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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리포트 | 2014년 ‘아베외교’의 초라한 성적표 - 6승 꿈꿨지만 1승도 못 건진 ‘절망외교’ 

미국과 TPP 체결 실패, 러시아·중국과는 영토문제 해결 답보, 인도에 원전과 고속철 판매 협상 난항, 북일수교 협상 원점에서 맴돌고 한국과 위안부문제 해결 못해 

콘도 다이스케 일본 <주간현대> 부편집장

11월 11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APEC 정상회의 개회식에서 만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왼쪽)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두 정상의 어두운 얼굴 표정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양국 관계에는 아직 넘어야 한 산이 많다.
11월 10일, 아침 저녁으로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는 극한(極寒)의 베이징. 두 번째 총리취임 이후, 2년이 채 안되는 기간 동안 쉬지 않고 세계를 순방해온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50번째 순방국인 중국의 수도에서, 이제껏 참담한 길을 걸어온 '아베외교’가 드디어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에 부풀어 있다. 그것은 최근 2년간 성사되지 못 했던 중국 시진핑(習近平) 주석과의 중일정상회담이다.

사실 올해 초, 아베 총리의 뇌리에는 ‘4+2’, 즉 6개의 외교성과를 올린다는 계획이 세워져 있었다. 4개의 비약적인 외교성과를 올림과 동시에, 2개를 정상적인 상태로 되돌린다는 복안이었다. ‘4개의 비약적인 외교성과’란, 미국과 TPP(환태평양파트너십 협정) 체결, 러시아로부터 북방영토 반환, 북한과 납치자문제 해결, 그리고 인도에 신칸센과 원자력발전소 기술을 수출한다는 계획이다. 더불어 ‘2개의 정상화’란, 중국 및 한국과 정상회담을 열고 이 두 나라와의 관계를 정상적인 상태로 되돌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4+2의 ‘6승’을 목표로 삼았던 ‘아베투수’는 패전에 패전을 거듭한다. 아베 총리의 ‘외교적 패배’를 순서대로 살펴보자. 그 첫 번째는 미국과의 TPP 교섭이다. 일본이 TPP에 참가하겠다는 결정을 아베 총리가 미국에 정식으로 알린 건 지난해 2월 22일, 워싱턴에서 열린 오바마 대통령과의 미일 정상회담 자리에서였다. 아베 총리는 다음과 같이 오바마 대통령을 설득했다.

“일본은 올해 ‘잃어버린 20년’을 극복하고 아베노믹스를 통한 경제부흥을 이룩할 것입니다. 때문에 7월 참의원 선거까지 달러 강세와 엔 약세의 정책유도를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대신 일본은 미국의 주도로 진행되고 있는 TPP에 참가하겠습니다. 미국이 주도하고 일본이 이를 따르는 모양새로 21세기의 아시아태평양 무역을 함께 견인해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농수산족’의 반발로 TPP 협상 난항


2013년 4월 29일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만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오른쪽)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아베 총리의 염원이었던 북방도서 반환 문제는 우크라이나 사태 발발로 더 이상 진전되지 않았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 제안을 듣고 뒤늦게 TPP 참가를 선언한이 12번째의 참가국이 당연히 미국의 주장에 맹종하리라 믿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아베 총리가 당 대표를 맡고 있는 자민당의 주요 지지기반은 농촌지역으로 소위 ‘농수산족’이라고 불리는 의원단을 형성하고 있다. 그들은 일본이 TPP에 참가해서 농산물 관세를 철폐해버리면, 전국의 농가가 반기를 들어 다음 선거에 참패하게 될 것이라는 걱정한다.

그래서 쌀, 보리, 소·돼지고기, 유제품, 설탕을 ‘중요 5품목’으로 설정하고, 이 5개의 품목에 대해서는 관세를 철폐하지 않겠다는 자민당 내의 합의를 형성했다. 예를 들면 일본의 쌀에는 778%에 달하는 세계 최고율의 관세가 부과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을 갑작스럽게 제로로 만들게 되면 일본의 쌀농가는 붕괴하고 만다.


10월 28일 서대하 북한 국가안전보위부 부부장(가운데)이 같은 날 납치 일본인 문제 재조사를 위해 방북한 이하라 준이치 일본 외무성 국장(오른쪽)과 만나고 있다.
여기서 아베 총리의 고뇌가 시작되었다. 아베 총리는 당초 일본의 농수산족과 미국의 오바마 정권이 서로 조금씩만 양보하면 용이하게 타협점을 찾아낼 수 있으리라 예측하고 있었다. 실제로 TPP 참가국인 12개국 가운데, 미국과 일본이 전체 GDP의 81%나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미일의 합의야말로 TPP 체결을 의미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2013년 한 해 동안 미일 양국은 타결을 보지 못했고, 결국 2014년 4월 오바마 대통령이 방일에 맞춰 단숨에 해결하려고 했다. 4월 23일 오후 8시 아베 총리는‘에어포스원’을 타고 워싱턴에서 날라온 지 1시간밖에 지나지 않은 오바마 대통령을 긴자의 최고급 초밥집인 ‘스키야바시 지로(すきや ばし次郎)’로 초대했다. 일본 최고급품의 오토로(大トロ: 다랑어의 지방이 많은 뱃살)와, 자신의 고향인 야마구치(山口)의 명주인 ‘닷사이(獺祭)’로 극진히 대접했다.

이때, 아베 총리는 ‘3개 복안’을 가지고 있었는데 먼저 일본이 가장 적은 타격을 입을 만한 안을 제시해보았다. 그러자 오바마 대통령은 그 안에 관심을 보이며 그 자리에서 미국대사관에 대기 중이던 TPP 담당관인 마이클 프로맨 미통상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베 총리가 훌륭한 타협안을 제시해주었네. 지금 곧 일본과 각료급 회담을 열어주길 바라네.”

아베 총리와 식사를 마친 오바마 대통령이 숙소인 호텔 뉴오타니에 도착하자 프로맨 대표는 즉시 오바마 대통령의 방을 찾았다. “외람됩니다만 대통령 각하는 아베 총리가 내민 ‘조커’를 움켜쥐셨습니다.” 이때부터 미국 정부가 강한 반격으로 나왔으며 결국 일미합의는 또 한번 좌절되었다.

이후 “아베에게 속았다”라는 생각에 기분이 상한 오바마 정권은 일미교섭이 진행될 때마다 타협은커녕 허들을 높여갔다. 일본측 대표인 아마리 아키라(甘利明) TPP 담당장관은 “교섭이라고 하는 것은 쌍방이 타협해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며 한숨 섞인 불만을 토로했다. 저녁식사를 함께 한 아마리(甘利) 장관의 참모도 자조 섞인 푸념을 늘어놨다.

“미국 중간선거 이후 오바마 정권은 더욱더 강경하게 나올것으로 예상됩니다. 아마 일본을 굴복시키려는 목적인 것같습니다. TPP가 타결되는 것은 어쩌면 22세기나 되야 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2014년 아베외교의 두 번째 패전은 러시아와의 북방영토 반환교섭이었다. 올해 2월 8일에 열린 소치동계올림픽 개막식에 참석한 아베 총리는 다음날인 9일 점심을 푸틴 대통령과 함께했다. 그 자리에서 ‘평생 잊을 수 없는 호화 러시아요리’를 대접받고 푸틴 대통령과 최고급 보드카를 다섯 잔이나 주고 받으면서 쌍방 모두 몹시 취해버렸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정상회담을 마친 아베 총리는 매우 흡족한 표정을 지었고, 그와 동행했던 측근은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기자단에 넌지시 이렇게 귀띔해주었다. “여러분들은 서둘러 일본의 지도책을 다시 제작할 준비를 해두는 게 좋을 것입니다.”

당시 아베 총리는 “북방영토 4개 섬 가운데 전체 면적의 7%에 이르는 하보마이(齒舞)섬과 시코탄(色丹)섬을 일본에 즉각 반환한다. 면적의 93%에 해당하는 구나시리(國後)섬과 에토로후(択捉)섬은 일본과 러시아가 쌍방이 서로 납득할 수 있는 해결방법을 생각해간다”고 하는 제안을 푸틴 대통령에게 했다. 덧붙여 2014년 가을에 푸틴 대통령이 방일하고, 2015년 봄이나 여름에 아베 총리가 방러하는 데 합의하며, 그 시점에서 북방영토 문제를 해결하고, 일본-러시아 간의 평화조약을 체결한다는 청사진을 제시한 것이다. 푸틴 대통령은 이에 미소로 수긍했다고 한다.

그러나 2월 18일 우크라이나 위기가 발발했다. 수도 키예프의 대규모 시위, 야누코비치 대통령의 피신, 러시아에 의한 크림반도 편입, 우크라이나 동부에서의 내전, 그리고 EU와 미국에 의한 경제제재…. 눈 깜짝할 사이에 러시아를 둘러싼 세계정세가 변화되어갔다.

오바마 대통령은 아베 총리에게 “일본은 당연히 미국의 동맹국으로서, 러시아에 대한 경제제재에 참여하길 바란다”는 취지의 메시지를 전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외무성 관리는 다음과 같은 사정을 들려줬다.

“아베 총리의 본심은 우크라이나 위기 따위는 일본과 아무 관계도 없다는 것이었다. 반대로 미국과 서방 유럽의 경제제재를 받은 러시아가 경제위기에 빠지면 빠질수록 러시아는 북방영토 문제를 가지고 일본과 타협하려 할 것이기 때문에 북방영토 문제 해결의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고까지 생각했다. 그러나 미국으로부터 강렬한 압력이 가해지자 결국 미국의 뜻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 일본도 3월·4월·8월·9월, 총 네 번에 걸쳐 러시아에 경제제재를 가했다. 9월 24일에 시행한 네 번째 경제제재는 러시아 5개 대형 은행의 일본 내 증권발행 금지, 군사전용이 가능한 민생품의 수출제한 등이 그 내용이었다.

일본의 제재에 대한 푸틴 대통령의 격노가 작렬했다. 러시아는 8월 12일 구나시리섬과 에토로후섬에서 러시아군 1천명 이상이 참가하는 군사연습을 감행했다. 9월 19일부터는 구나시리섬과 에토로후섬을 포함하는 극동에서, 10만 명의 러시아군이 참가하는 대규모 군사훈련인 ‘보스토크2014’를 시작했다. 크고 작은 섬의 방어를 상정하고, 전차 1500대, 항공기 120기, 함정 70척의 대규모 부대가 훈련에 참가했다. 러시아군의 이런 움직임은 “북방영토는 절대로 반환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메시지로 해석될 수밖에 없었다. 가을로 예정돼 있던 푸틴 대통령의 방일도 ‘무기연기’되었다. 이리하여 아베 외교는 ‘두 번째 고배’를 마신 것이었다.

아베 외교의 제3라운드는 북한과의 납치문제 교섭이다. 지난해 12월 12일 김정은 제1위원장의 명령으로 북한의 2인자인 장성택이 처형된 것을 계기로 2014년의 동북아 정세는 미묘하게 변화했다. 먼저 중국의 시진핑 주석이 북한에 대해 격노했다. 지금까지 중국과 북한의 파이프라인 역할을 했던 중요인물을 중국에 아무런 통보 없이 처형하고, 더구나 죄목에 “나라의 재산을 중국에 전부 팔아 넘겼다”라는 말이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다.

시진핑 주석의 명령으로 중국은 즉시 북한에 원유·식량·화학비료 등 ‘원조 3종세트’의 지원을 중지했다. 또한 나선과 황금평 등 동서의 경제특구에 대한 협력과 지원도 유보했다. 이렇게 전체 무역의 80%를 차지하는 중국으로부터 외면당한 북한은 ‘군량부족’으로 체제가 붕괴되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먼저 한국의 박근혜 정부와 화해를 시도했다. 1월 16일 이후 한국에 대하여 상호 비방중상의 중지를 호소하고, ‘동포는 적이 아니다’라고 대대적으로 떠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북한의 태도변화에 대해 박근혜 정부는 냉담했다. 2월 24일부터 대규모 한미합동 군사훈련인 ‘키리졸브’를 시행한 시점에서 북한은 결국 ‘한국 설득’을 포기했다.

북한은 ‘차선책’으로 일본과의 관계개선을 타진했다. 그랬더니 아베 총리가 예상을 넘어선 적극적인 태도로 대화에 응해왔다. 3월 30일과 31일 베이징에서의 북일 정부 간 협의, 5월 26일에서 28일까지 스웨덴에서의 협의, 7월 1일 다시 베이징에서에서 양국 정부간 협의가 이뤄졌다.

시진핑 주석이 한국을 단독 방문한 7월 3일, 마치 일부러 날짜를 맞춘 듯 북한이 ‘일본인특별조사위원회’의 활동을 시작했다. 이것은 일본측이 가장 강하게 주장하고 있는 납치피해자의 재조사를 포함하는 실종자, 일본인 아내, 잔류일본인, 일본인의 유골 등을 일괄해서 조사하는 신설기관이다. 위원장에는 서대하 국가안전보위부 부부장이 취임했다.

북한은 ‘여름이 끝날 무렵 혹은 가을의 문턱’에 즈음해 조사결과를 발표하겠다고 했다. 일본국민들 사이에서는 “납치피해자가 12년 만에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높아졌다. 이때 누구보다도 강한 기대감을 가진 사람은 아베 총리였다. “8월 후반부터 9월 전반까지는 가능한 한 스케줄을 넣지 않도록”이라는 지시가 수상관저로부터 나왔다. 아베 총리가 직접 방북하겠다는 의지가 강했기 때문이다.

북한, ‘가을의 문턱’이 되어도 감감무소식


8월 31일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왼쪽)와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일본 교토의 전통 사찰 도지(東寺)를 방문해 국보인 ‘오대명왕상’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인도에 원전과 고속철을 판매하려던 아베 총리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런데 ‘여름이 끝날 무렵’이 되어도 ‘가을의 문턱’이 되어도 북한에서는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 수상관저는 나날이 초조감이 커졌다. 북한이 일본에 대해 빠른 속도로 냉담해져간 최대의 이유는 러시아에 있었다. 앞서 언급한대로 우크라이나 위기에 의해 미국과 유럽의 경제제재를 받고 있던 러시아는 빠른 속도로 ‘탈구입아(脱欧入亜: 유럽을 벗어나 아시아로 향한다)’ 정책의 기조를 꺾었다. 외교의 축을 서쪽에서 동쪽으로 바꾼 것이다. 5월 20일 상하이에서 열린 아시아신뢰 조성회의에서 푸틴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은 30년간 4천억 달러에 달하는 역사상 최대규모의 천연가스 매매계약을 체결했다.

북한에도 적극적으로 접근해갔다. 3월 가르시아 극동발전 장관이 북한을 방문해 2020년까지 양국의 무역량을 10배로 늘리기로 합의했으며, 4월 18일에는 구소련시대의 북한 채무 약 100억 달러의 면제를 결정했다. 4월 하순에는 토르트네프 부총리(극동군관할구역대통령전권)가 방북해 북한에 없는 소방차를 50대나 기부했다.

가을에 접어들면서 북러외교는 더 한층 가속화됐다. 9월 30일부터 10일간 일정으로 김정은 제1위원장의 스위스 유학시절 아버지의 역할을 했던 리수용 외무상이 러시아를 방문했다. 모스크바에서 라브로프 외무장관을 시작으로 토르트네프 부수상, 페도로프 농업부 장관, 가르시아 극동발전장관과 회담을 가졌다. 이어 아무르주, 사할린주, 하바로프스크주 등 연해주 지역을 시찰하며 현지 지방정부 지도자들과의 회담도 정력적으로 처리했다. 이렇게 ‘중국에 버림받은 북한’과 ‘유럽에 버림받은 러시아’가 급속히 가까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새로운 돈줄 러시아를 발견한 북한

10월 21일에는 가르시아 극동발전장관이 다시 북한을 방문, 북한과 러시아 간의 철도정비사업의 착공행사를 열었다. 소치 올림픽의 인프라 정비를 담당했던 러시아의 대형 건설사인 모스토비크가 북한의 3500㎞에 달하는 철도정비 사업을 맡아 약 250억 달러를 부담해서 북한 철도를 현대화한다는 계획이다. 담보는 금이나 희귀금속 등의 북한산 광물자원이다.

러시아와 북한은 중국이 사실상 포기한 나선항의 정비도 청부 맡았을 가능성이 있다. 즉 지난해까지 장성택이 중국과 진행하려 한 북한 내의 인프라 사업을 앞으로는 통합해서 러시아가 맡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현재 북한은 ‘러시아와의 경제사업’에 골몰하고 있는 양상이다. 김정은 제1위원장은 40일 이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유럽에서 전문의를 불러 수술까지 했다는 족근관증후군이 완쾌되면 모스크바를 전격 방문할 가능성이 있다. 시진핑이 평양을 뛰어넘어 서울로 갔던 것처럼, 김정은은 베이징을 뛰어넘어 모스크바에 가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완전히 홀로 남겨진 일본은 10월 27일 이하라준이치(伊原純一) 외무성 아시아 대양주국장을 단장으로 하는 12명의 북한방문단을 평양에 파견했다. 납치문제 확인이 방문의 최대목적이었다. 그러나 북일 쌍방은 2일간에 걸쳐 총10시간 반이나 회담했지만 새로운 납치피해자의 생존자에 대해서는 보고받지 못했다. 이하라 북한방문단이 귀국한 10월 30일 밤, 넋이 나간 표정으로 총리 관저에서 나오던 아베 총리는 자신을 둘러싼 기자단에 강변했다.

“북한 측은 이번 협의에서 ‘과거의 조사결과에 구애되지 않고, 새로운 각도로 확실하고 심도 있는 조사를 해간다’는 방침을 내보이고 있으며 ‘특수기관도 철저하게 조사한다’라고 일본 측에 답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외무성 관리는 다음과 같이 한탄했다.

“말이 좋아 특별조사위원회 설치고, 새로운 각도의 조사 운운하는 것이다. 북한은 억지스러운 말로 변죽만 울리고 있지, 결국 일본인 납치피해자의 생존자 등을 (북한은) 이미 오래전부터 파악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을 내놓을 마음만 있으면 오늘, 내일이라도 내놓을 수 있는데 그것을 거부하는 것은 이미 내놓을 의향이 없다고 밖에 볼 수 없다. 바꾸어 말하면, 러시아라고 하는 새로운 돈줄을 찾았으니 이제 일본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아베 외교는 ‘세 번째 패배’를 당하게 되었다.

아베 외교의 제4라운드는 인도에 신칸센과 원전을 수출하는 사업이었다. 일본의 신칸센은 올해 10월에 탄생 50주년을 맞았다. 지금까지 단 한 명의 사망자도 내지 않고 분 단위의 운행을 하는 일본 첨단기술의 결정체임에도 불구하고, 대만 이외의 지역에는 수출하지 못했다. 한국의 고속철도를 프랑스에 빼앗겼고 중국은 독자적인 기술로 개발을 진척시키고있다. 미국의 워싱턴-뉴욕 간에 노선에 수출을 도모하고 있지만 현지 노조의 반대로 잘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인도의 뭄바이-아메다바드(Ahmedabad) 간의 고속철도 사업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일본이 수주하고 싶어했다.

3년 전 후쿠시마 원전대참사를 일으킨 장본인인 일본이 과연 원전을 수출할 자격이 있는지 의심스럽지만 아베 총리는 터키나 베트남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 원전기술을 팔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인다. 특히 인구 13억의 인도에 1기라도 수출하게 되면, 그후 추가적인 수출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인도는 핵무기 보유국으로, 원전 사용 후의 핵연료를 핵무기 제조에 유용하려 한다. 이는 일본이 가맹되어 있는 핵무기 비확산조약(NPT)의 규정에 저촉되는 것으로 일본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다. 그렇지만 아베 총리로서는 어떻게든 인도에 수출하여 원전수출의 물꼬를 트고 싶은것이다. 신칸센과 원전이라는 두 개의 일본기술이 모두 인도 수출에 성공하면, 아베노믹스의 큰 부양력이 되기 때문이다.

신칸센도 원전도 사주지 않은 인도


1 일본 의원들이 8월 15일 태평양전쟁 종전 69주년을 맞아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고 있다. 아베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는 중일 관계 정상화의 핵심 의제다. 2 11월 7일 베이징에서 개막된 APEC 정상회담의 홍보 기념물 앞에 서 있는 중국 보안대원. APEC 기간 중 아베 총리와 시진핑 주석의 중일 정상회담이 성사됐지만 양국 관계의 전도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올해 일본의 대 인도외교의 첫걸음은, 인도의 ‘올해의 중요인물’에 선정되는 것이었다. 인도에서는 매년 1월 26일의 공화국 기념일에 수상이 오픈카를 타고 뉴델리 시내를 퍼레이드하는데, 이때 그해 가장 중요시하는 나라의 지도자를 인도에 초대하여 함께 오픈카 퍼레이드를 하는 습관이 있다. 올해 1월부터 아베 총리는 이 ‘포지션’을 잡기 위해 필사적인 외교공작을 펼쳤으며, 그 결과 보기 좋게 성공했다. 아베 총리는 퍼레이드에 참가하기 위해 2박3일의 일정으로 떠들썩하게 인도를 방문했다. 올해 5월 26일 모디 지사가 총리에 취임하자 아베 정권은 열렬한 러브콜을 보내며, 빠른 시일 내에 일본을 방문해줄 것을 요청했다. 모디 총리를 설득하는 문구는 ‘경제와 방위에서의 일본과 인도 일체화’였다.

모디 총리는 아베 총리의 열렬한 러브콜에 화답해 8월 30일에서 9월 3일까지, 취임 후 첫 단독방문국가로 5일간에 걸쳐 일본을 방문했다. 아베 총리는 교토까지 모디 총리와 동행하며 사원과 다실의 안내역까지 자청했다. 그리고 향후 5년간 인도에 3조5천억 엔이나 되는 금액을 투·융자하겠다고 제안했다.

당시 필자도 호텔 오쿠라에서 열린 모디 총리의 강연회를 들으러 갔지만, 모디 총리의 일본에 대한 태도는 뭔지 모르게 차가운 듯한 인상을 받았다. 실제로, 아베 총리의 필사적인 세일즈에도 불구하고 모디 총리는 신칸센도 원전도 사주지 않았다. 신칸센에 관해서는 “향후 1년간 신중하게 검토해가고 싶다”라고 했을 뿐이다. 그리고 원전에 관해서는“일본이 수출 조건을 완화하면 좋겠다”라는 점을 시종일관 강조했다. 즉 핵무기에의 전용에 눈을 감아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에 아베 총리는 크게 실망했다. 그러나 이미 충격을 받은 아베 총리에게 다시 한번 일격을 가하는 듯한 사건이, 그 직후 일어났다. 9월 17일 시진핑 주석이 인도의 구자라토주의 아마다바드공항에 내려섰다. 곧바로 아마다바드에서 모디 총리와 정상회담을 했다. 이후 시진핑의 2박3일 모든 일정에 모디 총리가 대동했다. 게다가 첫날은 모디 총리의 64세 생일로, 그는 “잊을 수 없는 생일이 되었다”는 각별한 감상을 밝히기도 했다. 덧붙이자면 인도 고속철도의 전초전라고 말할 수 있는 뭄바이의 지하철 1호선은 9월 10일, 중국에 낙찰됐다. 시진핑 주석은 인도에서의 강연에서 위풍당당하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향후 5년간 남아시아에 300억 달러를 투자할 것이다. 21세기의 아시아는 중국과 인도가 중심이 되어 ‘류상공무(竜象共舞: 용과 코끼리가 함께 춤춘다)’의 시대를 구축할 것이다.” 이 보고가 도쿄의 나가타초(永田町)에 있는 총리 관저에 올라갔을 때, 아베 총리는 얼굴에 경련을 일으키며 분개해 했다고 한다. 아무튼 이것이 아베 외교의 ‘네 번째 패배’였다.

2014년의 아베 외교는 또 한편으로 한국과 중국과의 ‘정상적인 관계’ 복원에도 애를 먹고 있다. 한국과의 관계가 여기까지 악화된 원인은 오로지 종군위안부문제 때문이다. 위안부 문제는 지난 8월 <아사히신문>이 지금까지의 위안부 보도를 정정하고 사죄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한일문제이던 것이 일본의 내정 문제로도 번졌다.

위안부문제는 아베 정권이 “과거의 식민지 지배에 관한 문제는 1965년의 한일 국교정상화로 해결이 완료되었다”라는 입장으로부터 얼마나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 관건이다. 영원히 해결 불가능한 영토문제와는 달리 정부가 의욕을 가지면 해결될 수 있는 문제다. 그러나 아베 정권은 자신의 지지기반인 우익세력의 눈치를 살피면서 이 문제에 손대지 못하고 있다.

중국과의 문제는 좀 더 복잡하다. 시진핑 주석이 아베 총리와의 중일 정상회담을 지금까지 거부했던 이유는 그의 두가지 요구를 일본이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첫째 아베총리가 앞으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지 않겠다고 확약하는 것, 둘째는 센카쿠 제도의 영유권을 둘러싸고 중일 쌍방이 분쟁 중이라는 것을 일본이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베 총리의 입장은 앞으로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할지 여부를 명확하게 발언하지 않는 것, 센카쿠 제도는 일본 고유의 영토이며 쟁점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올해 7월 ‘복병’이 나타났다. 일본 정계 친중파의 대표인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전 총리다. 그가 “내가 아베 총리와 시진핑 주석의 사이를 중개하겠다”고 자청한 것이다.후쿠다 전 총리와 아베 총리는 같은 파벌의 선후배지만 견원지간으로 알려져 있다. 앞서 언급한 외무성 관리의 전언에 따르면, 후쿠다 씨는 7월 중 어느 날 총리관저를 뒷문으로 들어가 “두 번 다시 야스쿠니에 가지 말 것. 중국이 센카쿠 제도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것” 등을 아베 총리에게 강요했다고 한다.

아베, 후쿠다의 방중 성과를 뒤엎다

이에 아베 총리는 “오는 8월 15일 종전기념일에는 참배하지 않겠다. 그러나 센카쿠 제도는 중국이 뭐라고 하건 일본의 고유한 영토다”라는 입장을 후쿠다 전 총리에게 전했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야치 쇼타로(谷內正太郞) 국가안전보장국장(전외무부 차관)과 키테라 마사토(木寺昌人) 주 베이징 일본대사를 동행시켜, 후쿠다 전 총리를 베이징에 보내 APEC에서 시진핑 주석과의 중일 정상회담이 성사될 수 있도록 중개를 부탁했다.

후쿠다 전 총리 일행은 7월 27일에서 29일까지 방중하여 시 주석과의 면담을 마쳤다. 그러나 직후인 8월 1일 아베 정권이 센카쿠 제도 해역을 포함한 158개의 무인도에 이름을 붙였다고 발표함으로써 다시 한번 시진핑 주석의 노여움을샀다. 이날은 마침 청일전쟁을 야기한 일본의 선전포고가 있은 지 120주년이 되는 날로, 중국에 있어서는 ‘굴욕의 날’이다. 그런 날 후쿠다의 방중을 뒤엎는 일을 하는 아베 정권은 도저히 신용할 수 없다는 것이 중국의 반응이었다.

그러나 후쿠다 전 총리는 오명을 씻기 위해 10월 29일 다시 한번 베이징을 방문하여 시진핑 주석과의 회담에 참석해 “중국은 미국에 버금가는 대국이 될 것이다”라며 중국을 추켜세웠다. 이렇게 해서 11월 10일의 베이징 APEC을 맞이한 것이다. 시 주석과 아베 총리가 취임 후 정상회담을 가진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중일정상회담은 2012년 5월 당시 원자바오 중국 총리와 노다 요시히코 일본 총리의 회담 후 2년 반만에 성사됐다. 그러나 정상회담의 성공 여부는 아직 점치기 이르다. 양국 관계가 완전한 해빙을 맞기 위해선 아직 넘어야할 산이 첩첩이다.

이처럼 2014년의 ‘아베외교’를 돌아보면, 패배에 패배를 거듭한 ‘가시밭길 여정’이었다. 그렇다고 2015년의 ‘아베외교’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논의는, 적어도 일본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많은 일본인은 아베 정권이 향후 1년 이상 지속된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두에서 언급한대로 아베 총리는 2년이 채 안 되는 재임 중 50개국을 순방했다. 이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가 5년 5개월 간 48개국을 순방한 기록을 가볍게 제치는 전무후무한 신기록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베 총리는 정말로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온 힘을 다해서 열심히 공을 던져도 패전투수가 되는 경우가 종종있다. 비정한 것 같지만 외교는 결과가 모든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201412호 (2014.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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