용·불말·불까마귀·불칼·불활― 를 순식간에 거둬들였다.

거지국의 세 신선_ 비바람 일으키는 것을 손바닥 뒤집듯 하고, 물로 기름을 만들어내거나 돌을 금으로 바꾸며 별자리의 오묘함도 바꿀 수 있다. 기타 등등.

보다시피 <서유기>는 요괴의 향연이다. 요괴는 멋지고 화려하며 강렬하고 집요하다. <터미네이터3>의 주인공 같은 ‘변신술의 달인’도 있고,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 나오는 ‘오무군단’처럼 눈이 수십 개인 ‘다목요괴’도 있다. 사자와 코끼리, 봉새처럼 파워풀한 야수에서 거미와 벌, 나나니(구멍벌과의 곤충, 애벌레를 사냥해 새끼의 먹이로 삼는다) 같은 곤충을 비롯하여 대나무·살구나무·벚나무의 정령들에 이르기까지, 삼라만상의 온갖 만물이 다 요괴다. 이들이 구사하는 술법도 상상 그 이상이다.

오운육기(풍한서습조화)를 자유자재로 다루는가하면, 치명적인 미인계로 유혹하기도 한다. 신비롭고 고상한 풍류의 세계로 이끄는가 하면, 부귀영화의 극치를 제공하기도 한다. 이런 장애를 뚫고 길을 가자니 삼장법사 일행은 별의별 고난을 다 겪는다. 가장 황당한 것으로는 여인들만 산다는 서량녀국에선 삼장법사와 저팔계가 임신을 하는 해프닝을 겪기도 하고, 희시동 천년똥길에선 저팔계가 쇠스랑으로 밤새 똥을 치기도 했다. 그야말로 산전수전, 간난신고, 좌충우돌의 연속이다. 그래서 드는 의문. 웬 요괴가 이렇게 지천에 널렸단 말인가? 과연 이 길이 서천행이긴 한 건가?

하지만 거꾸로 물어보자. 요괴가 없었다면 과연 이 길을 갈 수 있었을까? 만약 가는 길마다 태평하고 도처에서 환대를 받았다면? 단언컨대, 길을 갈 수 없었으리라. 아니, 그건 길이라는 개념에 부합하지 않는다. 길이란 장애와 번뇌를 마주하는 것이고, 그로부터 힘을 길어 올려 다시 한걸음을 내딛는 것을 의미한다. 고로, 구법과 고난, 서천과 요괴는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이것이 <서유기>의 ‘반전포인트’다.

관음보살과 ‘팜므파탈’ 요괴들

삼장법사는 십세(十世)토록 원양(생명 활동에서 힘의 근원이 되는 신의 양기)을 보존해왔지만 사람의 몸을 지니고 있는 한 결코 81난을 피할 수 없다. 그것이 인간의 운명이다. 세 명의 제자야 말할 나위도 없다. 지난호에서 밝혔듯이, 이들은 ‘탐진치’의 화신이다. ‘탐진치’를 털어내고 무상과 자비를 터득하려면 끊임없이 싸우고 또 겪어야 한다. 그래야만 ‘탐진치’로 향하는 기질과 습관이 덜어지기 때문이다. 즉, 이들에겐 전투와 환란이 곧 공부이자 수행인 것. 따라서 이 싸움은 요괴와의 싸움이자 동시에 자신과의 대결이기도 하다.

<서유기>에는 운문이 사건의 진행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주로 요괴들과의 전투신을 멋들어진 운문으로 압축해서 보여주는데, 그 와중에 세 제자가 자신의 내력을 길게 읊조리는 대목이 자주 등장한다. 이를테면, 전투를 치르기 직전 ‘자신이 누구고, 왜 지금 여기 있는지’를 환기해주는 장치인 셈이다. 그래서인가. 전투가 진행될수록 이들은 확실히 달라진다. 손오공은 분노조절 장애가 한결 완화되고, 저팔계는 식욕과 성욕의 덫에서 점차 벗어난다. 사오정의 치심 또한 신중함과 배려의 차원으로 이동하게 되고.

물론 요괴들과의 싸움은 늘 아슬아슬하다. 생사를 넘나들고, 창자를 쥐어짜며, 혼백이 아득해지는 경험을 수시로 겪어야 한다. 하지만 이들에겐 요괴만 있는 건 아니다. 이들을 시종일관 엄호해주는 수호신도 있다. 관음보살이 바로 그런 존재다. 관음보살은 이들을 서천으로 가도록 이끌었을 뿐 아니라 가는 도중에도 각종 배려를 아끼지 않는다.

말하자면, 이 장쾌한 로드무비의 총감독격인 셈이다. 헌데, 그의 ‘성정체성’은 여성이다. 하지만 이 여성성은 남성/여성이라는 이항대립의 산물이 아니다.(석가여래의 남성성이 그런 것처럼) 그 대립을 뛰어넘는 ‘충만한 신체, 충만한 대지’로서의 여성성인 것. 단호하고 엄정하지만 자비와 지혜로 무장한, 부드러운 카리스마의 전형이다. ‘여성이 세계를 구원한다’는 인류학적 테마를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와 극명하게 대비되는 여성성도 존재한다. 서량녀국의 여왕·거미요괴·쥐요괴·토끼요괴 등등. 이들은 모두 치명적 아름다움으로 무장한 ‘팜므파탈’이다. 이들의 목적은 능력 있는 남성을 붙들어 자신의 왕국에 정착시키는 것. 당연히 이 여성들의

주타겟은 삼장법사다.

그가 지니고 있는 눈부신 외모와 순수한 원양, 드높은 법력 등을 독점하기 위해서다. 말로는 사랑이라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쾌락이고 집착이다. 그렇게 사랑한다며 꼬드기다가 삼장법사가 넘어오지 않으면 그때부턴 삶아먹겠다고 협박을 해댄다. 우리 시대의 사랑법과 너무도 닮았다. ‘쾌락과 폭력의 이중주’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서유기>에 등장하는 다양한 요괴를 그린 삽화.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으로 가짜 손오공·거미요괴·홍해아·나찰녀.



도가 높아질수록 요괴 또한 강해진다네

이들 아름다운 요괴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지만 결국은 하위주체다. 남성을 유혹하고 그 남성에게 의지하고자 하는 속성 때문이다. 이들의 욕망은 참으로 집요하다. 그래서 그 어떤 요괴보다도 삼장법사 일행을 난관에 빠뜨린다. 손오공의 술법과 괴력이 가장 안 통하는 대상이기도 하다. 구법의 가장 큰 장애물이 무엇인지를 여실하게 보여주는 셈이다. <서유기>에는 수많은 속담이 등장하는데, 이런 상황을 기막히게 압축해주는 속담이 하나 있다. “때가 되면 ‘좋은 친구’를 만나고 운이 다하면 ‘미인’을 만난다.”

‘도가 한 자 높아지니 요괴의 시험은 한 길 높아진다’. 중반을 넘어서면서 자주 등장하는 아포리즘이다. 과연 그렇다. 수행과 마장(魔障)은 함께 간다. 번뇌가 보리라는 말도 이런 의미일 터, 이것이야말로 불교적 대역설이다. 우리는 보통 수행을 할수록 만사형통할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장애를 만나면 곧바로 멈추려고 한다. 이 길은 나와 맞지 않아, 라고 하면서. 그러면서 또 다른 길을 찾아 나선다. 하지만 그건 갈지(之)자 행보, 곧 좌우로 ‘왔다리 갔다리’ 하는 것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길을 간다는 것, 구도자가 된다는 건 지금보다 더 ‘강도 높은’ 장애를 만나기 위함이다. 그래야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중생을 구제하는 ‘동체대비’의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삼장법사와 아이들의 행보가 그렇다. 처음엔 오직 앞으로 가는 것이 목적이었다. 요괴들을 피하기도 하고 건너뛰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해봤자 요괴들은 다시 도래했다. ‘건너뛴 삶’이 ‘무서운 괴물’이 되어 다시 돌아오듯이. 그래서 중반부를 넘어서면 이 밴드의 행보가 좀 달라진다. 굳이 자신들의 길을 방해하지 않은데도 요괴들과의 전투를 불사한다.

요괴들이 ‘니들이 뭔 상관이냐, 그냥 갈 길을 가라’고 해도 개의치 않는다. 요괴들을 물리쳐 중생의 번뇌를 덜어주고자하는 자비심이 증득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구국에선 1천명이 넘는 아이들의 목숨을 구해주기도 하고, 멸법국에선 승려들의 고난을 해결해주기도 한다.

또 금성국에선 병든 왕을 진맥해서 담을 흩어준 다음 그 마음의 병까지 고쳐주겠다며 요괴와 한판대결을 벌인다. 봉선국에선 비를 불러 오랫동안의 가뭄을 해결해주고 세 명의 왕자를 제자로 받아들여 무공을 전수해주기도 한다. 요괴와 만나면 분노와 공포 속에서 어떻게 때려잡을까만 생각하던 때와는 사뭇 달라진 것이다. 처음엔 주로 부정적 방식으로 길을 열었다면, 이젠 능동적으로 길을 만들어간다. 존재의 구원이 중생의 구제와 다르지 않다는 대승불교의 진리, 혹은 ‘길이 있어 가는 것이 아니라, 가는 곳마다 길이 되는’ 경지가 이런 것이리라.

언급했듯이, 요괴들의 출신과 유형은 실로 버라이어티하다. 하늘나라에서 쫓겨온 자들에서 동물·식물들의 정령이 기본인데, 개중에는 오랫동안 수행과 수련을 해온 구도자도 있다. 구도자들이 요괴라고? 그렇다. 손오공의 사례가 잘 보여주듯, 오랜 수련을 통해 자연의 변화무쌍한 조화를 터득하는 과정에서 욕망의 벡터가 약간 틀어져버리면 바로 요괴가 되어 버린다. 결국 구도자와 요괴는 한끝 차이란 셈인데, 그럼 그 차이가 무엇일까?

아주 간단하다. 구도자는 진리를 깨닫기 위해 끊임없이 길을 떠나는 자이지만 요괴는 자신의 성취에 도취되어 그 길을 포기한 존재다. 그럼 그들은 무엇을 하는가? 특정구역을 차지한 뒤 지배자로 군림하기 시작한다. 예컨대, 사람들에게 통행세를 부과하거나 아니면 승려나 국왕 같은 실세들을 꼬드겨 혹세무민의 악행을 저지르거나. 또 인근의 친인척을 초대하여 파티를 여는 것이 일상의 주요행사다. 한마디로 제국의 정착민들이 하는 짓을 고스란히 복제하고 있다.

‘요괴’는 바로 내 안에 있다!―정착과 불멸

<서유기>를 대표하는 요괴 중에 우마왕과 나찰녀, 홍해아가 있다. 이들은 패밀리다. 우마왕와 나찰녀가 부부고, 홍해아는 그들의 아들이다. 홍해아는 손오공 일행과 맞서 싸우다가 관음보살에게 제압되어 선재동자가 되었다. 그런데도 우마왕과 나찰녀는 손오공에게 복수를 감행한다. 참 희한하지 않은가. 자식이 지옥에 떨어진 것도 아니고 관음보살의 수제자가 되었는데도 복수의 정염이 사그라지지 않는다. 왜?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살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이게 바로 정착민적 발상이다. 자식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그 사랑에는 자신들의 욕망이 짙게 투사되어 있다. 그걸 벗어나는 꼴은 못 보겠다는 거다. 어디 그뿐인가.

우마왕은 혼세마왕의 딸 옥면공주를 첩으로 삼는다. 옥면공주는 부모의 유산으로 백만장자가 되었는데, 그걸 관리하기 위해 초절정의 파워를 자랑하는 우마왕을 유혹한 것이다. 그러자 정부인인 나찰녀는 첩에 대한 질투심으로 더더욱 포악해진다. 손오공은 나찰녀의 파초선을 빼앗기 위해 이 삼각관계를 적극 활용한다. 참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다. 이렇듯 아무리 도가 높다 해도 정착민이 되는 순간 족보와 패밀리, 재산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 아니, 그 반대로 말할 수도 있다. 정착민의 욕망에 붙들리는 순간, 누구든 요괴가 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다고.

다른 유형의 요괴들 역시 마찬가지다. 곤충요괴들은 모계사회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의 특징은 맹렬한 번식욕이다. 손오공으로선 가장 난감한 상대들이다. 찐득찐득하고 엉키고 설켜서 타격의 포인트를 잡기가 어려운 탓이다. 쥐요괴의 경우는 3백 리가 넘는 ‘순음(純陰)의 구덩이’가 그들의 거처다. 이것은 남성을 유혹하는 여성들의 ‘깊은 자궁’을 의미한다. 여기에 빠지면 헤어날 길이 없다. 이렇듯, 오로지 번식욕망에 사로잡혀 사는 것이 여성요괴들의 특징이라면 남성요괴들은 하나같이 정복욕에 불타고 있다.

거지국의 세 도사들을 비롯하여 사자, 코끼리, 봉새는 몇만 명에 달하는 군대를 일사불란하게 지휘하는 위용을 자랑한다. 요컨대, 여성은 남성을 이용해 자신의 분신을 복제·증식하고자 하고, 남성은 또 그것을 바탕으로 천하를 지배하고자 한다. 그 다음엔? 이 욕망의 영원한 지속을 위해 불사약을 찾아 헤맨다. 삼장법사의 원양을 노리는 것도 그 때문이다.

정착과 지배, 그리고 불멸! 참으로 익숙한 논법 아닌가. 그래서 요괴와 인간의 경계는 한끝 차이가 된다. 아니, 더 진솔하게 말하면, 요괴는 바로 ‘내 안에 있다’.

이 점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 가짜 손오공 소동이다. 손오공이 제 성질을 못이겨 또 살생을 저지르는 바람에 두 번째로 쫓겨났을 때였다. 화과산수렴동으로 돌아가자니 졸개들의 비웃음을 살 것 같고 하늘이나 바다로 가자니 신과 용왕에게 구차스럽게 보일 테고…. 어디에도 의지할 데가 없어지자 손오공은 결국 관음보살을 찾아간다. 그 사이에 가짜 손오공이 등장하여 팀을 위기에 빠트린다. 가짜 손오공은 화과산 수렴동을 차지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스승의 도를 가로채고 취경(取經)의 임무까지 수행하고자 한다.

“내가 당나라 중을 때려눕히고 짐을 빼앗아온 건, 서방에 가지 않으려는 것도 아니고 이곳에 사는 게 좋아서도 아니야. 내가 지금이 통행증명서를 다 읽어봤는데, 나 혼자서 서방에 가 부처님을 뵙고 경전을 구해서 그걸 동녘 땅에 가져가련다. 그렇게 나 홀로 공을 이루어 남섬부주 사람들로 하여금 날 교조(敎祖)로 받들게 해서 천추만대에 길이 이름을 남길 생각이야.”(6권, 200쪽)


▎<서유기> 주인공들은 우스꽝스럽고 불완전한 모습으로 그려지지만 그 캐릭터가 독자에게 보여주는 진리와 각성의 세계는 자못 진진한 것이다.



저기 두 마음이 싸우고 있구나!

대단한 야심 아닌가. 석가여래마저 속일 작정으로 가짜 삼장법사, 가짜 백마, 가짜 저팔계, 가짜 사오정까지 다 마련해두었다. 완벽한 복제! 이건 손오공 안에 있는 또 다른 욕망의 발로에 해당한다. 무소불위의 능력으로 천하를 지배할 뿐 아니라 스승의 도까지 가로채어 불멸의 영광을 누리겠다는 심보인 것.

가짜와 진짜의 싸움은 치열했다. 둘은 어찌나 흡사한지 관음보살, 옥황상제, 염라대왕도 구별하지 못한다. 결국 “그들은 서로 머리채를 움켜쥐고 팔로 목을 감은 채 하늘 문을 나와” 석가여래를 찾아간다. 석가여래가 하는 말씀. “저것 보아라. 두 마음이 서로 싸우며 오고 있구나.”

“사람에게 두 마음 있으면 재앙이 생기나니/ 하늘 끝 바다 언저리에서도 의심과 시기가 생긴다네/ 멋진 말 타고 높은 벼슬에 오르고 싶어하고/ 또 금란보전 최고 자리를 마음에 품게 되지/ 남북으로 뛰어다니며 쉴 틈도 없고/ 동서로 치받고 다니며 평안할 날 없구나!/ 불문에서는 모름지기 무심의 비결을 배워야 하나니/ 고요히 수련하여 신선으로 탈태환골을 이뤄야지”(6권, 224쪽)

결국 석가여래에 의해 가짜의 정체가 드러나고 진짜가 가짜를 완전히 박살낸 다음에야 이 싸움은 종결된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건 결국 자신이라는 뜻일 터, 그렇다면 이제 다시 물어야 한다. 요괴란 과연 무엇인가?

요괴 중에는 하늘의 신이 기르던 동물도 있다. 손오공이 죽어라고 싸워 요괴를 물리치고 보면, 관음보살이 시험용이었다며 다시 데리고 간다. 투덜거리는 손오공. “그 보살도 정말 지독하군! 이 몸을 풀어 주고 삼장법사를 호위하여 경전을 가지러 가라고 했을 때 내가 길이 험하여 가기 어렵다고 했더니, 다급하고 어려운 상황에 빠지면 직접 와서 구해주겠다고 해놓고, 이제 와서 도리어 요괴들을 시켜 목숨을 위협하다니! 말이 틀리지 않은가? 평생 혼자 사는 것도 당연해!” 그야말로 점입가경이다. 이젠 요괴와 보살의 경계조차 흐려지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다 보니 요괴의 정체를 탐색하는 것이 아주 중요한 미션이 되었다. 세 제자가 죽어라고 싸우다 안되면 그 다음에 하는 일이 그 요괴의 출신과 유래를 탐색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늘과 땅, 용궁 등으로 가서 주인을 데려오면 요괴는 바로 굴복한다. 모든 무기를 다 빨아들이는 고리를 갖고 있는 독각시대왕의 주인은 태상노군(노자)이다. 무소불위의 힘으로 손오공을 위기에 빠뜨리다가 태상노군이 등장하자 부들부들 떨며 말한다.

“도둑놈 원숭이가 정말 여간내기가 아니네! 어떻게 우리 주인님을 다 찾아내 왔지?” 이어지는 장면. “태상노군이 주문을 외며 파초선을 한 번 흔들자, 요괴는 고리를 떨어뜨렸어요. 태상노군이 그걸 거둬들이고 다시 한번 부채질을 하자, 요괴는 온 몸의 기운이 빠져 흐늘거리더니 마침내 본모습을 드러냈어요.

그것은 다름 아닌 한 마리 푸른 소였지요. 태상노군은 금강탁에 신선의 기운을 훅 불어넣어 소의 코를 꿰고, 도포를 매었던 띠를 풀어 금강탁에 묶어 끌고 갔어요.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소의 코뚜레, 일명 ‘빈랑(檳榔)’이라고도 하는 것이 이때부터 시작된 거랍니다.”(6권, 63쪽)

독각시대왕뿐 아니라 ‘난다 긴다’ 하는 다른 요괴들 역시 이런 식으로 굴복당하여 자신이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간다. 이 또한 불교적 가르침에 따른 것이리라. 초기불교에 속하는 ‘위파사나’ 수행법은 ‘보면 사라진다!’가 기본원리다. 욕망과 번뇌의 근원을 ‘있는 그대로’ 보면 그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요괴와 싸우기 위해선 마땅히 그것의 체와 유래를 파악해야 한다. 모르는 상대와 싸운다는 건 맹목과 무지의 악순환이 될 터이니 말이다.

그렇다 해도 여전히 의아한 점이 있다. 그렇게 펄펄 날다가도 요괴들은 왜 주인만 오면 맥을 못 추는 걸까. 그 정도의 술법이면 주인하고도 맞짱을 뜰만한데 말이다. 이치는 간단하다. 스스로 터득한 능력이 아니라 주인의 것을 훔쳐왔기 때문이다. 그 경우엔 스스로 생성하고 창조할 능력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술법은 주로 부정적, 파괴적 힘으로만 작용한다. 졸개들을 거느리고 ‘나와바리’를 점령하고 길을 막는 것. 다시 말해, 타인의 능력을 빼앗는 데는 능하지만 뭔가를 창조하고 생성하기엔 역부족이다. 그래서 ‘반자연’이다. 니체가 말한 노예의 도덕이 이런 것일 터. 아무리 거대하고 강하다 한들 자신이 생성한 것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리 작고 미미한 것일지라도 스스로 터득한 것이라면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다. 이것이 자연의 원리다. 그래서 자연에는 대/소, 강/약의 척도가 아니라 스스로 생성할 수 있느냐/없느냐의 차이만이 적용된다. 주인이 될 것인가? 아니면 노예가 될 것인가? 요괴와 구도자의 차이도 여기에 있다.

아울러 관음보살이나 태상노군이 하는 일은 이들을 제자리로 되돌려놓는 것이다. 즉, 무조건 죽이고 응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본래 면목을 되찾도록 하는 것이 요괴 퇴치전략의 핵심이다. 그래서 또 헷갈린다. 과연 요괴란 무엇인가?

요괴퇴치전략―주인을 찾아라!

적이면서 동시에 나의 분신이고, 영웅이면서 원수이며, 천하게 몹쓸 요물이면서 동시에 보살의 현현이다. 안에 있는가 하면 밖에 있고, 밖에서 오는가 싶으면 어느새 나의 심연을 차지하고 있다. 전후좌우 그 어디에도 있고, 또 그 어디에도 없다. 이것이 요괴의 정체다. 그런 점에서 요괴란 일종의 ‘화두’다.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해 반드시 던져야 하는 존재와 우주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 화두! 삼장법사와 세 제자는 이 화두를 붙들고 끊임없이 씨름한다. 그러므로 요괴를 만나지 않고서 도를 깨치는 건 불가능하다!

서천이 가까워올 무렵, 손오공은 변신술을 쓰고 신통력을 부리는 일을 이야기해주었다. 스승과 제자들은 모두 웃느라고 입을 다물 줄을 몰랐다. 그렇게 한참 즐거워하고 있는데, 갑자기 높은 산이 나타났다. 삼장법사가 금방 얼어붙었다. 손오공이 웃으며 <반야바라밀다심경>을 외우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네 구의 게송을 읊어준다. “부처님은 영취산에 있으니 멀리서 찾지 말라/ 영취산은 바로 그대의 마음 속에 있느니라/ 사람들에게는 모두 영취산의 불탑이 있으니/ 그 불탑을 보고 수행하면 되느니라.”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의지와 정성이 있다면 뇌음사(雷音寺)는 바로 눈 앞에 있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사부님처럼 그렇게 두려워하고 당황해 하며 마음이 불안하면 대도는 멀어지고 뇌음사도 멀어지게 될 겁니다. 쓸데없이 의심하지 마시고 저를 따라오세요.”(8권 138쪽) 처음 길을 나설 때 사부님의 속도로는 수천 번을 다시 태어나도 도달하기 어렵다며 투덜거렸던 손오공에게서 이런 말이 술술 나오다니. 그야말로 장족의 발전이다. 그렇다! 이제 이들은 알게 되었다. 서천은 속도가 아니라 마음으로 도달해야 한다는 것을.


▎손오공은 <서유기>의 대단원에서 득도한 주인공으로, 그래서 머리 위의 테가 어느 순간 사라진 모습으로 그려진다.



‘서천’에선 대체 무슨 일이?

그렇게 해서 마침내 10만8천 리의 거리를 주파했다. 14년 만의 여정이다. 자, 여기서 몹시 궁금한 사항 하나. 서천, 곧 석가여래가 사는 곳은 대체 어떤 곳일까? 모든 이가 도달하기를 열망하는 그곳, 거기서는 대체 어떤 삶이 펼쳐질까?

“삼장법사 일행이 큰길로 들어서니 과연 서방의 부처님이 계신 땅은 다른 곳과는 달라서 기화요초와 오래된 잣나무, 푸른 소나무들이 보였어요. 지나는 마음에서는 집집마다 선을 행하고 모두들 승려에게 공양을 올렸어요. 산 아래에선 항상 수행하는 사람들을 만났고, 숲에서는 나그네들이 경전을 낭송했어요.”(10권, 201쪽)

선을 행하고, 공양을 올리고 수행을 하고 경전낭송을 한다. 이게 다야? 라고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이게 다다. 기독교의 천국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거기가 천국이 되려면 한없이 담백하고 평화로운 삶이 펼쳐져야 한다. 하여 모두가 수행자이자 진리의 순례자가 되어야 한다.

그뿐이다! 아마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천국이나 극락을 상상해보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다 이루어지고, 늘 멋지고 황홀한 일이 벌어지는 곳으로 상상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단언컨대 이 우주 안에 그런 식의 천국은 없다!

삼장법사 일행은 능운도를 거쳐 ‘바닥 없는’ 배를 타고 피안에 이른다. 강을 건너는 동안에 삼장법사는 마침내 몸의 태를 벗고 해탈의 경지에 오른다. 그러자 삼장법사는 세 제자에게 감사를 표한다.

손오공의 답변, “사부님이나 저희나 모두 감사할 필요없습니다. 서로가 모두 돕고 의지한 것이니까요. 저희들은 사부님 덕분에 해탈하고, 불문을 통해 공을 닦아 다행히 정과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사부님께서도 저희들의 보호를 받아 불법의 가르침을 지켜 다행히 세속의 태를 벗게 되셨습니다.”(10권, 212쪽) 오, 놀라워라! 이 ‘콩가루 밴드’가 ‘모든 존재는 서로 돕고 의지한다’는 인연법의 오묘한 경지를 깨우치게 되다니. 과연 여기가 서천임이 분명하다.

삼장법사 일행은 마침내 석가여래와 마주한다. 석가여래는 이들의 노고를 치하하며 경전을 하사한다. “내게 이제 고뇌를 벗어나고 재앙을 풀 수 있는 삼장의 경전이 있나니, 하늘에 관해 설명하는 <법장>과 땅에 관해 설명하는 <논장>, 귀신을 제도하는 <경장>이 그것이니라. 이것들은 모두 서른다섯 부, 일만 오천백사십사 권인데, 참으로 참된 도를 수양하는 지름길이요, 올바른 선으로 들어가는 문이로다.”(10권, 218쪽)

아, 감동적인 대단원인가…, 싶지만 또 한 번의 반전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다. 석가여래의 수제자인 아난과 가섭이 선물을 요구한 것이다. 삼장법사가 ‘먼 길을 오느라 미처 준비하지 못했’다고 변명하자, 아난과 가섭은 빈정거린다. “오호! 참 잘도 하셨습니다! 빈손으로 경전을 받아 전하시면, 후세 사람들은 굶어 죽을 겁니다.” 손오공이 참다 못해 고함을 내질렀다. 저팔계와 사오정이 성질을 참으며 손오공을 달래고, 몸을 돌려 간신히 경전을 받았다.

하지만 이게 웬걸! 그 경전에는 글자가 없었다. 이른바 ‘무자(無字)경전’이 었던 것. 오 마이 갓! 궁극적인 도는 언어의 길이 끊어진 곳에 있다는 ‘언어도단’의 이치를 보여주고자 함인가. 탄식하는 삼장법사. “우리 동녘 땅 사람들은 정말 복이 없구나. 이렇게 글자도 없는 빈 책을 가져가 어디에 쓴단 말이냐?” 일행은 다시 석가여래를 알현하고 따진다. 물론 석가여래는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다.


▎작가 조광현이 그린 <카오스세상> (캔버스에 유화·2009). 동양의 우주론은 코스모스가 아니라 카오스다. <서유기> 역시 “구법의 여행에서 종착지란 없다”는 ‘카오스의 메시지’를 남긴다.
“너희들은 지금 빈손으로 와서 가져가려 하니 빈 책을 전해준 것이다.”(10권, 226쪽) 헐~ 결국 공짜는 없다는 말씀. 삼장법사가 지닌 유일한 보물인 황제가 하사한 자금 바리때를 바치고 나서야 ‘유자경전 오천마흔여덟 권’을 받는다. 전체 불경의 3분의 1에 해당한단다.

부처 된 손오공, 머리테가 사라졌다!

이젠 정말 대단원에 이르는가 했더니, 아직! 아니란다. 총감독격인 관음보살이 재난 장부를 검토해보더니 하나가 부족하다며 기어코 81난을 채워야 한단다. 마지막 재난은 통천하에서 맞이한다. 통천하를 건너다 자라가 일행을 물에 빠뜨려버린다. 덕분에 경전이 몽땅 물에 젖었다. 일행은 경전을 높은 벼랑 위로 옮겨놓고 햇볕에 말렸다. 하지만 <불본행경> 몇 권이 바위에 들러붙어 끝부분이 찢겨버렸다. 삼장법사는 탄식한다.

“내가 태만해서 조심히 돌보지 않은 탓이구나!” 하지만 손오공의 생각은 달랐다. “그게 아닙니다, 그게 아니에요. 하늘과 땅이 온전하지 않은데, 이 경전은 원래 온전했기 때문에 이제 바위에 붙어 찢긴 것입니다. 바로 불완전한 것에 대응하는 오묘한 뜻이 깃든 일이니, 어찌 사람의 힘으로 관여할 수 있겠습니까?”(10권, 251쪽)

천지가 불완전하다고? 그렇다. 동양의 우주론은 코스모스가 아니라 카오스다. 태양의 길인 황도도 들쭉날쭉한 타원형이고, 지구의 자전 축 역시 23.5도 기울어져 있다. 그래서 하늘과 땅의 완전한 일치란 불가능하다. 그러니 경전이 어찌 완벽할 수 있겠느냐는 것. 결국 구법의 여행에서 종착지란 없다. 끝에 도달하는 순간 또 다른 문이 열릴 터이므로. ‘여행이 끝나자 길이 시작되었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경지이리라.

당나라로 가서 경전을 전해준 다음 이들은 다시 영취산으로 귀향한다. 석가여래는 이들의 공덕을 치하하여 직책을 수여한다. 삼장법사는 전단공덕불로, 손오공은 투전승불, 사오정은 금신나한, 백마는 팔부천용으로. 하지만 저팔계는 제단을 관리하는 ‘정단사자(淨壇使者)’에 그쳤다. “아직도 어리석은 마음이 남아 있고 여자에 대한 욕정도 사라지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투덜거리 저팔계. “네가 입만 살고 몸은 게으른데다가, 밥통은 크지 않느냐? …불사가 있을 때마다 너더러 제단을 정돈하라는 것이니 마음껏 먹을 수 있는 관직이다.”(10권, 283쪽) 역시 식욕과 성욕은 힘이 세다!

마지막으로, 손오공에겐 반드시 풀어야 할 ‘대업’이 하나 있다. 머리테를 풀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삼장법사가 말한다. “예전 너를 통제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그런 법력을 써서 너를 다스렸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미 부처가 됐으니 벌써 저절로 없어져 버렸느니라. 아직까지 그 테가 머리 위에 남아 있을 리가 있겠느냐? 한 번 만져보아라.”(10권, 284쪽) 누군가 풀어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스스로 풀렸다. 그렇다! 자신을 구원하는 것은 오직 자신뿐이다!

201407호 (2014.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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